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성경을 보아도, 같은 설교를 들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능력이 나타납니다. 씨가 달라서가 아니라 뿌려진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의 비밀이지요.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작은 소리(세미한 음성)의 울림이 당신의 영혼에 있기를...

 

마가복음 21. 비유의 비밀

 

마가복음 4:1~20,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마가복음은 섬기는 사역의 책입니다. 종과 제자로서 훈련받는 복음서입니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설교가 4개밖에 기록되지 않은 책입니다. 반면에 이적 행하심은 18번의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설교 중 씨 뿌리는 비유는 어느 복음서나 비유설교의 맨 처음에 기록되어 있고 비유설교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의 씨 뿌리는 비유를 비교해 봅시다.

 

마태복음 13:1~23,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8:4~18,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어느 복음서나 예수님이 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기록합니다. “큰 무리가 말씀을 들었듯이 오늘날 복음이 세계 어디에나 전해졌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복음은 교회와 많은 문화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많은 사람이 누구나 복음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무리가 말씀을 들었지만 정작 그 말씀의 정확한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겨우 12명의 제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왜냐하면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지지만 그 능력을 힘입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설교를 하셨을 때의 느낌과 분위기를 같이 느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는 읽혀지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로 들려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배를 타고 설교하셨습니다. 작은 보트가 예수님의 강대상이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교회, 회당의 설교 장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바닷가에서 몰려 온 사람들에게 들려지기 위한 말씀입니다. 즉 비유는 들려지는 것입니다.

 

좀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장면입니다. 그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전하면 좋겠습니까?

 

천국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설명한다 해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란 무엇인가요?

 

비유: παραβολή (측면에 던진 것, 일치하다), parabola=포물선(원추를 옆선과 평행하게 잘랐을 때 단면이 포물선 모양, 파라볼라 안테나).

 

비유란, 우화나 상징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천로역정이란 소설을 보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의 사건이나 등장인물이 직접적으로 무엇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비유는 이야기의 전체 맥락과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는가? 바로 그것을 당시 청중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9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전하신 비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그리고 10절에서 12절까지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 제자들과 몇 사람에게그 비유의 의미를 간략히 먼저 말씀하십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즉 큰 무리에게 구체적으로 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으나 심지어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미쳤다고 귀신에게 씌었다고 수군댑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천국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비유의 이중 작용은 두 가지입니다.

1. 진리를 보이는 일

2. 진리를 가리는 일

 

같은 비유가 이렇게 상대적입니다. 마치 우리가 구원 받도록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스스로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비유를 듣고도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세한 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 예수님에 있기도 하고 그것을 아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13절 이하에서 자세히 풀어 설명하십니다.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이 본문에서는 씨가 뿌려진 네 가지 환경 혹은 밭이 나옵니다. 길가라 쉽게 빼앗기고, 돌밭이라 단단하고 깊이가 얕아 곧 믿음이 사라지고, 가시떨기 가운데처럼 여러 염려로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마지막으로 준비된 좋은 마음의 밭이 나옵니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복음은 누구에게나 들려지지만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복음의 밭이라도 그곳에서 나오는 결실은 엄청나고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혹은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복음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복음은 누구에게나 들려집니다.

 

2. 복음은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3. 복음의 뒤에는 실패와 희생의 밭이 있습니다.

 

4. 복음의 앞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한국 교회는 또한 과거 이런 복음의 씨앗을 역사적으로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순교와 고난의 토양 속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예화:

 

1. 토마스선교사의 순교 - “평양 대동강에 부어진 순교의 잔

186694일 그믐이었기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제네럴셔만호는 물이 빠져나간 강의 진흙바닥에 좌초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쑥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같이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박규수 평양감사는 그 다음 날 95일에 유황을 뿌린 잡목들을 실은 거룻배에 불을 붙여 제네럴셔만호를 향하여 떠내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불붙은 작은 배들이 토마스가 승선해 있는 그 배에 닫자마자 이내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규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 군사들로 하여금 화살과 총포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외양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네럴셔만호가 볏짚처럼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승무원들은 목숨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된 조선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토마스선교사는 훨훨 타오르는 극한 상황에도 대동강변에 나와 있는 평양백성들을 향하여 힘써 외치고 있었다. “야소.” “야소.” 화마처럼 자신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도 조선백성들을 향한 토마스선교사의 복음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한권의 성경이라도 조선백성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배에서 뛰어 내려 자신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토마스 자신도 그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리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느꼈기에 더 이상 주저함이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한 권의 성경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렸다. 대동강 쑥섬에 기어 올라온 토마스는 조선 군인에게 잡혔고 자신 앞에 서있는 조선 병사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가슴에 품고 있었던 한 권의 성경을 그에 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뿌리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칼로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찔렀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피는 모래밭을 적시고 대동강 물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선교사가 바로 한국 교회사에 최초의 순교한 선교사였다. 그이 나이 27. 조선 땅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한 그는 토마스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였다.

