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본문: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

 

 

1. 요셉의 생애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요셉은 17세에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17세부터 110세까지, 무려 93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약 80년을 애굽의 총리로 지냈습니다.

 

창세기 50: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요셉의 일생은 단순히 한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기록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셉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과 같이 우리 신자들의 인생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우연에 맡기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마지막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사야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the end from the beginning)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private possession)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과 기다림의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2. 애굽에서도 약속을 바라본 요셉

 

요셉은 애굽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애굽은 요셉에게 매우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권세와 부와 명예를 모두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과 형제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이 언젠가 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50:24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창세기 50:24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visit)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요셉은 애굽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이 아무리 풍요롭고 아름다워도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할 곳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줍니다.

 

이 세상이 바로 애굽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성공하고, 재산을 얻고, 명예를 얻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전도서 1:13~14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요셉은 애굽의 영광을 누렸지만, 애굽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3. 요셉의 마지막 유언: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리라”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해골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로 삼도록 유언합니다.

 

창세기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개역한글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KJ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God will surely visit you, and ye shall carry up my bones from hence.

 

NIV는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서,

 

God will surely come to your aid ...

 

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돌보다”, “권고하다”, “찾아오다”, “방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פָּקַד (paqad)입니다.

 

פָּקַד는 문맥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 세다, 계수하다

* 돌보다

* 시찰하다, 방문하다

* 임명하다

* 감독하다

* 주의 깊게 살피다

* 돌보고 보살피다

* 벌하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고 찾아오셔서 주의 깊게 살피시고, 돌보시며, 마침내 약속을 이루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후손들에게 바로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이다.”

 

4. 요셉의 해골이 보여주는 부활의 소망

 

그렇다면 왜 요셉은 자신의 시신을 애굽에 그대로 두지 말고,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갈 때 자신의 뼈도 함께 가져가도록 했을까요?

 

요셉의 해골을 애굽에서 옮기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더 깊은 의미를 보여줍니다.

 

육신의 죽음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몸으로의 부활을 소망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로마서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요셉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무덤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관 속에 있는 뼈조차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5. 요셉의 관, 그리고 ‘궤’의 의미

 

요셉의 시신은 애굽의 장례 방식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미라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50: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여기에서 성경에 시신을 보관하는 ‘관’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는 אָרוֹן (‘ârôn)입니다.

 

H727 אָרוֹן (‘ârôn)

From H717 (in the sense of gathering); a box: ark, chest, coffin

 

즉, 기본적인 의미는 상자, 궤, 관입니다.

 

이 단어는 H717 אָרָה (‘ârâh)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어원에는 “모으다, 거두다, 뽑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다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1) ‘관’

창세기 50:26에서 요셉의 시신을 넣은 관을 가리킵니다.

 

(2) ‘돈 궤’

열왕기하 12:9, 역대하 24:8에서 성전의 헌금을 넣는 궤를 가리킵니다.

 

열왕기하 12:9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אָרוֹן, a chest)를 가져다가 그것의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문 어귀 오른쪽 곧 제단 옆에 두매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3) ‘언약궤’

출애굽기 25:10~21과 출애굽기 37:1~9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25: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אָרוֹן, an ark)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놀랍게도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요셉의 ‘관’, 성전의 ‘헌금 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참고로, 모세의 형 ‘아론’의 정확한 히브리어는 אַהֲרֹן(Aharon)으로, 요셉의 ‘관’이나 언약궤를 뜻하는 אָרוֹן(’ârôn)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6. 요셉의 관은 무엇을 증거했는가?

 

요셉의 관은 단순한 나무 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증거물이었습니다.

 

애굽의 왕조가 바뀌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 요셉의 치적과 역사를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요셉의 관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요셉의 관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없이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마침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할 때, 요셉의 관도 함께 애굽을 떠났습니다.

 

출애굽기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그리고 마침내 요셉의 뼈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혔습니다.

