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3.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

 

 


마가복음 6:45~56,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같은 오병이어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백성들의 열광적인 메시아니즘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메시아니즘은 아마 심각한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했다면 헤롯왕과 로마총독을 몰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왕위를 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 제자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영적인 일을 분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실 나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정치적, 군사적인 제도를 생각했습니다.

 

요즘(200812) 포퓰리즘(populism)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최근 이문열씨의 발언에서도 나타납니다. 포퓰리즘이란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치가가 실현해줌으로써 인기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 국가의 장래와는 상관없이 다수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분석이 배제되고 국가 장래를 위한 전략도 없고, 원칙도 없는 반논리적, 반시장적인 정치행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될 자격과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엄청난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고달플 때보다 더 쉽게 만족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시험에 듭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따르면 그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2. 그리스도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마가복음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으로 세상에 증거 되어야 했습니다. 권력의 힘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방법에는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이 있고, 왕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냈습니다. 제자들이 백성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유는 요한복음에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하나의 이유를 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직후에 폭풍우가 있을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 받는 종으로서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체험학습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훈련은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이미 4장에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경험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의 폭풍과 지금의 폭풍은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가, 아닌가 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될 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때에는 제자들이 자신의 인격과 의지로 예수님이 아닌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나라를 전하는 사역을 할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그들을 바다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유혹에 빠졌을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영적 체험의 뒤에는 매우 위험한 장소가 있습니다. 산을 내려 올 때는 늘 계곡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시(豫示)와 같은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과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체험한 후, 훗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사도행전 4장에서 몇 명을 전도했습니까? 오천 명입니다.

 

사도행전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마가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의 기적이자 비유입니다. 제자들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체험하고 오병이어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신으로 함께 하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바로 이 믿음을 갖도록 주님은 산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물 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물가에 내놓은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지 하고 능력을 보이려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이야기는 마태복음 14:28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가의 스승이며 마가복음의 출처인 베드로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베드로의 겸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의 스승이 베드로입니다. 그가 바다를 걸은 경험은 어찌 보면 예수님 외에 누구도 해보지 못한 특이한 이적입니다. 훗날 마태 복음서에는 기록이 되지만 베드로는 기억은 하면서도 그 기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달리 보는 것을 염려했을지 모릅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 경험의 주제가 자신의 이적 경험이나 믿음의 부족함이라는 데에 빠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이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그래서 이 마가복음을 읽어야 하는 로마의 고난 받는 성도들이 폭풍 같은 로마 황제의 박해 속에서도 주님이 보시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유혹과 고난에 쉽게 넘어지기 쉬운 우리들의 처지와 당시 폭풍 속의 제자들의 처지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래서 사도행전의 오천 명을 전도한 제자들의 영적인 승리에서도 그들은 오병이어를 기억하고 교만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조그만 영적인 성공에서도 교만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말씀은 당신이 풍요롭게 사는 능력과 재주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풍요한 중에 - 당시 감옥 안에서 얼마나 풍요했겠습니까. 정신적인 기쁨이거나 아주 적은 물질적 도움일 수도 있습니다. - 그가 깨달은 비결은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삶의 한 비밀입니다.

 

빌립보서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배고픈 중에도 배부름에 처하는 법을 아는 것은 거룩한 교훈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배부른 적이 있었지만 고기가 아직 그들 입에 있을 때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11:33).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혈기를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혼의 방탕을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들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 부요함에 대해서조차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배가 불러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만족한 우리는 천국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배고픔에 처할 줄 아는 것보다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길 바랍니다. 배부르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기도드릴 때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우리가 만족스러울 때나 폭풍 같은 시련의 때에도 동일하게 주께서 그 모든 일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힘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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