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후일에 당할 일

본문: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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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을 이루셨습니다.

 

이사야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세상의 역사와 신자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십니다.

 

전도서 3:1, 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in his time)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from the beginning to the end)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을 받고, 지혜를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엘 2:28~32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러한 방대한 말씀들이 창세기의 야곱의 12 아들에 대한 예언에서 짧게, 짧게 파편적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49:1~2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in the last days)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예언한 말씀은 신약 시대의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

그들에게(unto them)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들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신약 시대 교회의 여러 모습을 상징합니다.

 

갈라디아서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upon the Israel of God)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창세기의 야곱의 12 아들들과 요한계시록 2, 3장에 나타나는 일곱교회처럼, 모든 교회와 신자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죄를 짓거나 실수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믿은 교회와 신자들은 새예루살렘을 약속받습니다.

 

오늘은 요셉과 그 자손에 대한 야곱의 예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 가장 유명한 아들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첫아들입니다. 라헬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끝에 요셉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30:22~24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יוֹסֵף, Jehovah has added)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라헬은 아들을 더 낳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요셉(하나님이 더하신다)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라헬이 다른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요셉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과 복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에 대한 예언은 상징적인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예언은, 이미 앞서 기록된 요셉의 일생을, 야곱의 12 아들의 하나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삶을 요약하는 기능을 합니다.

 

창세기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בֵּן, a son)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בֵּן, a son)라 그 가지(בָּנ֕וֹת ,daughters)가 담을 넘었도다

 

싱반절의 가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들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강조하는 하반절의 가지는 딸들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동사 단어 בָּנָה [banah](obtain children)에서 유래했으며, 이 단어의 복수 명사는 자녀, 자손들입니다.

 

시편 127:3~5

[3] 보라, 자녀(בָּנִ֑ים ,children; בֵּן pl.)는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즉 요셉의 가지가 무성하다는 야곱의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을 예언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5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셉의 무성한 가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 교회가 세상에 점점 퍼져나가는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7~8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교회와 신자들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환난을 경험합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신자의 사명입니다.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we must through much tribulation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하고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to suffer for him)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2:12

참으면(if we endure)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베드로전서 4:12~14, 17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you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For the time is come that judgment must begin at the house of God)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이 심판을 거친 교회와 신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합니다.

 

요한계시록 20:4~6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in the first resurrection)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셉은 자신의 일생에서 우리가 말세에 겪는 고난을 보여주었습니다.

 

창세기 49:23~24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형들로 말미암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시편의 다윗의 고백은 그러한 경험을 말합니다.

 

시편 64:3~4

[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화살의 표적이 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같이 살게 된 형들로부터 끝까지 오해받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24절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라는 말씀처럼 요셉은 끝까지 인내하며 진리에 굳게 섰습니다.

 

창세기 49: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해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모세는 요셉 지파(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신명기 33:13~17

[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모세도 야곱의 예언처럼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더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의 144천 명에는 에브라임, 므낫세가 같이 요셉 지파로 기록됩니다.

 

요한계시록 7: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The King’s Learning 18

 

사무엘상 18:1~30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18]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19]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0]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21]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22]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24]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니

[25]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26]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에게 아뢰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결혼할 날이 차기 전에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30]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영감 있는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다. 내가 가진 영성의 그릇이 작으면 설교에서 얻을 것도 적고, 내 영성의 그릇이 커진다면 얻을 것도 클 것이다.

 

 

사람이 사탄이나 마귀 때문에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개인의 죄와 욕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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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 Learning 18

사울과 요나단

사무엘상 18:1~30

 

 

오늘의 본문 내용은 매우 극과 극입니다. 마치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과 미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사랑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와서 사울과 만났을 때 그들의 대화를 요나단이 옆에서 들었던 모양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같은 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신앙과 행동은 사실 요나단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단지 요나단은 사울의 질투로 인해 오랫동안 아버지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만나고 나서 요나단은 자신의 신앙과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에게서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8: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כְּנַפְשֽׁוֹ =as his own soul)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생명이란 말은 히브리어의 nepesh, ‘영혼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영혼처럼(as his own soul)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나이 차이가 20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우정을 또래 사리에 있는 친구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와 세대 차이를 넘어

 

여러분이 외국(서구)에 나가면 당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상하, 수직관계가 아니라 좌우, 수평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직분이 높다고 인간적인 수직관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은 사람을 호칭할 때 대개 이름 다음에 그 사람의 직분을 붙이고 자를 덧붙입니다. 아니면 이름은 빼고 직분에 자만 붙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끼리 영어로 말할 때 많이 어색해지고 불편해집니다. 한국어로는 존칭이 들어가는데 영어는 없거든요. 한국어로는 선생님”, “목사님인데 영어로 하면, “”, 아니면 그냥 이름입니다. 영어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이름으로 불러줘야 인간미가 있는 가까운 사이라는 의미입니다. 직분을 부르는 때도 있지만, 경찰관을 “Officer”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 낯선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합니다. 직분으로 부르면 너와 나는 거리가 먼 사이다라고 미리 선을 긋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외국어에는 경칭은 있어도 한국어처럼 존댓말이 발달한 언어가 없습니다. 일본어에도 한국어처럼 존댓말 어미가 있다고 하는데 한국어처럼 심하지는 않습니다.