 

여호수아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요셉은 애굽에서 죽었지만, 그의 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인생은 애굽에서 끝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애굽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7.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목적 역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이 세상이 교회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아내의 역할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베드로전서 3:1~4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KJV는 4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But let it be the hidden man of the heart, in that which is not corruptible, even the ornament of a meek and quiet spirit, which is in the sight of God of great price.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마음에 숨은 사람(the hidden man of the heart)”입니다.

 

성도의 참된 아름다움은 외적인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숨은 사람, 곧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내면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조용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을 통하여 세상에 우리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요셉의 관이 애굽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살면서도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관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했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애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백성을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의 끝에는 부활과 영광이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증거했던 것처럼, 우리의 생애 또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세상에 보여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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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의 修業 22. “다윗⑧-다윗과 사울②”

 

“신자이면서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신앙고백도 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구원 받았다는 간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왕이 되기를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대신 자신을 높이기 원합니다. 자신의 양심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과 권세가 높아지면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이 왕 노릇 하려는 숨어있던 욕심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19:18~24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19]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고로 사울이 세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자신의 왕권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누릴 권리로, 자신의 것으로 여기다가 그 교만과 욕심으로 미쳐가는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만이 들어가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을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유명해지면 사울처럼 교만해지는 과정이 틀림없이 찾아옵니다. 특히 대형교회의 스타 목사들의 자리는 안정되고 커다란 권력까지 가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들은 물론 말로는 언제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주께 영광 돌립니다. 서로 사랑합시다”를 외치는데 테이프 틀어놓은 듯 자동이지 진심은 차차 희미해집니다.

 

목사가 교만해진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목회에 코피 날 정도로 열심이고 능력 있는 은사와 감동적인 설교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교만해질수록 외적으로 보이는 그의 능력은 오히려 더욱 빛이 날 수 있습니다. 그가 교만하다고 그가 남들에게 무례하거나 언사를 거칠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낮아진 것처럼 보이고 친절해집니다. 왜요? 그렇게 남들에게 보일수록 자신의 권세가 더 견고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주 노련한 정치인들과 대화해 보신 적 있습니까? 우리가 보통 정치인들을 욕하고 무능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결코 무식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똑똑하고, 언변에 능통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 천재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 능력을 국민과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이권이나 소속정당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은 능력과 실력으로 진실을 왜곡시키고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그 행위가 누적되고 국민에게 노출이 돼서 욕을 먹는 이유가 됩니다.

 

실제로 많은 스타 목사들이 그 유혹에 빠졌습니다. 교회의 교인이 몇 만 명이 넘고 목사의 명예와 영광이 이미 절정에 다다르면 대부분 그 유혹에 빠집니다.

 

그때 교회를 분리하거나 자신이 작은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자기 자식에게 세습시키려고 합니다. 그 상태를 ‘미혹의 영’(딤전 4:1; 요일 4:6)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큰 교회 목사에만 해당이 될까요?

 

작은 교회 목사들의 목회의 목적이 대부분 교회부흥입니다. 신도시에 빨리 터 잡아서, 은행 대출받아서 큰 건물 지어놓고 사람들 끌어 모으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교, 부흥, 제자훈련...’ 듣기 좋은 말을 사용합니다.

 

부흥과 성장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흥하지말자는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원하는 인간의 속에 자기의 영광을 향한 욕망과 야심이 숨어있기는 너무 쉽고, 그것들을 분리해내기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도 만일 목회가 ‘성공’하면 그 교만의 길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BMW 내놓으라고 은근히 눈치주고, 40평 이하는 안 살고, 아르마니 외에는 걸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외형적인 변화가 유치하지만 사실로 나타납니다.

