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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4.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


마가복음 6:45~56,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두 번째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 경험은, 첫 번째와 다른 상황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네 가지 비유(네 가지 밭의 비유, 등불 비유,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를 가르치신 후,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시기 위해 바다를 건너실 때입니다.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이때는 예수께서 배 안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나, 6장의 비슷한 사건인 갈릴리 바다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떨어져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 비슷한 내용의 경험을 두 번 인도하셨습니다.

 

이 두 번째 풍랑에서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동행하지 않으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했을 때의 상황을 미리 보여주시는 하나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45,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백성들의 예수님에 대한 과도한 반응과 승리감에 들뜬 제자들 사이의 분위기에서 교만과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지 않도록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재촉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사도행전 3,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그들의 복음전도로 오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을 때 관원들과 제사장들에 의해 오히려 옥에 갇히고 핍박받은 사건과 연결 지어 생각했습니다. 과거 오천 명을 오병이어로 먹인 후 풍랑을 만났을 때 자신들이 믿음의 싸움에서 실패한 경험을 기억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옥에서도 담대하게 예수가 주이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러므로 오병이어나 풍랑의 경험들은 훗날의 제자들을 위한 훈련이요 믿음의 학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 때에 가끔 이상한 경험들을 하는데, 그것은 어떤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고 급격히 진행되는 일 들입니다. 때로 그 일들이 미리 예상할 수도, 혹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진행 속도는 다른 평범한 일들보다 급박한 경우가 있습니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이유가 사람의 인위적인 개입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사용하십니다.

 

그때,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때가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의 안주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지금의 어떤 일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진행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맡기십시오.

 

하지만 그 다음의 진행과정이 우리 기준이나 소원에 맞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풍이 아니고 풍랑이기 때문입니다. 부흥할 때 반드시 시험이 있고, 환경이 변할 때 언제나 시험의 요소가 암초처럼 숨어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나 환경을 만날 때 우리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더 큰 믿음으로만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어서 가라고 재촉하십니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산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져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46,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산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라고 합니다.

 

산 위에 올라가면 우리는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다보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의 정상에 섰을 때 승리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가장 꼭대기에서부터는 내려오는 순간이고 잘못 내려오면 파멸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정상에 올랐을 때, 무언가 일을 성취하고 어떤 과정을 이루었을 때 여러분의 이름을 새긴 깃발을 휘두르지 말고 엎드리십시오. 주님께 엎드리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주님은 산 위에서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바다에서 곧 풍랑을 만나 고통을 겪을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몇 년 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 그들만 남아 복음을 전할 때를 위하여 그들이 시험이 들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 12제자를 세우기 위해 그 전날 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12~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 주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거듭나 믿음을 갖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3. 예수께서 제자들의 형편을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바다 위에서 고난을 겪는 제자들을 보셨듯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물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헉헉거리며 괴로워하는 우리를 보시고 그 고통을 당장 없애버리면 우리는 지금은 좋겠으나 결국은 우리에게도 좋지 않을 것을 아시기에 안타까워하시면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관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고통을 이기도록 하늘 위에서 간구하십니다.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또한 성령도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4. 예수께서 제자들을 돕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마가복음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요한복음 14:18~20,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함께하시겠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 혹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히 믿을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성령의 전(殿)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함께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다 혹은 약하다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하나님 보좌 옆에 계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바람에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어떻게 오셨는지 살펴봅시다.

 

1) 밤 사경 즈음이라 했습니다.

 

4경은 지금의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저녁에 배를 타고 출발해서 거의 6,7시간을 바다에서 고생했습니다. 완전히 탈진했을 시간입니다. 보통 유월절은 보름달이 뜨는 때이지만, 지금은 풍랑으로 하늘이 어둡고, 새벽이 가까워 오히려 흑암이 가장 짙은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완악할 때, 믿음이 없을 때 흔히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힘을 다 쓰고 완전히 탈진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19~20,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십여 리는 4~5km입니다. 풍랑 때문에 저녁부터 6~7시간을 노를 저어 간 거리가 10리를 겨우 넘었습니다. 제자들이 완전 탈진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돕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점입니다.

 

2)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상하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기록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유명한 일화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부침하는 사람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에 집중한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49절을 보면,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인데 그밖에 쓸데없는 소망을 헛된 망상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에게 웬 로또입니까?

 

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마가복음 6:50~52,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랐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당연한 권세와 능력을 믿지 못했기에 놀란 것입니다. 52절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권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놀란 제자들에게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내용이 비슷한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워낙 많지만 그중 한 가지만 같이 보겠습니다.

 

이사야 43:1~12,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수님이 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I am”과 같습니다. 즉 나는 나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4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자신을 믿는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이사야 43장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파도와 바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실패하고 믿음의 연약함을 주님께 보여드렸지만, 그 경험이 훗날 그들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는 디딤돌 같은 경험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세파, 세상의 파도와 바람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그것들을 모두 유익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세기의 야곱이 오랜 세월을 외삼촌 라반의 밑에 살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천사의 군대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하나임이란 두 개의 군대 진영을 뜻합니다. 즉 야곱의 한 무리와 천사의 한 무리가 평행하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보는 영적 경험을 합니다.

 

하늘 군대와 이 땅의 일들을 함께 본다는 것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심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의 일들에 너무나 집착되어 있고 또한 우리의 관심이 너무 쓸데없는 것들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우리가 신분이 상승하고 남들에게 다른 사람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세상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조차 인격적인 무시를 받아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껴도 하나님께 변함없이 여전히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경제에 미쳐있습니다. 석유 값 폭등에 이어,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불황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얼어붙었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만나는 현실이고 풍랑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의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연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들과 꽃들! 아무도 관심 없는 태양의 해돋이와 일몰의 장관들!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차고 넘쳐 보이는데 사람보기에 이 얼마나 낭비가 심해 보입니까? 사람들이 전세계의 재물과 과학지식을 사용해서 그 자연의 한 자락이나 흉내 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는 방식은 인간의 경제지식과 관념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풍랑이 거세질 때 우리는 마태복음의 하물며를 기억합시다.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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