 

현대 한국 문화에는 나이 차이를 넘어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친구란 나이가 같거나 차이가 있더라도 몇 살 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유명한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도 다섯 살 차이가 있었지만, 과거장에서 서로 만난 후 평생지기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장난꾸러기 어린 시절의 일화들은 속설이고 실화가 아닙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다섯 살 정도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특히 현대의 한국에서는 동년배 아니면 친구가 될 수 없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겉은 왕자와 신하 사이의 기사도 같은 관계에, 그 속은 동일한 종류의 신앙으로 어울려진 믿음의 선후배와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언약을 맺는데, 아마 처음에는 단순히 우정을 변치 말자는 짤막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훗날 매우 중요한 의미와 결과를 낳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가려 할 때 이 언약이 두 번째 구체적으로 세워집니다.

 

사무엘상 20:16~17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사무엘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 이 우정과 언약으로 인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보호하고 보살피게 됩니다.

 

사무엘하 9: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무엘하 9:6~7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 후 사무엘하 2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연속 3년 기근이 들었을 때 그 원인이 과거 사울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무고하게 피 흘리게 한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브온 주민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내주어 죽이게 합니다. 이때 사울의 다른 일곱 자손들은 다 죽지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이 보호해 줍니다.

 

사무엘하 21:1~7

[1]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2]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3]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4]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5]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결국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언약은 요나단의 후손이 살아남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사무엘상 18장의 다윗과 요나단이 처음 만난 장면으로 돌아오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우정의 표시로 몇 가지를 선물합니다. 겉옷, 군복, , 활입니다. 아마도 요나단이 갖고 있거나 걸치고 있던 대부분의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신이 늘 사용하던 물건을 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위해 특별한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옷이 피가 묻힌 채 돌아왔을 때 요셉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요셉의 채색옷은 요셉 자신을 상징하고 야곱의 애정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창세기 37:23, 32~33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또한 바로 다음 장인 38장에서는,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속아서 자신의 약조물을 줍니다. 유다의 도장과 끈 그리고 그의 지팡이는 유다의 인격이 담긴 약속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8:17~18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아론이 죽었을 때 그 뒤를 잇는 엘르아살에게 아론의 옷을 입힙니다. 아론의 옷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 및 그 권위를 의미합니다.

 

민수기 20:23~28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르시되

[24]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25]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선지자 엘리야가 제자가 될 엘리사를 부를 때 겉옷을 던져 부릅니다. 그의 겉옷은 자신의 선지자적 권위를 상징합니다.

 

열왕기상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훗날 엘리야가 불병거로 하늘에 올라갈 때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받고 엘리야의 뒤를 잇게 됩니다.

 

열왕기하 2:13~14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그러므로 요나단이 다윗에게 선물을 주는 이 행동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미래까지 넘겨주는 상징적인 일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요나단은 다윗이 기름 부음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대신해서 왕이 될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것을 심정적으로, 영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을 때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슬픔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사무엘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이런 두 사람의 언약과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 그리고 신자들 사이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마태복음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요한일서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 미움

 

사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에게 군대의 장()이라는, 장군을 의미하는 직책을 줍니다(over the men of war). 그런데 그 전투에서 돌아오는 환영식에서 백성들이 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무엘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 말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 단위로 셀 수 있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 단위로 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속 좁은 사울은 이 노래를 듣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점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죽이려는 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윗은 백성들로부터 더 신망을 얻게 되어 사울은 다윗을 원수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 갈 것을 심정적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단창을 던지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을 광야를 쫓아다닌 것은 그 후 약 천년 후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시도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사울이 다윗에게 몇 번 단창을 던졌습니까? ‘두 번입니다.

 

사무엘상 18: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무엘상 19: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그런데 사울이 창을 던질 때 그가 과연 악령에 사로잡혀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해의 의도가 없었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18: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he prophesied)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분명히 10절에는 악신이 사울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떠들어대다’(개역한글: 야료惹鬧하다)라는 말은 원래 예언하다(נָבָא)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여기에서는 마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예언하듯이 사울이 발광(發狂)했다는 말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질투와 미움 때문입니다. 자신의 왕권에 대한 욕심 사나운 집착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과 자리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왕위를 유지하고 누리겠다는 욕심이 그에게 악신이 내리게 한 원인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등장하자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강도가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인간 영혼의 가장 약한 점을 파고듭니다. 고린도후서에는 사람이 누군가를 용서 못 했을 때 오히려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2:10~11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람이 사탄이나 마귀 때문에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개인의 죄와 욕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21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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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l’s Advocate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 1997)라는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 제목인 Devil’s advocate은 원래 라틴어 ‘advocatus diaboli’(악마의 옹호자)에서 나온 관용어인데 사사건건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카톨릭에서 누군가를 성인으로 추대(시성, canonization)할 때 그 사람의 업적과 순교가 과연 성인의 지위에 합당한지를 판단하기 위해, 성인의 반대편에서 그를 논박하는 역할을 맡은 성직자를 악마의 옹호자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의 쓰임새가 확대되어, 어느 한 집단에 있어서 고의적으로 그 집단이 하는 주장의 반대편에 서서 검증 또는 반론을 제기 등 악역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내용으로 보면, 오히려 악마의 변호사라는 번역이 잘 어울립니다.