 

목사가 큰 교회에 가거나 부흥시켜서 개혁하겠다? 본인이 아무리 겸손한 인품이어도 쉽지 않아요. 큰 교회는 일단 교회의 ‘격’을 맞추기 위해 ‘목사다운’ 대접을 해 줍니다. 교인들이 솔선해서, 즉 자기들 수준에 맞추기 위해 목사를 ‘보기 좋게’ 포장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임명된 목사는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그렇게 보여줘야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충 소개해서 그렇지, 못난 일부 한국 목사들이 하는 짓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두 시험 듭니다. 인터넷 기사 검색하면 놀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의 이름이 달린 일이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손에 맡기고, 문제를 알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귀 있는 자들은’ 자신의 경주를 하면 됩니다.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갔다가 예언을 하게 되는 희한한 이야기가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예언을 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울은 이 번 말고도 이미 먼저 예언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울이 영적인 경험을 한 것이 ‘두 번’ 입니다. 그때도 그 예언의 내용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는 사울이 왕이 된다는 증거로 예언자들의 무리와 함께 예언을 할 것이라는 사무엘의 예언대로 됩니다.

 

사무엘상 10:5~6, 9~10

[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사울이 예언하자 사람들이 놀라서 비아냥거리는 말로 속담(첫 번째 속담)까지 만들었습니다.

 

사무엘상 10:11~12

[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12]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사울도 선지자냐”는 말에는 “개나 소나 다 한다”는 비꼬는 투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에 백성들이 불평하자 모세가 심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여 예언하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 70 명의 장로들은 모세를 위해 거의 도움도 안 되는 불평분자들이요 선동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모세처럼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민수기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이 때로는 이와 같이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신령한 일을 허락해 주시거나 은사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어서 얻는 줄로 착각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이 기이한 체험을 하고 예언을 한 것은 그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왕이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언 사건은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다는 확실한 외적 증거로 삼고 사울이 개인적인 확신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두 번째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사울이 하나님의 택하신 진정한 왕을 죽이려고 사무엘의 안방까지 쳐들어 온 때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목적에서 떠나 의지까지 잃어버리고 겉옷도 벗어버린 채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두 번째 속담이 퍼지게 됩니다.

 

[24]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이때는 이미 사무엘에 의해 사울의 때가 끝났다는 경고를 들은 지 한참이 지난 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수십 년을 왕으로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면 이제 자신의 진정한 통치권이 완전히 굳어졌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사무엘의 경고를 흐지부지 잊어버릴 정도의 시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한국 교회에 시작이 되었는데 아무도 귀 기울이는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크게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의 첫 예언체험캠프가 그의 왕정의 시작을 상징한다면 두 번째 예언체험캠프는 그의 왕정의 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울의 예언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이 말하지 않기에 아무도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은 가능합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통치입니다. 사울의 예언도 그 예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예언하는 가운데 직접적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라마 나욧에서 선지자들과 같이 예언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이 정하신 왕임을 알고 있습니다. 사울도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미친 듯 쫓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다윗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사울을 밀어내기 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은 바퀴벌레 잡듯 죽이려고 합니다.

 

바퀴벌레 잡으려고 쫓아다닌 적 있습니까? 그놈들 더듬이 휘날리며 달릴 때는 잡기 힘듭니다. 약은 오르고 속에서는 열이 나지요. 바퀴벌레 비유가 좀 그렇지만, 사울이 한 때는 다윗을 곤충채집하듯 창으로 벽에 박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모든 시도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이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마스에 관한 성경 이야기 중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그를 죽이려는 헤롯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태어나신 왕을 찾으려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 그리고 헤롯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박사들이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래서 헤롯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를 알게 되고 박사들을 속여 그 탄생 시간을 알아냅니다.

 

시간과 장소라는 정밀좌표가 파악되었으니 이제 융단폭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다 죽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했습니까? 아니었죠.

