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안나 까레니나와 함께 톨스토이 문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일대 걸작으로 그 양이나 질에 있어서, 그리고 스케일에 있어서도 세계 문학 가운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나 견줄, 러시아 문학뿐만 아니라 “19세기의 전소설계에 군림하고 있는 거대한 기념탑이자 근대의 일리아스이다라고 로망 롤랑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럽의 근대 문학 가운데서 최대의 예술작품으로 헤아려지고도 남을 일대 서사시적 대하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1805년의 제1차 나폴레옹 전쟁 직전부터 1812년의 대 나폴레옹 조국 전쟁, 1825년의 이른바 제까브리스뜨 12월 당원들의 혁명 운동을 낳게 한 자유주의적 사회기운이 팽배하기 시작한 1820년까지의 15년 동안에 걸친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시기를 재현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보로지노 벌판에서의 노·불 양군의 대회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 모스크바의 대화재, 프랑스군의 퇴각 등 러시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대사건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의 노·불 두 황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상의 실제 인물과 모델에 따른 작중 인물, 완전히 창작된 인물들이 등장하여 독자의 눈앞에서 활약하는 등, 그 규모의 웅대함은 참으로 세계 문학 가운데서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을 찾아 낼 수 없을 만큼, 또 재래의 장편 스타일을 깨고 역사 소설과 가정 소설,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을 한데 시도한, 전혀 전례 없는 문학 형식을 창조하여, 그 당시 평자들이 이 작품을 어느 장르로 이해해야 할지 몹시 당황했을 정도였다.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톨스토이가 오랫동안 친히 알고 지내던 모스크바의 궁정의 베르스의 열여섯 살 난 둘째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한 이듬해인 18632월로, 자기네 소유지 야스나야 뽈랴나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완전한 행복과 찬란한 희망, 그리고 밝고 편안한 심정을 즐기던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이리하여 전쟁과 평화집필에 착수한 톨스토이는 한편 새로운 호메로스가 되어 보겠다는 의욕으로 이 대작의 창작에 골몰했다. 그 사이에는 18649, 사냥을 나갔다 말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 등 온갖 장애와 어려운 일들이 있었으나 그의 왕성한 창작의욕은 그러한 것 때문에 오는 창작의 침체 없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로 하여금 예술 창작에 완전히 몰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652월에 끝마친 첫 부분 제1권 제1편이 당시 평론가인 까뜨꼬프가 발행하던 러시아통보지에 1805이라는 표제로 발표되고, 뒤에 전쟁과 평화로 제목을 바꿔 꼬박 여섯 해 동안의 부단한 정진을 거친 1869년 말에야 비로소 전편을 완결 지었다.

그러나 이 대작 전쟁과 평화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태어났다. 그는 18607월에 제 2차 외국 여행에 나섰다.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게르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제까브리스뜨에 대하여 쓸 생각>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 톨스토이는 1856년에 시베리아의 유배지에서 사면을 받고 처자를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새로운 러시아에 자기의 엄중한, 얼마쯤 이상주의적인 눈초리를 돌리는 제까브리스뜨들의 활동 및 톨스토이의 외가 친척인 드루베스꼬이 공작가와 세르게이, 그리고 리에비치 볼꼰스끼이 공작이 연좌했던 12월 당원의 지난날의 혁명 활동에 관하여 같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주제로 <제까브리스뜨>라는 장편 소설을 계획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제까브리스뜨란 18251214일 대 나폴레옹 조국 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군을 추격, 서구의 해방자로 파리에 입성하여 거기에서 서구의 진보적인 문명에 접하고 자유사상을 흡수한 러시아 귀족 출신 청년 장교들이 니꼴라이 1세의 자유주의자 탄압에 반항하여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폐지를 내세우고 뻬쩨르부르그의 의료원 광장에서 반정부 혁명을 일으켜 시인 K.P.르일레예프 등 5명이 처형당하고, 당시 러시아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약 100여 명의 청년들이 시베리아로 유형 당했던, 자유주의자들의 비밀 결사 12월당의 구성원을 말한다.


