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마가복음 1:21~28,

개정,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개역,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오늘의 본문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권세)입니다. 한글개역판 성경에는 권세로 번역하고 있는데 개정판 번역대로 권위가 더 올바른 번역입니다.

 

권세란 권력과 세력이라고 합니다.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즉 다른 이의 복종을 끌어내는 힘이 권위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세속적 권세나 권위가 아니고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구분이 정말 가능할까요? 저는 정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외모나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를 보거나 진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많이 배워서, 인격이 훌륭해서, 경험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만나 거꾸러진 제자만이 갖게 됩니다.

 

한국에는 나이가 계급장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때로 연장자가 하는 말이 무조건 먹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연세가 지긋하고 품격이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분이 젊잖게 말하는 것과 시골뜨기에 배운 것 없고 노동자 출신인 젊은이가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권위 있어 보이겠습니까?

 

, 그 젊은이는 예수님을 말할 수 있겠구나. 그러면 당연히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이 말이 권위가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야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러시다면 다음 질문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양심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멀리 이사했습니다. 지금까지 다니던 교회를 계속 못 다닐 정도로 멉니다. 그래서 주변의 다른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대개 전에 다니던 교회와 같은 교단의 교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도 없다면? 지역적으로 아예 장로교가 없는 지역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큰 교회를 선택하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의 크기에 교회 목회자의 능력이나 성도들이 받는 은혜가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으면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익명성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갖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사실 핑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한 교회의 가치만큼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유명한 외국 대학출신의 박사님이라서, 서울 강남에서 이름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라서,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매스컴도 타고 좋은 일을 했다는 교회라서... 그렇게 여러분의 선택대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자신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비유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일 년 수입이 수억 원이고 사회적 지위가 꽤 있다면, 여러분은 옷 한 벌 사기위해 동네 옷가게나 마트에 가겠습니까 아니면 유명 백화점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백화점에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걸맞게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곳을 가야 그런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자신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저희 가족이 한때 부모님이 사시던18평 시영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한 동안 살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아파트 주차장에는 당시 우리나라 고급 승용차들이 꽤 많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집은 작아도 차는 번듯하면 어디 나가서 기죽지 않는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열등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외형과 소유로 자신의 가치를 포장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형 교회를 자신의 교회로 선택했다면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명품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와 같습니다. 그 브랜드의 권위만큼 자신도 괜찮은 신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 여러분은 외모와 나이와 재산과 학력을 떠나서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까?

 

교회의 가치를 영적 감동과 생명력의 활동 그리고 대사회적인 건전한 세계관과 그 관계에서 구하지 않고 건물의 크기, 담임목사의 학력, 교인들의 경제적, 학력 수준에 둔다면 세상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 그 두 가지 권위를 여전히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을 권세로 복종케 했습니다. 그들의 권세의 근원은 백성들의 신앙이고 자신들이 일반인보다 더욱 열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인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잘 지키느냐로 종교적 열심을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일반과 구별된 특수계층이 되면서 스스로 사회적으로 계급화 되고, 종교적으로 권력화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명예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욕망의 실현과 그것을 영구히 지속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그렇게 자신들의 목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도, 심지어 메시아라도 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율법주의자를 바리새인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기보다 신앙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종교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기독교가, 교회가 권력화 되어 결국 타락하는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대개 단 하나의 종교만 허용하는 사회에서는 종교계급은 어쩔 수 없이 정치권력과 밀착하거나 아예 종교인들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세력을 두려워하기에 복종할 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권세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고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순전한 영적 권위를 가진 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22절에는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권위가 두 번 언급이 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의 권위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이나 학자들은 자신들의 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른 권위 있는 지명도 높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때 유명한 가말리엘과 힐렐 학파 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유명한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 외에 어느 누구의 이름을 인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끌어와서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마음대로 못하고 악한 귀신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이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은 당연히 귀신보다 더 큰 권위와 능력을 가진 자만이 가능합니다.

 

마침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아니고 귀신의 의지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나사렛이란 호칭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 자리의 어떤 누구보다도 그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고 또한 아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가복음의 다른 장면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가복음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가복음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귀신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느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정확하게 그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의 지식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귀신들은 두려워서 떱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8:16~17,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세례 받은 것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봉사를 하는 것이 약간의 외적 증거로서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러분 안의 성령께서 증거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가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 같은, 어떤 은사가 나타나고 병이 고쳐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은사들은 사라지고, 나았던 병이 다시 들기도 하고 다른 병으로, 혹은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증거가 교회 다니니까 복 받고, 돈 잘 벌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증거는 이단과 마귀가 더 잘 나타냅니다.

 

성령이 증거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말씀의 권위에 거꾸러진 경험이 있으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셨으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아무에게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만난 제자만이 그 내적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남편이 회사에서 갑자기 퇴직하라는 압력을 받고, 집 나간 자식이 애 하나 안고 덜컥 들어올 때 어찌하시렵니까?

 

그 일 속에서 어떤 일에도 실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사랑을 발견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꿇어 엎드리고, 자신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눈물로 아뢰어 보십시오. 그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심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의 고난이 있어야 영혼의 눈이 뜨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권위 앞에 복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고난과 함께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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