 

이 영화는 영화 자체보다 알 파치노의 명연기로 유명합니다. 알 파치노라는 명배우가 법률회사 대표의 모습을 한 악마로 나오는데 악마도 감탄할 만하게 악마 연기를 잘합니다.

 

지방에서 승승장구하던 케빈이라는 젊고 능력 있고 야심에 찬 변호사(키아누 리브스)가 뉴욕의 거대 법률회사에 들어갑니다. 그 법률회사의 대표인 존 밀튼(알 파치노)은 악마, 즉 사탄입니다. 케빈은 밀튼의 도움으로 더욱 성공적인 변호사가 됩니다. 그런데 케빈이 어떤 살인사건을 맡게 되면서 밀튼이 악마인 것을 알아채게 됩니다. 악마는 케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골적으로 설득을 합니다.

 

바로 그 장면의 대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Devil’s Advocate

Al Pacino’s famous speech – as the devil – in the Devil’s Advocate (1997). Al Pacino plays John Milton aka the devil. In this scene he tries to convince Kevin Lomax (Keanu Reeves) to join his side.

 

MILTON: Who are you carrying all those bricks for anyway?

누굴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거야?

 

God?

하나님?

 

Is that it?

그런 거야?

 

God?

하나님이야?

 

Why I’ll tell you...

말해줄까?

 

...let me give you a little inside information about God.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겠어.

 

God likes to watch.

하나님은 지켜보기를 좋아해.

 

He’s a prankster.

장난꾸러기지.

 

Think about it.

생각해 보라고.

 

He gives man... instincts.

그는 인간에게 본능을 줬어.

 

He gives you this extraordinary gift, and then what does He do?

이 놀라운 선물을 주고선 뭘 하는지 알아?

 

I swear, for his own amusement...

장담하건대 말이야, 자신의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

 

...his own private, cosmic...gag reel...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우주적인, 우스꽝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He sets the rules in opposition.

말도 안 되는 상반되는 규칙들을 세워놓고선

 

It’s the goof of all time.

지금까지 빈둥빈둥 구경만 해 온 거야.

 

Look, but don’t touch.

보기만 해. 그러나 만지진 말아.

 

Touch, but don’t taste.

만져는 봐. 그러나 맛보진 말라고.

 

Taste, but don’t swallow.

맛을 느껴봐. 그러나 삼키지는 마.

 

And while you’re jumping from one foot to the next, what is He doing?

그리고 네가 허둥지둥할 때 그는 뭘 하는지 알아?

 

He’s laughing his sick, fucking ass off!

배꼽 빠지도록 웃고 있지.

 

He’s a tight ass!

못된 작자지.

 

He’s a sadist!

새디스트야.

 

He’s an absentee landlord!

무책임한 방관자라고.

 

Worship that? Never!

그런 자를 숭배한다고? 네버!

 

KEVIN: “Better to reign in Hell than serve in Heaven,” is that it?

천국에서 모시느니 지옥에서 군림한다, 이거군요.

 

MILTON: Why not?

그게 어때서?

 

I’m here on the ground with my nose in it since the whole thing began!

태초부터 난 땅바닥에 코를 박고 살아왔어.

 

I’ve nurtured every sensation man has been inspired to have!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감각에 나도 단련돼 있지.

 

I cared about what he wanted and I never judged him!

인간의 욕구를 존중했고 비판한 적이 없었어!

 

Why? Because I never rejected him, in spite of all his imperfections!

왜냐고? 인간이 불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요구를 거절한 적도 없었지.

 

I’m a fan of man!

나는 인간의 팬이기 때문이야.

 

…I’m a humanist.

나는 휴머니스트라고.

 

Maybe the last humanist.

최후의 휴머니스트라고 하는 게 맞겠지.

 

Who, in their right mind...

사람들이 생각 좀 한다면….

 

...Kevin, could possibly deny...

부인할 자가 있을까?

 

...that the twentieth century was entirely mine?

20세기가 완전하게 나의 시대였다는 것을.

 

All of it, Kevin!

몽땅 다, 케빈.

 

All of it.

몽땅 다.

 

Mine.

내가 해낸 거야.

 

I’m peaking, Kevin.

내 시대가 열린 거야, 케빈.

 

It’s my time now.

이제는 내 때고,

 

It’s our time.

바로 우리의 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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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게 핑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질 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상 18:11a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귀신 들린 자는, 거라사의 광인처럼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귀신으로 인식합니다(5:9.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자신의 의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울은 자신의 의지로 다윗을 죽이려 했다고 합니다. 악신이 아니라 사울 자신입니다.

 

훗날에는 오히려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서는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 찾아온 사울을 오히려 두 번이나 살려주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사울은 첫 번째 단창 던지기에 실패한 후,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줄 알고 다윗을 처리할 계략을 생각합니다. 사울은 블레셋인 백 명을 죽이면 부마로 삼겠다고 합니다. 이미 다윗이 부마가 되는 조건은 골리앗을 죽임으로 이루어졌는데도 사울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사울의 계략으로는 다윗이 혼자 블레셋인 백 명을 죽이려면 다윗도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윗은 그 두 배의 것을 갖다 바칩니다.