줄거리:

1805, 나폴레옹의 통솔 하에 유럽을 석권한 프랑스군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청년 공작(公爵) 안드레이 포르콘스키는, 영지(領地) 벽촌에 은둔하고 있는 아버지와 누이동생 마리아에게 만삭이 된 아내를 맡기고, 크로우조프 장군의 부관으로 일선으로 출발한다. 이 전쟁이야말로, 그에게 빛나는 미래와 영광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안드레이의 친구로서, 유학에서 갓 돌아온 피에르는 모스크바 굴지의 자산가 베즈호프 백작의 사생아였지만, 백작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서 전 재산을 상속받고 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후견인 역인 크라긴 공작은, 미모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품행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한 자기의 딸 에렌을 피에르와 결혼시키려고 획책하고 무난히 성공한다.

이 해 11, 안드레이는 아우스테르리쯔의 결전(決戰)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으로서, 단신 군기를 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중상을 입지만, 문득 제정신이 들어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그 장엄함에 크게 감동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기의 야심이라든지 명예욕, 위대한 인물로 숭배하고 있었던 나폴레옹 등이, 사실은 보잘 것 없이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피에르는, 결혼 후 친구 드로포프와 아내 에렌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결투를 신청하여, 상대를 쓰러뜨린 후 아내와 별거를 한다. 그리고 나서부터, 그는 선악이라든지 생사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만, 프리이메이슨(Freemason; 1723년 런던에서 성립하여 전유럽에 퍼진, 인류애를 위한 세계적인 평화와 행복의 실현을 목표로, 국제적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의 지도자를 알게 되고, 새로운 신앙생활에 들어간다.

전사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던 안드레이가, 뜻밖에 영지(領地)의 벽촌으로 돌아온 바로 그날 밤, 아내 리자는 사내 아들을 낳고 그대로 숨을 거둔다. 안드레이는 이미 자기의 인생은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영지에서 일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1809년 봄에, 안드레이는 귀족회(貴族會)의 용무로 로스토프 백작의 집을 방문하고,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백작의 젊은 딸 나타샤를 만나 마음이 강하게 끌린다. 그 해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두 사람은 무도회에서 다시 만나, 곧 사랑하게 되고 약혼을 하지만, 영지의 노공작(老公爵)의 완강한 반대로 1년간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하고, 안드레이는 외유를 한다. 그러나 젊은 나타샤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피에르의 아내 에렌의 오빠 아나토리의 유혹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할 약속을 함에,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파기되고 만다.

1812년에, 다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고, 안드레이는 포로지노의 결전에서 중상을 입는다. 러시아군은 패주를 거듭하고, 마침내 모스크바를 적에게 내 주게 된다. 로스토프가()에서는 가재(家財)를 운반하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마차로 부상병들을 수송하기로 결심한다.

나타샤는 부상병들 속에서 반사 상태의 안드레이를 발견하고, 자기의 죄를 사과하고 필사적으로 간호를 한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안드레이는 숨을 거둔다.

피에르는 모스크바에 머물며 농민으로 가장하고, 나폴레옹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다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된다. 아내 에렌은 전화(戰火) 속에서도 연신 난행(亂行)을 계속하다가, 낙태약을 잘못 먹고 몸부림을 치면서 죽는다.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모스크바에서 나타샤를 만난 피에르는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녀와 결혼을 한다. 안드레이의 여동생 마리아도 나타샤의 오빠 니콜라이와 결혼하고, 각각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간다.

출처: http://ask.nate.com/qna/view.html?n=6319813

영어판 전자책입니다. 
 

'Under Your Fee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얘들아, 학교 가자  (0) 2012.03.11
The Music of the Night - Michael Crawford  (1) 2012.02.26
이제 그만  (0) 2012.01.15
시에 대한 편견  (0) 2011.12.13
Christmas Carol in Animation  (0) 2011.12.07

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마가복음 1:35~39,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자의 의지(意志)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행하셨기에 그런 당신의 놀라운 사역을 기도 없이는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요 5:19).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든 신자의 삶의 전형입니다예수님은 모든 사역과 섬김의 행동의 최우선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기도는 모든 신자의 최우선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장면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 기도의 시간은밀한 시간에.

