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6. 한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사람이 제일 견디기 힘든 일은 돈이나 사랑의 배신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 인격체로, 사람으로 대접을 못 받을 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가장 견디지 못합니다.
한국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제일 높은 나라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스웨덴, 노르웨이가 그랬다고 공부한 기억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재산이 있거나 인기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그렇게 자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해서 입니다.
저는 대형 마트 같은 곳에 갈 때 기분이 나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옷을 파는 가게 옆을 지나면 판매원들이 제 옷을 쳐다보고, 구두 가게 옆을 지나면 신발을 바라보고... 자신들이 팔고자 하는 물건과 제가 갖고 있는 같은 종류의 물건을 비교할 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느낌 받으신 적 있죠? 이상하게 종업원들이 한결 같이 손님의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짓지 않고, 아이 컨택,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카트 컨택, 쇼핑 카트 안의 물건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손님이 ‘인격’으로 대접받아야 기분이 좋은데 ‘상품의 소유자’로만 취급당합니다. “뭘 샀나?” 비교 당하는 것 같아 기분 안 좋습니다. 아마 종업원들이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없거나, 아니면 판매 의욕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직업병 같은 현상 같습니다. 종업원들이 창고에서 나오면서 왜 허공에 대고 인사합니까? 손님의 눈을 바라보고 손님을 향해야지요. 대형 마트 경영진은 본인이 직접 쇼핑을 해보지 않아서 이 중요한 문제점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어떤 물건을 파는 사람이라면, 저는 손님의 물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눈을 보겠습니다. 그것이 그 손님을 대접하는 제일 좋은 태도일 것입니다.
최고의 장사꾼들은 자신이 팔고자 하는 물건의 가치와 고객의 가치를 비교평가(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고객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이나 자신보다 더 고귀한 존재로 대접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얻고 물건을 파는 방법입니다. 교회에서 전도할 때에도 그런 방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예수님의 태도를 한 번 보십시오.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이런 전도의 관점에서 완전 빵점입니다. 마트 종업원이 손님에게 무례한 수준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게서는 예수님을 찾아 온 한 여인에게 최소한의 배려나 자존심을 챙겨주는 행동이 전혀 없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랍비로 인정받았고, 그 여인은 이방인이요, 또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7:24에 의하면, 예수님과 일행이 “두로 지경”을 가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15:21)에는 “두로와 시돈 지방”이라고 하는데 두 지방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찾아 온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인” 혹은 “가나안” 여인이라 합니다. 수로보니게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곳입니다. 수로보니게의 뜻은 수리아(시리아)에 속하는 베니게(페니키아)라는 말입니다. 그곳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북쪽에는 시리아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이곳의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밀려서 쫓겨 갔던 가나안 족속의 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지방을 지나면서 한 집에 들어가시는데 그 목적이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려주지 않기 위해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한 여인, 그것도 이방 여인에 의해서입니다. 이 여인은 제대로 ‘예수 컨택’을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름 없이 그저 “한 여인”으로 지칭이 됩니다. 전설이나 어떤 기록에는 이 여인과 여인의 딸의 이름까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름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 내용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에 이 여인의 간절함과 예수님의 예상외의 쌀쌀한 태도가 더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같이 보십시다. 마태복음 15:21 이하에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 즉 이방인에게는 구원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시고, 또 “유대인에게 돌아갈 구원(떡)을 개 같은 이방인에게 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즉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생각을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틀린 말했어?”라며 듣는 사람이나 대화의 대상을 자존심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용이 옳아도 방법이나 목적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진실만큼 마음에 거슬리는 말은 없다”라는 프랑스 속담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존심 상하면 스스로 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지경을 넘어섰습니다. 자신의 생명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중에 “멍들고 피 흘리는 사람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기만 해도 급히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어디에 숨거나 가리면서 부딪치고 다쳐서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율법을 엄격히 지킨다는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 여자를 보는 것으로도 죄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멀리했습니다. 심지어 율법선생이라는 랍비들에게는 더한 율법적 요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랍비’로 불렸습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여자가 직접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규정상 랍비들에게는 매우 거북한 입장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도 만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은 사람처럼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방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제자들은, 스스로 예수님의 마음을 눈치 챘다고 생각하고 귀찮은 여자이니 돌려보내라고 응원까지 합니다.
여인은 이 모든 불가능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왜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야말로 평범하고 모든 이의 관심 밖에 있던 ‘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응답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분이 이 우주에 오직 한 분만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 어떠한 가치평가보다도 그분이 주실 은혜가 더 크고 가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그런 믿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때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의 시련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함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마 15:22)이심을 믿고 그분께 나와 엎드린다면, 때로 자신을 숨기시고(24절) 침묵하시는(마 15:23) 그분의 응답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극동방송, 기독교 유선TV, 인터넷 기독교 방송 등 유명 교회, 유명 목사의 예배 중계와 설교가 넘치는 요즘 세상입니다. 은혜 받으려면 그런 방송매체로 예배드리고 설교 들으면 됩니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딪치는 게 자존심 상해서 축도 끝나자마자 재빨리 달아나면 여러분의 영적 고통이 해결이 됩니까?
물론 교회에서는 예배와 설교로 받은 은혜가 바탕이 되지만 더욱 큰 은혜는 교회 생활 속에서 겪는 ‘실전’에서 생깁니다. 상처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신앙의 싸움에서 체험과 자람이 있습니다. 유아독존, 고상한 일인 신앙은 자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체험은 한 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의 아라비아 사막의 경험과, 평생의 온갖 고난, 교회의 오해, 죽음의 위협 같은 실전에서 그가 더 자랐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교회로 부름 받았고, 이겨내어야 할 사명이 있는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 혼자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영광을 향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조그맣고 일시적인 체면과 자존심을 얻는데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로부터 얻을, 크고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얻으시겠습니까?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38.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추수감사절) (1) | 2012.07.12 |
---|---|
마가복음 37.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시고 (0) | 2012.07.05 |
마가복음 35. 사람의 계명, 하나님의 계명 (0) | 2012.06.24 |
마가복음 34.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 (0) | 2012.06.17 |
마가복음 33.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 (0) | 2012.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