 

헤롯은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지만 그 시도가 오히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사실을 공적으로 자신이 증명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 일이 실패했던 것처럼 헤롯도 다윗의 후손을 죽이려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로 인해 다윗이 하나님이 택한 진정한 왕임을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사무엘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이 모습은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세상 모든 세력이 주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다윗을 사울이 죽이려 했다는 것이, 사울 자신이 왕이 아니라 다윗이 왕이라는 첫 번째 증거이고, 사울이 예언하며 사무엘 앞에 엎드러진 것이 다윗이 왕이라는 두 번째 증거가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복음입니다. 또한 성경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2천 년 전에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앞으로 그 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그 아들을 믿지 않은 자들과 세력은 그 아들의 적(敵)으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서는 성경 전체의 축소판이라고도 합니다. 심판과 구원을 대비시키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이사야서에 특히 사무엘서와 맥락을 같이하는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심판의 날에 모든 열방이 그리스도께 굴복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사야 2: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사야 2: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이사야 2: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이러한 표현들이야말로 ‘한나의 찬송’과 ‘마리아의 찬송’에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누가복음 1:52~53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한나와 마리아의 찬송이 성경 전체의 핵심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왕의 수업 21. 참고).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리라”는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모든 세력과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켜 승리하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과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는 자들은 반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고린도전서 15:22~27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어리석은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줄 왕임을 알면서도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의식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며 사무엘 앞에 엎드려 세상을 통치하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종말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신앙고백도 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구원 받았다는 간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왕이 되기를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대신 자신을 높이기 원합니다. 말은 해요.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양심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과 권세가 높아지면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이 왕 노릇 하려는 숨어있던 욕심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전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의 때에 사울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런 자들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킨다고 하거나 ‘행음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실수하고 자신을 높이는 죄를 저지를 때도 있기는 합니다. 다윗도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곧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먼저 굴복한 자는 종말에 영원히 높아질 것이요, 세상에서 먼저 자신을 높이는 자는 종말에 영원히 비참해 질 것입니다.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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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

본문: 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

 

창세기 마지막 장들에 나타나는 야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육신의 죽음’에 대한 상징적인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적 표징입니다.

 

곧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되었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6:3~6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은 이 개념을 개인 차원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옛사람, 즉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던 육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세례는 단순히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옛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전체 구조를 하나의 의식과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음으로(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 신자의 옛사람, 육신이 즉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λογίζομαι, 간주하다)

In the same way, count y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NIV]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과 그것을 실제 삶에서 계속 적용하는 ‘성화의 과정’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성화의 과정을, 환난을 겪으며 악을 경험했던 요셉의 생애를 통해 풀어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셉의 형들이 다시 요셉에게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그에 대한 요셉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야곱의 죽음, 장례식에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우리의 육신이 죽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훗날 총리가 된 요셉의 도움으로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을 때까지 애굽에서 17년을 살았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이처럼 ‘죽음’과 ‘생명’이 각각 17년이라는 동일한 시간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창세기 50:15~17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형들은 세상의 법칙과 상식선에서 살아오면서 아직 하나님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44~45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A good man brings good things out of the good stored up in his heart, and an evil man brings evil things out of the evil stored up in his heart. For the mouth speaks what the heart is full of. [NIV]

 

하나님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인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악을 쌓고 악을 내어놓습니다.

 

자신에게 악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또 인정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에게 당한 것이 있다면, 같은 것으로 되갚는 법칙을 추구합니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 사회적 형법과 민법에 해당하는 규정들은 인간의 악함을 전제로 하여, 악행에 대해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못하도록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게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사회법은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는 자연법이나 고대 함무라비 법전의 동해복수법(lex talionis)과 일정한 공통점을 갖습니다.

