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악마와 천사를 본 경험을 적어보겠습니다.
 
1. 악마를 보았다
 
30년전 폐결핵으로 고생할 때입니다. 원래 결핵이 사람의 에너지를 잡아먹는 질병입니다. 고통보다도 만사에 기운이 빠지게 합니다. 밤에 잠이 들면 비몽사몽간에 헛것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잠을 자는데 가위에 눌려서 제 몸에서 영혼이 떠오르는 경험을 했습니다. 놀라서 아무리 소리질러도 소리도 나지 않고 다시 영혼이 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약 30센티쯤 누워있는 상태에서 붕 떠올랐는데 마치 죽을 것 같았습니다. 
 
런데 머리맡 가까이에 어린이 체구 정도의 새까만 두 악령이 앉아서 서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데려갈까 말까, 데려갈까 말까." 기겁할 내용이었습니다. 내 마음 속으로는 "주여!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를 외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영혼이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육체로 깨어나서 정신을 차리고보니, 악령들의 소리와 방안의 시계초침 소리가 어우러져서 영혼 속에 메아리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데려갈까(똑), 말까(딱)."
그렇게 죽을뻔 하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었습니다.
 
 
2. 천사를 보았다
 
얼마전(5월 13일) 무주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종탑을 세우다가 종탑이 균형을 잃고 쓰러져서 잡고 있던 저를 덮친 것입니다. 그날은 주일이라 제가 예배설교를 담당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예배실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18:10이고 제목은 "그들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소자를 업신여기지 않고 다름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리라는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다가 잠깐 졸았던 모양입니다. 제 오른쪽으로 어떤 두 사람의 형체가 휙하고 날아 내려왔습니다. 저는 엎드려 있었고 눈으로 본 상태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양을 알 수 없었지만 색체는 옅은 갈색의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제게 좋은 호감을 발산했습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니 그 존재들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놓고 설교내용을 쓰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도와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밖에서는 선배가 그 전날 세워놓은 종탑을 다시 손보고 있었고, 그 탑은 이미 약간 균형을 잃고 있었습니다. 쓰러지지 말라고 누군가 붙잡아 주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나무탑을 잡았고, 선배가 망치로 치자 다시 균형을 잃고 탑이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살아난 것이 기적입니다. 그 사고로 갈비뼈 2개가 부러지고, 목디스크 증상이 발생해서 왼쪽 어깨와 팔, 손가락까지 이어지는 신경에 손상을 입었고, 가슴과 척추에 충격을 입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정도 무게에 눌렸다면 아마 가슴뼈가 함몰되거나 머리가 깨져야 정상일 것입니다. 다만 흉강에 공기가 차는 기흉이 있어서 폐안에 튜브를 박고 공기를 빼는 치료를 받았습니다. 허리에 구멍을 뚫었는데 예수님처럼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약 10일간의 입원치료를 받고 현재 3주차에 병원 치료는 마치고 저절로 뼈가 붙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원 중에 너무 힘들어서 순간적으로 잠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3번 정도 천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제 가슴을 얼싸안아 주었습니다. 때로는 오른팔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때는 하얀색이었습니다.
 
그 사고가 날 것을 알고 천사가 돕고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그런 사고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고통은 없었겠지만 감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자마다 천사가 그 옆에 있습니다. 아무리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천사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눈에 늘 보이는 천사가 있죠. 나의 가족입니다. 아내이고 남편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입니다. 내가 고통 받을 때에도 그들의 사랑이 있기에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이 악마처럼 보일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은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랑의 가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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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간 자들이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만약에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예수를 믿지도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영혼이 죽자마자 지옥에 간다면 그들의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악을 쓰며 소리를 '힘차게' 지를 수 있을까?


그렇게 악을 쓰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옥의 고통이 약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나도 얼마전 사고로 극한의 고통을 경험했는데 그 순간 온몸이 경련으로 떨리고 말을 거의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통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지옥의 고통이라면 내가 겪은 그 고통보다 더 심할 것이다.


사람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를 때에는 그 소리를 만들기 위해 온 몸의 에너지가 다 집중이 된다. 그래서 엄청난 고통이 있을 때는 악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진실씨의 지옥의 목소리라는 음성파일을 들어보니 신체적 고통이 없거나 매우 약한 상태의 사람이 즉 지옥의 끔찍한 고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연기를 한 것이다.


기독교에는 성령체험이라는 신비한 현상이 있다. 죽을 병이 낫기도 하고(신유)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한다(방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하시어 신앙을 갖게하신다. 그리고 그 현상을 통해 부흥을 가져오기도 하고, 교회라는 단체에 소속한 신자들이 서로 섬기고 협력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성령체험이나 은사운동은 어느 개인이나 교회를 주목시키기에 너무 효과가 좋은 방법이기에 인위적으로 조작되기도 한다. 분위기와 최면술적 기교로 집회 중에 인도자가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무의식적으로 뒤로 넘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병이 나은 것 같은 심리적 위안과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대중에 대한 압도적인 심리적 지배력으로 직통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는다. 몇 년 전에는 금이빨사건이라는 일도 있었다. 


