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단 강 건너편”

본문: 창세기 50:1~14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

 

.................................

 

창세기에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의외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 비해, 야곱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기록은 길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은 우리의 육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에 야곱의 후손들뿐 아니라 애굽 백성까지 슬퍼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울음에는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전도서 7:2~4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요셉이 갇힌 감옥에 들어 온 바로의 두 신하의 꿈 해석이 이루어진 날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40:13~15, 19~22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바로의 ‘생일 잔칫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 기쁜 날에 꿈 해석이 이루어졌으나 그 사건은 당사자에게서 기억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왜 하나님의 백성은 즐거움을 주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을 가까이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요한계시록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난, 환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란, 육신의 영적인 가난을 깨닫고 인정하는, 내가 무너지는 슬픔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이것을 절대 인정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말이 많아지는 때는 언제인가요? 주로 식당이나 술집에서 술을 마셨을 때 많이 발견합니다. 그 사람들의 말의 내용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잘났다!” “나는 안 죽었어!”라는 자기 증명입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기의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애통해합니다. 그리고 말이 사라집니다.

 

욥기 40:1~5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그러한 슬픔의 상태를 말합니다.

 

예레미야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요한계시록 18: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우리는 또한, 육신의 죽음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간혹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믿음이 연약하다는 의미로 ‘어린아이, 고아, 과부’라고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그들에게 몇 번 선한 권고를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리스도 안의 지체입니다.

 

마태복음 25:35~40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갈라디아서 6:1~2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언제나 장례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12~13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삽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세상의 대표자인 바로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허락받습니다.

 

창세기 50:4~6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야곱의 장례 행렬이 가나안 땅 동쪽의 요단 강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50:10~11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the threshingfloor of Atad)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아닷’은 가시나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요셉은 그곳의 타작마당에서 다시 7일간의 애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닷의 타작마당’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요단 강 간너편, 즉 요단 강 동쪽 강변의 농업지대일 것입니다.

 

타작마당은 성경에서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킬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세워졌습니다.

 

역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성경에서 야곱의 죽음과 장례가 분량으로는 제일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죽음과 장례보다 더 중요하게 기록된 인물은 누구일까요?

 

요한복음 19:30~42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육신의 ‘타작’(고난, 죽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전이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져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로마서 6:3~9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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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The King’s Learning 19

 

사무엘상 18:20~30

[20]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21]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22]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24]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니

[25]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26]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에게 아뢰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결혼할 날이 차기 전에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30]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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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s Learning 19

 

두 종류의 사랑

사무엘상 18:20~30

 

 

다윗의 아내들은 아비가일, 밧세바를 비롯해 최소 8명 정도(삼하 3:2~5, 5:13) 되는데 첫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입니다. 원래 사울은 골리앗을 이긴 용사에게 상으로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약속대로 하지 않고 첫째 딸 메랍을 다윗을 죽일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상 18:17~19

[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18]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19]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울의 자녀들은 이렇습니다.

 

사무엘상 14: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그런데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18:20). 사울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다윗을 죽이는 계획을 세웠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다윗의 이름만 더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18장에 나왔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이을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고, 딸 미갈도 사랑하고, 온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고 사랑했습니다. 반대로 사울의 질투와 광기는 더 심해져 갑니다.

 

19장 1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의논)할 때에 보다 못한 요나단이 나서서 다윗을 보호해주고 변호해 줍니다. 먼저 요나단은 다윗을 은밀한 곳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이 큰 공로를 세웠고 무죄하다고 설득시킵니다.

 

요나단은 의를 위해서 혈연과 권세에 굽히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말 중에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4절)란 말이나,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5절)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악을 멀리합니다.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 세상에는 때로 의를 주장하기도 하다가도 혈연 때문에 혹은 자기 자리보전을 위해 악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변호했습니다.