 

출애굽기 21:23~25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디모데전서 1:9~10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율법의 존재 의의는 악을 따르는 옛사람, 자연인의 죄악을 제한하고, 더 큰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는 영적인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여전히 자연인과 율법과 육신의 관점에 머물러 영적인 세계에 있는 요셉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이제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을 가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보여주는, 성령으로 사는 새사람의 법칙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12:17~21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스라엘 민족의 12 지파의 조상으로서 요셉의 형들은 이제 자연인에서 새사람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악’을 경험하고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요셉을 통해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출발점은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의 ‘악’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all the evil which we did unto him)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사람’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충격적인 계시를 경험하는 것이 ‘재난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24:3~8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the beginning of birth pains)이니라

 

우리 말 ‘재난의 시작’은 헬라어(ὠδίν, the pain of childbirth)로는 ‘해산의 고통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직면하고 정체를 깨닫게 되는 악의 경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해산의 고통에 비유한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마치 말세의 전쟁이 일어나듯, 기근, 지진, 전염병을 경험하듯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을 것입니다. 가족 문제, 경제 문제, 사업, 건강... 모든 일이 엉망이 되는 말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50:17b

...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Joseph wept)

 

이와 비슷한 신약의 구절을 기억합니까? 영어 성경에서 단어 수로는 가장 짧은 절이라고 합니다(헬라어는 3 단어: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요한복음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

 

요셉이 왜 울었나요? 형제들의 믿음 없음, 17년을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영적인 발전이 없음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장례식에서 왜 우셨습니까? 육신의 죽음에 절망하여 생명의 주인을 몰라보는 사람들의 영적인 무지에 슬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다시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 형들을 향하여 요셉은, 창세기에 나타난 선과 악의 의미를 결론짓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며 용서를 선언합니다.

 

창세기 50:18~21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다른 가족보다 앞서 환난과 심판의 과정을 거치는 말씀의 단련을 받았습니다.

 

시편 105:17~19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the word of the LORD tried him)

 

하나님의 말씀은 ‘두 날 가진 칼’입니다.

 

시편 149:4~6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a double-edged sword)이 있도다

 

에베소서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을 가지라

 

‘두 날 가진’, 혹은 ‘좌우에 날 선’은 헬라어로 δίστομος[distomos] ‘두 개의 입을 가진’이란 뜻입니다. 칼에 적용하여, ‘두 개의 가지(날)’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a sharp twoedged sword)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요한계시록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꿰뚫어 그 안의 악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 말씀을 거역하는 악을 심판하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나타냅니다.

 

성화의 관점에서는 ‘두 날 가진 칼’은 그 칼날이 다른 사람을 향할 수도 있고 자신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검은 먼저 다른 사람의 악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옛사람과 죄와 자기 의를 드러내고 베어내는 검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마태복음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베드로전서 4:17~19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말씀의 연단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악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과 자신을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에게 복수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복수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히브리서 10:30~31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된 사람은 모든 일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봅니다.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evil)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good)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디모데전서 2:1~6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For this is good and acceptable in the sight of God our Saviour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 위로로 같은 고난을 겪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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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The King’s Learning 20

 

“우리는 고난이 우리를 떠나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지혜를 얻어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을 참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8:14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지혜롭게 행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sakal(사칼)은 ‘지혜롭게 행하다’라는 뜻 외에 ‘깨닫다’, ‘숙고하다’, ‘주의하다’, ‘형통하다’ 등의 다른 의미로도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sakal (동사)

지혜롭게 하다(창 3:6), 지혜가 있다(신 32:29), 지혜 있는 자(단 12:3), 지혜로운 자(욥 22:2), 지혜(욥 34:35), 깨닫다(단 9:13), 깊이 생각하다(시 64:9), 주의하다(시 101:2), 유심히 보다(단 7:8), 이해하다[이해시키다](느 8:13), 여기다(잠 3:4), 생각하다[손을 어긋맞기다](창 48:14), 능숙하다[통달하다](대하 30:22), 형통하다(수 1:8, 왕상 2:3, 왕하 18:7),

잡다(屠殺)(레 4:24), 꾀(단 8:8).

 

sakal: to be prudent

Definition: consider, expert, instruct, prosper, deal prudently, give skillful, have good success, teach.

