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그의 백성에게로”
본문: 창세기 49:28~33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
.................................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보통 좋은 결말이 아닙니다. 동화 대부분은 신데렐라처럼 ‘그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치는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주지만, 창세기의 마지막은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 주제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인생이 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인생의 과정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한 사람의 인격 성장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야곱의 죽음은 신자의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야곱은 우리가 그러하듯,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낸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15세)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고향으로 돌아온 후, 벧엘에서 에브랏(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아내 라헬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98세로 추측됩니다.
창세기 35:16~19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헤브론)에 살 때 아버지 이삭이 죽었습니다(이삭 180세, 야곱 120세 때).
창세기 35:27~29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이 아직 살아 있었을 때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야곱은 이때 요셉이 진짜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창세기 37:31~35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야곱의 유언 중에 야곱의 또 다른 아내 레아의 죽음이 있습니다.
창세기 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 세상의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명예와 지위가 높아도 죽음 앞에서는 사라집니다.
전도서 2: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3. 그러므로 사람은 재산이나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을 인생 중에 찾아야 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
신자의 죽음은 그의 신앙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믿음, 지혜, 사랑, 삶의 모범... 그것이 ‘지혜로운 마음’, ‘지혜자의 마음’입니다.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to number our days)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a heart of wisdom)을 얻게 하소서
전도서 7:1~2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the day of death)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the house of mourning)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야곱은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굴에 장사되었습니다.
막벨라굴: 막벨라굴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가족무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은 이슬람과 유대교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두 종교의 공동 종교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과거 헤롯왕 시대에 지은 성 같은 건축물이 그 위에 있고 지하에 무덤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굴을 샀을 때 주변 토착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소수 이방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먼저 헷 족속에게서 무덤 장소를 위해 정당한 값을 내고 땅을 샀습니다.
창세기 23:1~4, 16~20
[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아브라함에게 막벨라굴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가나안 땅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드는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살아 있을 때는 나그네였지만, 죽어서 묻힌 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죽었을 때 그 땅에 묻힌다는 것은 ‘조상들과 함께 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은 자신이 죽을 때 애굽이 아니라 고향 가나안 땅에 묻히도록 유언했습니다.
창세기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은 그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서 11:21~22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출애굽 때 그 뼈를 갖고 나와서 여호수아 시대에 막벨라굴은 아니지만, 요셉의 후손이 정착할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여호수아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신자에게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죽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신자가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1. 정통 기독교 교리는 말하기를, 신자의 죽음의 상태를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 32장:
‘인간의 사후(死後)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
① 모든 사람의 육신은 다 같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된다. 그때 모든 사람의 영혼은 중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② 의인과 악인에 따라 중간 상태가 각기 다르다. 의인은 죽은 순간 그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만, 아직 몸의 부활과 최종적인 영광은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죽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고 불멸의 상태로 즉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③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부활의 몸은 이미 죽은 그 몸(실체적인 면에서는 동일시되나, 질적인 면에서는 다르다)의 부활일 것이다. 이 몸이 다시 영혼과 결합하여 영원토록 살아 있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정통 장로교(개혁주의)에서는, 죽은 성도가 잠 잔다고 말할 때의 ‘잠’은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비유적 표현이지 영혼의 무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라고 봅니다.
2. 영혼수면설: 소수의 기독교 종파 주장.
영혼수면설(soul sleep)은 사람이 죽으면 몸뿐 아니라 영혼도 의식이 없는 ‘잠자는 상태’에 들어가며, 부활할 때 비로소 의식을 회복한다는 견해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부활할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오늘 죽은 사람이 천 년 후에 부활한다면 그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서는 죽음 직후와 부활의 순간이 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고린도전서 15:18, 51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이 두 가지 이론은 우리가 인간의 죽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교리들입니다. 이들 각각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안목을 얻기 위해 바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AD 61~63) 유럽의 최초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은 몇 년 후에 로마에서 순교(AD 67)합니다.
빌립보서 1:13~24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감옥에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기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거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좋은 일이지만, 감옥에서나마 이 세상에 살아 있음으로(24절, 내가 육신으로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more needful) 이 세상의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더 유익할 것을 알았습니다.

빌립보서 1:25~26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coming to you)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Jesus Christ)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야곱과 바울의 믿음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3차원의 제한적인 입장에서는, 우리는 성도의 죽음을 영혼의 중간 상태와 영혼 수면설 두 가지 이론 중 하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관점(4차원 혹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 그것을 우리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본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 두 가지 이론이 하나로 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4차원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순식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이며, 시간의 흐름을 인정해야 하는 3차원의 관점에서는 심판 때까지 잠자는 상태로 보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의 생애는 3차원 세상에서 수백 년간 조금씩, 단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경험, 선택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믿음의 조상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9~40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날마다 죽으면서 언젠가 그들과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with the Lord) 있는 그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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