 

2. 순교의 가해자 박춘권의 회심과 널다리골 교회

제네럴셔만호의 격침에 누구보다도 많은 공로를 세우며 토마스선교사의 가슴에 칼을 겨눈 혈기 등등한 한 평양의 병사가 있었다. 한국교회사 100년에 토마스를 순교시킨 인물로 또 평양의 최초의 교회이며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안주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 박춘권(朴春權)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말기 평양 중군 이현익 휘하의 관군으로 6척 장신의 기골이 용맹한 군인이었다. 제네럴셔만호에 대한 화공에 직접 관여하여 누구보다도 혁혁한 공을 세워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구전된 이야기에는 그가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살해했고 토마스가 전해준 그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가 보관했고 훗날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였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30년이 지난 후에는 Samuel A. Moffet 선교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찾아와 주님을 영접하고 널다리골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초대 성도들을 핍박하고 빌립집사가 순교 당할 때에 이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혈기 왕성한 인물이 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장 열정적인 복음의 사도가 된 사실과 너무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테판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7:58~8:1)

1918년부터 평양의 총회는 토마스의 전도행전과 순교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200여명을 찾아내어 증언한 자료를 토대로, 1928년 오문환장로에 의해 <토마스 목사전>을 출간 하였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는 친히 목격하였던 이 광경을 오문환장로에게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의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면 조왕리교회는 1932년 토마스목사 기념 교회로 선정되었다.

토마스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대동강변에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선교사가 뿌린 성경3권을 얻어 집으로 가져왔고, 그때 20세였던 여인 이신행도 성경 한권을 얻었고 훗날 그녀는 평양에서 최초의 여성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교인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86694일 제네럴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후 박규수 평양 감사는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수백 권의 성경과 전도 책자의 소지자에 대한 체포령과 회수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버렸다. 이 때 버려진 성경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양 대동문 안의 영문주사의 관직자였던 박영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하였다.

후에 박영식의 집을, 토마스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갖고 있었던 평양의 최치량이 구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므로 이 여관에 머무는 여행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1893년 마펫선교사는 평양에 선교부를 두기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집 주인인 최치량이 기독교인이 되어 그 여관이 나중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최치량은 그 교회의 개척 멤버였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이 재현되는 것 같은 일화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2차 빌립보성으로 전도 여행시에 루디아의 집에 유하므로 그 집안이 구원 받고 그 처소가 빕립보의 가정교회가 되었던 사실과 동일한 역사이기도 하다.

마펫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본부를 두기 위해 방문한 사실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와 유관한 것이며, 그가 평양을 방문할 당시에 이미 토마스에 의해 뿌려진 성경으로 인해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펫선교사가 평양도성 대동문안에 교회를 개척할 때 토마스선교사에게 얻은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뿌려진 성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에 북음의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며, 마펫 선교사는 그 증거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이 토마스선교사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 성경을 뿌린 것이 평양 초대 교회의 태신자들을 탄생시켰으며 평양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춘권영수가 섬긴 평양 널다리골교회는 1894년 마펫선교사가 그 동네의 29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림으로 개척된 것이다.

이 널다리골교회는 후에 크게 부흥이 되어 1903년에 72칸짜리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 이 장대현교회는 평양의 장자 교회 역할을 했으며, 한국 교회 부흥의 전환점을 가져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바로 이 교회였다. 이는 토마스선교사의 평양에서의 한알의 밀알이 된 순교가 장대현교회의 탄생과 그 교회를 통해 발원된 부흥운동을 잉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토머스 목사 약력.

184097일 영국 웨일즈 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64일 고향인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24). 1863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1~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 달 반 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89일 제너럴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92일경,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

 

우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소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증거요 열매인줄 압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비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열매가 씨앗을 품고 있듯이 여러분 또한 여러분 자신의 가정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 역사를 이어 나갈 또 다른 씨앗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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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2  (0) 2012.02.27

그분의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시면서 하신 판단에, 교회 일 대신 설거지가 먼저 필요하면 그 일을 우선하십시오. 그러나 그 사정이 예배나 교회 봉사에서 도망치기 위한 핑계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 것도 다른 것을 피하기 위한 핑계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해내십니다.


