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마가복음
 
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나를 새생명 얻게 하셨다고 생각하시면 구원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 뿐 아니라 또 다른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여러분을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로서 부르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주님의 생애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자란 종의 다른 이름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는 면을 강조한다면, 제자는 배우며 따라간다는 면을 강조한 이름입니다. 종이 구약적인 색채가 있다면 제자는 신약적인 느낌의 단어입니다.

 

처음 네 명의 제자들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주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마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약간 다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안드레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로서 지내다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두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자기 형제인 시몬 베드로를 전도하여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으로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를 부르시기 몇 달 전에 이미 서로 만났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연유로 잠시 헤어졌다가 그들은 고향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다시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면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왜 그 과정을 생략했습니까?

 

마가복음의 처음 독자였던 로마교회의 고난 받는 성도들은 심각한 신앙의 위기와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당했고, 박해가 잠시 뜸한 틈에서도 제대로 생업을 이어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극심한 왕따를 당했습니다. 요즘말로 괴담 같은 거짓 소문들이 퍼져나가 아주 이상하고 위험한 부류로 낙인찍혔습니다. 우리나라의 광우병 사태를 보면 거짓 소문의 효과가 어떠한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면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때에 마가는 베드로의 도움으로 기록한 예수님의 생애가 담긴 책을 기록하여 그들을 주님의 종이요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의지였습니다.

 

실제로는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지만 그렇게 그가 한 행동도 하나님이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마음에 좀 평안을 얻어야지라고 색각하고 처음 이 교회에 발걸음을 시작했을 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권적으로 내가 구원받도록 부르셨습니다.

 

, 예수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1.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바다는 디베랴 혹은 게네사렛호수라고도 불렸습니다. 호수가 워낙 넓어서 짠물이 아닌데도 바다로 인정이 될 정도입니다. 물이 짠지 민물인지는 나중에 직접 가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아마 애매모호한 수질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2천 년 전이니 지금과 수질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는 사해는 엄연히 짠물이니까 세계에서 제일 작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오대호나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갈릴리나 사해보다도 훨씬 크지만 민물이라 호수로 불립니다.

 

갈릴리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수면이 낮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예수님 당시의 사회와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바다에 15개의 항구가 있었고 330척의 배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는 이스라엘 전역에 판매가 되고 소금으로 절여서 외국에까지 판매가 될 정도로 어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예수님이 최초의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은 제자들의 생업의 현장이었습니다. 즉 늘 하던 평상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이적이나 증거를 원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오라고 부르실 때 그것이 기적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사형수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감옥에서 나와라, 자유다, 생명을 얻었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사형수에게 더 큰 기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들은 언제 구원받은 것일까요? 굳이 그들의 구원과 제자로 부르심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제자로 불릴 때 동시에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것은 알겠는데 아직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야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이미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시에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얻는 것으로,천국 가는 티켓을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제자로 불림 받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그것은 과거의 순간이 아니고 계속 진행형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645)라는 독일의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정권에 반대하여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2차 대전이 끝나기 한 달 전에 감옥에서 처형당했습니다(1945.4.9). 그가 제자도(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1937). 원제목의 뜻은 제자가 되는 비용 혹은 대가라는 뜻입니다.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구원받았음을 즐기는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 거룩한 희생이 따른다는 내용입니다. 싸구려 은혜란 희생도 훈련도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값싼 은혜에만 만족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제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12명 중 처음 네 명의 제자들을 어떠한 기준으로 부르셨나요? 이들은 모두 어부들이었습니다. 어부란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부러움을 살 만한 직업은 결코 아닙니다.