 

이사야 50:4,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2. 기도의 장소은밀한 장소에서.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통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하면그 설교의 결론은 새벽기도 잘 나오라는 다그침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새벽철야를 하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지 실제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고는 성경에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예수님의 기도의 장면들을 오늘날의 한국 교회 기도집회의 근거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예수님이 늘 하신 것이 아닙니다철야 혹은 심야기도도 늘 하신 것이 아닙니다많이 혹은 여러 번 하셨습니다.

 

새벽기도가 옳지 않다거나 하지 말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새벽기도는 한국 교회의 하나의 좋은 전통입니다기도를 해야 하지만그 근거가 정확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언제어디에서 해야 하고 등이 정해져야 안심이 되는 분들은 스스로 혼자 찾아서는 못합니다.

 

기도는 제도가 아닙니다기도는 다그쳐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기도는 계급장이 아닙니다누가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하면 무슨 영적 권세가 붙는 것으로 착각합니다내가 새벽기도 안하는 사람들을 좀 잘못된 것으로 본다면 새벽기도 하여 좀 더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하나님과 자신만의 영적 비밀을 구하지 않고 껍데기에서 신앙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열심 있는 기도 행위를 무슨 자랑처럼 남들에게 말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무저갱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남 보이려는 기도를 안 하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솔직히 목사들이 설교 중에 대부분 기도를 다그치는 이유는 집회가 목적이고 출석이 목적이지 성도들의 내밀한 영적 성장이 일차 목적은 아닙니다물론 말은 그리 하지요.

 

부흥하면교인만 많으면힘이 세면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치부하는 오늘날의 성장제일 위주의 잘못된 가치관이 참된 영성의 본질을 흐려 놓았습니다목사 혼자라도 새벽기도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참된 기쁨을 발견하고 있다면 남들에게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영성은 자신에게서 넘쳐서 남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호소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샘이 깊은 물은 그 물이 저절로 큰 강에까지 이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왜 예수님이 기도하셨느냐무엇 때문에 기도해야 했느냐를 놓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일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쉬운 것그 모든 일들보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그것을 잡으려는 예수님의 노력이 나타납니다예수님 개인적으로도 이런 요구는 치열했고그렇게 실제 기도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신 후그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거나 구경을 하기 위해 시몬 베드로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예수님은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귀신들린 자각색 병이 들린 자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바쁜 하루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일정을 거의 쉬는 시간도 없이 지내셨습니다여기에는 한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즉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을 모두 다 이 세상을 위해 헌신하신 것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바쁜 시간 중에서도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듯이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베드로의 기억과 신앙을 이어받아 예수님의 생애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의 기억에 잊지 못할 어떤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마을을 돌아다녔다는 기억입니다물론 별 중요한 사건도 없었고 큰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그러나 베드로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인상 중 하나가 예수님이 종종 혼자 있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베드로에게는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아다녀야하는 귀찮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아침이 되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고 네 명의 제자들은 재촉하는 사람들의 성화에 갑자기 사라진 예수님을 찾아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베드로에게는 잠시 성가신 일이었지만 나중에 몇 년이 지나 예수님을 회고하면서 그 귀중한 그 경험이 자신의 사역과 신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바쁘고 많은 일과 속에서도 그런 일들의 근원은 그 모든 문젯거리들을 가져 온 사람들이나 이 세상도 아니고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인 예수님 자신도 아니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모든 사역을 준비할 때에 기도로 하셨습니다여기에서 기도는 단지 좁은 의미로서 기도 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의지입니다하나님께서 하리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구입니다기도는 수시로 나타나는 우리의 교만과 게으름을 물리치고 깨어있기를 위해 힘쓰는 훈련입니다그래서 마가의 스승인 베드로도 자신의 서신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지의 표현으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삼위일체이시기에 하나님이시면서 아들이신 예수님은 기도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다른 외부의 능력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그러나 무슨 일이든 혼자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시면서도 아들로서 그리고 종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순종이란 뜻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뜻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외에서도 중대한 일을 앞에 두시고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먼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12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12~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변화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께서 5천명을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시고제자들을 앞서서 바다로 보내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22~23, (막 6:46)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의 본으로서도 우리에게 기도의 가르침을 주십니다주님은 혼자 무리와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그 기도는 다음 사역의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세 번 예수님이 기도하신 기록이 있습니다예수님이 물론 일생 세 번만 기도했다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발견한 장면 중에 특히 남기고 싶은 기도 장면이 세 번 마가복음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마가에게 전하여 준 베드로의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면은예수님의 일생에서도 중요시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1.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첫 번째 사역을 하신 안식일 다음날’ 새벽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 다음 날은 예수님께 어떤 날입니까?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2.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무리를 떠나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는 사건 바로 다음에 이어집니다세례 요한의 때가 사라지고 예수님의 때가 되어 엄청난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와 놀람과 인기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역과 기도에만 집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3.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렇게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일생 사역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와 기도로 계속 이어나가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예수님께 기도는 가장 중요한 최우선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세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시간입니다.

