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0. 십자가와 영광
마가복음 8:27~9:13,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6:13~28,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적 행하심과 말씀으로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과 십자가의 비밀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두 번에 걸친 적은 분량의 떡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과 병 고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참고.
가이사랴 빌립보:
예루살렘 북쪽 20마일, 갈릴리해 북쪽 20마일, 헐몬 산속에 있는 성. 데가볼리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중에 하나로 다메섹 남서쪽 약 80Km지점. 헐몬 남쪽의 경사가 심하며 경치 좋은 산간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1) 구약 시대 바알갓(수 11:17) 또는 바알 헤르몬(삿 3:3).
(2) 분봉왕 헤롯 빌립이 화려하게 확장하고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이사랴라 하였고 자기의 이름을 붙여 빌립보를 추가 하였다.
(3)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 했던 곳(마 16:13~16).
이스라엘의 최북단 헤르몬산의 발치에 자리 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이 BC 2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Augustus)로부터 선물로 얻은 도시로, 희랍시대에는 판(Pan) 신전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자기의 수도로 정하면서 로마의 황제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더한 가이사랴 빌립보라 칭하였습니다. 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물(초당 20㎥)이 이 도시를 적셔줄 뿐만 아니라 요단강을 통하여 갈릴리 호수로 모이게 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 북쪽 끝에 있고 페니키아, 다른 한쪽으로는 수리아와 접경을 하고 있는 변방지역입니다. 자연히 그곳은 이방 민족의 종교에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우상인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헬라 문명이 침투하자 그 우상에 심취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명 자체가 로마 황제 가이사와 분봉 왕 빌립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우상, 그리이스의 신화, 그리고 로마 황제의 신격화가 어우러진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요, 바로 그곳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27절)고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 요한,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마태복음은 예레미야 첨가)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열거한 인물들은 영웅적, 신화적, 이상적인 존재들입니다. 불의를 질타한 세례 요한, 신비로운 권능을 지닌 엘리야,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같은 모습을 예수에게서 발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과 욕망을 채워줄 구세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거룩하신 하나님, 구세주로 알지 못하고, 또 믿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맞추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 축복을 주시는 능력자, 혹은 사랑을 실천하는 휴머니즘의 화신으로 예수를 받듭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고 물으신 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절)고 물으셨습니다. 즉 온 유대 사람들이든, 가이사랴 빌립보 사람이든지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말하고 믿든지 너희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개인적인 결단과 고백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과 결단을 지닌 사람만이 교회의 일원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 누구의 도움도 그분과 나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나를 어떻게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늘 홀로 결단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올바른 대답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전 떡을 떼시어 수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시고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고 답답한 제자들을 걱정하실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었습니다.
“주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기름 부음 받으신 메시야이시고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예수님의 일부분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기대하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켜주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 영웅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사람들, 죄인들을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구원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30절 이후).
그런데 먼저 이 말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시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공적으로 공포하면 메시야를 고대하던 백성들이 로마에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십자가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이 어그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8:30~31,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합니다.
마가복음 8:32~33,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2에서는 좀 더 자세한 베드로의 말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6:22,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가복음 8:32에서 “간하다”라는 말은 3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epitimao, 꾸짖다, 경계하다, 간하다, 책망하다)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간한 것은 공손한 태도가 아니고 “감정이 드러나는 강한 제안”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후 줄곧 예수님의 언행과 행적은 십자가를 향하신 일로 발전해 나갑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부터 제자들에게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인기를 얻고 왕이 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망하고 죽겠다는 그리스도라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시면 이제는 이 민족과 세상을 한 번 돌아보셔야지요. 지금까지 당신을 따라다닌 우리는 뭡니까?”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도 이 점에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수준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와 제자는 같기도 하면서 다릅니다.
신자들은 주님을 향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원하고 가기를 원하는 곳은 주님이 원하는 곳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당시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고 죽으시겠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광이 우선이지 십자가가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33절에, 제자들을 향하여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베드로가 간곡히 말했던 것은 실은 사탄이 역사한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한 베드로가 곧 이어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신자들에게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믿음으로 한다고 했을 때, 숨어있던 자기의 의와 자기의 욕심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육에 숨어있는 자기 의는 그 모든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예수님도 이 문제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참된 제자도를 위한 십자가는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죽음입니다.
3.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의 원리는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도는 잃는 것이 복입니다. 남을 누르고 경쟁해서 이기고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신이 참된 신이라고 믿는 것이 세상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었고 인간들의 이런 욕망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리는 위선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서기 9세기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제국(후에 신성로마제국이 됨)의 샤를마뉴 황제가 있었습니다. 유럽은 로마시대 이후 황제라고 불리운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첫 번째가 되었고, 훗날 나폴레옹, 심지어 히틀러까지 이런 로마제국의 영광을 흠모하며 샤를마뉴 같은 세계 패자가 되기 원했습니다.
참고.
샤를마뉴 대제
샤를 1세, 카를 1세라고도 함. 별칭은 대제(Carolus Magnus/Charles le Grand/Karl der Grosse/Charles the Great).