 

교회에서도 다윗과 요나단 같은 성도들의 사랑이 있는 대신, ‘사울의 것 같은 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은지 경쟁하기도 했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고린도교회에서도 심한 분쟁과 분열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원인은 질투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왕국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마음 때문입니다. 말로는 모두 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이야기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속과 정신은 말과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지식이 없어서, 몰라서 교회가 다투고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임 목사가 부교역자에게 설교를 자주 시키지 못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많은 이유는 담임 목사의 질투 혹은 부교역자의 설익은 부족함 때문입니다. 질투가 생기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격에 별 상관이 없습니다. 질투심을 이겨내는 사람은 자아가 완전히 깨지거나 자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부교역자를 세워 일을 시키기는 하지만 만일 부교역자가 담임 목사보다 더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그때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각 담임 목사는 그 부교역자의 설교를 줄이거나 아예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질투라고는 자신도 설명이 안 되는 게 질투입니다. ‘창던지기를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실력은 있지만 설익은 부교역자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성도들이, 그것도 꽤 힘 있는 장로나 안수집사들이 몰려와서 나가서 개척하시지요.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라는 말에 쉽게 유혹받습니다. 본인은 그런 말 듣고 겉으로는 개척한다고 40일 금식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에서 흔들린다면 신령함을 가장한 위선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개척이라고 하는데 담임 목사의 눈에는 배신이 되는 일을 합니다. 서로 을 던진 겁니다.

 

창과 창이 왔다 갔다 하면? ‘전쟁입니다. 이런 일을 현명하게 잘 처리하고 대처하는 담임 목사나 부교역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교회 분열의 원인이 실은 재산 싸움이나 정치 싸움인데, 그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유를 담임 목사의 설교로 듭니다. 자신들의 세속적이고 더러운 욕심을 신령한 문제인 것으로 포장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울의 블레셋 양피 요구에 숨어있는 계략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를 대할 때 한 가지 당황스러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일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공포되는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자신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심정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것을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으로, 영혼으로 확신했기에 다윗과 후손의 운명을 거는 약속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도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줄 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 자신의 경험과 판단력은 다윗이 왕권을 위협할 자라고 속삭였습니다. 즉 스스로 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고, 이미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 받았음을 애써서 증명하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는 적이나 아군이나 본능적으로 깨닫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기 전까지의 약 10년 이상의 다윗의 생애는 다윗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이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받아들이는 때를 기다린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이 왕 될 것을 미리 보았고 사울도 알아차렸습니다.

 

사무엘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다윗에게 대한 태도는 영 반대입니다. ‘사랑과 미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이 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고 개인적인 신앙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요나단이 될 수 있고 사울이 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있습니다. 요나단과 사울은 그리스도를 대하는 두 종류 신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요나단은 그리스도를 교회와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섬기기를 원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이 교회와 자신의 모든 소유의 왕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요나단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고, 사울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가는 원수로 여깁니다.

 

겉으로는 사울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영적인 능력(예언)을 행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역사하셨던 증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룬 것으로, 자신이 영원히 누릴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며 진리를 향하여 창을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교회의 왕으로 진실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울같이 불에서 다 태워, 남은 것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의 대열에 설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요나단이 자신의 상징물들을 다윗에게 주고 미래를 다윗에게 부탁했듯이 참된 신자들은 신앙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요나단의 사랑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 영원한 영광의 구원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디모데후서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修業

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제목: 후일에 당할 일

본문: 창세기 49:1~4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

 

=====

창세기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בְּאַחֲרִ֥ית, in last)일에(the days)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אַחֲרִית ['achă̂yth] 는 예언적 미래(prophetic for future time), 마지막 부분, , 결말, 마지막 때를 말합니다.

 

49장은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자기 아들들에게 예언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야곱의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에서 말세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후일에와 같은 단어가 다른 구절에서 이렇게 사용됩니다.

 

이사야 2:2

(בְּאַחֲרִ֣ית, in latter)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도행전 2:17~21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ν τας σχάταις μέραις, in the last days)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본문은 요엘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요엘 2:28~31

[28] 후에(אַחַר, afterward)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영을 육체에 부어 준다는 말은 흔히 오순절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령 체험과 은사를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으며 새로운 하나님의 집(성령의 전)이 세워질 것을 말합니다. 그때가 마지막 날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7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하나님이 지으시는 집이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7:21~27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말세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고난)은 고통스럽습니다.

 

디모데후서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ν σχάταις μέραις, in the last days)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그 말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의 모든 신약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이 모든 날 마지막을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in these last days)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래서 그때가 가까이 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4:33~35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야곱의 열두 아들에 대한 예언은 현재를 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인 그림입니다.

 

르우벤(רְאוּבֵן, behold a son)

 

르우벤의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다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이 아내 레아에게서 낳은 첫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동생인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는 외삼촌 라반에 속아 혼인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레아에게서 첫 번째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

 

창세기 29:31~32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르우벤은 첫 사람, 육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고린도전서 15:45~49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a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이 되니라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마태복음 3:17

[δού(보라)]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3:22~23, 38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You are my Son, whom I love)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son of God)

 

야곱은 르우벤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창세기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르우벤은 야곱의 첫아들의 권력을 가졌습니다.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게 죽을 뻔했을 때 요셉을 구해준 것도 르우벤이었습니다.

 

창세기 37:20~22

[20] ,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하지만 르우벤이 자리에 없는 사이에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창세기 37:28~30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르우벤은 맏아들로서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팔려 간 사실로 인하여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애굽에서 총리대신인 요셉을 몰라보고 있을 때, 그동안의 양심적 고통이 있었음을 털어놓습니다.