 

기도는 제자도의 중요한 한 가지 입니다그래서 희생이 따릅니다기도는 기도할 시간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그 시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주었고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그렇다고 자신의 별도의 시간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4복음서의 기록을 보았듯이 예수님은 남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 혹은 기회를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이른 아침의 기도는 이미 구약에서도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고난의 종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이사야서 50장은,

 

이사야 50:4~5,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예수님은 아침마다 혹은 자주 하나님과의 조용한 교제와 기도를 통해 지혜를 얻으셨고 순종의 삶을 행하셨습니다.

 

2. 두 번째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마가복음 1:35의 한적한 곳은 황량한 곳입니다인적이나 소음이 없는 곳입니다예수님께 누가 기도처를 제공하거나 헌물한 사람이 없습니다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 장소를 조달해야 했습니다예수님이 찾으신 곳들은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은밀한 곳입니다.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광야에서산 위에서그리고 동산에서 자신만의 골방을 만드셨습니다그곳은 또한 우리의 골방입니다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힘써 만들어야 합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이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고 그 아이를 고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귀신들렸을 때 즉시 기도하면 낫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병 고치는 놀라운 이적의 힘이 하나님께서 치료하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이고 그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유는 이런 종류입니다어떤 종류의 문제가 있습니까마귀의 문제입니까질병의 문제입니까가정의 부부문제입니까자녀의 문제입니까? ‘이런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주님께 맡겨드리십시오.

 

기도는 말로만 믿습니다는 마술사의 주문 같은 행위가 아닙니다하나님이 설혹 우리의 소원을 따라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더라도 순종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먼저 앞에 둘 수 없습니다우리의 욕심과 소원이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뜻이 나의 기도가 되어 주옵소서라는 고백을 드려보십시오.

 

37절에서 39절까지 보시면,

 

마가복음 1:36~39,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다고 합니다여기에 찾았다는 표현은 수색했다는 말입니다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가가 막 치솟는데 이때 팔아야지요여기 혼자 앉아서 뭐하십니까빨리 나가셔서 사람들을 좀 더 치료해 주시고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의지(意志)입니다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 같아도 실제 우리 삶 속에서 훈련이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시끄럽게 따라오는 무리를 떼어 두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시어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행동하며 살겠다는 신앙의 원칙을 세우십시오여러분 속의 모든 욕망과 방법을 버리고 예수만 의지하겠다고 홀로 설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시끄러운 상황과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들 보다 더 중요하고아니 그 모든 문제들의 근원인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거룩한 뜻을 세우시고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만물의 마지막 때와 같은 이 세상을 살겠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2. 예수께 나아가자  (0) 2012.02.02
마가복음 11. 종의 만지심  (0) 2012.01.29
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0) 2012.01.25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0) 2012.01.20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마가복음 1:29~35,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오늘의 본문은 1장 21절부터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첫날이며 안식일이었던 갈릴리 가버나움 사역의 계속입니다예수님은 회당에서의 축귀(逐鬼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쳤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첫날의 사역은 공생애 마지막 날의 일정과 대조가 됩니다마지막 날의 기록인 14장에는,

