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0.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4장의 4가지 비유에 이어, 5장에서는 4가지 이적이 나오면서 점점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의 주제는 무기력한 인간 존재의 모습에서 또 죽음에서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배척을 보여주어 앞으로의 제자들의 사역과 교회의 모습이 세상에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암시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안다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여 스스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을 사용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우리는 혹여 우리의 편견과 익숙함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인간적인 자랑과 영광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는 겉돌게 하며 살지는 않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주께서 이런 우리를 오히려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돌아보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마가복음 5장에 언급된 이적 기사들은 거라사 지방의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예수께 나아온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거라사 광인, 혈류증 여인, 회당장 야이로)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엄청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무서워 떨고 있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렸던 자는 비록 처음에는 자기의 의지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지만 고침을 받고 고향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실낱같은 병 고침의 희망과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이나마 잡아보겠다고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부족한 믿음이지만 예수님만이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이에 비해 지금 우리가 다룰 막 6장의 장면(막 6:1~6)은 이러한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권능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은 불신앙 때문으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을 통해 독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반응을 보게 되는데 이들 두 반응은 다음 장면 가운데 묘사된 제자들의 전도(선교) 사역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합니다(막 6:11~13).
결론적으로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정반대의 구도로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제자들(교회)의 전도(선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이 어떠할 것인지를 성공과 실패, 수용과 반대, 이해와 오해의 대조적인 두 반응으로 잘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이 언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어 규례에 따라 회당에 들어가셨고 거기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회당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되었으나 예수님의 신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의 출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를 배척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 중에 안식일을 맞아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다고 합니까? 2절에 “놀라”, 놀랐습니다.
마가복음 6장과 유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좀 더 자세히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6~30,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2)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2절에서는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즉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같은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다른 두 사건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결론을 쉽게 옮기자면, “어리벙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에 대한 소문을 또 전해 듣고 2절 이하에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라 하면, 지역공동체에서 종교의식과 종교교육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정식으로 랍비가 되는 훈련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향 사람들이 다 아는 목수였습니다. 당시 ‘목수’라는 말은 나무만 만지는 일뿐 아니라 다른 다방면의 ‘기술자’(craftsman)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흔한 노동자였지 학자나 선생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최소 10년 이상을 목수로 일했을 것이고, 예수님이 만든 가구나 혹은 고친 물건들이 한 두 개 정도 있는 집들도 꽤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를 선생이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호칭은 당시 좋은 호칭이 아니라 합니다.
그들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즉 특별하게 보이는, 남들과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종교나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해 그런 비슷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좋다” “유명하고 학위가 있는 목사가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교회가 이사할 자리를 찾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다니다 보니, 문을 닫는 작은 교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너무 교회가 많고 경쟁적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부터 번듯하게 지어놓고 시작하는 교회들이 그래도 성장하는 것을 보면, 작은 교회를 기피하는 것도 최근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 땅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선입견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셨다고 합니까?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오히려 더 낮추어진 모양으로,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 씩 짝을 지어 전도로 제자들을 내어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사도라 불렸고 초대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전도를 할 때, 제사장들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러할 때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들어 논리적으로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4:13~14,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범인(凡人)이란 말은 ‘평범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호칭했던 ‘이 사람’입니다. 교육받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한 어부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특별히 정식으로 교육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들은 하나같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을 통해 시작한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학벌도 지식도 가문도 좋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 교회 건물을 찾고, 교육 많이 받은 목사를 찾지만, 하나님은 다른 교회, 다른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깊이를 재시지, 숫자를 세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 사람들의 방법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3만 2천명의 군사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지만, 하나님은 300명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깊이를 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25평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을 얻어 놓고, 또 이것저것 부족한 것을 보고 한숨을 쉬겠지만, 하나님은 그 25평의 건물을 복사하듯이 옆으로, 옆으로 계속 연결시켜 주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원본의 깊이가 어떠하냐에 달려있겠지요.