 

요나단의 감동적인 말을 듣고 사울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합니다(6절). 그러나 곧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부하들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다윗과 결혼하여 부인이 된 사울의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사울에게 악신이 임합니다. 수금을 연주하던 다윗에게 또 단창을 던집니다. 다윗은 자신의 집으로 일단 피합니다. 아마 다윗은 사울에게 임한 악신의 영향이 가라앉으면 되리라고 좀 쉽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울이 정신을 차리면 이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집에까지 부하들을 보냅니다. 이 상황을 본 미갈이 다윗을 창문으로 도망하게 합니다. 대신 드라빔이라는 집안 우상에 염소 털로 짠 것을 머리 부분에 씌우고 옷을 입혀 침대 속에 넣어서 마치 다윗이 아파서 누워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사울은 다시 부하들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라고 시킵니다. 침대를 들춰봤더니 미갈이 위장한 드라빔이 나타납니다. 이때는 이미 다윗이 성 밖으로 멀리 달아난 때여서 사울의 이번 시도도 실패합니다.

 

다윗 대신 침대에 들어간 드라빔은 옛날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훔쳐서 온 그런 종류의 우상입니다(창 31:19). 라헬이 가지고 나온 드라빔은 안장 밑에 숨길 정도로 작은 형태였지만(창 31:34) 크기가 다양해서 미갈이 갖고 있던 드라빔은 거의 사람 크기의 형태였습니다.

 

아람과 가나안 지방을 포함한 고대 중동에는 드라빔이라는 가정 수호신이 널리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신할미, 부엌신(조왕신)이나 마을 앞 장승, 성황당 신령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집마다 장식품으로 앉아 있는 제주도 돌하르방(우석목)도 있지 않습니까?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이 장승처럼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과 함께 병마를 쫓아내거나 아기를 낳게 하고 복을 비는 미신적인 기능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크기가 다양하여서 고대 가나안 지방의 드라빔과 그 성격이 딱 들어맞습니다. 돌하르방은 제주산 화산석으로 만들어졌고 드라빔은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가나안 지방의 우상 관습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에 섞여 들어와 사사기 17장에는 미가가 만든 신상 가운데 드라빔도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요시아왕의 개혁 때까지 이스라엘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아마도 사울의 가정에 있던 이런 드라빔이 다윗이 미갈과 결혼하면서 다윗의 집까지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당시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과 가나안의 미신 신앙이 섞여 있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그 우상이 아니라 요나단과 미갈의 다윗에 대한 사랑입니다. 19장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이 다윗을 각각 한 번씩 살리게 됩니다.

 

1. 요나단의 사랑

 

요나단은 직언으로 사울의 마음을 돌려서 다윗을 살리고, 미갈은 위기 상황에서 재치로 드라빔을 이용해 다윗을 살립니다.

 

우리는 요나단의 사랑에 대하여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사랑이 진실하였고 또 최선을 다한 사랑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요나단 개인의 최후는 아무 보답이나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는 지난 시간에 다루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켰으며 그 자손에게 그 약속 이상의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잘못된 왕의 아들로서 또 그의 신하로서 그런 왕과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나갈 때, 어쩔 수 없이 그 공동체와 속해있으면서도 의로운 길을 가기를 원하는 ‘남은 자’를 상징합니다.

 

구원이나 심판은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똑같이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한 사람인 왕의 잘못된 신앙과 결정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국민 전체가 전쟁, 기근에 희생이 되거나 혹은 비참한 포로가 되는 역사가 수다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구원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남은 자’를 기억하십니다.

 

‘남은 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개혁이나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합니다. 단지 그들이 공동체의 운명으로 불의한 지도자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그 공동체의 운명에 동참하면서 고난 받는 자들이 ‘남은 자’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어느 교회 안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남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을 상징하지, 그들의 신앙이나 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단지 그들은 은혜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요나단의 약속처럼, 영원한 구원의 언약에 의해 그들과 그들의 영적 자손들을 기억하여 주실 것입니다.