 

마가복음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첫날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리스도로서의 권세를 나타내신 일이 있었습니다그런데 마지막 날에는 제자들의 배신과 체포당한 일조롱과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이런 극명한 대조의 처음과 마지막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는 섬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예수님은 첫날의 사역에서 회당에서의 놀라운 가르침과 이적을 통해 자신의 권세를 보여주셨지만그 일로 인하여 스스로 높아지는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회당을 나가신 후 예수님이 하신 것은 가난한 어부의 집을 방문하신 일입니다그리고 그곳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회당에서처럼 대중 앞에서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자신이 드러나건 가리건 그것은 주님께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1. 즉 예수님의 사역은 섬김을 위한 것입니다.

 

가르침축귀병 고침 등의 일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사역과 섬김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자칫 명예와 인기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교회나 기독교 단체마다 섬긴다는 말을 너무 남용하고 오용합니다이제 섬김이 캐치프레이즈가 되고 하나의 평범한 용어가 되었습니다희생과 봉사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진정 교회와 타인을 섬기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결국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 같아 보입니다.

 

사역자들의 가장 중요한 기본은 처음부터 끝까지드러내지 않고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렇게 자신의 사역을 알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2. 제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그래서 자신들의 문제를 주님께 갖고 왔고 주님께서 처리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옵니까아플 때 의사에게 가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질병과 문제를 해결할 분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고 질문 드리는 것입니다.

 

아사왕의 예를 보십시오.

 

역대하 16:12,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그러나 간교하다는 야곱은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창세기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산헤립의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왕도 위기의 순간에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열왕기하 19:1,14~16,

[1]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15]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의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나사로의 여동생들도 주님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 11:1~3,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과연 주님은 여러분의 친구입니까?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님은 당신의 가장 큰 사역인 십자가의 때까지 공생애 동안의 모든 사역을 섬기는 사역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신자들의 섬기는 사역도 이와 동일합니다신자의 사역의 목표는 그 일 자체가 아닙니다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십자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봉사정신을 위해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남을 돕는다는 기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신자의 일생과 사역의 초점은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주권을 내려놓고 모든 일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께 내 모든 일을 아뢰고 내어놓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 아닙니다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그 살을 우리의 음식으로 나누어주셔야만 했던 주님 때문입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1. 종의 만지심  (0) 2012.01.29
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0) 2012.01.27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0) 2012.01.20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마가복음 1:21~28,

개정,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개역,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오늘의 본문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권세)입니다. 한글개역판 성경에는 권세로 번역하고 있는데 개정판 번역대로 권위가 더 올바른 번역입니다.

 

권세란 권력과 세력이라고 합니다.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즉 다른 이의 복종을 끌어내는 힘이 권위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세속적 권세나 권위가 아니고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구분이 정말 가능할까요? 저는 정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외모나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를 보거나 진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많이 배워서, 인격이 훌륭해서, 경험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만나 거꾸러진 제자만이 갖게 됩니다.

 

한국에는 나이가 계급장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때로 연장자가 하는 말이 무조건 먹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연세가 지긋하고 품격이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분이 젊잖게 말하는 것과 시골뜨기에 배운 것 없고 노동자 출신인 젊은이가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권위 있어 보이겠습니까?