 

그러므로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그에 따라 주의 깊게 행동함으로써 일이 잘되는 결과를 얻었다’는 폭넓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는 그밖에 3번 더 ‘지혜’라는 단어가 다윗과 관계되어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18:5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무엘상 18:15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사무엘상 18:30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함에 따라 사울의 반응이 점점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5절에서 다윗이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일을 잘 처리해서 지혜롭게 행했을 때,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라고 합니다. 사울은 그를 자기의 부하로 만들기 위해 다윗을 인정하고 높은 직위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퍼뜨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가 전국을 넘어서 유행하자 사울은 엄청난 질투심을 느꼈고 다윗이 자신을 위해 연주를 할 때 첫 번째 창질을 합니다.

 

자신에게는 악신이 임했는데, 다윗에게는 성령이 임해서 그 능력으로 곡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 악신을 쫓자, 질투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다윗을 창으로 두 번 찌르기를 시도합니다.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미움과 분노의 마음이 다윗을 더 두려워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에게 천부장이라는 높은 직책을 줍니다. 천부장은 천 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높은 장군입니다.

 

다윗의 공로가 충분하니 천부장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 보여도 사실 사울에게는 다윗에게 크고 어려운 직임을 주어서 창피당하게 하려 했거나 적의 손을 빌려 죽게 만들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는 두 번째 다윗이 천부장의 직임을 지혜롭게 행했을 때, 사울은 15절에서 “그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범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린애 같은 젊은 장수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자신이 버림받은 사실을 분명히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에게 사위가 되는 조건을 걸며 블레셋의 손에 죽게 하는 계략을 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승리를 거두고 약속을 지킵니다.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사울은 더욱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게다가 계획과 다르게 딸까지 주었으니, 사울은 아예 ‘평생 원수’같이 여깁니다.

 

마지막으로 30절에서 다윗이 세 번째 지혜롭게 행했다고 합니다. 블레셋 방백이 나올 때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은 블레셋의 고위 귀족들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할 때마다 다윗이 지혜롭게 작전을 펴서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로 19장 1절에서 사울은 아예 자신의 살의(殺意)를 모든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냅니다.

 

사무엘상 19: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자, 그러면 이 세 번에 걸친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한 일에 대한 공통된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사형통이었습니까? 인생 대박이었습니까? 전혀 반대입니다.

 

물론 계급은 올라가고 왕의 부마가 되었습니다. 많은 백성과 부하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죽을 뻔하고 계속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따라 살려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고난과 시험을 겪는 일이 신자들에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런 현상을 다른 말로 “불시험”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겪는 시험과 시련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십자가를 똑같이 졌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속에서 그 체험을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 된 신자들이 어떤 모양으로 그 과정을 겪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당연히 고난을 겪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운명이 하나님의 이름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며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사야 48:9~11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과 시련 중에 다윗이 미리 보여준 길을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시편 23편의 첫 구절은 다윗이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서 부른 노래가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 중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자신의 고난 중에 지혜롭게 행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함께하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려울 때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혜를 얻는 방법은 모든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지혜를 갖고 계시고 또한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야고보서 1:2~5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가 구하는 모든 지혜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다른 계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 자신에게 눈이 번쩍 뜨이도록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동안 많이 보고 들었으나 실제로 이 말씀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감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사실 우리가 늘 대하던 성경 말씀입니다. 이것이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도록 우리가 간절하게 만드십니다. 애가 타는 정도입니다. 많은 스트레스와 걱정 근심까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목숨이 경각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여 응답하시도록 영혼의 신경이 곤두섭니다. 영혼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집니다.

 

그때에야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칠 어떤 말씀 구절이나 묵상의 내용들’이 달라 보입니다. 말씀에 배고픈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셔서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것이지 사람이 자신을 그런 상태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받은 위로의 말씀과 감동이 하나님이 주신 응답입니다.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이큐를 갑자기 높여주시거나 해결방법이 뚝 떨어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말씀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응답이고 해결 방법입니다.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시편 119: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우리는 고난이 우리를 떠나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지혜를 얻어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을 참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것들, 욕심을 위하여 그것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나중에 사람의 중심이 변하는 때는 있습니다. 교만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복으로 헛짓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윗도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되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응답은 늦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 초기에는 거의 즉각 즉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가 대체로 80년대까지 기복신앙에 있었지요. 병 고쳐 달라고, 복 달라고 구하면 실제로 그렇게 응답이 되었습니다. 교회들도 크게 성장을 했지요.