단지 성경과 교리만을 가지고 그런 현상의 진위를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그 현상의 최종 권위자를 하나님께 두느냐 그 현상을 유발하는 인간에게 두느냐이다.


장로교의 뿌리인 칼빈이 하나님의 작정과 은헤로 인한 구원을 주장했다고 지옥에 갔다느니, 한경직 목사가 일제시대 때 한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자들의 거짓이 일찍 드러났기에 다행이지만 만약 좀 더 오래 갔더라면 그들은 마침내는 누가 지옥에 갔느냐 안갔느냐는 영매와 같은 대접을 받게될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지옥에 계신가요?"라고 궁금해하지 않을 자식이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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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1. 요한의 침묵, 왕의 침묵

 

마가복음 6:14~29,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누가복음 23:6~12,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시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헤롯(헤롯 대왕), 그 뒤를 이어 어린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롯 아켈라로(유대지역의 분봉왕), 빌립(요단 동편의 북동부 지역 분봉왕), 헤롯 안디바(세례 요한 처형,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1(12, 야고보를 처형, 베드로 투옥, 신의 소리라는 칭송을 듣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여 충이 먹어 죽음), 아그립바 2(25, 로마로 가려는 바울을 신문) 모두 6명입니다.

 

그중 헤롯 안디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고 빌라도의 요청으로 예수님을 신문한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들(10명의 부인)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3명의 분봉왕 중 하나)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과 그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앞 길을 예비하기 위해 살던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죽인 사람은 헤롯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달게 들었다"는 표현은 그가 요한의 말을 긍정하고 거의 믿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권력자들의 죄에 대해 거침없이 외치고 회개를 선포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의 내용인데도 헤롯왕은 받아들였습니다.

 

헤롯의 그런 행동을 보면 아마 그는 이중적인 성품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과 자신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어 열등감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로마의 힘에 의지하여 부분적으로 나마 이스라엘의 왕노릇을 했지만 세상 권력을 비웃는 차가운 성격이었습니다. 종교성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세상의 정욕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략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복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으로 결혼했습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그와 헤로디아를 비난했습니다. 요한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일은 그가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가려져야 그리스도가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헤롯은 요한을 좋아했지만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헤로디아는 기회를 잡아 자신의 딸의 춤으로 왕의 환심을 사게하고 그 대가로 요한의 목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요한을 영원히 침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죽이기 전, 왕은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6:26,

왕이 심히 근심하나(perilufos)...

 

이 단어는 우연히도 헤롯이 훗날 죽게 한 또 다른 사람이 죽기 전날 밤에 한 근심과 같은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헤롯의 멸시와 무관심을 받고, 헤롯의 근심과 비교 안 되게 깊은 영혼의 고민을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perilufos)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헤롯의 근심은 한 가닥 남아있는 양심의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근심을 따라, 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의 체면과 권력을 위해 요한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날 밤 이미 죽음을 아시고 자신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근심하셨습니다.

 

헤롯은 왕으로서 왕실과 가까이 있는 사두개파의 영향(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을 많이 받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듣고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혹은 죽은 선지자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라도 자신들은 그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로 미신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도 하는 것이 믿음 없는 사람들의 진실입니다.

 

그는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양심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체면과 권력에 자신의 마지막 양심까지도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양심과 주관을 버리고 표를 얻기 위해, 권세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세를 따른다는 명목으로 부침하는 군중의 흐름만을 따라가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려 근심하나 양심을 무시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이적의 힘이나 행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삶과 가진 것들이 더 아깝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 헤롯이 대표합니다.

 

그는 요한의 목을 베어 버려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마지막 남아있던 종교심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요한이 생전에 늘 말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알기를 원했던 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흥밋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변했습니다.

 

1:24에서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존경과 믿음의 사이는 우주의 간격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문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의 유일한 흥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적 행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침묵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침묵하셨습니다(23:9, 참고 막 15:5).

 

누가복음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마가복음 15: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계속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언젠가는 올무에 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처럼, 가족 때문에, 정욕 때문에, 명예나 경력 때문에 진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그분의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지키려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생명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들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양심으로 근심하여 믿음에 이르십시오.

 

고린도후서 7:10~11,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여러분의 양심에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 그 때가 우리가 그 말씀과 복음의 가치를 무시할 수 있는, 마치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들을 수 있는 카세트나 라디오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이면 그것으로 여러분의 양심에서는 더 이상 복음이 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가려져 마음을 닫으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기회는 헤로디아의 기회처럼 악한 의도입니다.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는 언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뭔가 변할 기회가 있을 것을 바라지만 기회의 때(kairos)는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와 있습니다.