 

요즘 교회를 개척하면 목사들은 어떤 사람들이 교회로 오기를 바랍니까?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가 있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안 그럴까요? 그렇다면 신도시 값나가는 아파트 지역에 왜 교회가 너도나도 먼저 들어갑니까?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의 일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1 19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과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리란 로마 식민지이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면서 때로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던,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7 6절을 보면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택정하여 준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주님은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택정하고 부른다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골라내어 부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 중에서 택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택정함을 받은 사람은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택정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선생을 따라야 합니다. 선생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2.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유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제자로 훈련시키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우리를 훈련시키는 분은 주님이지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을 사용하신다가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당신의 도구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부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원양어선이 그물을 바다에 던지면 족족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있는 몇 달 동안 단지 몇 차례의 기회 밖에 없습니다. 낚시할 때 낚시꾼이 낚시를 드리우고 물만 바라보고 몇 시간을 기다립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매일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는 실패 후에 풍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일곱 명이 어부입니다. 당시의 많은 직업 중에 가장 인내가 필요한 것은 아마 어부일 것입니다. 그런 인내에 익숙한 어부들을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 낚는 어부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일이 얼마나 큰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은 영광된 일입니다.

 

잠언 11:30,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다니엘서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17절의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고 바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훈련과 연단 과정을 거쳐서 숙성하고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루어지지만 제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거듭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할 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했을 때, 이미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라 살며 그분의 제자로 되어가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19] 조금 더 가시다가(a little further)

 

두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셨습니다. 여러분도 구원의 입구에서 조금 더 가보십시오. 제자 되는 영광된 시작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돈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기를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낚기 위해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려고, 그런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려고 생각하셨다면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사는 것입니다.

 

3. “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주님이 제자를 부르시자 네 명의 제자들은 곧 따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전에 전혀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그 중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몇 달 전에 예수님을 따랐던 적이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들입니다.

 

마태복음 27: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한복음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러나 자신의 생업과 가족들을 놔두고 즉시 따라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 혹은 가족들을 전도하기 더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마태복음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요한복음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우리의 순종은 즉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그들은 그물을, 같이 일하던 자들을 놔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우리를 붙잡는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앞서게 해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8절에 나오는 '좇으니라'는 말과 20절에 나오는 '따라가니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주님을 닮아 가는 것과 주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는 받고, 주님의 축복은 받고, 주님의 구원을 받으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주님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라고 구원하신 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되어야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신적인 삶, 이타적인 삶, 사람 낚는 어부의 삶으로 부르신 우리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이 너무 중요해서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 거룩한 제자의 삶을 사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나야 했으며, 배와 그물도 버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혈육과 삶을 버린다는 것은 오늘 날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 당시로써는 더욱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저마다 다르기에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업을 유지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실제 모든 것을 끊는 것을 뜻하지 않고 나의 세상적인 욕심과 삶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삶의 목적이 돈을 벌고, 명예와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소명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부인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이 정하고, 얽어 맨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부인한 사람은 이제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이 목적과 소망을 갖고 주님을 쫓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이신 것을 그 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리지 못하여서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의 배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것 같고, 세상의 문화와 조직을 벗어나면 도태되고, 외면당할 것 같아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변화된 열둘의 제자로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주님은 변화된 우리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후에 열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사도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메섹도상에서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네로황제의 박해 때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박힐 수 있는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7,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린도후서 4: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주이신 것과 우리 자신이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인 것을 전파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연약하고 찌꺼기 같은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9~13,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시도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중요한 직분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모습과 능력으로 그 직분을 수행케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상식입니다.

 

새예루살렘성에는 성의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19~20,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러나 보십시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렇게 사도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네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네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겠느냐”(고후 10:10) 거기에 대해 바울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었고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셨다”(고전 4:13)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된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주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를 성공시켜 달라고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면 무슨 망신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향한 자존심과 욕망의 문제이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섭섭해 하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일하게 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그 예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을 정복해야지 왜 십자가에서 죽느냐?”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고 못났다고 하나님께서 쓰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니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약함이 우리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야 할 신자들도 자신의 자존심과 자아 때문에 내가 얼마나 능력 있고 쓸 만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형통하고 승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한 제자들의 승리는 자신을 나타내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는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주 앞에 무릎 꿇은 자에게 문제의 해결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의 존재가 높아지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소원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께 소유 당했느냐 입니다.돈이나 건강, 명예, 가정의 평화가 아닙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을까를 구해 본적이 있습니까?

 

모든 영적 싸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만이 그 힘을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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