 

, 그 젊은이는 예수님을 말할 수 있겠구나. 그러면 당연히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이 말이 권위가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야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러시다면 다음 질문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양심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멀리 이사했습니다. 지금까지 다니던 교회를 계속 못 다닐 정도로 멉니다. 그래서 주변의 다른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대개 전에 다니던 교회와 같은 교단의 교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도 없다면? 지역적으로 아예 장로교가 없는 지역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큰 교회를 선택하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의 크기에 교회 목회자의 능력이나 성도들이 받는 은혜가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으면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익명성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갖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사실 핑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한 교회의 가치만큼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유명한 외국 대학출신의 박사님이라서, 서울 강남에서 이름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라서,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매스컴도 타고 좋은 일을 했다는 교회라서... 그렇게 여러분의 선택대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자신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비유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일 년 수입이 수억 원이고 사회적 지위가 꽤 있다면, 여러분은 옷 한 벌 사기위해 동네 옷가게나 마트에 가겠습니까 아니면 유명 백화점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백화점에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걸맞게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곳을 가야 그런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자신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저희 가족이 한때 부모님이 사시던18평 시영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한 동안 살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아파트 주차장에는 당시 우리나라 고급 승용차들이 꽤 많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집은 작아도 차는 번듯하면 어디 나가서 기죽지 않는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열등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외형과 소유로 자신의 가치를 포장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형 교회를 자신의 교회로 선택했다면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명품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와 같습니다. 그 브랜드의 권위만큼 자신도 괜찮은 신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 여러분은 외모와 나이와 재산과 학력을 떠나서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까?

 

교회의 가치를 영적 감동과 생명력의 활동 그리고 대사회적인 건전한 세계관과 그 관계에서 구하지 않고 건물의 크기, 담임목사의 학력, 교인들의 경제적, 학력 수준에 둔다면 세상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 그 두 가지 권위를 여전히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을 권세로 복종케 했습니다. 그들의 권세의 근원은 백성들의 신앙이고 자신들이 일반인보다 더욱 열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인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잘 지키느냐로 종교적 열심을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일반과 구별된 특수계층이 되면서 스스로 사회적으로 계급화 되고, 종교적으로 권력화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명예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욕망의 실현과 그것을 영구히 지속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그렇게 자신들의 목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도, 심지어 메시아라도 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율법주의자를 바리새인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기보다 신앙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종교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기독교가, 교회가 권력화 되어 결국 타락하는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대개 단 하나의 종교만 허용하는 사회에서는 종교계급은 어쩔 수 없이 정치권력과 밀착하거나 아예 종교인들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세력을 두려워하기에 복종할 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권세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고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순전한 영적 권위를 가진 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22절에는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권위가 두 번 언급이 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의 권위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이나 학자들은 자신들의 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른 권위 있는 지명도 높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때 유명한 가말리엘과 힐렐 학파 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유명한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 외에 어느 누구의 이름을 인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끌어와서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마음대로 못하고 악한 귀신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이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은 당연히 귀신보다 더 큰 권위와 능력을 가진 자만이 가능합니다.

 

마침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아니고 귀신의 의지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나사렛이란 호칭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 자리의 어떤 누구보다도 그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고 또한 아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가복음의 다른 장면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가복음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가복음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귀신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느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정확하게 그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의 지식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귀신들은 두려워서 떱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8:16~17,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세례 받은 것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봉사를 하는 것이 약간의 외적 증거로서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러분 안의 성령께서 증거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가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 같은, 어떤 은사가 나타나고 병이 고쳐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은사들은 사라지고, 나았던 병이 다시 들기도 하고 다른 병으로, 혹은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증거가 교회 다니니까 복 받고, 돈 잘 벌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증거는 이단과 마귀가 더 잘 나타냅니다.

 

성령이 증거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말씀의 권위에 거꾸러진 경험이 있으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셨으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아무에게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만난 제자만이 그 내적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남편이 회사에서 갑자기 퇴직하라는 압력을 받고, 집 나간 자식이 애 하나 안고 덜컥 들어올 때 어찌하시렵니까?

 

그 일 속에서 어떤 일에도 실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사랑을 발견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꿇어 엎드리고, 자신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눈물로 아뢰어 보십시오. 그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심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의 고난이 있어야 영혼의 눈이 뜨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권위 앞에 복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고난과 함께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0) 2012.01.27
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0) 2012.01.25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5. 광야에서  (0) 2012.01.15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마가복음
 
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나를 새생명 얻게 하셨다고 생각하시면 구원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 뿐 아니라 또 다른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여러분을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로서 부르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주님의 생애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자란 종의 다른 이름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는 면을 강조한다면, 제자는 배우며 따라간다는 면을 강조한 이름입니다. 종이 구약적인 색채가 있다면 제자는 신약적인 느낌의 단어입니다.

