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2. 큰 자들과 소자 하나

 

마가복음 9:33~50,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이 기록된 당시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에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 마가복음의 목적입니다. 그 제자도의 핵심이 바로 마가복음 9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도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는 과정, 헌신의 길입니다. 이 제자도는 과거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현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나 나쁜 행위들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자기 부인(否認)이라고 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제자가 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인격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가 되심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기독교에 기대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신자라면, ‘지옥으로부터 구원죄 사함에 대하여 듣기를 좋아합니다.

 

때로 어떤 이들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싸워서, 목사님이 바람이 나서, 목사와 장로가 싸움질을 해서 그 꼴 보니 싫어서 교회 안 다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비극입니다. 그런 교회들도 문제지만, 신앙의 조건을 그런데서 찾는 당사자 자신도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는 비극만 가득한 드라마입니다.

 

교회에 실망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착각했든지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도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요한복음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제자도에는 올인해서 운이 좋다면 곱빼기로 이문을 남긴다는 약속이 전혀 없습니다. 올인은 기본인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보상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자가 되려고 하면 지금까지의 경력과 명예를 다 잃어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그러한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된다고 믿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아무든지는 가정(假定) 상황이 전제된 말입니다. “만일 ~하려 하면입니다. 그 의미는 반대로 네가 원치 않는다면 제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제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구원은 받겠으나, 그 사람의 이 세상의 삶은 우리 주님께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돌덩이와 보석의 차이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새예루살렘이 정금이니, 보석이니, 진주 등등의 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 보물들이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한 보물이 아닙니다. 바로 새예루살렘, 즉 그리스도의 신부된 신자의 영광된 모습을 보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8~22,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계속 이 한 가지 문제로 신자의 자아와 다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권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이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도하기 전에는 나는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관계를 주님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신앙생활에는 대가(cost)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도의 조건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인 열띤 논쟁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열띤 논쟁은 바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곧 로마를 정복하고 왕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큰 자가 누구냐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짜 누가 천국에서 큰 자고 첫째가 되는 자인지 가까이에 있던 어떤 어린아이를 데리고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작은 자, 즉 소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참된 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남보다 높아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남보다 낮추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탄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렇게 큰 자와 소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던 중에, 제자인 요한이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고자질을 합니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과 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화 산 아래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기에 어떤 어린아이를 말 못하고 귀먹게 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그 사람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질투, 시기심이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속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들을 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작은 사람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매우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단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주님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으로 일하는 형제들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9장 후반에 나타난 제자들의 첫 번째 문제는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남보다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은 제자 사회라는 울타리를 두르고 남들보다 자신들이 더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선권을 주장하며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는 말씀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9:35)는 말씀처럼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게 되는 희한한 법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권세 있고 돈 있는 큰 자들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즉 가진 자가 높은 자요, 먼저 된 자가 먼저 누리는 곳이 세상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고대 세계에서 한편으로는 문명이 발달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 가장 야만적인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즉 권세 계급이며 지배계층인 로마의 귀족들과 왕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향락과 권세를 위해 갖은 추악한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세계에서는 모든 제국의 백성들은 로마 황제만을 주()라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황제가 신처럼 숭배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마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가 그들을 그대로 둘리가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을 굶주린 야수들의 발톱으로 찢었으며 그들의 눈을 뽑았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당시의 성도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남을 정죄하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수족을 베는 듯한 과감한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또한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 치듯하다는 말은 죄인이 지옥에서 불로 형벌을 받을 때 마치 소금으로 맛을 내게 하듯 불이 죄인에게 뿌려진다는 뜻입니다(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NIV).

 

특히 마지막 절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9:50,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가운데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금 그 소금 맛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금은 소금 맛이 필요할 때 소금을 필요로 하는 곳에 던져져야 할 터인데 우리는 던져져서 그래서 녹아 없어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이미 전혀 엉뚱한 일로 소금 맛을 다 잃어버려서 던져져 봐야 아무 쓸모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요?

 

더럽고 부패하기 쉬운 것일수록 소금을 필요로 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짠 맛을 지녀도 싫다고 배척하려 하지만 우리가 짠 맛을 잃으면 더 더욱 우리를 무시할 것이며 그 때에는 우리를 이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이라고 더 맹렬히 핍박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세상과 짝하여 적당히 지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더 우리 본연의 짠 맛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의 제자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제자들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을 되찾아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요즘 제직훈련 중에 제직으로서, 성도로서 교회 생활하는 모습에 그 역할에 대해 집사님들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남을 돌보고 섬기는 거룩한 부담감으로서의 직분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성도님 가운데는 이런 분들이 안 계시지만, 어떤 교회들 가운데는 직분을 명예처럼 여기고, 서로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훨씬 낫다는 우월감이 있다면 영적인 교만이 됩니다. 남과 나를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되지 않았다는 비교입니다.

 

또 사람을 누구 편이냐?’로 가릅니다. 교회는 우월의식이 아닙니다. 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인간의 가장 본성적인 싸움은 권력 싸움입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이면 권력 싸움을 합니다. 누가 더 우선권이 있느냐?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작은 공동체 안에도 권력 다툼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에서는 더욱 심합니다.

 

TV 드라마 중에 요즘(20091)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랍니다. 그 내용의 핵심이 어떤 부잣집에 시집간 평범한 집 출신의 며느리가 마음이 너무 착해서, 남과 경쟁하지 못해서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무시 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마음을 바꾸고 요녀로 변신한다는 줄거리라고 합니다. 현대 세상에서는 친구에게 남편을 뺏길 정도로 순진하기만 하고 남을 의심할 줄 모르면 가진 자들과 더 똑똑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간에, 장로와 장로 간에, 집사와 집사 간에, 교회 안에서조차 계급화, 권력화 되어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 직분을 출세로, 감투로, 벼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의 제일 좋은 칭호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당회장이라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예전에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 소도시 던펌린에 현대전자가 반도체 공장을 세웠는데 그 직원 중에 몇 명이 제가 공동 목회하던 에딘버러 한인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인교회 청년회를 제가 맡았는데 청년회장이 한 번은 청년들이 부탁한 일을 하러 그 공장에 갔습니다. 직원인 청년회원들이 회장님이다라는 말을 하니까 갑자기 전체 공장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회장님 오셨다!” 현대그룹 왕회장님’(당시 생존)이 기습 방문을 한줄 알고 말입니다. 호칭이 문제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은 늦게 예수를 믿고 훗날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분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삼일운동 준비를 할 때는 장로였습니다.

 

삼일운동 직전, 독립선언서에 쓰일 민족대표들의 이름을 쓰려고 할 때 사람들 간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냐 기독교의 대표인 이승훈이냐 누구의 이름을 먼저 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잠시 바깥에 나가있던 이승훈선생이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義菴,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

 

교회 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먼저 죽는 순서입니다. 남보다 내려가는 순서입니다. 누구 뒤에 썼다고 누구 다음에 내 순서라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에는 상식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을 위해 순교까지 하는 기독교인데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로 살 때 가족들이 불화하고 분쟁하는 일도 있다고도 했습니다(10:35, 12:53).

 

하지만 우리의 제자의 삶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나 우월의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헌신, 자기 부인, 사랑이라는 신앙의 행위 속에서 조차 내가 남들에게 우월하게 보이려는 마음이 없는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 능력, 남을 돕는 구제 그 모든 행위들이 내가 남보다 더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는 동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큰 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여전히 살아있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일은 어린 아이, 소자와 같은 영혼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제자들은 자기를 낮추고 자기가 죽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제자로 부름 받은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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