 

창세기 42:21~22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또한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이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책임지고 데려오겠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르우벤이 비록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해 요셉과 베냐민을 보호하겠다고 말했지만, 르우벤이 실제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르우벤은 우리의 육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보호조차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능력에 불과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간의 본성은 안전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이 아니라 악인에게 임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한 사람에게 고난의 화살을 쏘십니다.

 

욥기 6:1~4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요한계시록 6:1~2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르우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힘의 시작, 첫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를 죽이셨다는 영적 의미는 우리의 육신의 첫아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the beginning

[רֵאשִׁית] of my strength)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시편 78: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the chief

[רֵאשִׁית] of their strength)을 치셨으나

 

시편 105:36

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the chief of all their strength[רֵאשִׁית])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도다

 

욥기 49:1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רֵאשִׁית, the chief)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디모데전서 1:15

... 죄인 중에 내가 괴수(πρτος, first, chief)니라

 

우리의 육신 르우벤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해 보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대적하는 자, 자기를 하나님으로 높이는 자, 불법한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세의 고난을 통해 그런 높아진 것들을 폐하게 만드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4~8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shall destroy)

 

야곱은 자신의 첫아들 르우벤의 불안정성과 한계를 알아보았습니다.

 

창세기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Unstable as water)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은 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르우벤의 최대 약점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이러한 일로 인하여 르우벤은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장자권은 요셉과 그 후손에게 돌아갔습니다.

 

역대상 5:1~1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우리의 육신은 세상의 첩에 빠져버립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력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어 보이고 당연해 보일 때 빌하와 동침하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논리는 마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모세가 권력을 독차지했다는 시기심입니다.

 

민수기 16:1~3

[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들이 르우벤 자손이었습니다. 르우벤의 본성이 여전히 육신의 힘, 월등함, 탁월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육신, 옛사람의 본성은 우리 안에도, 교회 안에도 여전히 살아있으며, 힘을 추구합니다.

 

르우벤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갓, 므낫세 반지파와 함께 요단강 동편에 정착지를 정했습니다.

 

민수기 32:1~7

[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신약성경은 그것을 음녀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7:1~5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비록 르우벤이 우리의 육신을 상징하고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잘못들을 저질렀으나, 그 자신(르우벤)을 통해 참된 아들이 누구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거듭난 르우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에 참여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7: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한계시록 21:10~12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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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The King’s Learning 17 

 

 

사무엘상 17:55~58

[55]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이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56] 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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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금으로 변화시키시는 연금술사

He seeks no second site on which to build,

But on the old foundation, stone by stone,

Cementing sad experience with grace,

Fashions a strong temple of His own.

그분은 두 번째 건축 현장을 찾지 않으시네

그저 옛 기초 위에, 돌을 하나씩 올리실 뿐.

은혜와 함께 슬픈 경험을 반죽하여 굳히시고

그분 자신의 튼튼한 성전을 건축하시네.

- Patricia Mary St. John (1919~1993), The Alchemist

 

다윗이 이스라엘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음악가 즉 선지자와 용사로서의 모습입니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사무엘서를 기록한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이 세상에 알려지는 모습이 마치 두 번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기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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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 Learning 17

다윗과 골리앗

 

아름다운은 영어로? - beautiful

티 없이 아름다운은 영어로? - beau iful

 

(누군가)의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이 갑자기 펭귄 그림으로 바뀌었습니다.

펭귄 문제 틀리면 3일간 펭귄 프사로 살아야 합니다. 정답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정답은 문제 안에 있다.”

It is not the answer that enlightens, but the question.

외젠 이오네스크(1904~1994, 루마니아계 프랑스 문학가, Eugène Io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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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서의 그 전체 내용은 쉽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유명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읽다 보면 우리를 종종 당황스럽게 할 만한 부분들(문제점으로 보이는)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무엘서를 읽다가 , 왜 이렇게 기록돼 있지?”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무엘서에는 잘못된 기록이 있다라고 지적하고 성경은 거짓이고 사람이 편집한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하거나 성경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에 이런 의심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어떤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고대의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은 알겠고, ‘예수님의 헌신적인 행위와 인격은 교훈적이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성경의 모든 구절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기록하신 살아있는 능력임을 압니다.

 

고린도전서 13:9~10

[9] 우리는 부분적으로(in part) 알고 부분적으로(in part) 예언하니

[10] 온전한(perfect)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in part) 하던 것이 폐하리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딤후 3:16).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의 감동과 깊이를 열어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단지 사람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오류나 문제처럼 보이는 부분은 정답을 찾기 바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도 결국 상을 얻지 못할 태도이지만, 다 깨닫지 못할지라도 구원에는 상관없습니다.

 

사무엘상의 특징

 

사무엘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왕국의 시작이나 다윗의 이야기를 기록한 성경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사무엘상에는 많은 복선(Subplot, MacGuffin과 다름)상징(Symbol)영적인 비밀(Secret)이 담겨 있습니다. 캐낼수록 보석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맥과 같습니다.

 

어떤 학자는 사무엘서가 이스라엘 역사 사건과 개인의 일생들에 대한 이중적 기록이 특징인 책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무엘서를 그저 신학적인 관점에서만 살펴보고 문제점은 찾았으나 정답은 찾지 못한 경우입니다.

