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3. 등불의 비유
마가복음 4:21~25,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지난 시간에는 두 번에 걸쳐 ‘비유의 비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알기위해 다른 것과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쉽게 설명하는 비유가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두 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비유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영적인 일에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진리를 더 잘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일에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는 성경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4장 9절과 23절에,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온다고 합니다만, 헬라어 원문 성경(혹은 KJV)에는 등불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등불이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마가복음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And he said unto them, Is a candle brought to be put under a bushel,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set on a candlestick? (KJV)
He said to them, "Do you bring in a lamp to put it under a bowl or a bed? Instead, don't you put it on its stand? (NIV. 일반인 지칭명사 ‘너희’를 사용합니다)
즉, 등불이 하나의 인격처럼, 사람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그 등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이와 같이 빛을 예수님으로 은유해서 사용하는 부분이 특히 많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한복음 8:21,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이 빛이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빛이 세상에 왔으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구약에서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을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1~4,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비유의 목적 중 하나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 자체가 하나의 비유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비유입니다. 성육신 자체가 신비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에는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았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를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요즘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지식의 힘이 바로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이고 매우 감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예수라는 사람을 왜곡시키고 덧붙여서 편집된 사람들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좋게 봐주어도 단지 명상과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데 좋은 마음 닦기 수단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것은 옛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최근 SBS방송에서 방영한 “신의 길, 사람의 길”이라는 특집프로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나 몇 년 전 나온 다빈치코드 같은 영화들이 요즘 대표적인 영적 장님들에 해당합니다. 그런 시도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 대해 반대를 하는 뭔가 새로운 접근이 있어야 인기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때문입니다.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2절의 말씀은 언뜻 보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한 병렬형식입니다. 빛이 집 안에 비췰 때 억지로 빛으로부터 숨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빛이 모든 것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비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숨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우리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믿는다고 하면 저절로 모든 말씀이 이해되나요? 이해된 것이 그 말씀대로 살아지나요?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24절과 25절의 말씀으로 이 등불의 비유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즈음에 달란트비유(마태복음 25장)를 마음속에 떠올린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비유의 비밀을 찾으신 겁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찾아봅시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히브리서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마가복음 4장의 등불의 비유에서는 등불이 놓이는 세 가지의 장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디죠? 말 아래, 평상 아래, 등경 위입니다. 말 이란, 곡식의 분량을 한 말, 두 말 재는 말통(약 20L)입니다. 평상이란 침대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매트리스가 달린 침대가 아니라 그냥 나무로 만들어진 침상입니다. 등경이란 촛불이나 호롱불을 놓는 곳인데 주로 집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높은 곳입니다. 주로 벽이나 가운데 기둥에 설치합니다.
만약 등불을 말 아래 둔다면 어떤 상황입니까? 더 이상 불이 필요 없어서 불을 끌 때입니다. 좁은 공간 안에 갇힌 등불은 산소가 없어서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등불이 평상 아래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잘못하면 화재가 날겁니다. 하나는 불이 없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이 너무 많이 생겨 등불이 아니라 재앙이 됩니다. 등경 위에 놓이는 것이 등불의 제 위치입니다.
24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 신자들도 그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기 어려움을 설명합니다. 지난 시간의 네 가지 밭 혹은 네 가지 땅의 비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너무 굳어있으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혹은 깊이가 너무 얕아서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혹은 다른 염려와 유혹에 가려져 싹트던 곡식이 자랄 수 없습니다. 적당한 밭에 뿌려진 씨앗이 제대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등불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 등불이신 예수님이 몇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유를 비롯한 깊은 말씀을 그들에게만 설명해 주셨습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여기에서 혼자 계실 때란, 단지 예수님 혼자가 아니라 많은 무리들과 떨어져서 오직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34절의 “혼자 계실 때”를 “개인적으로 혹은 비밀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 된 자신의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나누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빌립보서 2:15~16,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1:1~3,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이제 여러분이 등불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작은 등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들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정작 깨닫게 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동일한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위해서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비추이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기름이 되고 심지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엡 5:18).
주님은 홀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홀로 고독을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죽을 때 우리의 등불이 탑니다. 그리고 빛을 발합니다. 세상을 밝히고 또 다른 제자들에게 그 빛이 비추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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