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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3. 등불의 비유

마가복음 4:21~25,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지난 시간에는 두 번에 걸쳐 비유의 비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알기위해 다른 것과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쉽게 설명하는 비유가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두 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비유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영적인 일에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진리를 더 잘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일에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는 성경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49절과 23절에,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온다고 합니다만, 헬라어 원문 성경(혹은 KJV)에는 등불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등불이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마가복음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And he said unto them, Is a candle brought to be put under a bushel,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set on a candlestick? (KJV)

He said to them, "Do you bring in a lamp to put it under a bowl or a bed? Instead, don't you put it on its stand? (NIV. 일반인 지칭명사 너희를 사용합니다)

, 등불이 하나의 인격처럼, 사람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그 등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이와 같이 빛을 예수님으로 은유해서 사용하는 부분이 특히 많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한복음 8:21,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이 빛이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빛이 세상에 왔으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5,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구약에서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을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1~4,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비유의 목적 중 하나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 자체가 하나의 비유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비유입니다. 성육신 자체가 신비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에는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았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를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요즘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지식의 힘이 바로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이고 매우 감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예수라는 사람을 왜곡시키고 덧붙여서 편집된 사람들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좋게 봐주어도 단지 명상과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데 좋은 마음 닦기 수단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것은 옛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최근 SBS방송에서 방영한 신의 길, 사람의 길이라는 특집프로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나 몇 년 전 나온 다빈치코드 같은 영화들이 요즘 대표적인 영적 장님들에 해당합니다. 그런 시도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 대해 반대를 하는 뭔가 새로운 접근이 있어야 인기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때문입니다.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2절의 말씀은 언뜻 보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한 병렬형식입니다. 빛이 집 안에 비췰 때 억지로 빛으로부터 숨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빛이 모든 것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비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숨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우리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믿는다고 하면 저절로 모든 말씀이 이해되나요? 이해된 것이 그 말씀대로 살아지나요?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24절과 25절의 말씀으로 이 등불의 비유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즈음에 달란트비유(마태복음 25)를 마음속에 떠올린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비유의 비밀을 찾으신 겁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찾아봅시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히브리서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마가복음 4장의 등불의 비유에서는 등불이 놓이는 세 가지의 장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디죠? 말 아래, 평상 아래, 등경 위입니다. 말 이란, 곡식의 분량을 한 말, 두 말 재는 말통(20L)입니다. 평상이란 침대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매트리스가 달린 침대가 아니라 그냥 나무로 만들어진 침상입니다. 등경이란 촛불이나 호롱불을 놓는 곳인데 주로 집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높은 곳입니다. 주로 벽이나 가운데 기둥에 설치합니다.

만약 등불을 말 아래 둔다면 어떤 상황입니까? 더 이상 불이 필요 없어서 불을 끌 때입니다. 좁은 공간 안에 갇힌 등불은 산소가 없어서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등불이 평상 아래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잘못하면 화재가 날겁니다. 하나는 불이 없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이 너무 많이 생겨 등불이 아니라 재앙이 됩니다. 등경 위에 놓이는 것이 등불의 제 위치입니다.

24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 신자들도 그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기 어려움을 설명합니다. 지난 시간의 네 가지 밭 혹은 네 가지 땅의 비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너무 굳어있으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혹은 깊이가 너무 얕아서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혹은 다른 염려와 유혹에 가려져 싹트던 곡식이 자랄 수 없습니다. 적당한 밭에 뿌려진 씨앗이 제대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등불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 등불이신 예수님이 몇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유를 비롯한 깊은 말씀을 그들에게만 설명해 주셨습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여기에서 혼자 계실 때란, 단지 예수님 혼자가 아니라 많은 무리들과 떨어져서 오직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34절의 혼자 계실 때개인적으로 혹은 비밀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 된 자신의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나누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빌립보서 2:15~16,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1:1~3,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이제 여러분이 등불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작은 등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들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정작 깨닫게 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동일한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위해서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비추이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기름이 되고 심지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5:18).

주님은 홀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홀로 고독을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죽을 때 우리의 등불이 탑니다. 그리고 빛을 발합니다. 세상을 밝히고 또 다른 제자들에게 그 빛이 비추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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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For School: Afghan Girl Struggles To Get Education

Last night, PBS aired Wide Angle's Time For School 3, a documentary series that follows seven school children from around the world, like 16-year-old Shugufa, whose education may be cut short by Taliban attacks and household obligations.

Time For School is a 12-year documentary project about seven children from different countries who are struggling to get a basic education. The first two installments, Time For School and Back To School (both of which are available online) aired in 2004 and 2006 introduced the children as they started school and then checked up on them two years later. The new film, Time For School 3, revisits the students, who are now teenagers, in two episodes airing last night and on September 9.

73 million children around the world don't attend school, and of these, two thirds of those children are female. Though more Afghan children are enrolled in school than ever before, one third of the country's children are still not in school and, again, most are girls. Shugufa is an exception because her father, who is an assistant doctor, believes in educating his daughters. When Shugufa was very young the family lived in a refugee camp in Pakistan for four and a half years to escape Taliban rule. Though the Taliban is no longer technically in control, the group's attacks against women's education have grown worse in the past few years; last year, violent attacks closed down more than 600 schools in the country and Shugufa's school has been forced to tighten security.

Still, Shugufa dreams of becoming an engineer, a journalist, or a doctor. In the clip below, it's clear that Shugufa has a much different attitude toward education than many American children. "School sets you on the right path. Who doesn't love school?" she says.

