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성경을 보아도, 같은 설교를 들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능력이 나타납니다. 씨가 달라서가 아니라 뿌려진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의 비밀이지요.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작은 소리(세미한 음성)의 울림이 당신의 영혼에 있기를...
마가복음 21. 비유의 비밀①
마가복음 4:1~20,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마가복음은 섬기는 사역의 책입니다. 종과 제자로서 훈련받는 복음서입니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설교가 4개밖에 기록되지 않은 책입니다. 반면에 이적 행하심은 18번의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설교 중 씨 뿌리는 비유는 어느 복음서나 비유설교의 맨 처음에 기록되어 있고 비유설교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의 ‘씨 뿌리는 비유’를 비교해 봅시다.
마태복음 13:1~23,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8:4~18,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어느 복음서나 예수님이 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기록합니다. “큰 무리”가 말씀을 들었듯이 오늘날 복음이 세계 어디에나 전해졌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복음은 교회와 많은 문화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많은 사람이 누구나 복음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무리가 말씀을 들었지만 정작 그 말씀의 정확한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겨우 12명의 제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왜냐하면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지지만 그 능력을 힘입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설교를 하셨을 때의 느낌과 분위기를 같이 느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는 읽혀지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로 들려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배를 타고 설교하셨습니다. 작은 보트가 예수님의 강대상이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교회, 회당의 설교 장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바닷가에서 몰려 온 사람들에게 들려지기 위한 말씀입니다. 즉 비유는 ‘들려지는 것’입니다.
좀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장면입니다. 그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전하면 좋겠습니까?
천국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설명한다 해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란 무엇인가요?
비유: παραβολή (측면에 던진 것, 일치하다), parabola=포물선(원추를 옆선과 평행하게 잘랐을 때 단면이 포물선 모양, 파라볼라 안테나).
비유란, 우화나 상징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천로역정이란 소설을 보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의 사건이나 등장인물이 직접적으로 무엇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비유는 이야기의 전체 맥락과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는가? 바로 그것을 당시 청중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9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신 비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그리고 10절에서 12절까지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 ‘제자들과 몇 사람에게’ 그 비유의 의미를 간략히 먼저 말씀하십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즉 큰 무리에게 구체적으로 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으나 심지어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미쳤다고 귀신에게 씌었다고 수군댑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천국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비유의 이중 작용’은 두 가지입니다.
1. 진리를 보이는 일
2. 진리를 가리는 일
같은 비유가 이렇게 상대적입니다. 마치 우리가 구원 받도록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스스로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비유를 듣고도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세한 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 예수님에 있기도 하고 그것을 아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13절 이하에서 자세히 풀어 설명하십니다.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이 본문에서는 씨가 뿌려진 네 가지 환경 혹은 밭이 나옵니다. 길가라 쉽게 빼앗기고, 돌밭이라 단단하고 깊이가 얕아 곧 믿음이 사라지고, 가시떨기 가운데처럼 여러 염려로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마지막으로 준비된 좋은 마음의 밭이 나옵니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복음은 누구에게나 들려지지만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복음의 밭이라도 그곳에서 나오는 결실은 엄청나고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혹은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복음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복음은 누구에게나 들려집니다.
2. 복음은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3. 복음의 뒤에는 실패와 희생의 밭이 있습니다.
4. 복음의 앞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한국 교회는 또한 과거 이런 복음의 씨앗을 역사적으로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순교와 고난의 토양 속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예화:
1. 토마스선교사의 순교 - “평양 대동강에 부어진 순교의 잔”
1866년 9월 4일 그믐이었기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제네럴셔만호는 물이 빠져나간 강의 진흙바닥에 좌초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쑥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같이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박규수 평양감사는 그 다음 날 9월 5일에 유황을 뿌린 잡목들을 실은 거룻배에 불을 붙여 제네럴셔만호를 향하여 떠내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불붙은 작은 배들이 토마스가 승선해 있는 그 배에 닫자마자 이내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규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 군사들로 하여금 화살과 총포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외양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네럴셔만호가 볏짚처럼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승무원들은 목숨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된 조선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토마스선교사는 훨훨 타오르는 극한 상황에도 대동강변에 나와 있는 평양백성들을 향하여 힘써 외치고 있었다. “야소.” “야소.” 화마처럼 자신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도 조선백성들을 향한 토마스선교사의 복음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한권의 성경이라도 조선백성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배에서 뛰어 내려 자신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토마스 자신도 그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리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느꼈기에 더 이상 주저함이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한 권의 성경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렸다. 대동강 쑥섬에 기어 올라온 토마스는 조선 군인에게 잡혔고 자신 앞에 서있는 조선 병사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가슴에 품고 있었던 한 권의 성경을 그에 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뿌리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칼로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찔렀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피는 모래밭을 적시고 대동강 물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선교사가 바로 한국 교회사에 최초의 순교한 선교사였다. 그이 나이 27세. 조선 땅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한 그는 토마스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였다.