 

성경에 대한 문제의 정답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The answer to the question about the Bible is in the Bible.

 

왕의 수업이 사무엘서를 보는 관점은 이렇습니다. 사무엘서에는 둘 혹은 2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번 반복되는 사건들과 예언들이 강조하는 것은, 심판과 구원, 거듭남(중생), 세상과 하나님 나라 등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그 관점에서 다윗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라고 상상해 보면 흥분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신자들에게 어떤 조명하심이 있을까를 주제로 삼고 고민할 때마다 하나님의 지혜 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두 번째 큰 고개를 넘어가게 됩니다. 다윗의 공식적인 등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심지어 기독교를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성경의 오류를 집어내는 구절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느 반기독교 사이트에는 이 구절부터 나오더군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inspired)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는 문서설’(documentary theory)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무엘서를 이루고 있는 기본 자료가 적어도 두 개 혹은 세 개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 말로는, 다윗 이야기에는 다른 모든 전설처럼(춘향전 버전 120, 아더왕의 전설 등) 여러 버전(version)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고지식한 성경 편집자들이 그것을 제대로 편집하지 않고 내려오는 전승(傳乘, tradition)을 그대로 삽입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특히, 사무엘서에는 한 장면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10장에서 사울이 왕으로 임명될 때,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 받는 장면이 있고, 또 미스바에서 제비 뽑아서 사울을 세우는 장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골리앗을 죽이는 내용도 두 번 나온다고 합니다. (‘왕의 수업 16’ 참고)

 

* 원래의 의미:

 

삼상 17:50 “다윗이 블레셋 사람(골리앗)을 죽였다

 

삼하 21:19 “엘하난이 ... 골리앗을 죽였다[HEBREW]

And there was again a battle in Gob with the Philistines, where Elhanan the son of Jaareoregim, a Bethlehemite, slew [the brother of] Goliath the Gittite, the staff of whose spear [was] like a weaver's beam. [KJV]

 

대상 20:5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

 

* 잘못된 번역으로 오해되는 구절:

 

삼하 21:19 “엘하난은 ...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을 죽였다

 

 

심지어 그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다. 엘하난이 죽인 것을 다윗을 영웅 만들기 위해 편집한 흔적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러한 그들의 주장도 성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선입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골리앗 문제는 지난 시간에 다루었기 때문에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엘리의 아들들의 타락에 대한 기록(2:12~1722~25)이 중복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훗날 솔로몬이 왕이 되면서 엘리의 자손인 아비아달이 물러나고 사독이 대제사장이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무엘서 2:22 이하의 엘리의 아들들의 죄악과 심판의 내용을 추가했다고 주장합니다(왕의 수업 02 참고).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사무엘상 211절에서 26절까지의 사무엘과 엘리의 두 아들들의 비교, 그리고 17절에서 마지막 36절까지의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에 나타난 구별과 동일시의 병행(Parallelism or Chiasm of Distinction and Identification)’(왕의 수업 02 참고)이라고 했습니다.

 

2번 반복하는 목적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엘리의 아들들의 죄와 사무엘의 모습을 병행 혹은 교차적으로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로 기독교가 작정하고 사기를 치는 종교라면 다른 종교들처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성경 본문에 오류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의 시간 동안 성경을 다듬고 조작했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많은 성경 사본이 존재하고 그 사본들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성경의 오류를 증명하는 자료/문서비평’(Source Criticism),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해하게 하는 책입니다. 넘어지게 하는 책입니다(4:17).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신 성령의 깨우쳐주심이 없이는 전혀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생깁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 지식인들이 성경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성경을 그대로 믿었습니까? 그들은 지금 기독교를 반대하는 왜곡된 선입견에 빠진 지식인들보다 성경을 더욱 고민하고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공식적인 등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의문이 생겼습니까? “,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라고 솔직하게 양심으로 부딪치며, 신앙으로 고민하며 읽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다면 바로 우리가 오늘 다루고자 하는 내용과 연결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사무엘상에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두 번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다윗의 첫 등장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부하로부터 다윗을 소개받고 다윗을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구절을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여전히 목동을 하게 하시는 중요한 구절로 보기도 했습니다.

 

David, God is with him

 

사무엘상 16:19

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who is with the sheep)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분명히 사울은 다윗이 누구인지 보고를 받았고 그래서 다윗을 어느 집 자식인지 알고 부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 다윗이 다시 고향에 돌아간 후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을 위해 음식을 가져다주는 과정에 골리앗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묻습니다.

 

사무엘상 17: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Whose son are you, young man?)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

 

사울이 다윗을 모르고 묻는 듯한 구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악신을 쫓아내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궁정에서 활동했는데도 기억을 못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사울의 병이 정신병에 가까운 현상이라 기억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때는 그가 궁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울이 진정된 후 다시 고향에 내려가 있는 상황입니다.

 

사무엘상 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그런데도 다윗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58절의 사울의 말은 이상해 보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누구인지 정말 몰랐을까요?