마가복음 20.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31~35,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가족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예수님을 데리러 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탄에 씌어서 귀신들을 내쫓는다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을 어렵게 하는 방해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등장합니다. 어떤 집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예수야, 예수야!” “!” “오빠!”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가족들이 오셔서 찾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동생이냐?”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 외에는 거의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그중에는 인간적으로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이다. 이 사람들을 보아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면 내 가족이다.”

마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더 붙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도 혈육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요셉은 이미 돌아가신 때인 것 같습니다. 그 가족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참고:

야고보란 이름이 흔하여서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 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순교자), 알패오와 살로메의 아들 야고보가 둘이 있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의 저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믿었겠지만 그 영향력이 다른 자식들까지 이해시킬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형제는 사실 육신적으로 반쪽 형제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이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지만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역시 천국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어느 부자가 지옥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사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의 관계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3:5~8,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뜻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4:1~25,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가족과 하나님의 일과의 갈등이 있을 때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구약에서 이런 사건으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1~35,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신명기 33:8~9,

[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9]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신자의 태도를 이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하시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여 사는 일에는 많은 오해와 갈등이 나타납니다. 아마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없는 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미친 짓입니다. 구역장들이 교회 일로 바쁘면 집 안에 설거지가 산처럼 싱크대에 쌓입니다. 직장에서 돌아 온 남편이나 중고등학생 자녀들이 설거지를 해주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대신 역정을 내고 교회를 비난하지요. 그리고 인터넷에 X독교라고 한마디 씁니다. 자신은 가족의 의무를 다하는 죄 없는 사람이니 돌을 던지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의롭겠습니까? 힘들고 피곤해서 역정 냈다고 그냥 덮어줍시다.

물론 교회 일에 힘 쓸 때에 가정의 의무, 아내의 의무, 부모의 일에도 그것 못지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때 - 저는 교회 일이 먼저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 ‘주님을 선택하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계속 교회 일로 집안과 가정 일을 소홀히 하라는 말씀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 교회 봉사를 포기하시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분의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시면서 하신 판단에, 교회 일 대신 설거지가 먼저 필요하면 그 일을 우선하십시오. 그러나 그 사정이 예배나 교회 봉사에서 도망치기 위한 핑계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 것도 다른 것을 피하기 위한 핑계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해내십니다.

자식 때문에 교회 못나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목매며 자식새끼, 자식새끼 하지만, 언제 어떻게 평생 바친 부모사랑이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중에 죽어서 제사상 받겠다고 지금 후손 챙깁니까? 죽어서도 조상귀신 될 자신 있어요?

신앙이 없는 가족들에게는 재산 한가득 물려주지 않으면 죽어서도 고생합니다. 특별히 선산에 돈 주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2대만 가도 고인의 묘가 버림받습니다.

가족은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육신의 가족들의 사랑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땅의 가족은 하나님 사랑의 연습입니다. 그러면서 실전 같은 연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족으로 인해 여러분이 놓쳐서는 안 될 하나님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희생과 헌신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한 보이는 믿음의 가족들이 점점 더 넓게 확대되고 이어져서 보이지 않는 참된 가족의 모습이 됩니다.여러분의 참된 가족은 천국에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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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는 것은 휴일의 피크닉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을 유쾌하게 하는 음악과 듣기 좋은 심리치료를 들으려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감히 받으실 수 없는 무시와 치욕을 받으신 그 영적 전쟁에, 여러분은 그의 제자로서 참여했다는 선언이 이 예배입니다.

 

마가복음 19. 종의 전쟁

 

마가복음 3:20~30,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본문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친속들의 오해

 

마가복음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친속들이란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고향 친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이 미친 줄 오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일부러 그럴 수도 있습니다. 대개 정상인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경우는 어떤 사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심각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변명을 할 때도 사용됩니다. 요즘에는 병역기피를 위해 가짜로 정신이상자 노릇을 한다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변호해주지 않았고 그래도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께 도움이 되지 못한 모양입니다. 설령 변호를 했더라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메시야 콤플렉스에 빠졌구나!” 이것이 예수님께 대한 가족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도 가족과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 오해를 받았을 것이고,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38,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만일 우리가 예수를 섬기기를 원하고 따르기를 원하면 그분이 가신 갈보리 길과 고난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2.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의 훼방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해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라 악의에 찬 훼방입니다.