 

처음 네 명의 제자들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주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마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약간 다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안드레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로서 지내다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두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자기 형제인 시몬 베드로를 전도하여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으로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를 부르시기 몇 달 전에 이미 서로 만났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연유로 잠시 헤어졌다가 그들은 고향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다시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면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왜 그 과정을 생략했습니까?

 

마가복음의 처음 독자였던 로마교회의 고난 받는 성도들은 심각한 신앙의 위기와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당했고, 박해가 잠시 뜸한 틈에서도 제대로 생업을 이어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극심한 왕따를 당했습니다. 요즘말로 괴담 같은 거짓 소문들이 퍼져나가 아주 이상하고 위험한 부류로 낙인찍혔습니다. 우리나라의 광우병 사태를 보면 거짓 소문의 효과가 어떠한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면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때에 마가는 베드로의 도움으로 기록한 예수님의 생애가 담긴 책을 기록하여 그들을 주님의 종이요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의지였습니다.

 

실제로는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지만 그렇게 그가 한 행동도 하나님이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마음에 좀 평안을 얻어야지라고 색각하고 처음 이 교회에 발걸음을 시작했을 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권적으로 내가 구원받도록 부르셨습니다.

 

, 예수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1.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바다는 디베랴 혹은 게네사렛호수라고도 불렸습니다. 호수가 워낙 넓어서 짠물이 아닌데도 바다로 인정이 될 정도입니다. 물이 짠지 민물인지는 나중에 직접 가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아마 애매모호한 수질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2천 년 전이니 지금과 수질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는 사해는 엄연히 짠물이니까 세계에서 제일 작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오대호나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갈릴리나 사해보다도 훨씬 크지만 민물이라 호수로 불립니다.

 

갈릴리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수면이 낮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예수님 당시의 사회와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바다에 15개의 항구가 있었고 330척의 배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는 이스라엘 전역에 판매가 되고 소금으로 절여서 외국에까지 판매가 될 정도로 어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예수님이 최초의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은 제자들의 생업의 현장이었습니다. 즉 늘 하던 평상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이적이나 증거를 원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오라고 부르실 때 그것이 기적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사형수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감옥에서 나와라, 자유다, 생명을 얻었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사형수에게 더 큰 기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들은 언제 구원받은 것일까요? 굳이 그들의 구원과 제자로 부르심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제자로 불릴 때 동시에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것은 알겠는데 아직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야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이미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시에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얻는 것으로,천국 가는 티켓을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제자로 불림 받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그것은 과거의 순간이 아니고 계속 진행형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645)라는 독일의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정권에 반대하여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2차 대전이 끝나기 한 달 전에 감옥에서 처형당했습니다(1945.4.9). 그가 제자도(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1937). 원제목의 뜻은 제자가 되는 비용 혹은 대가라는 뜻입니다.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구원받았음을 즐기는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 거룩한 희생이 따른다는 내용입니다. 싸구려 은혜란 희생도 훈련도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값싼 은혜에만 만족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제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12명 중 처음 네 명의 제자들을 어떠한 기준으로 부르셨나요? 이들은 모두 어부들이었습니다. 어부란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부러움을 살 만한 직업은 결코 아닙니다.

 

요즘 교회를 개척하면 목사들은 어떤 사람들이 교회로 오기를 바랍니까?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가 있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안 그럴까요? 그렇다면 신도시 값나가는 아파트 지역에 왜 교회가 너도나도 먼저 들어갑니까?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의 일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1 19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과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리란 로마 식민지이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면서 때로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던,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7 6절을 보면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택정하여 준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주님은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택정하고 부른다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골라내어 부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 중에서 택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택정함을 받은 사람은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택정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선생을 따라야 합니다. 선생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2.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유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제자로 훈련시키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우리를 훈련시키는 분은 주님이지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을 사용하신다가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당신의 도구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부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원양어선이 그물을 바다에 던지면 족족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있는 몇 달 동안 단지 몇 차례의 기회 밖에 없습니다. 낚시할 때 낚시꾼이 낚시를 드리우고 물만 바라보고 몇 시간을 기다립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매일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는 실패 후에 풍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일곱 명이 어부입니다. 당시의 많은 직업 중에 가장 인내가 필요한 것은 아마 어부일 것입니다. 그런 인내에 익숙한 어부들을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 낚는 어부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일이 얼마나 큰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은 영광된 일입니다.