 

그래서 자유주의 학자들이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장면을 놓고 성경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들의 말로는 성경이 본래 여러 개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여호와 신앙에 어울릴만한 좋은 이야기들을 짜깁기했다라고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특히 다윗이 두 번 등장하는 사무엘상의 이야기가 좋은 재료가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사울 앞에 나온 다윗이 정말 누구인지 사울이 몰랐다면, 상식적으로 사울은 다윗을 만난 그 자리에서 네가 누구냐? 기특하구나?”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갑옷을 주는 때에 어깨를 툭툭 치거나 한 번 껴안으면서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어야죠. 그러나 사울은 그때 질문을 안 하고 다윗이 승리한 후에야 했습니다.

 

물론 다윗이 싸우러 나갈 때 군장 아브넬에게 그가 누구인지 질문을 하기는 했습니다(55).

 

왕으로서 일일이 백성들의 출신 집안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사울은 악령의 역사로 정신적인 능력에 어느 정도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사울은 다윗을 처음부터 모르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어느 집안 출신인지를 잊었거나 아니면 다시 확인해 보려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약속한 상을 골리앗을 죽인 용사의 집안에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승리하고 돌아온 이후에 사울이 질문한 이유는 바로 이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즉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람에게 사울이 주겠다고 약속한 상 때문입니다.

 

사울이 무슨 상을 약속했습니까?

 

사무엘상 17:25

...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개역개정]

 

...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make his father's house free in Israel) [개역한글]

 

첫 번째는 재물입니다. 두 번째는 부마로 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집안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용사의 집안’(his father’s house)과 관련된 문제는 세 번째입니다.

 

이 부분에서 개역한글판 성경이 원문대로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은 의미를 살려 의역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은 노예가 아닌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입니까? 국가 세금과 부역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런 것들이 면제받는다는 것은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의 집안을 확인한 것입니다. 물론 자유하게 한다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주로 노예 신분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 사용되지만, 이새의 집안이 노예가 아닌 이상 이것은 더 폭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울의 이 약속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왕과 백성 사이의 중간 계급 혹은 귀족 계급으로 올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Lemche, Ewald), (2) 세금 납부를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Fay), (3)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Smith) 등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견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중간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Mccarter), 그리고 두 번째의 견해는 자유하게 하시리라’(하파쉬)는 단어가 성경 용례상 세금의 면제를 전혀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21:2; 15:12; 34:10) 타당치 않다. 반면에 세 번째의 견해는 자유하게 하리라라는 단어가 대체적으로 육체적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우가릿 문서에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이 왕에 의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병행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Klein) 타당성이 있다. 한편 여기 아비의 집은 가문(家門) 전체를 가리킨다. [호크마주석]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등장이 두 번으로 보이고, 사울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다윗이 누구인지 질문한 이유가 사울이 내건 상 -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 때문이라고 밝히는 결론뿐이라면 뭔가 부족합니다.

 

다윗이 마치 이스라엘에 두 번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래서 자칫 사람들이 오해하게 할 수 있게 만들지만, 그 속에는 훨씬 더 놀라운 것(Hidden wonderful thing)을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시와 그림자처럼 나타나도록 그의 역사를 주장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1.

 

사무엘상 16:18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 cunning in playing, and a mighty valiant man, and a man of war, and prudent in matters, and a comely person, and the LORD is with him [KJV]

 

이 구절은 사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자를 찾을 때 사울의 부하가 다윗을 추천하는 내용입니다.

 

이 추천자는 다윗의 고향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다윗을 묘사한 내용은 거의 예언적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고 다윗을 가장 잘 파악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을 묘사하는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다윗은 음악가라고 합니다. 둘째는 용사입니다. 이 두 가지 다윗의 모습 위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다윗을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묘사입니다.

 

사울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난 다윗은 그중에 첫 번째가 가장 들어맞는 부분입니다. 악기 연주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병기 든 자(용사, 기볼 하일)가 되었기 때문에 악사와 용사 두 가지캐릭터가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위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것은 그의 음악(찬양) 사역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부분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겉으로는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도 그가 가장 좋아한 일은 전투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고, 그가 평생에 가장 소망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함께 하신다는 상징인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2.

 

사무엘하 23장에 ‘37명의 다윗의 용사들이 소개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3:8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이 부분에서 평생을 위해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한 전쟁왕으로서의 다윗의 업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소개를 하기 전에 주의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앞 구절들입니다. 이 부분은 다윗의 인생의 마지막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무엘하 23:1~2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2절에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는 구절의 의미는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사무엘서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백성들이 다윗이 누구인지 모를까 봐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시는 중요한 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처음부터 자신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전쟁왕, 혹은 용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노래를 하는 목적은 찬양입니다. 그의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예언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시편입니다. 다윗이 가장 많은 시편의 저자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은 찬양과 예언의 성격이 있는 노래입니다. 그의 노래는 예언과 동일합니다. 즉 그는 선지자로서의 사명도 수행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음악가, 선지자와 용사로서의 모습입니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사무엘서를 기록한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이 세상에 알려지는 모습이 마치 두 번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기록한 것입니다.

 

신약의 사복음서가 각각 다른 관점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예수님이 네 명이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한 분을 다르게 약간씩 묘사하면서 더 완벽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는 그 사복음서의 다른 묘사 때문에 많이 넘어지고 오히려 불신앙의 핑계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 믿는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집니까?

 

예수 믿고 거듭나면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작은 문제입니다.

우리의 속이 변해야 하고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윗을 본받으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살아야 할 그 삶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시인이 되어 찬송합니다.