 

2. 미갈의 사랑

 

그런데 문제는 미갈입니다. 미갈의 경우, 위급한 순간에 거짓말이 용납되느냐는 상황 윤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필 우상이 이용되었느냐는 문제도 다른 기회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요나단의 사랑’과 대조되는 ‘미갈의 사랑’의 성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여러 명의 아내들과 여러 번의 사랑을 할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만한 사랑이 없었다고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미갈도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이 위급했을 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훗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근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좀 건너뛰어서,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다윗이 아비가일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 남편 나발이 죽은 후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고, 또 다른 여인 아히노암이 다윗의 아내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후 다음 44절에 미갈이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은 다윗이 도망 다닐 때 미갈이 여전히 다윗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미갈을 다른 사람의 아내로 주고 마는 파렴치한 일을 저지릅니다.

 

사무엘상 25:44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그것은 미갈을 이용할 가치가 이제 없어졌다는 말이고, 더 이상 다윗이 자신의 집안이 연관이 없다는 공적인 선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인성까지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남편이 죽어야만 여자가 재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은 다윗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반드시 죽이겠다는 지독한 의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미갈 자신도 재가하는 중대한 문제를 스스로의 의지가 없이 아버지 사울의 결정에만 맡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갈이 다윗이 다른 여자들과 혼인했다는 소문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혼인관습에 아브라함, 야곱, 모세처럼 부인들이 여럿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갈이 재가한 것은 25:44에서도 보듯이 주어가 사울이라고 한 것처럼 사울의 의지가 가장 강했겠지만, 미갈의 동의도 전혀 없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되고 난 후 첫 아내인 미갈을 다시 찾아오려고 합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다른 아들 이스보셋을 세워서 다윗과 계속 전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의 문제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넘어오려고 합니다.

 

다윗은 그 약속의 증거로 미갈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3:12~16

[12]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3]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4]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15]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6]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아브넬이 어떤 방법으로 이스보셋을 설득했는지 이스보셋은 원래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현재의 남편 노릇을 하는 발디(엘)과 억지로 헤어지게 하고 다윗에게 돌려보냅니다. 사무엘상 25:44의 발디와 사무엘하 3:15의 발디엘은 같은 사람의 약간 다른 이름입니다.

 

3. 미갈의 심판

 

그 후 세월이 지나 다윗의 왕권이 안정되었을 때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성에 모셔 오게 됩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이스라엘의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 그 행렬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의 기질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미갈이 창밖으로 내다보았습니다. 그에 대한 미갈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사무엘하 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창문 밖으로 다윗을 구해 준 미갈이 나중에는 창문에서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를 소개하는 성경 구절이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딸’이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6:20~23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사울의 서슬에도 다윗을 살려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이 부분의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목사님들이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돌아오는 주일에 쓰는 본문이라고 추측을 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어떤 여자 권사님이나 집사님에게 기분이 나빠서 ‘때리는’ 설교라고들 하지요. 사실 그런 경우들이 없지 않아 있겠지요?

 

성경, 특히 구약에서는 여자가 자식이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것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미갈의 경우도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미갈은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빈정대고 무시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미갈이 그때까지 다윗을 사랑했다? 안 했다?’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연예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부의 사랑이 처음에는 떨림, 다음에는 울림, 그 사람 다음은 살림”이라고요. 어느 부부든지 사랑의 감정을 평생 유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자신들의 혼인 약속을 지키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는 과정이 결혼입니다.

 

오늘 미갈과 요나단의 사랑의 차이를 보려는 것이 남녀 사이의 사랑을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미갈의 가치관입니다.

 

미갈이 ‘사울의 딸’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로서 자신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재는 가치척도 그대로 다윗을 영웅이나 왕으로만 생각하고, 다윗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영적인 일에는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미갈의 말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왕이 그런 식의 체통을 잃은 행동을 할 수 있느냐?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창피한 짓을 하느냐?’는 내용입니다.

