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5. 광야에서

 


마가복음
 
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광야시험의 특징:

 

40일의 시험이었으나 그 후로도 계속된(imperfect) 시험입니다. 40일은 실제 역사이며 또한 성도와 교회에 대한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마가는 시험에서의 승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상 죄를 지신 고난 받으시는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는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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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가셨다는 것과,  그 모든 일을 성령께서 몰아내시는 방법으로 보내어졌고,  받을 필요가 없는 시험을 받으셨어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오늘은 특히 13절 부분에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는 부분을 통해 마가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 주고자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마태, 누가)에 비해 간략하게 2개의 절로 기록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직후 그분의 가실 곳을 번쩍이는 예루살렘성이 아니고 거친 들판,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는 광야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기록함으로써 마가의 복음서를 읽었던 당시 고난 받던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특히 예수님을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유혹과 시험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합니다.

 

전에는 죄로 인해 죄로 여기지도 못했던 것들을 이제 죄와 유혹의 것으로 알게 됩니다. 전에는 세상의 도덕적 기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았지만, 이제 너는 내 아들이라, 내 자녀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과 자신들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것들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성경이 죄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려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리고 있을 때에(벧전 5:8)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이미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겨 나갑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유혹을 이겨내기 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은 더 심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영광스러운 산꼭대기 보다 산 아래 계곡에서 믿음을 더 잘 배웁니다. 누구나 있고 싶고 일하고 싶은 예루살렘 왕궁 안에서 보다 광야에서 주님의 제자가 탄생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 받으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시험 받는 문제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1:13~15,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수님은 삼위일체로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맞지가 않는 건가요? 우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시험받는 것은 현실이잖습니까?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두 가지 인격(흔히 생각하는 도덕성이 아니라 자아 개체입니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시험 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가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여 구원하는 방법 외에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또한 두 번째 의문인, ‘우리가 시험 받는다는 문제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야고보서의 1 13절의 시험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직접적으로 주는 시험입니다. 그것이 처음에 고난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무릎 꿇고 신앙을 저버릴 정도에서 갈등을 하면 그것은 시험 즉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소명을 저버리게 할 정도의 시험이라면 마귀가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험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유익과 내세에의 소망을 더 든든히 갖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마귀가 주는 시험마저도 그 주권 아래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욥의 고난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마가복음 1 1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장소가 광야라고 했습니다. 들짐승과 함께 40일을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광야가 생물이 살기에 거친 장소이기는 해도 자연적으로 그런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식물, 곤충들과 그밖에 야생짐승들이 광야에 꽤 있었습니다. 위험한 대형 포식동물인 자칼, 하이에나, 심지어 사자도 있었습니다. 요즘 중동지방에는 사자가 멸종되었지만 구약 성경책의 약 3분의 2에 사자가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흔한 짐승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단지 굶어서 배고픈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험한 야생동물들의 위험도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시험을 받는다는 단어를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처럼 시험을 받았다가 아니라, “시험을 받는 중이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3,

peirazomenos (pres.[현재형] pass. part. peirazo, to tempt)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And he was there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tempted of Satan; and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ministered unto him. (KJV)

 

마태복음 4:1,

peirasthenai (aor.[부정시제] inf. pass.)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Then was Jesus led up of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of the devil. (KJV)

* aorist(부정시제)란 부정(不定) 시제에, 즉 어떤 시점에 (1)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나, (2) 이미 끝난 일이나, (3)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일을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4:2,

peirazomenos (마가와 같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Being forty days tempted of the devil. And in those days he did eat nothing: and when they were ended, he afterward hungered. (KJV)

 

* 요한복음에는 광야시험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의 현재형 동사 표현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험은, 고난은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그래서 3가지 시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만 말하면 광야의 40일이 3가지 시험과 배고픈 일 외에는 큰 문제가 없는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험이 3가지 이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귀의 시험은 종류가 세 가지였지만 그것이 단숨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거의 40일간 계속된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마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은 그 40일간의 3가지 시험의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은 광야40 이후에도 예수님의 남은 3년 반의 기간 동안 계속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40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0은 특히 광야와 관련하여 특별합니다. 모세의 광야 40,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방랑.......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이 그 40년으로 끝났던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고난도 단순히 광야 40일로 끝나지 않았다고 마가는 우리에게 두 절의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0은 이와 같이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특별한 숫자입니다. 모든 주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인생을 광야 40년의 세월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광야입니다.

 

마가는 특이하게도 마태복음과 다르게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결과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천사들이 수종든 것”( 4:11,  1:13)으로 보아 예수님이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겨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처럼,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라는 유명한 말씀도 없습니다. 11절에 마귀가 물러갔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은 그런 이야기도 없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는 기록을 굳이 나타내지 않음으로 마가복음을 읽는 성도들이 고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언제 어디에서 끝납니까?

골고다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최후의 고난이면서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의 광야는 어떻습니까?

 

이제 왜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고난 받으셔야 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라고 하면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그 모든 양떼 대신 당신 혼자 죗값을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이사야 53:6,11,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선한 목자로 비유되시어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0:11,14~15,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불순종으로 범죄하여 죄를 세상에 들여놓았으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기에 고난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으나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 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의 어떠한 환난이나 고난에도 우리가 망하지 않도록 지키시고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받으셨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선언하신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H.C. Trumbull, 1830~1903)이 교도소의 죄수들을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감자들을 찾아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른 점은 단지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어떤 수감자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에게 하신 말씀 중에 당신의 인생을 다르게 만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때문이라는 겁니까? 정말 그것이 당신을 우리 같은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 유일한 것인가요?” 그 죄수는 목사님으로부터 더 자세히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종신형으로 있습니다. 이제는 이곳에서 만족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죄수가 되어 나의 형제가 되어주신 분이 이곳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광야에서 수많은 고난과 시험을 받습니다. 이 세상이 감옥입니다. 모든 사람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이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의 사망 권세까지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나의 형제가 되어서 나의 모든 고난과 죄짐을 지신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주님이 이 광야에 계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 광야를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고난의 광야를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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