742경. 4. 2.~814. 1. 28. 아우스트라시아 아헨(엑스라샤펠),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는 흔히 칼 대제라고도 잘 알려진 프랑스와 독일 지방의 옛 왕국인 프랑크의 국왕이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신자였고 그의 서유럽 통일로 인해 유럽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침입을 저지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과 영광만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난 후 나를 무덤에 묻을 때, 로마 황제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앉힌 채, 머리에는 왕관을 씌운 채로, 그리고 손에는 내가 살아서 권위를 휘두르던 황제의 홀은 내 손에 쥔 채로 장사지내라. 또 잊지 말 것은 내 몸과 어깨에 황제의 망토를 걸치고 내가 원하는 책 한 권을 펴 놓은 상태로 내 무릎위에 올려놓도록 해다오.”
마침내 황제는 주후 814년에 죽게 되었고, 그 후 약 200년의 세월이 지난 후(997년) 오토 3세라고 하는 황제는 기록을 통해 샤를마뉴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신하들을 명하여 과연 샤를마뉴 황제의 유언에 따라 유족과 신하들이 샤를마뉴 황제의 시신을 장사지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무덤발굴단은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조사 결과 모든 것이 샤를마뉴 황제의 요구대로 시행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렇게 대리석 옥좌에 앉힌 황제의 모습은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황제의 망토는 좀 벌레에 의해 거의 다 갉아 먹혀 버렸고, 황제의 몸은 뼈만 남은 채 그의 과거의 위엄과 권위로 가득 찼던 모습은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섬뜩한 분위기 속에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무릎 뼈 위에는 자신이 원했던 책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손가락 뼈 중 하나는 그 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가복음 8:36)
참고.
Here he died, and entered his tomb in the church himself had founded. Into this sepulchre the emperor Otho III. dared to penetrate in the year 997, impelled by a motive of vile and varlet-like curiosity. They say the dead monarch confronted his living visitor in the great marble chair in which he had been seated at his own command, haughty and inflexible as in life, the ivory sceptre in his ivory fingers, his white skull crowned with the diadem of gold. The peeping emperor looked upon him with awe, half afraid of the mysterious and penetrating shadows that reached forth out of his rayless eyes. Before he left, however, he peered about, touched the sceptre and the throne, fingered this and that, and having, as it were, trimmed the nails and combed the beard of the great spectre, retired with a valet's bow. Observing that Charlemagne had lost most of his nose, he caused it to be replaced in gold very delicately chiseled and enchased. The sacrilege was repeated by Frederick Barbarossa in 1165, who went farther and forced Charlemagne to get up from his chair before him. The corpse, in rising, fell in pieces, which have been dispersed through Europe as relics. We saw such of them as remain here at the Chapelle. I was allowed, for about the equivalent of an American dollar, to measure the Occidental emperor's leg—they call it his arm. And then, as a makeweight in the bargain, the venal sacristan placed in my hands the head of Charlemagne.I thought Hohenfels would have sunk to the ground with disgust. He colored deeply and dragged me into the air. "I am ashamed of every drop of German blood in my veins," he cried. "What are we to think of the commerce of these wretches, for whom the very wounds of Cæsar are the lips of a money-box?"
I had given back the skull, as Hamlet returns the skull of Yorick to the grave-digger, and was dusting my fingers with a handkerchief, as hundreds of Hamlets have dusted theirs. I said, "'Thrift, thrift, Horatio.'"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고생스러운 시어머니일까요? 공부 안하는 자식일까요? 괴롭히는 직장 상사일까요? 아니면 질병, 경제적 어려움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이것들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십자가로서의 일을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우리가 환경에 의해 겪어나가는 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고난을 택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좋은 것을 버리고 싫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들로부터 무시와 멸시, 미움, 고난, 박해, 심지어 배반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있었나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말하자면 사탄의 시험에 간당간당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하신 6일 후,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한 것과 어쩌면 비슷합니다. 그곳이 변화산이라고 흔히 말해지는 헬몬산입니다.
왜 9장에 변화산 장면이 나옵니까? 8장의 베드로의 고백과 십자가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이 제자도가 아니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제자도인데 그 고난의 뒤에는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몇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온 몸이 하얗게 변하시고 그 옆의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십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하늘의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의 영광이 이 지상에서 잠시나마 이루어졌습니다.
이 장면에 같이 참여했던 이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스승입니다. 그가 이 장면을 마가에게 구술할 때 아마도 엄청난 감동으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가에게 이 복음서를 쓰게 하고 얼마 후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억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고난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지키고 위로를 주고 그들의 믿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하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네로 황제의 유혹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영광이나 핍박이 그의 십자가 죽음을 결코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전에는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했고 십자가 직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진정 제자였습니다.
그 베드로가 직접 쓴 기록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6~11,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4:12~1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변화산의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후의 예수님의 모습, 앞으로 오실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영광된 주님의 모습에 우리도 같이 참여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7:22~23,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렇게 변화되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합니다. 변화하신 예수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죽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직접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볼 모든 살아있는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9:7에 하늘의 음성이 울려 퍼지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십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고난은 없고, 십자가는 단지 믿음의 표시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로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차에 태워져서 처형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호송하던 한 군인이 이렇게 그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죽으러 가는데 무섭지 않으냐?” 선교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친구.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소.”
이 말이 저 자신의 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의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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