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9.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마가복음 8:10~26,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성경에 ‘소경’(혹은 맹인)으로 기록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소경이 고침 받는 사건이 왜 이 본문에 등장하며 그 전후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너무 심하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이 증명해 주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엄청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의 증거를 제시하라는 요구는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정말 당연한 건가요?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증거를 듣고 보았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선언했고, 예수님 자신의 이적과 신령한 가르침을 그들이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하늘에서 오는 표적”, 말하자면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 같은 뭔가 찬란하고 보암직한 증거를 더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만약 모세의 중재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고 착각하고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 다시 그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멀리서 그의 음성만 듣고도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9:16~21,
[16]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그런데 과연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확실히 하고자 요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성경적이 아니거나 실패를 했을 경우 예수님을 잡아내기 위해서였고, 그 모든 함정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시기하는 마음과 참된 거룩을 이해 못하는 그들의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선적인 일을 꾸미는 바리새인들을 떠나 예수님과 그 일행은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마침 여행 중에 음식이 떨어져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해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오해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6장의 5천명 먹이신 일과 8장의 4천명을 먹이신 일을 하시면서 누룩의 경고 말씀을 이해 못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벳새다에서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사건과 가르침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그 흐름 속에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17, 18절의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이 그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종류의 사람들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 벳새다 소경입니다. 이 세 번째 사람인 소경의 배후에는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7:31~37에 나타났던 “귀먹고 어눌한 자”입니다. 즉 8장의 소경과 7장의 귀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은 실제적으로는 다른 각각의 사람이지만, 18절의 말씀을 보건대 같은 한 가지를 보여주는 동일한 비유입니다.
다시 세 종류의 사람들을 정리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꽉 막혀서 예수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 심적 소경이며 귀머거리입니다. 두 번째 부류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 다니지만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적인 소경입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경을 주님이 특이한 방법으로 고치시면서 제자들이 현재 어떤 영적 소경의 상태에 있는 빗대어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1. 먼저 바리새인들의 영적, 심적 소경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그 행위로 의롭게 사는 것을 신앙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순수했던 그들의 의도가 점차 자신의 신앙을 남과 비교하는 차별의 도구로 삼고, 사람에게 보여주는 외형적인 형식에 치우쳐서 권력화된 위선자들의 집단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와 하늘의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당연히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꼬투리를 찾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이적 행하심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들에게 정신적 충격은 될지언정 영혼의 감격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마음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런 영혼과 마음의 태도는 처음부터 그러했습니다. 마가복음 3:22을 기억하십니까?
마가복음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그들은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나 손길로 고쳐지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5천명, 4천명의 사람들이 단지 떡 몇 개로 배불리 먹고도 남는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일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고, 아니면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런 마음 닫힌 태도를 가진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수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설교를 들기도 하고 성경을 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내가 구원받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이 흘러가기만 하였다면, 예수님이 나의 인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라면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기에서 잠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하늘의 표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 가운데 흐르던 이야기에 의하면,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등장할 것이라는 통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시험한 사건을.
누가복음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사탄은 바리새인들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시험을 할 때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환영할만한 그럴듯한 이벤트를 생각했습니다. “만인이 바라보는 성전 위에 나타나 번지점프를 하면서 성전 앞에 착 내려앉으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라고 복잡하게 증명할 필요 없이 누구나 다 믿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왕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에게는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런 일 한 번만 하면, 3년 반 씩이나 돌아다니면서 고생하면서 오해받으면서 복잡하게 수고하고 떠들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도 필요 없겠지요?
그런 사탄의 유혹이 다시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나옵니다. “하늘의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겠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뿐입니까? “당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당신 교회에 나가겠소.” 이 요구에 화답하여 대단한 목사, 대단한 교회 건물을 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들입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이 못된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복음을 믿고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교회 겉모습을 보고, 사람의 껍데기를 보고 교회에 나가니 마니를 결정하겠다는 태도는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핑계를 대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마가복음 8:12~13,
[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저희를 떠나...
주님은 하늘을 보시며 탄식하십니다. ‘탄식하다’라는 단어 ἁναστενάξας 는 ‘천둥’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즉 ‘속에서 끓어올랐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깊은 속의 아픔이 하늘을 향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표적들을 보고도 또 올무를 씌우기 위한 표적을 구하는 저들을 보시고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향해서 예수님은 탄식하고는 그들을 떠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최후의 날에는 그들의 불신앙이 응당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증거와 말씀을 듣고서도 마음 문을 닫고 주님을 떠나 살려고 하는 이 세대에 대한 주님의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버리운 자들은 결국 어떤 기회도 없이 주님도 떠나시고 맙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의도적으로 주님을 거부하고 복음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주님께 자신의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시길 권합니다. 주님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도 다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선택은 여러분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주님을 믿고 예배하기 위해 오신 분들은 가장 고귀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2. 두 번째로 제자들의 영적 소경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침 배 안에 떡 한 개 밖에 없어서 예수님이 그 떡 하나를 가지고 실물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답답한 제자들이 그 말씀을 오해합니다. 자신들이 먹을 것이 준비하지 못해서 예수님이 기분 나쁘신가 보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기 12장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2:14~15,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10번째 재앙의 날에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하나의 절기를 삼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입니다. 이때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데 그 기간을 무교절이라 합니다.
