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The King’s Learning 19
사무엘상 18:20~30
[20]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21]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22]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24]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니
[25]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26]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에게 아뢰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결혼할 날이 차기 전에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30]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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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s Learning 19
두 종류의 사랑
사무엘상 18:20~30
다윗의 아내들은 아비가일, 밧세바를 비롯해 최소 8명 정도(삼하 3:2~5, 5:13) 되는데 첫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입니다. 원래 사울은 골리앗을 이긴 용사에게 상으로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약속대로 하지 않고 첫째 딸 메랍을 다윗을 죽일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상 18:17~19
[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18]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19]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울의 자녀들은 이렇습니다.
사무엘상 14: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그런데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18:20). 사울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다윗을 죽이는 계획을 세웠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다윗의 이름만 더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18장에 나왔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이을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고, 딸 미갈도 사랑하고, 온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고 사랑했습니다. 반대로 사울의 질투와 광기는 더 심해져 갑니다.
19장 1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의논)할 때에 보다 못한 요나단이 나서서 다윗을 보호해주고 변호해 줍니다. 먼저 요나단은 다윗을 은밀한 곳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이 큰 공로를 세웠고 무죄하다고 설득시킵니다.
요나단은 의를 위해서 혈연과 권세에 굽히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말 중에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4절)란 말이나,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5절)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악을 멀리합니다.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 세상에는 때로 의를 주장하기도 하다가도 혈연 때문에 혹은 자기 자리보전을 위해 악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변호했습니다.
요나단의 감동적인 말을 듣고 사울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합니다(6절). 그러나 곧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부하들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다윗과 결혼하여 부인이 된 사울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사울에게 악신이 임합니다. 수금을 연주하던 다윗에게 또 단창을 던집니다. 다윗은 자신의 집으로 일단 피합니다. 아마 다윗은 사울에게 임한 악신의 영향이 가라앉으면 되리라고 좀 쉽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울이 정신을 차리면 이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집에까지 부하들을 보냅니다. 이 상황을 본 미갈이 다윗을 창문으로 도망하게 합니다. 대신 드라빔이라는 집안 우상에 염소 털로 짠 것을 머리 부분에 씌우고 옷을 입혀 침대 속에 넣어서 마치 다윗이 아파서 누워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사울은 다시 부하들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라고 시킵니다. 침대를 들춰봤더니 미갈이 위장한 드라빔이 나타납니다. 이때는 이미 다윗이 성 밖으로 멀리 달아난 때여서 사울의 이번 시도도 실패합니다.
다윗 대신 침대에 들어간 드라빔은 옛날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훔쳐서 온 그런 종류의 우상입니다(창 31:19). 라헬이 가지고 나온 드라빔은 안장 밑에 숨길 정도로 작은 형태였지만(창 31:34) 크기가 다양해서 미갈이 갖고 있던 드라빔은 거의 사람 크기의 형태였습니다.
아람과 가나안 지방을 포함한 고대 중동에는 드라빔이라는 가정 수호신이 널리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신할미, 부엌신(조왕신)이나 마을 앞 장승, 성황당 신령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집마다 장식품으로 앉아 있는 제주도 돌하르방(우석목)도 있지 않습니까?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이 장승처럼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과 함께 병마를 쫓아내거나 아기를 낳게 하고 복을 비는 미신적인 기능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크기가 다양하여서 고대 가나안 지방의 드라빔과 그 성격이 딱 들어맞습니다. 돌하르방은 제주산 화산석으로 만들어졌고 드라빔은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가나안 지방의 우상 관습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에 섞여 들어와 사사기 17장에는 미가가 만든 신상 가운데 드라빔도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요시아왕의 개혁 때까지 이스라엘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아마도 사울의 가정에 있던 이런 드라빔이 다윗이 미갈과 결혼하면서 다윗의 집까지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당시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과 가나안의 미신 신앙이 섞여 있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그 우상이 아니라 요나단과 미갈의 다윗에 대한 사랑입니다. 19장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이 다윗을 각각 한 번씩 살리게 됩니다.
1. 요나단의 사랑
요나단은 직언으로 사울의 마음을 돌려서 다윗을 살리고, 미갈은 위기 상황에서 재치로 드라빔을 이용해 다윗을 살립니다.
우리는 요나단의 사랑에 대하여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사랑이 진실하였고 또 최선을 다한 사랑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요나단 개인의 최후는 아무 보답이나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는 지난 시간에 다루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켰으며 그 자손에게 그 약속 이상의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잘못된 왕의 아들로서 또 그의 신하로서 그런 왕과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나갈 때, 어쩔 수 없이 그 공동체와 속해있으면서도 의로운 길을 가기를 원하는 ‘남은 자’를 상징합니다.
구원이나 심판은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똑같이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한 사람인 왕의 잘못된 신앙과 결정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국민 전체가 전쟁, 기근에 희생이 되거나 혹은 비참한 포로가 되는 역사가 수다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구원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남은 자’를 기억하십니다.
‘남은 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개혁이나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합니다. 단지 그들이 공동체의 운명으로 불의한 지도자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그 공동체의 운명에 동참하면서 고난 받는 자들이 ‘남은 자’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어느 교회 안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남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을 상징하지, 그들의 신앙이나 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단지 그들은 은혜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의 약속처럼, 영원한 구원의 언약에 의해 그들과 그들의 영적 자손들을 기억하여 주실 것입니다.
