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3. 제자도, 종과 어린 아이

 

마가복음 9:33~40,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병행 본문: 18:1~5, 9:46~48, 9:49~50

 

누가복음 9:49~50,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우리너희의 차이)

 

 

마가복음 8장에 접어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그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제자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9장의 갈멜산상에서의 변화 사건도 이러한 십자가의 원리를 가르치는 한 재료였습니다. 즉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결국 얻게 될 것이지만, 그 제자들은 반드시 주님의 고난도 같이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8장부터 10장까지 연속적으로 말씀되어집니다.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마가복음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말씀을 하신지 얼마 안지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적과 권능을 행하실 때는 누구나 대단한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로마를 때려 부수고 부활한 다윗왕권의 권세의 한 자락씩을 잡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사장들과 자기 백성들, 그리고 제자 중 한 명에게 배신을 당하고 로마병사에 의해 십자가에 형벌을 받게 되자 모두들 겁에 질리고 실망하여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행동과 믿음 없음이 오늘날의 우리와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이적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관심을 갖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원하신 것은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향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 앞에서 모두 다 도망갑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다를까요?

 

제자가 되시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리되기 위해 오늘의 성경말씀을 듣고, 왜 예수님이 제자도와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종과 어린 아이로 그 말씀의 재료로 다시 삼으시는지 생각하십시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누가 큰 자인지 길을 가면서 계속 논쟁하던 제자들에게 무엇이 큰 자인지,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제자인지, 즉 십자가를 가르치기 위해 두 가지 사건 재료 혹은 예화를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과 어린 아이입니다.

 

35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뭇 사람)섬기는 자가 되어라 하시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섬기는 자”(servant, diakonos) 혹은 하인을 말합니다. 바로 이 헬라어 단어에서 집사”(deacon)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마침 옆에 있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나다. 나에게 하듯 이 아이에게 대하라는 실물교육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강해 중에 제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듯이, 이 마가복음은 당시 로마황제의 핍박아래 있던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한 복음서가 마가복음입니다.

 

신약성경은 거의 대부분이 당시 국제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영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제자들이 실제 사용한 언어는 헬라어가 아닌 당시 이스라엘의 지역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원래의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언어입니다. 옛적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사용한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부터 나온 언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멸망한 북이스라엘 지역에 내려와 살게 되고, 남유다 마저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사왕국에서 포로생활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본래 히브리어와 비슷한 아람어를 유다민족의 공용어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과도기 시대의 기록인 다니엘서의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백성들의 일상 언어로는 아람어를 사용했지만, 때로 국제 공용어린 헬라어나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도 필요에 따라 자주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라틴어나 헬라어는 웬만큼 배운 사람들이나 국제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언어적 특징은, 4복음서 중에서 아람어 단어와 라틴어 단어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헬라어 발음으로 음역해서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아람어 단어들이 달리다 굼(5:41), 에바다(7:34), 아바(14:36) 등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의 뜻을 기억하십니까?

 

Aramaic phrases in Mark

 

Talitha qoum (Ταλιθα κουμ)

Mark 5:41, And taking the hand of the child, he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is translated, "Little girl, I say to you, get up".

The Aramaic is ţlīthā qūm. The word ţlīthā is the feminine form of the word ţlē, meaning "young". Qūm is the Aramaic verb 'to rise, stand, get up'.

In Aramaic, it could be ימוק אתילט or ימוק אתלט 

(* 히브리어 철자가 원래는 반대 순서인데 여기에서는 순서가 변경이 안됩니다)

 

Ephphatha (Εφφαθα)

Mark 7:34,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ighed and said to him, "Ephphatha", which is 'be opened'.

In Aramaic, it could be חתפתא or חתפא. In Hebrew חתפה

 

Abba (Αββα)

Mark 14:36, Abba, Father," he said,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Abba, an Aramaic Hebrew word (written Αββα in Greek, and 'abbā in Aramaic). Romans 8:15 and Galatians 4:6.

In Aramaic, it would be בא

 

마가복음에서 특히 많은 아람어 단어들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이 책이 비 아람어 독자들을 대상으로 즉 로마교회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두 단어를 봅시다. 그것은 어린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아람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아람어로 talyâ입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하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문둥병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의 하녀가 어린 소녀(왕하 5:1~3)였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도 똑같이 어린 아이라는 단어가 하인이나 노예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하시고, 바로 어린 아이 하나를 안아주시면서 어린 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섬기는 자, 즉 종과 어린 아이는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어린 양이라는 단어도 같은 아람어 탈랴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아이와 종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If John made his proclamation in Aramaic, he said, "talya de laha" (ref: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page 62). The phrase is ambiguous because it can mean Lamb or Servant of God. The Aramaic word talya does not mean lamb; it means child or servant (the Aramaic word for lamb is immer). However, talya took on a double-meaning when the Targums used the word idiomatically (in Pseudo-Jonathan Targum Gen 30:40) capitalizing on its similarity to the Hebrew word taleh (lamb). Although John's proclamation had a double entendre, it was the Servant that Israel was anticipating (Isa 42:1-4; 49:5-6; 52:13; 53:7; Mat 12:18-21; Mat 20:28). 인용: http://glad-u-see.com/sin_world.html

 

아마 제자들은 이 경험을 하면서 그 단어들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 재료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요한의 불평입니다.