 

잠언 11:30,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다니엘서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17절의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고 바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훈련과 연단 과정을 거쳐서 숙성하고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루어지지만 제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거듭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할 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했을 때, 이미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라 살며 그분의 제자로 되어가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19] 조금 더 가시다가(a little further)

 

두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셨습니다. 여러분도 구원의 입구에서 조금 더 가보십시오. 제자 되는 영광된 시작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돈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기를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낚기 위해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려고, 그런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려고 생각하셨다면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사는 것입니다.

 

3. “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주님이 제자를 부르시자 네 명의 제자들은 곧 따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전에 전혀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그 중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몇 달 전에 예수님을 따랐던 적이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들입니다.

 

마태복음 27: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한복음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러나 자신의 생업과 가족들을 놔두고 즉시 따라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 혹은 가족들을 전도하기 더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마태복음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요한복음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우리의 순종은 즉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그들은 그물을, 같이 일하던 자들을 놔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우리를 붙잡는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앞서게 해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8절에 나오는 '좇으니라'는 말과 20절에 나오는 '따라가니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주님을 닮아 가는 것과 주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는 받고, 주님의 축복은 받고, 주님의 구원을 받으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주님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라고 구원하신 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되어야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신적인 삶, 이타적인 삶, 사람 낚는 어부의 삶으로 부르신 우리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이 너무 중요해서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 거룩한 제자의 삶을 사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나야 했으며, 배와 그물도 버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혈육과 삶을 버린다는 것은 오늘 날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 당시로써는 더욱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저마다 다르기에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업을 유지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실제 모든 것을 끊는 것을 뜻하지 않고 나의 세상적인 욕심과 삶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삶의 목적이 돈을 벌고, 명예와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소명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부인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이 정하고, 얽어 맨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부인한 사람은 이제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이 목적과 소망을 갖고 주님을 쫓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이신 것을 그 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리지 못하여서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의 배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것 같고, 세상의 문화와 조직을 벗어나면 도태되고, 외면당할 것 같아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변화된 열둘의 제자로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주님은 변화된 우리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후에 열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사도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메섹도상에서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네로황제의 박해 때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박힐 수 있는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7,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린도후서 4: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주이신 것과 우리 자신이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인 것을 전파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연약하고 찌꺼기 같은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9~13,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시도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중요한 직분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모습과 능력으로 그 직분을 수행케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상식입니다.

 

새예루살렘성에는 성의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19~20,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러나 보십시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렇게 사도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네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네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겠느냐”(고후 10:10) 거기에 대해 바울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었고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셨다”(고전 4:13)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된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주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를 성공시켜 달라고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면 무슨 망신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향한 자존심과 욕망의 문제이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섭섭해 하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일하게 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그 예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을 정복해야지 왜 십자가에서 죽느냐?”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고 못났다고 하나님께서 쓰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니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약함이 우리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야 할 신자들도 자신의 자존심과 자아 때문에 내가 얼마나 능력 있고 쓸 만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형통하고 승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한 제자들의 승리는 자신을 나타내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는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주 앞에 무릎 꿇은 자에게 문제의 해결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의 존재가 높아지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소원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께 소유 당했느냐 입니다.돈이나 건강, 명예, 가정의 평화가 아닙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을까를 구해 본적이 있습니까?

 

모든 영적 싸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만이 그 힘을 발휘합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0) 2012.01.25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0) 2012.01.20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5. 광야에서  (0) 2012.01.15
마가복음 04. 종의 시험  (0) 2012.0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