2. 미갈의 사랑
그런데 문제는 미갈입니다. 미갈의 경우, 위급한 순간에 거짓말이 용납되느냐는 상황 윤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필 우상이 이용되었느냐는 문제도 다른 기회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요나단의 사랑’과 대조되는 ‘미갈의 사랑’의 성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여러 명의 아내들과 여러 번의 사랑을 할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만한 사랑이 없었다고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미갈도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이 위급했을 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훗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근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좀 건너뛰어서,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다윗이 아비가일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 남편 나발이 죽은 후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고, 또 다른 여인 아히노암이 다윗의 아내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후 다음 44절에 미갈이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은 다윗이 도망 다닐 때 미갈이 여전히 다윗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미갈을 다른 사람의 아내로 주고 마는 파렴치한 일을 저지릅니다.
사무엘상 25:44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그것은 미갈을 이용할 가치가 이제 없어졌다는 말이고, 더 이상 다윗이 자신의 집안이 연관이 없다는 공적인 선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인성까지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남편이 죽어야만 여자가 재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은 다윗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반드시 죽이겠다는 지독한 의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미갈 자신도 재가하는 중대한 문제를 스스로의 의지가 없이 아버지 사울의 결정에만 맡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갈이 다윗이 다른 여자들과 혼인했다는 소문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혼인관습에 아브라함, 야곱, 모세처럼 부인들이 여럿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갈이 재가한 것은 25:44에서도 보듯이 주어가 사울이라고 한 것처럼 사울의 의지가 가장 강했겠지만, 미갈의 동의도 전혀 없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되고 난 후 첫 아내인 미갈을 다시 찾아오려고 합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다른 아들 이스보셋을 세워서 다윗과 계속 전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의 문제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넘어오려고 합니다.
다윗은 그 약속의 증거로 미갈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3:12~16
[12]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3]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4]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15]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6]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아브넬이 어떤 방법으로 이스보셋을 설득했는지 이스보셋은 원래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현재의 남편 노릇을 하는 발디(엘)과 억지로 헤어지게 하고 다윗에게 돌려보냅니다. 사무엘상 25:44의 발디와 사무엘하 3:15의 발디엘은 같은 사람의 약간 다른 이름입니다.
3. 미갈의 심판
그 후 세월이 지나 다윗의 왕권이 안정되었을 때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성에 모셔 오게 됩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이스라엘의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 그 행렬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의 기질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미갈이 창밖으로 내다보았습니다. 그에 대한 미갈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사무엘하 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창문 밖으로 다윗을 구해 준 미갈이 나중에는 창문에서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를 소개하는 성경 구절이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딸’이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6:20~23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사울의 서슬에도 다윗을 살려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이 부분의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목사님들이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돌아오는 주일에 쓰는 본문이라고 추측을 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어떤 여자 권사님이나 집사님에게 기분이 나빠서 ‘때리는’ 설교라고들 하지요. 사실 그런 경우들이 없지 않아 있겠지요?
성경, 특히 구약에서는 여자가 자식이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것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미갈의 경우도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미갈은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빈정대고 무시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미갈이 그때까지 다윗을 사랑했다? 안 했다?’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연예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부의 사랑이 처음에는 떨림, 다음에는 울림, 그 사람 다음은 살림”이라고요. 어느 부부든지 사랑의 감정을 평생 유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자신들의 혼인 약속을 지키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는 과정이 결혼입니다.
오늘 미갈과 요나단의 사랑의 차이를 보려는 것이 남녀 사이의 사랑을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미갈의 가치관입니다.
미갈이 ‘사울의 딸’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로서 자신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재는 가치척도 그대로 다윗을 영웅이나 왕으로만 생각하고, 다윗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영적인 일에는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미갈의 말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왕이 그런 식의 체통을 잃은 행동을 할 수 있느냐?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창피한 짓을 하느냐?’는 내용입니다.
미갈이 사랑한 것은 이스라엘의 영웅이고, 권위와 권세 있는 왕의 이미지였기 때문입니다. 백마 탄 왕자를 바라보는 공주입니다.
미갈은 사람들의 평가와 가치 기준에 눈이 맞추어진 사람입니다. 남들의 평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왕이 춤추는 것을 보고 종들이 아마도 시시덕거렸을 것입니다.
미갈의 말처럼 왕이 거리에서 춤춘다는 것은 민망스럽고 가벼워 보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었고 하나님이 그를 지금까지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면 감정이 풍부한 낭만주의자요 하나님 중심주의자인 다윗이라는 한 인간의 행동이 이해되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자신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갈의 아비의 집, 즉 사울을 버리시고 자신을 높여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천하게 보일지라도 자신을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무엘서의 핵심 사상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는 높아지는 자요, 다른 하나는 낮아지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상을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찬송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고 브닌나에게서 심한 놀림과 수모를 받던 한나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찬송합니다.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 찬송의 내용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송에도 그대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2~53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이것이 사무엘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리라는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모든 세력과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켜 승리하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과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반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11 (눅 18:14, 마 23:12)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시편 59편은 다윗이 미갈의 도움으로 구출될 때를 기억하여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으로는 이것이 맞는지 배경인지 제목이 없다면 모를 정도입니다. 정작 공을 세운 미갈에 관한 이야기는 한 단어도 없습니다. 단지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고만 합니다.
시편 59
[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6] 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11]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셀라)
[14]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지키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삶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헌신으로 우리에게 남겨줍니다.
반면에 미갈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세상적인 기준으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그가 위험할 때 돕기는 했으나 의로운 도구로 사용되는 영광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윗의 찬양하는 행동을 무시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운명이 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에도 이와 같은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영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변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척해도 중심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성공과 명예, 자존심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배경, 인품이나 행동이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도 맞설 수 없는 다윗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산성이 되시고 그의 보호하심을 믿는 자들은 다윗과 같은 ‘왕의 수업’ 과정에 한 걸음 다가선 것입니다.
王의 修業
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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