 

미갈이 사랑한 것은 이스라엘의 영웅이고, 권위와 권세 있는 왕의 이미지였기 때문입니다. 백마 탄 왕자를 바라보는 공주입니다.

 

미갈은 사람들의 평가와 가치 기준에 눈이 맞추어진 사람입니다. 남들의 평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왕이 춤추는 것을 보고 종들이 아마도 시시덕거렸을 것입니다.

 

미갈의 말처럼 왕이 거리에서 춤춘다는 것은 민망스럽고 가벼워 보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었고 하나님이 그를 지금까지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면 감정이 풍부한 낭만주의자요 하나님 중심주의자인 다윗이라는 한 인간의 행동이 이해되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자신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갈의 아비의 집, 즉 사울을 버리시고 자신을 높여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천하게 보일지라도 자신을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무엘서의 핵심 사상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는 높아지는 자요, 다른 하나는 낮아지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상을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찬송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고 브닌나에게서 심한 놀림과 수모를 받던 한나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찬송합니다.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 찬송의 내용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송에도 그대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2~53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이것이 사무엘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리라는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모든 세력과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켜 승리하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과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반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11 (눅 18:14, 마 23:12)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시편 59편은 다윗이 미갈의 도움으로 구출될 때를 기억하여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으로는 이것이 맞는지 배경인지 제목이 없다면 모를 정도입니다. 정작 공을 세운 미갈에 관한 이야기는 한 단어도 없습니다. 단지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고만 합니다.

 

시편 59

[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6] 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11]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셀라)

[14]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지키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삶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헌신으로 우리에게 남겨줍니다.

 

반면에 미갈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세상적인 기준으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그가 위험할 때 돕기는 했으나 의로운 도구로 사용되는 영광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윗의 찬양하는 행동을 무시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운명이 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에도 이와 같은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영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변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척해도 중심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성공과 명예, 자존심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배경, 인품이나 행동이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도 맞설 수 없는 다윗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산성이 되시고 그의 보호하심을 믿는 자들은 다윗과 같은 ‘왕의 수업’ 과정에 한 걸음 다가선 것입니다.

 

王의 修業

The King's Learning, The Exposition of 1 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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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의 백성에게로”

본문: 창세기 49:28~33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

 

.................................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보통 좋은 결말이 아닙니다. 동화 대부분은 신데렐라처럼 ‘그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치는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주지만, 창세기의 마지막은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 주제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인생이 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인생의 과정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한 사람의 인격 성장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야곱의 죽음은 신자의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야곱은 우리가 그러하듯,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낸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15세)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고향으로 돌아온 후, 벧엘에서 에브랏(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아내 라헬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98세로 추측됩니다.

 

창세기 35:16~19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헤브론)에 살 때 아버지 이삭이 죽었습니다(이삭 180세, 야곱 120세 때).

 

창세기 35:27~29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이 아직 살아 있었을 때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야곱은 이때 요셉이 진짜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창세기 37:31~35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야곱의 유언 중에 야곱의 또 다른 아내 레아의 죽음이 있습니다.

 

창세기 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 세상의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명예와 지위가 높아도 죽음 앞에서는 사라집니다.

 

전도서 2: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3. 그러므로 사람은 재산이나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을 인생 중에 찾아야 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

 

신자의 죽음은 그의 신앙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믿음, 지혜, 사랑, 삶의 모범... 그것이 ‘지혜로운 마음’, ‘지혜자의 마음’입니다.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to number our days)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a heart of wisdom)을 얻게 하소서

 

전도서 7:1~2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the day of death)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the house of mourning)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야곱은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막벨라굴: 막벨라굴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가족무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은 이슬람과 유대교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두 종교의 공동 종교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과거 헤롯왕 시대에 지은 성 같은 건축물이 그 위에 있고 지하에 무덤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굴을 샀을 때 주변 토착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소수 이방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먼저 헷 족속에게서 무덤 장소를 위해 정당한 값을 내고 땅을 샀습니다.