 

어쩌면 한국 교회 전체와 개인 신앙의 변화 유형이 비슷하다고도 생각이 됩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이제 뭔가 달라졌다는 분위기를 느끼실 것입니다.

 

신자 개인의 신앙 경력이 쌓이면 하나님은 다른 수준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십니다. 그것이 결코 우리가 실력이 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의 실력은 언제나 도토리 키 재기이고, 단지 경험과 이해력이 달라졌습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 경력이 붙으면서 처음 믿을 때와 다르게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응답이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 이미 하나님은 응답하신 때도 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최고 수준의 다루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을 기다려야 했고,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가 70년 이상이 지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2천 년 넘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기다리며 더 간절하게 하고 그 동안 하나님이 이런 과정을 허락하신 진실한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게 하십니다. 아니면 더 큰 것을 구하게 하거나 다른 것을 구하게 하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방법으로 다루시며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이 지혜롭게 일을 처리할 때마다 오히려 고난이 따라 왔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으로 준비되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과 내적 갈등을 노래한 것이 시편입니다. 이 시편이 여러분의 시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유지할 수도 없고 믿음의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지혜 자체가 모든 기도의 응답입니다.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하신다는 것만큼 큰 위로와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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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단 강 건너편”

본문: 창세기 50:1~14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

 

.................................

 

창세기에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의외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 비해, 야곱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기록은 길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은 우리의 육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에 야곱의 후손들뿐 아니라 애굽 백성까지 슬퍼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울음에는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전도서 7:2~4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요셉이 갇힌 감옥에 들어 온 바로의 두 신하의 꿈 해석이 이루어진 날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40:13~15, 19~22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바로의 ‘생일 잔칫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 기쁜 날에 꿈 해석이 이루어졌으나 그 사건은 당사자에게서 기억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왜 하나님의 백성은 즐거움을 주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을 가까이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요한계시록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난, 환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란, 육신의 영적인 가난을 깨닫고 인정하는, 내가 무너지는 슬픔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이것을 절대 인정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말이 많아지는 때는 언제인가요? 주로 식당이나 술집에서 술을 마셨을 때 많이 발견합니다. 그 사람들의 말의 내용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잘났다!” “나는 안 죽었어!”라는 자기 증명입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기의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애통해합니다. 그리고 말이 사라집니다.

 

욥기 40:1~5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그러한 슬픔의 상태를 말합니다.

 

예레미야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요한계시록 18: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우리는 또한, 육신의 죽음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간혹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믿음이 연약하다는 의미로 ‘어린아이, 고아, 과부’라고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그들에게 몇 번 선한 권고를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리스도 안의 지체입니다.

 

마태복음 25:35~40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갈라디아서 6:1~2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언제나 장례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12~13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삽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세상의 대표자인 바로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허락받습니다.

 

창세기 50:4~6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야곱의 장례 행렬이 가나안 땅 동쪽의 요단 강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50:10~11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the threshingfloor of Atad)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아닷’은 가시나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요셉은 그곳의 타작마당에서 다시 7일간의 애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닷의 타작마당’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요단 강 간너편, 즉 요단 강 동쪽 강변의 농업지대일 것입니다.

 

타작마당은 성경에서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킬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세워졌습니다.

 

역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성경에서 야곱의 죽음과 장례가 분량으로는 제일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죽음과 장례보다 더 중요하게 기록된 인물은 누구일까요?

 

요한복음 19:30~42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육신의 ‘타작’(고난, 죽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전이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져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로마서 6:3~9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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