 

마가복음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런 언행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시고 그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29~30,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그들은 그리스도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악령에 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에그론(Ekron)에 거주하던 블레셋 사람들의 신의 이름입니다.

 

열왕기하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바알세불은 똥파리 대왕이라는 뜻이고 사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고 바로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완악한지를 보여줍니다.

 

훼방(毁謗)’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훼방(blasphemy): 남을 헐뜯어 비방함. 또는 그런 비방.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 모독죄입니다.

 

마태복음 12:32,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거스려 말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을 훼방하는 죄,

 

1) 구원 받은 성도의 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죄가 용서함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53: 5:18~19).

 

로마서 5:18~19,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의 죄를 범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죄들을 다 용서받습니다. 그 결과 성도는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 되어(8:34),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을 받는 온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10:14).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합니다(5:2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원한 생명이란 결코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 받은 성도는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2) 가라지 같은 사람의 죄입니다.

 

성령훼방죄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입니다.

 

히브리서 6:4~6,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런 사람은 전혀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가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 동안 교회생활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무엇이 성령의 생각이고 무엇이 성령의 사역인지를 분별할만한 능력을 얻은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들 속에 섞여 있는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마치 성도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를 하거나 스스로 자신이 성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훼방죄는 참 성도나 전혀 불신자들이 범하는 죄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입니다.

 

3)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훼방죄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죄와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3:28~29).

 

훼방이란 해치거나 방해를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는 성령 하나님이나 그의 사역을 상대로 방해를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4) 고의적(故意的)인 죄입니다.

 

사람은 무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성령을 훼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과거에 훼방자였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께서는 바로 이어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도리어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한 주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딤전 1:13~14).

 

디모데전서 1:13~14,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훼방죄는 용서를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성령훼방죄는 무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범한 죄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임이 분명합니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임하여집니다(3:19).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어떠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2:5).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성령의 훼방죄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고난이 두려워서 한 순간이나마 주님을 부인하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6)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어려운 죄입니다.

 

어떤 경우가 성령훼방죄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크고 중해 보이는 죄라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용서 못하실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가 아무리 막중할지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봅시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베드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죄(바울), 의도적인 간음에 살인을 더했던 죄(다윗),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명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했던 죄(요나) 등 모든 죄가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보고 성령훼방죄임에 틀림이 없다는 속단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장차 베드로, 바울, 다윗, 요나처럼 회개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이와 같이 진리를 듣고 보았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한 사건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리지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 신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과 철학이 옳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때로 그들이 종교적인 권세를 가지고 의로운 자들을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요 그들의 인생의 목적은 참된 신자와 제자를 연단시키고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인 것입니다.

 

두 번째, 반대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신앙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의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휴일의 피크닉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을 유쾌하게 하는 음악과 듣기 좋은 심리치료를 들으려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감히 받으실 수 없는 무시와 치욕을 받으신 그 영적 전쟁에, 여러분은 그의 제자로서 참여했다는 선언이 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해와 모독을 당하신 것처럼 그런 오해와 비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을 선택한 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종으로서 섬기고 그 고난을 견디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려면 그가 받으신 무시와 치욕을 받는 전쟁에 당연히 참여해야 합니다. 때로 아픔과 오해가 있더라도, 여러분 보다 먼저 모든 것을 견디시고 또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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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타락시키고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가장 큰 책임은 목사들, 기독교단체장들에게 있다. 성경에서는 신자의 구원이 그러하듯이 대표 원리로서 머리(교회의 머리가 목사가 아닌데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고 있다)된 자의 책임을 늘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들을 이 지경까지 만든 책임이 신자들에게도 역시 있다.

지금의 한국은 교회를 어쩔수 없이 가야하는 중세시대 유럽도 아니고, 독재와 폭정에 꼼짝 못하는 북한 같은 사회도 아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선택한 책임이 어느정도 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최종 인간 책임자인 목사나 장로들이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고 묵인하고 사주한 책임이 있다. 아무리 그들이 비성경적인 언행을 한다 할지라도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나는 그런 대단한 실력자의 그늘에 있다"는 속에 품은 욕심이 없었다면 왜 아직까지 그 선택을 유지하는가? 그것은 신자의 의지였고 또한 책임으로 귀결이 된다.

썩은 신자들 속에 썩은 목사가 난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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