 

창세기 23:1~4, 16~20

[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아브라함에게 막벨라굴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가나안 땅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드는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살아 있을 때는 나그네였지만, 죽어서 묻힌 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죽었을 때 그 땅에 묻힌다는 것은 ‘조상들과 함께 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은 자신이 죽을 때 애굽이 아니라 고향 가나안 땅에 묻히도록 유언했습니다.

 

창세기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은 그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서 11:21~22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출애굽 때 그 뼈를 갖고 나와서 여호수아 시대에 막벨라굴은 아니지만, 요셉의 후손이 정착할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여호수아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신자에게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죽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신자가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1. 정통 기독교 교리는 말하기를, 신자의 죽음의 상태를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 32장:

‘인간의 사후(死後)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

 

① 모든 사람의 육신은 다 같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된다. 그때 모든 사람의 영혼은 중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② 의인과 악인에 따라 중간 상태가 각기 다르다. 의인은 죽은 순간 그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만, 아직 몸의 부활과 최종적인 영광은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죽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고 불멸의 상태로 즉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③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부활의 몸은 이미 죽은 그 몸(실체적인 면에서는 동일시되나, 질적인 면에서는 다르다)의 부활일 것이다. 이 몸이 다시 영혼과 결합하여 영원토록 살아 있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정통 장로교(개혁주의)에서는, 죽은 성도가 잠 잔다고 말할 때의 ‘잠’은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비유적 표현이지 영혼의 무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라고 봅니다.

 

2. 영혼수면설: 소수의 기독교 종파 주장.

 

영혼수면설(soul sleep)은 사람이 죽으면 몸뿐 아니라 영혼도 의식이 없는 ‘잠자는 상태’에 들어가며, 부활할 때 비로소 의식을 회복한다는 견해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부활할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오늘 죽은 사람이 천 년 후에 부활한다면 그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서는 죽음 직후와 부활의 순간이 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고린도전서 15:18, 51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이 두 가지 이론은 우리가 인간의 죽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교리들입니다. 이들 각각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안목을 얻기 위해 바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AD 61~63) 유럽의 최초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은 몇 년 후에 로마에서 순교(AD 67)합니다.

 

빌립보서 1:13~24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감옥에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기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거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좋은 일이지만, 감옥에서나마 이 세상에 살아 있음으로(24절, 내가 육신으로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more needful) 이 세상의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더 유익할 것을 알았습니다.

빌립보서 1:25~26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coming to you)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Jesus Christ)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야곱과 바울의 믿음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3차원의 제한적인 입장에서는, 우리는 성도의 죽음을 영혼의 중간 상태와 영혼 수면설 두 가지 이론 중 하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관점(4차원 혹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 그것을 우리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본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 두 가지 이론이 하나로 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4차원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순식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이며, 시간의 흐름을 인정해야 하는 3차원의 관점에서는 심판 때까지 잠자는 상태로 보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의 생애는 3차원 세상에서 수백 년간 조금씩, 단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경험, 선택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믿음의 조상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9~40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날마다 죽으면서 언젠가 그들과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with the Lord) 있는 그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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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책 

野花今愛 김영배 

 


어릴 적엔
풀 한 포기, 작은 풀꽃 하나
신비하지 않은 게 없었다
난 봄볕에 꿈을 꾸며
하늘을 날았다

가을이 익어갈 무렵에
새벽을 깨우며
방앗간 감나무로 달음질했다
어린 내 주먹만 한 감
풀숲 나무 밑 길가당에
어떤 때는 감나무에 매어놓은
커다란 황소 똥 위에 떨어졌다
주워 먹자니 더럽고
버려두자니 아까웠다
난 용기를 냈다
그걸 주워서 개울에 씻으면 그만 아닌가