2. 순교의 가해자 박춘권의 회심과 널다리골 교회
제네럴셔만호의 격침에 누구보다도 많은 공로를 세우며 토마스선교사의 가슴에 칼을 겨눈 혈기 등등한 한 평양의 병사가 있었다. 한국교회사 100년에 토마스를 순교시킨 인물로 또 평양의 최초의 교회이며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안주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 박춘권(朴春權)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말기 평양 중군 이현익 휘하의 관군으로 6척 장신의 기골이 용맹한 군인이었다. 제네럴셔만호에 대한 화공에 직접 관여하여 누구보다도 혁혁한 공을 세워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구전된 이야기에는 그가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살해했고 토마스가 전해준 그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가 보관했고 훗날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였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30년이 지난 후에는 Samuel A. Moffet 선교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찾아와 주님을 영접하고 널다리골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초대 성도들을 핍박하고 빌립집사가 순교 당할 때에 이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혈기 왕성한 인물이 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장 열정적인 복음의 사도가 된 사실과 너무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테판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7:58~8:1)
1918년부터 평양의 총회는 토마스의 전도행전과 순교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200여명을 찾아내어 증언한 자료를 토대로, 1928년 오문환장로에 의해 <토마스 목사전>을 출간 하였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는 친히 목격하였던 이 광경을 오문환장로에게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의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면 조왕리교회는 1932년 토마스목사 기념 교회로 선정되었다.
토마스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대동강변에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선교사가 뿌린 성경3권을 얻어 집으로 가져왔고, 그때 20세였던 여인 이신행도 성경 한권을 얻었고 훗날 그녀는 평양에서 최초의 여성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교인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866년 9월 4일 제네럴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후 박규수 평양 감사는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수백 권의 성경과 전도 책자의 소지자에 대한 체포령과 회수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버렸다. 이 때 버려진 성경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양 대동문 안의 영문주사의 관직자였던 박영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하였다.
후에 박영식의 집을, 토마스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갖고 있었던 평양의 최치량이 구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므로 이 여관에 머무는 여행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1893년 마펫선교사는 평양에 선교부를 두기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집 주인인 최치량이 기독교인이 되어 그 여관이 나중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최치량은 그 교회의 개척 멤버였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이 재현되는 것 같은 일화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2차 빌립보성으로 전도 여행시에 루디아의 집에 유하므로 그 집안이 구원 받고 그 처소가 빕립보의 가정교회가 되었던 사실과 동일한 역사이기도 하다.
마펫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본부를 두기 위해 방문한 사실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와 유관한 것이며, 그가 평양을 방문할 당시에 이미 토마스에 의해 뿌려진 성경으로 인해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펫선교사가 평양도성 대동문안에 교회를 개척할 때 토마스선교사에게 얻은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뿌려진 성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에 북음의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며, 마펫 선교사는 그 증거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이 토마스선교사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 성경을 뿌린 것이 평양 초대 교회의 태신자들을 탄생시켰으며 평양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춘권영수가 섬긴 평양 널다리골교회는 1894년 마펫선교사가 그 동네의 29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림으로 개척된 것이다.
이 널다리골교회는 후에 크게 부흥이 되어 1903년에 72칸짜리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 이 장대현교회는 평양의 장자 교회 역할을 했으며, 한국 교회 부흥의 전환점을 가져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바로 이 교회였다. 이는 토마스선교사의 평양에서의 한알의 밀알이 된 순교가 장대현교회의 탄생과 그 교회를 통해 발원된 부흥운동을 잉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토머스 목사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 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 4일 고향인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 달 반 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 9일 제너럴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 2일경,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우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소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증거요 열매인줄 압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비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열매가 씨앗을 품고 있듯이 여러분 또한 여러분 자신의 가정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 역사를 이어 나갈 또 다른 씨앗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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