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8.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추수감사절)

 


마가복음 8:1~10,

[1]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오늘 본문의 이적 이야기는 마가복음 6장의 오병이어 이적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그 두 이야기를 구별해 나가기 위해 편의상 간단히 5천명 이야기, 4천명 이야기로 부르고자 합니다. 먼저 두 이야기의 차이를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다른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4천명을 먹이신 이 이야기는 오직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39,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2. 5천명 이야기에서는 그 5천명의 사람들이 하루 동안 예수님과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4천명은 사흘입니다(2).

 

3. 5천명 이야기에서 사용된 음식은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4천명 이야기에서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입니다.

 

4. 5천명은 유대인이었지만, 4천명은 거의 모두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5천명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했고, 4천명에서는 이방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5. 5천명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지만 4천명에서는 그냥 땅 바닥에 앉았습니다.

 

6. 5천명에서는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같이 축사하셨으나, 4천명에서는 각기 따로 축사하셨습니다. 4천명의 경우에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자 각기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란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는 뜻입니다.

 

7. 5천명에서는 남은 음식이 12바구니입니다. 작은 크기의 바구니입니다. 그러나 4천명에서 남은 일곱 광주리는 우리가 옛날 쌀집에서 본 쌀 담는 볏짚 광주리 크기입니다. 같은 단어가 바로 사도행전에서 사울이 다메섹에서 탈출할 때 타고 내려간 그 광주리입니다. 즉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큰 광주리입니다.

 

사도행전 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그러니까 4천명 이야기에서는 숫자로서는 비록 적지만 양에 있어서는 오히려 5천명 이야기보다 많이 남은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의 비슷한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또 여기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러분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기 위하신 것일까요?

 

8장의 다음 부분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두 이야기를 일부러 사용하셨고, 그 두 사건을 비교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8:19~21,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즉 주님은 5천명과 4천명을 먹이신 두 이야기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제자들은 비슷한 이적을 두 번 경험하고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이적들이 반복의 형태로 기록된 이유는 반복그 자체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아무리 똑똑한 학생이라도 단번에 기억은 해도 그 단번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는 학습이 때로 지겹고 힘들지만 그것만큼 좋은 학습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걸음을 배울 때 어떻게 배웠습니까? 어떤 사람도 석가모니처럼 태어나자마자 걸으면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하며 외칠 수는 없습니다. 서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구구단도 될 때까지 지겹게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 번의 반복 학습에서 실패했습니다. 무엇을 실패했습니까?

 

1.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천지를 뒤집어서라도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런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5천명을 먹이실 때의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15백 년 전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건을 연상시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이적을 경험하고 새로운 왕이 나왔다고 열광적인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적을 통해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떡임을 특히 요한복음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을이 베들레헴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떡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병점이라는 지명이 여럿이 있습니다. 병점도 떡거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늘의 만나의 원형이고 생명의 떡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의 근원과 공급자가 바로 예수인 것을 말씀하는 내용이 그 이적들의 이유입니다.

 

2.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갖고 계신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듯 예수님도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의 삶의 필요에도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아시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4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먹을 것을 다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여기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오지 그 분만이 우리의 영생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떡과 물고기를 떼어 나누어 주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면서 각기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한 조각씩을 제자들에게 전하십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종들의 손길을 이용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제자들의 손길을 사용하시는 방법을 원하셨습니다. 해리 포터 같은 영화에서는 식탁 위의 촛불을 한꺼번에 켤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의 접시에 동시에 같은 종류의 음식을 장만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마법 같은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장면이 마가복음 6장과 8장에 세밀하게 묘사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마가복음 8:6~7,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12바구니가 남은 5천명 이야기에서는, 12란 숫자는 특히 이스라엘 12지파를 생각나게 하고 유대인인 12 제자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4천명을 먹이고 7 광주리가 남았을 때, 7이란 숫자는 또한 성경에서 완벽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7: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출애굽기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여호수아 6:15,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마태복음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일곱 별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4천명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나라의 복을 얻을 수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똑같이 구원의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7장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이방인들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경우를 다른 유대인들 앞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명은 이방인인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여지게 되었습니다.

 

8절에, 4천명의 이방인들은 5천명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배불리 먹고도 풍족해서 음식이 남았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채워주십니다. 7광주리의 남은 음식은 12바구니보다 훨씬 많이 남은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적은 것으로도 다 채우시고도 남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떡이나 물질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적습니다. 아니 모든 것에 불가능하고 아예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다시 받은 것으로 세상에 전해보십시오. 우리의 복은 더욱 넘칩니다.

 

플라나리아라는 물속에 사는 작은 생물이 있습니다. 1~2cm 정도입니다. 아주 맑은 물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생물은 스스로도 번식을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반으로 잘라도 일주일이면 각기 잘려진 반 토막이 각각의 하나로 성장해서 두 마리로 됩니다. 이 내용이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무가 자랄 때 어떻게 자랍니까? 먼저 땅에서 새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작은 줄기에서 나뭇가지들이 갈라져 나옵니다. 즉 스스로 잘라지고 나누어지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몸이 자랄 때 어떻게 자랍니까? 몸을 이루는 세포가 덩치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포가 분열합니다. 나누어집니다.

 

믿음이 자랄 때 어떻게 자랄까요? 나누어질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이 나누어졌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상징적입니다. 어떤 고대 사형 제도처럼 몸이 여러 개로 분시 되는 형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히고 창과 가시관으로 몸이 찔리면서 그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박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미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나중에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제자들이 깨닫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생명의 떡을 세상에 나누어주며 살아야 하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은 만날 때마다 떡을 떼며 주님의 가르침과 십자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사도행전에 여러 번 기록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사도행전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도행전 27: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또한 사도 바울도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4,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리고 바울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라 합니까?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살면서 누린 것,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일부를 주님께 감사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여러분의 전부를 담아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나눔의 방법으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의 적은 것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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