양쪽 주머니에 한가득 주워
집으로 돌아와 커다란 물 항아리에
이삼일 담가두며
그 맛이 꿀맛이다

굽이굽이 인생길 가다 보니
벌써 저녁노을이 반겨준다
타관 땅 돌고 돌다 어느 편안한
산 동네(安山)에 둥지를 틀었다

가을빛 가득 내리는 날이면
밤송이 터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처음엔 아무 탐심이 없는 것처럼
가을바람에 내 몸을 맡기고
눈길은 저 푸른 하늘에 둔다
얼마만큼 걸었을까
나보다 먼저 땅에 내려온
알토란 같은 밤송이가 환한 얼굴로
자기를 봐달라며 눈을 깜박거린다

분명 고개를 숙였을 뿐인데
난 익어가는 가을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내가 아쉬워서 엎드렸을 뿐인데
어릴 적 추억에 하늘의 은혜
내 가슴으로 쏙 들어와
잊을 수 없는 가을 길 열어주었다

~~♡~~
☆ AI 詩評

야화 시인의 <가을 산책>을 시학적(詩學的) 관점과 구조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세밀하게 분석한 비평입니다.

1. 시간의 다층적 구조: 세 가지 '가을'의 융합이 시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세 가지 층위의 시간을 하나의 선상에 정교하게 배치하고 있습니다.

* 과거의 가을(유년기): 봄볕의 꿈에서 새벽 감나무로 이어지는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기억입니다.

* 현재의 가을(노년기): 타관 땅을 돌다 '저녁노을'과 '안산(安山)'에 정착한 화자의 황혼기입니다.

* 자연의 가을(순환기): 밤송이가 터지고 알토란 같은 결실을 맺는 대자연의 시간입니다.

* 평가: 화자는 산책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연의 가을' 속을 걸으며, 자신의 '인생의 가을'을 성찰하고, 문득 '어릴 적 가을'을 소환합니다.
이 세 가지 가을이 교차하면서 시의 깊이가 단순한 추억담을 넘어 인생론으로 확장됩니다.

2. 수직적 시선과 공간의 역학관계

시 속에서 화자의 '시선'과 '몸의 움직임'은 매우 정밀한 역학관계를 가집니다.

* 하늘(상승)에서 땅(하강)으로: 1연에서 어린 날의 화자는 "하늘을 날았다"며 상승의 이미지를 보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 현재는 "고개를 숙였을 뿐인데", "엎드렸을 뿐인데"라며 하강과 겸손의 자세를 취합니다.

* 낮춤을 통한 영적 상승: 역설적으로 화자가 땅(밤송이)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을 때,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시 "하늘의 은혜"입니다.

* 평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행위는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과 삶 앞에 겸손해진 화자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장치입니다.

3. 해학(Humor)과 성(Sacredness)의 절묘한 결합

가장 돋보이는 문학적 성취는 2연의 '황소 똥'과 마지막 연의 '하늘의 은혜'가 이루는 대비입니다.

* 황소 똥과 감: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똥)과 순수하고 달콤한 것(감)의 대비입니다. 어린아이는 이를 '개울물'이라는 자연의 정화 작용을 통해 '꿀맛'으로 승화시킵니다.

* 추억의 정화 능력: 이 유년의 기억은 나이가 들어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살아온 화자에게 여전히 '삶을 정화하는 샘물' 역할을 합니다.

* 평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황혼기의 사유를 '황소 똥'이라는 토속적 소재로 환기하여 시적 긴장을 완화하고, 독자에게 친근한 정서를 유도하는 완급 조절이 탁월합니다.

4. 시어와 표현의 미학적 특징

* 중의법의 적절한 활용: "안산(安山)"이라는 표현은 화자가 머무는 공간적 배경(경기도 안산시)인 동시에, 풍파를 겪은 후 도달한 내면의 평안함(편안한 산)을 상징하는 시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 감각의 변주: 시각(저녁노을, 푸른 하늘), 청각(밤송이 터지는 소리), 미각(꿀맛,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등 오감을 골고루 활용하여 독자가 화자의 산책길에 동행하는 듯한 생생한 입체감을 줍니다.