누룩은 밀가루 음식을 부풀게 하는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이로운 곰팡이입니다. 옛날에는 쉽게 음식을 부풀리기 위해 집집마다 누룩덩어리를 준비해 놓고 사용했는데 무교절에는 그 누룩을 집 안에서 모두 없애버립니다. 이것은 아주 적은 물질이 큰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의 화학적 현상을 통해서 죄악이 얼마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지 경계하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그들의 율법형식주의입니다.
헤롯은 당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악한 왕입니다. 헤롯 집안은 대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 교회를 핍박한 자입니다. ‘헤롯의 누룩’이란 자신의 세상 권세와 욕망을 위해 진리를 저버리는 세속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조금 전,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피해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종교적인 위선과 세상 사랑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죄가 얼마든지 한 사람과 공동체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먹을 떡이 없다고 그러시는가?’ 수군댑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인 눈이 떠있지 않는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에도 이런 수준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수준을 ‘육적 상태’라고 합니다. 영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육신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미 6장에 미리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6: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음이 둔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닫혀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 다음에 질문 세례를 몇 번이나 퍼 부우십니까? 17절에서 20절까지 물음표가 들어갈 말이 몇 번인가 세어 보세요. ... 9번입니다. 저 같으면 한 대씩 쥐어박았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건망증 증상이 있는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글쎄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줄곧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잊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간(肝)이 아마 새까맣게 탔을 겁니다. 얼마나 까마귀고기를 먹은 민족인지 아예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마에, 팔목에 “들으라 이스라엘아”라며 성경구절을 붙여 놓고 보게 했겠습니까? 그렇게 해도 불순종했잖아요?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 서있는 저나, 여러분도 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갈릴리 바다 위의 제자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시편 103:1~22,
[1]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7]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8]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사람을 잊지 아니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과거에 어떤 은혜로운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서, 지금, 어떠하십니까?
과거에 주님의 예비하심을 체험하셨습니까? 그러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이 그렇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어째서 주님이 5천명 먹이고, 4천명 먹이신 이적이 마가복음에 두 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는지 여러분의 삶에서 이해가 되나요?
3.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육신의 소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벳새다의 소경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배 위에서 예수님이 떡 한 덩어리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현실 모습을 보여주는 실물 설교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기억하고 자신의 제자인 마가에게 기록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야 깨달았던 것이지요. 이제 그것을 우리 교회 성도들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마가복음 7:31 이하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 이 소경과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벳새다의 소경입니까? 귀먹고 어눌한 자는 이방인입니다. 벳새다는 유대인 지역이나 신약에서 문제가 많은 곳입니다.
마태복음 11: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 지역은 이미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 완악함이 마치 바리새인과 같은 불신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를 고치시고도 소문을 내지 말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을 고치시는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합니다. 보통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모습과 다릅니다. 대개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침을 바르고 안수하고, 또 다시 안수하시면서 그 눈이 점차 시력을 회복하는 상황이 하나하나 묘사됩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마가복음 8:23~25,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처음에 소경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마치 나무 같다고 합니다. 즉 희끗희끗해서 사람인지 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시력이 아주 낮은 수준입니다. 그의 시력은 완전히 장님은 아니지만 아직 불완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안수하셨을 때에야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모두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던 제자들은 소경의 말을 들으면서 뭔가 부끄러운 느낌을 받았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소경의 상태가 자신들과 같다는 것을 나중에는 제대로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어떤 사람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13~32,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떡을 떼어주셔야 겨우 우리는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의 몸이 뜯겨 피를 흘리셔야 겨우 주님의 사랑을 아주 적게나마 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결국 세상 만물을 보게 된 벳새다 소경처럼 우리는 지금 비록 온전히 주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나 결국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다 알지 못하고 불순종의 삶의 흔적들이 많으나 주께서 우리의 소경된 눈을 이미 고치셨으니 점차 나아질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요한계시록 22:3~4,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이 자리에 아직 주님을 모르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권합니다. 주님께 구하면 들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직 세상의 일과 염려에 마음에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지 못한 영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힌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중심을 드려 결단하십시오. 주께서 점차 우리를 주님의 제자들로 삼아 믿음을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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