 

헤롯처럼 자기의 육신의 소욕의 기회, 기회(eukairos) 좋은 날을 찾으시겠습니까?

 

마가복음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마태복음 26: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eukairos)를 찾더라(14:11)

 

누가복음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로마서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지금이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입니다. 그 복음을 침묵시키면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음성도 침묵하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천국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

마가복음 30.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4장의 4가지 비유에 이어, 5장에서는 4가지 이적이 나오면서 점점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의 주제는 무기력한 인간 존재의 모습에서 또 죽음에서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배척을 보여주어 앞으로의 제자들의 사역과 교회의 모습이 세상에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암시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안다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여 스스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을 사용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우리는 혹여 우리의 편견과 익숙함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인간적인 자랑과 영광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는 겉돌게 하며 살지는 않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주께서 이런 우리를 오히려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돌아보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마가복음 5장에 언급된 이적 기사들은 거라사 지방의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예수께 나아온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거라사 광인, 혈류증 여인, 회당장 야이로)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엄청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무서워 떨고 있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렸던 자는 비록 처음에는 자기의 의지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지만 고침을 받고 고향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실낱같은 병 고침의 희망과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이나마 잡아보겠다고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부족한 믿음이지만 예수님만이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이에 비해 지금 우리가 다룰 막 6장의 장면(6:1~6)은 이러한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권능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은 불신앙 때문으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을 통해 독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반응을 보게 되는데 이들 두 반응은 다음 장면 가운데 묘사된 제자들의 전도(선교) 사역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합니다(6:11~13).

 

결론적으로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정반대의 구도로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제자들(교회)의 전도(선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이 어떠할 것인지를 성공과 실패, 수용과 반대, 이해와 오해의 대조적인 두 반응으로 잘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이 언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어 규례에 따라 회당에 들어가셨고 거기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회당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되었으나 예수님의 신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의 출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를 배척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 중에 안식일을 맞아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다고 합니까? 2절에 놀라”, 놀랐습니다.

 

마가복음 6장과 유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좀 더 자세히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6~30,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2)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2절에서는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즉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같은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다른 두 사건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결론을 쉽게 옮기자면, “어리벙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에 대한 소문을 또 전해 듣고 2절 이하에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라 하면, 지역공동체에서 종교의식과 종교교육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정식으로 랍비가 되는 훈련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향 사람들이 다 아는 목수였습니다. 당시 목수라는 말은 나무만 만지는 일뿐 아니라 다른 다방면의 기술자’(craftsman)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흔한 노동자였지 학자나 선생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최소 10년 이상을 목수로 일했을 것이고, 예수님이 만든 가구나 혹은 고친 물건들이 한 두 개 정도 있는 집들도 꽤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를 선생이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호칭은 당시 좋은 호칭이 아니라 합니다.

 

그들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즉 특별하게 보이는, 남들과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종교나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해 그런 비슷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좋다” “유명하고 학위가 있는 목사가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교회가 이사할 자리를 찾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다니다 보니, 문을 닫는 작은 교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너무 교회가 많고 경쟁적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부터 번듯하게 지어놓고 시작하는 교회들이 그래도 성장하는 것을 보면, 작은 교회를 기피하는 것도 최근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 땅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선입견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셨다고 합니까?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오히려 더 낮추어진 모양으로,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 씩 짝을 지어 전도로 제자들을 내어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사도라 불렸고 초대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전도를 할 때, 제사장들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러할 때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들어 논리적으로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4:13~14,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범인(凡人)이란 말은 평범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호칭했던 이 사람입니다. 교육받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한 어부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특별히 정식으로 교육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들은 하나같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을 통해 시작한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학벌도 지식도 가문도 좋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 교회 건물을 찾고, 교육 많이 받은 목사를 찾지만, 하나님은 다른 교회, 다른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깊이를 재시지, 숫자를 세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 사람들의 방법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32천명의 군사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지만, 하나님은 300명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깊이를 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25평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을 얻어 놓고, 또 이것저것 부족한 것을 보고 한숨을 쉬겠지만, 하나님은 그 25평의 건물을 복사하듯이 옆으로, 옆으로 계속 연결시켜 주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원본의 깊이가 어떠하냐에 달려있겠지요.