💡 총평

야화의 <가을 산책>은 '욕망을 비워냈을 때 찾아오는 영적인 풍요로움'을 노래한 수작입니다.

처음에는 아무 탐심 없이 걸었기에(無欲), 땅에 떨어진 밤송이의 환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시에서 '잊을 수 없는 가을길'이란, 단순히 흙길을 걷는 산책로가 아니라 과거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삶의 유한함을 긍정하며 걷는 '인생의 귀로(歸路)'를 의미합니다. 거친 수식어 없이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맑고 건강한 서정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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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후일에 당할 일 ⑩”

본문: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

 

=====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을 이루셨습니다.

 

이사야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세상의 역사와 신자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십니다.

 

전도서 3:1, 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in his time)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from the beginning to the end)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을 받고, 지혜를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엘 2:28~32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러한 방대한 말씀들이 창세기의 야곱의 12 아들에 대한 예언에서 짧게, 짧게 파편적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49:1~2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in the last days)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예언한 말씀은 신약 시대의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

그들에게(unto them)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신약 시대 교회의 여러 모습을 상징합니다.

 

갈라디아서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upon the Israel of God)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창세기의 야곱의 12 아들들과 요한계시록 2, 3장에 나타나는 일곱교회처럼, 모든 교회와 신자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죄를 짓거나 실수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믿은 교회와 신자들은 새예루살렘을 약속받습니다.

 

오늘은 요셉과 그 자손에 대한 야곱의 예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 가장 유명한 아들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첫아들입니다. 라헬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끝에 요셉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30:22~24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יוֹסֵף, Jehovah has added)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라헬은 아들을 더 낳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요셉(하나님이 더하신다)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라헬이 다른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요셉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과 복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에 대한 예언은 상징적인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예언은, 이미 앞서 기록된 요셉의 일생을, 야곱의 12 아들의 하나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삶을 요약하는 기능을 합니다.

 

창세기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בֵּן, a son)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בֵּן, a son)라 그 가지(בָּנ֕וֹת ,daughters)가 담을 넘었도다

 

싱반절의 ‘가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들’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강조하는 하반절의 가지는 ‘딸들’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동사 단어 בָּנָה [banah](obtain children)에서 유래했으며, 이 단어의 복수 명사는 ‘자녀, 자손들’입니다.

 

시편 127:3~5

[3] 보라, 자녀(בָּנִ֑ים ,children; בֵּן pl.)는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즉 요셉의 가지가 무성하다는 야곱의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을 예언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5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셉의 무성한 가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 교회가 세상에 점점 퍼져나가는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7~8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교회와 신자들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환난을 경험합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신자의 사명입니다.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we must through much tribulation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하고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to suffer for him)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2:12

참으면(if we endure)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베드로전서 4:12~14, 17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you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For the time is come that judgment must begin at the house of God)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이 심판을 거친 교회와 신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합니다.

 

요한계시록 20:4~6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in the first resurrection)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셉은 자신의 일생에서 우리가 ‘말세’에 겪는 고난을 보여주었습니다.

 

창세기 49:23~24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형들로 말미암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시편의 다윗의 고백은 그러한 경험을 말합니다.

 

시편 64:3~4

[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화살의 표적이 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같이 살게 된 형들로부터 끝까지 오해받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24절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라는 말씀처럼 요셉은 끝까지 인내하며 진리에 굳게 섰습니다.

 

창세기 49: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해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모세는 요셉 지파(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신명기 33:13~17

[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모세도 야곱의 예언처럼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더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명에는 에브라임, 므낫세가 같이 ‘요셉 지파’로 기록됩니다.

 

요한계시록 7: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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