Aside from the threat of Taliban attacks, what may ultimately put an end to Shugufa's education is the fact that girls are expected to do housework. There are 13 people in Shugufa's family and she and her sisters have to work for several hours in the morning before school, and do more chores when they return. The boys around them? The get to play. "I'm up to my neck in household chores and I have to finish all of them," says Shugufa, " My problem is that I don't have enough time to study."




Shugufa has already received more education than many Afghan girls — by age 16 three out of four have already dropped out of school. As American children are lamenting the end of summer vacation and returning to school now, one of the most striking themes in Time For School is actually how much we take education for granted.

The Time For School series is set to continue visiting the seven children through 2015, which is the date they should graduate and also the U.N.'s target date for achieving universal education. According to the U.N.'s website, the goal is to "ensure that all boys and girls complete a full course of primary schooling." While there are millions of children around the world desperate to learn like Shugufa, sadly after watching her story it's hard to imagine that many will be able to overcome the tremendous hurdles to their education by then.

From: http://jezebel.com/wide-angle-time-for-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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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2. 비유의 비밀

 

마가복음 4:1~20,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같은 내용인 누가복음을 병행 본문으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5~15,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네 가지 밭의 비유는 먼저, 말씀이 결실을 맺는 비율(예수 믿어 구원 받는 수)이 극히 적지만 큰 결실이 있기 때문에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네 가지 밭의 비유, 마지막 좋은 밭을 제외하고는 세 가지 밭들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비유할 수 있기도 하지만, 이 모든 밭이 넷으로 나누어진 다른 상황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가 구원 받은 사람의 이야기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냐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 있는 이야기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 말씀 앞에 나와 있는 우리를 향한 비유입니다. 즉 말씀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의해 우리는 네 가지 밭을 수시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812~13절의 말씀 중 믿는다는 단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밭의 비유에서 똑같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가 이 세상 신, 곧 마귀가 그 마음 문을 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지만, 한편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누가복음 18: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음으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체험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구원 받는 문제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가지 밭 혹은 땅의 비유의 말씀으로 우리가 늘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길가(단단한 흙)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가의 흙이 단단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발로 밟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 문을 닫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에 너무 많이 내어주어 우리의 영혼이 너무 많이 세상에 밟혀지게만들어 버린 경우에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 많이 세상에 내어주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2. 돌밭(흙이 얇은 밭)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외적인 문제(환난, 핍박)에 부딪쳐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환난은 우리의 얄팍함을 나타내어 줍니다. 환난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척도입니다.

 

이들은 때로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간입니다. 환난, 핍박이 올 때 믿음을 버립니다. 뿌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8:13에는 잠시 믿는다고 했습니다. 원하기는 늘 충만하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의지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이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교회를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믿음을 따라 살기를 원할 때, 환난이나 어려움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하나님을 향한 의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3. 가시떨기(가리워진 흙)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이 경우는 내적인 문제(염려, 유혹, 욕심)에 어두워져 결실을 못하는 경우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가시떨기에 뿌리어진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환난은 사탄의 두 번째 강한 무기이다. 첫 번째로 강한 사탄의 무기는 물질이다.”

 

4. 좋은 땅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밭은 앞의 세 가지를 다 이겨내는 밭입니다. 저절로 좋은 밭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의 최고라는 생각과 의지가 있는 사람은 길가와 같은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사람이 돌짝밭도 이겨냅니다. 세상의 유혹과 물질의 유혹도 이겨내야 가시떨기 같은 상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거름이 되고 두엄이 되어 좋은 밭으로 만들어 갑니다.

 

예화: 공산 베트남 소속 민병대원 바이의 이야기

베트남 전쟁 당시 바이라는 청년은 어렸을 때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불행한 경험 속에서 정부군과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습니다. 어느 날 베트남 정부군 소속 병사를 사로잡아 그를 처형하기 직전 마지막 소원을 들을 때였습니다, 그 병사가 자기 윗주머니의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들어 주게 됩니다.

바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그때 미군의 헬리콥터가 사격을 시작하여 처형 직전의 병사는 도망가고 게릴라들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바이는 동료들과 도망가는 도중 게릴라 지도자에게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질문하여 오히려 반동이라는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그렇게 같이 도망가는 중 그는 설사병에 걸려 뒤처지고 혼자 남아있게 될 때 갑자기 앞에서 폭음이 들렸습니다. 먼저 가던 동료들은 몰살당하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바이는 4년 동안 계속 그 다음 예수가 무엇이라고 말했을까?”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기 직전 가장 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내용이 그 사람의 생명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후 전쟁이 끝난 후 바이는 우연히 성경책을 얻게 되어 읽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도 어느 날 심기어진 작은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자신만의 간증과 신앙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남기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자라고 열매 맺기를 위해 기도하시고 신앙을 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겨우 두 배의 결과가 나와도 대박이라고 하면서 그 결과를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결실은 100배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어 놓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믿음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자존심, 욕심, 자만 같은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좋은 땅이란 사람 사는 환경이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반대로 복음이 자라기 좋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이 자라는 땅은 고난의 땅이요 피 흘리는 땅입니다. 신앙을 위한 고민과 자신과의 싸움의 땅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눈물로 자라고 수고함으로 자랍니다. 그러나 열매가 거두어질 때에는 커다란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100배의 결실이고 이 천국의 기쁨에 주님은 여러분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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