그러면, 그 깊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준비입니까? 우리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제자들이, 사도들이 자기들을 잡아 가두려는 유대인들의 협박에도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심을 증거하고 오히려 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열심히 성경과외공부를 해서도 아니고, 미리 문장을 외워서 말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년∼1688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로역정이라는 신앙소설을 남긴 분입니다. 당시 영국왕 찰스 2세는 자기는 천주교인인데(모친이 프랑스 출신) 그것을 숨기고 천주교를 영국에 심기위해 신교를 핍박했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전하는 존 번연의 신교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존 번연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루는 감옥에 갇힌 존 번연에게 어린 딸이 면회를 왔습니다. 딸은 너무 어려서 아빠가 왜 감옥에 있어야 하고 자기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죠. 어린 딸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Daddy, Daddy, come home." 존 번연은 나중에 그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그 말을 듣는 것이 자기로서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감옥에 몇 번 갇히는 중에 한 번은 풀려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tinker 였습니다. 우리말로 땜장이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직업이 냄비 고치는 땜장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당시에 얼마나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겠습니까.
한번은 존 번연 때문에 골치 아픈 찰스 2세가 당시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였던 존 오웬이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존 오웬은 벌서부터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에도 참여한 사람이고 뛰어난 청교도 신학자로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가 쓴 23권짜리 전집은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은 안되었지만 그 전집에는 당시 청교도로서는 드물게 성령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학식으로 당시 비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학문이라고는 전혀 없는 땜장이 존 번연의 설교를 들었다는 소문은 청교도가 미운 왕에게는 통쾌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왕에게 어느 날 존 오웬이 편지를 썼습니다. “전하, 만약 제가 그 땜장이의 설교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저의 모든 학식을 버리겠나이다.” 물론 존 오웬도 역사에 남는 훌륭한 신학자요 설교가로 분류되는 분입니다만 그는 존 번연을 자기보다 더 높이 세웠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즉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고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상식으로 마리아가 사생아를 낳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하! 그래, 우리는 이 자가 누군지 잘 알아!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잘 알지. 그런데 그가 뭐가 어떻다는 거야? 어디서 사기꾼 기술을 좀 배우고와서 이제 고향에서 위신을 세워보겠다는 말이로군.
우리말로 “배척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의 ‘스캔들’로도 말이 전하여진 ἐσκανδαλίξοντο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감정이 상하다, 불쾌하게 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그 헬라어의 뜻은, “걸려 넘어지는 돌”에서 유래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의 선입견과 상식으로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이나 가시떨기의 모습과 같은 사람들처럼 지혜와 권능에 대해 잠시 놀라지만 신앙(의 뿌리)이 없기 때문에 세상견해에 의해 곧 “넘어지는”(σκανδαλιζονται) 자들(막 4:17)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잘 안다고, 오래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잘못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쌓아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또는 당연시할 때가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증상입니다.
더운 여름날 어느 농부가 호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농부는 ‘하나님도 무심하시다. 어찌하여 튼튼한 나무에는 쥐방울만한 호두를 열리게 하시고, 저 연약한 덩굴에는 커다란 호박이 열리게 하셨을까. 참으로 불공평하시구나.’ 생각하며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불이 번쩍하여 눈을 떴습니다. 호두가 머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잠에서 깬 농부는 옆에 있는 호박을 쳐다보며 만약 저 호박이 이 튼튼한 나무에 달렸다가 머리에 떨어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하나님께 감사했답니다.
때때로 우리는 눈앞의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이런 것을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고향 동네 사람들도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예수님을 무시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기록과 같이 고향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사렛에서는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소수의 병자만 고침을 받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가게 됩니다. 이적에 대한 놀람만 남아있지 참된 신앙이 없는 그곳은 기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예수가 떠나 버린 곳”(cf. 막 6:11)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에 반응하십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에 예수님이 오히려 놀라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의 믿음에 어떻게 반응하고 계실까요?
나의 신앙이 하나님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과거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고, 지금도 그 성장의 관성이 조금 남아서 계속 성장하는 약간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성장의 배경에는 우리가 믿을 수 없게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분의 존재와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과 기복 추구의 어두운 그림자가 상당 부분 성장의 동력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새로 이사 갈 교회 처소에 전기시설이 아직 안되어서 골치입니다. 벽에 콘센트는 버젓이 있는데 전기가 안 통합니다. 즉 그 건물이 준공검사를 받으려고 모양만 전기시설을 했지 벽의 콘센트가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기는 전선이 연결된 곳으로만 흐르지, 전선이 연결되지 않은 곳으로는 도저히 흐를 수 없습니다. 전기가 통하려면 침 바르면 되나요?
전선이 연결 안 된 곳으로는 전기가 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못 흐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믿음을 고백함이 없는 곳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를 수 없습니다.
민수기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인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이미 얻은 복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뜨겁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특히 부모님 때부터 예수님을 믿거나,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서 복음과 주님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사람이 주님을 배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