 

에베소서 1:3~6,12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의 표제어(제목)로 구분하자면, 다윗이 150편의 시편 중에 거의 절반 정도의 시편을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leDavid)라는 표제어가 모두 다윗이 저자라는 확실한 증거도 아니고, 다윗의 이름이 없어도 다윗의 시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이름이 없는 시편들도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는 시편조차도 다윗이 직접 편집했거나 다윗의 명령으로 훗날 솔로몬 시대의 악장들(헤만)이 정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전 찬양의 기틀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시편은 지혜문학의 하나입니다. 노래, 즉 찬양으로 만들어진 기도이고 예언서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의를 추구하는 사람(의인)의 인간적인 모든 경험을 망라하여 노래합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을 때 시인과 같은 경험을 내가 하고 있구나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시편을 읽고, 기도하고, 생각하면서 내가 읽는 다윗의 슬픔과 고통과 고독, 기쁨과 찬송이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나의 산 제사가 됩니다. 여러분의 찬송은 입술이 아니라 내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감사의 노래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진심에서 나온 찬송과 기도로 연약한 지체들에게는 예언이 되고 위로(살전 3:17)가 됩니다.

 

2. 영적인 전쟁에서 용사로서 싸워야 합니다.

 

에베소서 6:10~13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 구절은 말 그대로 여러분의 영적인 전쟁을 치루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쟁에는 지혜가 필요하고 성경은 그 지혜를 설명하는 네 권의 지혜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가 있습니다. 욥기는 드라마로, 시편은 노래로, 잠언과 전도서는 각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성도의 삶을 설명하는 지혜서입니다.

 

그중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시편은 찬양과 기도를 통해 다양하고 종합적인 영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잠언과 전도서는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언은 성도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거룩한 영적 전쟁에 초대하고 도전하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그런 전쟁에 돌입한 분들입니다. 전도서는 이미 도전한 성도들의 고달프고 혼란스러운 실제의 모습이 어떤지 비유와 상징을 통해 노래하는 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1:12). 그리고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딤후 2:3)로 여러분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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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가을 전령  

야화  김 영 배

낮에는 여전히
검은 머리 벗겨내어
거대한 사막을 만들려는 듯
강렬한 햇볕을 쏟아낸다

길이 있는데
어찌 덥다고
길을 가지 않으랴
느티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늘진 골목길 따라
숨을 껄떡거리며 지나왔다

어느 날 아침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았다
낯설었던 하늘
뭉게구름 꽃 활짝 피워놓고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이런 때도 있나?

무심결에 길을 간다
그저 더위만 피하고
그저 가시밭길만 피하고 싶었다
작은 소망 가슴에 남아있는데 
어찌 여기서 길을 멈추랴

가녀린 몸매에
머리도 곱게 단장하고
하늘하늘 살랑거리는 연분홍 치마에 색동저고리
걸음은 사뿐사뿐
얼굴은 천사의 미소

언제 찾아왔는가
더위에 지친 나를 찾아
새벽이슬에 고운 향기 날리며
날 찾아온다 하니

상큼한 가을바람아
어서 앞장서라
나 설레는 마음 안고
버선발로 반기리라

---


야화 시인의 <설레는 가을 전령>은 늦더위의 고단함을 이겨낸 후 마주한 가을의 문턱과, 그로 인해 피어나는 설렘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시를 읽으며 느껴지는 감상과 주요 특징을 정리해 드립니다.

1~2연: 늦더위의 고단함과 묵묵한 걸음. 강렬한 대비 

낮에는 여전히 대지를 사막으로 만들 것처럼 뜨거운 햇볕이 쏟아집니다. '검은 머리 벗겨내어'라는 표현에서 여름의 막바지 더위가 얼마나 맹렬한지 생생하게 다가옵니다.의연한 의지: 하지만 시인은 "길이 있는데 어찌 덥다고 길을 가지 않으랴"라며 삶의 여정을 묵묵히 이어갑니다. 느티나무 그늘과 골목길을 찾아 숨을 헐떡이며 걷는 모습은 우리네 지친 일상을 닮아 있어 깊은 공감을 자아냅니다.

3~4연: 무심코 마주한 변화의 징후. 반가운 하늘 

그저 더위와 가시밭길을 피하며 고단하게 걷던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변해 있습니다. 뭉게구름 꽃을 피우고 환하게 웃는 가을 하늘은 지친 시인에게 위로처럼 다가옵니다.  

5~6연: 가을 전령과의 설레는 만남. 코스모스의 의인화

가녀린 몸매, 연분홍 치마와 색동저고리, 사뿐사뿐한 걸음과 천사의 미소로 묘사된 존재는 단연 가을의 전령사인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새벽이슬을 머금고 고운 향기를 풍기며 찾아온 가을의 모습을 마치 그리던 정인을 만난 것처럼 아름답게 의인화했습니다.

7연가을을 맞이하는 벅찬 기쁨. 버선발의 환대 

늦더위에 지쳐 있던 시인은 마침내 불어오는 상큼한 가을바람을 향해 "어서 앞장서라"며 재촉합니다. 가을을 너무나도 기다려왔기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반기겠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벅차오르는 설렘이 그대로 전해집니다.힘겨운 계절을 버텨낸 끝에 찾아오는 가을의 시원함처럼, 이 시는 일상의 지친 마음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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