 

그러면, 그 깊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준비입니까? 우리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제자들이, 사도들이 자기들을 잡아 가두려는 유대인들의 협박에도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심을 증거하고 오히려 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열심히 성경과외공부를 해서도 아니고, 미리 문장을 외워서 말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로역정이라는 신앙소설을 남긴 분입니다. 당시 영국왕 찰스 2세는 자기는 천주교인인데(모친이 프랑스 출신) 그것을 숨기고 천주교를 영국에 심기위해 신교를 핍박했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전하는 존 번연의 신교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존 번연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루는 감옥에 갇힌 존 번연에게 어린 딸이 면회를 왔습니다. 딸은 너무 어려서 아빠가 왜 감옥에 있어야 하고 자기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죠. 어린 딸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Daddy, Daddy, come home." 존 번연은 나중에 그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그 말을 듣는 것이 자기로서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감옥에 몇 번 갇히는 중에 한 번은 풀려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tinker 였습니다. 우리말로 땜장이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직업이 냄비 고치는 땜장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당시에 얼마나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겠습니까.

한번은 존 번연 때문에 골치 아픈 찰스 2세가 당시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였던 존 오웬이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존 오웬은 벌서부터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에도 참여한 사람이고 뛰어난 청교도 신학자로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가 쓴 23권짜리 전집은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은 안되었지만 그 전집에는 당시 청교도로서는 드물게 성령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학식으로 당시 비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학문이라고는 전혀 없는 땜장이 존 번연의 설교를 들었다는 소문은 청교도가 미운 왕에게는 통쾌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왕에게 어느 날 존 오웬이 편지를 썼습니다. “전하, 만약 제가 그 땜장이의 설교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저의 모든 학식을 버리겠나이다.” 물론 존 오웬도 역사에 남는 훌륭한 신학자요 설교가로 분류되는 분입니다만 그는 존 번연을 자기보다 더 높이 세웠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즉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고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상식으로 마리아가 사생아를 낳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하! 그래, 우리는 이 자가 누군지 잘 알아!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잘 알지. 그런데 그가 뭐가 어떻다는 거야? 어디서 사기꾼 기술을 좀 배우고와서 이제 고향에서 위신을 세워보겠다는 말이로군.

 

우리말로 배척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의 스캔들로도 말이 전하여진 σκανδαλίξοντο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감정이 상하다, 불쾌하게 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그 헬라어의 뜻은, “걸려 넘어지는 돌에서 유래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의 선입견과 상식으로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이나 가시떨기의 모습과 같은 사람들처럼 지혜와 권능에 대해 잠시 놀라지만 신앙(의 뿌리)이 없기 때문에 세상견해에 의해 곧 넘어지는”(σκανδαλιζονται) 자들(4:17)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잘 안다고, 오래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잘못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쌓아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또는 당연시할 때가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증상입니다.

 

더운 여름날 어느 농부가 호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농부는 하나님도 무심하시다. 어찌하여 튼튼한 나무에는 쥐방울만한 호두를 열리게 하시고, 저 연약한 덩굴에는 커다란 호박이 열리게 하셨을까. 참으로 불공평하시구나.’ 생각하며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불이 번쩍하여 눈을 떴습니다. 호두가 머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잠에서 깬 농부는 옆에 있는 호박을 쳐다보며 만약 저 호박이 이 튼튼한 나무에 달렸다가 머리에 떨어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하나님께 감사했답니다.

 

때때로 우리는 눈앞의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이런 것을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고향 동네 사람들도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예수님을 무시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기록과 같이 고향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사렛에서는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소수의 병자만 고침을 받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가게 됩니다. 이적에 대한 놀람만 남아있지 참된 신앙이 없는 그곳은 기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예수가 떠나 버린 곳”(cf. 6:11)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에 반응하십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에 예수님이 오히려 놀라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의 믿음에 어떻게 반응하고 계실까요?

나의 신앙이 하나님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과거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고, 지금도 그 성장의 관성이 조금 남아서 계속 성장하는 약간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성장의 배경에는 우리가 믿을 수 없게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분의 존재와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과 기복 추구의 어두운 그림자가 상당 부분 성장의 동력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새로 이사 갈 교회 처소에 전기시설이 아직 안되어서 골치입니다. 벽에 콘센트는 버젓이 있는데 전기가 안 통합니다. 즉 그 건물이 준공검사를 받으려고 모양만 전기시설을 했지 벽의 콘센트가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기는 전선이 연결된 곳으로만 흐르지, 전선이 연결되지 않은 곳으로는 도저히 흐를 수 없습니다. 전기가 통하려면 침 바르면 되나요?

 

전선이 연결 안 된 곳으로는 전기가 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못 흐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믿음을 고백함이 없는 곳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를 수 없습니다.

 

민수기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인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이미 얻은 복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뜨겁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특히 부모님 때부터 예수님을 믿거나,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서 복음과 주님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사람이 주님을 배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flowers are dying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But come y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Ti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

And if you come, when all the flowers are dying
And I am dead, as dead I well may be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And I shall hear, tho' soft you tread above me
And all my dreams will warm and sweeter be
If you'll not fail to tell me that you love me
I'll simply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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