 

예수님이 종과 어린 아이에 대한 말씀이 끝나자마자,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최소한 예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의 두 가지 예화를 다시 정리하자면, ‘어린 아이를 예수님으로 영접하는 것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인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와 같이 어린 아이가 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자의 위치가 되고, 남들을 섬기는 자, 종이 되어라,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든지 우리에게 반대를 하지만 않으면 서로 같은 위치에서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하고 힘없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두렵고 힘드니까 다 도망갑니다. 그래도 자신들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거짓 예수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몇 년 전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한다는 책이 나왔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 자신은 물론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했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공부를 잘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로 그 책을 이해한다면 공부 못하는 보통 이하의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대학입학을 앞 둔 자녀들에게, “서울대냐 지방대냐?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겠느냐?”로 공부 좀 잘 하라고 설득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설득이 아니고 협박이지요. ‘서울대 가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논리는 제자도가 아닙니다.

 

제가 제일 거북스러운 교회 직분 중에 권사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집사에서 권사 되면 거의 인품이 달라졌습니다. 권사직에 귀신이 붙는 겁니까? 권사님들이 다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분들도 있다고 듣긴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고질병의 하나가 자리싸움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에서 올라갈수록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감리교에는 감독회장이 하나여야 합니다. 그런데 작년(2008)에 두 명이 선출이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고 감독회장의 직인까지 몰래 훔쳐가면서 잘 싸웠다는데 현재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 제자의 모습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습이 어제 오늘이 아니고, 장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은 겉에 나타나는 세력과 힘과 높아짐을 추켜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결과를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하는가 그 모습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내게 지금 허락된 것,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최근에 제가 보는 책이 본회퍼의 최후라는 책입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의 히틀러 지배 당시의 목사님입니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메시야로 생각하는 나치즘이 판을 치고 히틀러를 반대하는 사상들은 모두 적으로 돌려 깡그리 몰살시키던 시대에,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목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히틀러는 20세기 문명의 탈을 쓴 악마였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몇몇 군인들과 주요 인사가 가담한 암살 계획에 동조하여 모종의 연락책을 담당했는데 그만 발각이 되어 모든 가담자들과 함께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심문과 투옥생활 끝에 그만 독일이 항복하기 한 달 전에 교수형을 당합니다.

 

그가 독일군 나치 장교로부터 심문을 당하면서 (일제시대 독립군 심문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고 간 대화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낭독 내용 생략)

 

나치들이 보기에는 본회퍼는 목적을 이루진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제자로서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통해 영광된 이름을 얻었습니다.

 

당시 독일교회는 지금도 서구 교회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소속이 된 공무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특정한 종교 제도권이라는 고급 계급사회에 소속이 되어 그 관리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은 무미하고 건조하고 자유주의신학에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각성하면서, ‘고백교회라는 국가제도에서 보호받는 교회가 아닌 독립적인 교회들이 나타났고, 본회퍼는 그 교단의 목사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로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로 학생들에게 영성훈련을 시킵니다. 그렇게 나온 지은 책 중에 제자의 대가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싸구려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제자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고 한 참이 지나면 번영과 고난의 시간들이 반복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한국은 부침하는 역사와 함께 또 빠른 경제성장 속도와 같이 교회들의 변화도 매우 심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쇠퇴기입니다. 아니면 또 다른 고난의 시기, 사회적으로 돌 맞는 고난의 시기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는 이상한 환상과 착각이 지배적입니다. 아시다시피 7,80년대까지 교회를 부흥하게 했던 주요 흐름은 신유은사, 방언, 이적 등등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유행하던 말을 사용하면, “능력전도즉 능력을 나타내면 전도가 된다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허울 좋은 전도와 심령부흥집회 시절을 지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던 목사들과 교회들, 그리고 그 속에 같이 묻어 간 기독교인들의 숨어있는 욕망의 정체가 들어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부흥의 깊숙한 동력원은 인간의 허영, 권세, 영광을 바라는 욕망이었습니다. 큰 것이 복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에 따른 수적 성장에 의해 물질적 성장, 교회의 대형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약 20여 년 동안 성경공부, 제자훈련, 영성훈련 등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 내면을 잘 살펴보면 과거의 은사위주, 기복주의가 더 이상 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고 있는, 그릇된 교회성장에 대한 개혁적 움직이라기보다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들입니다. 목적은 같고 방법만 달라진 것입니다.

 

진정한 말씀과 제자도에 의한 회개와 개혁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교회성장의 시도들이 거의 대부분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성장에 보탬이 되기 위한 여러 방법론과 변형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작금의 현상을 꿰뚫어 보십시오. 지금은 한국 교회의 공백 기간입니다. 텅 빈, 마치 태풍의 눈의 시점과 같습니다. 다음 단계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긍정적으로만은, 지금까지 기대했던 외적 교회성장면으로는 예측되지 않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목사들의 윤리문제, 세습화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방송을 타고 대두되면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추락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과거의 성장 관성이 남아 있어서 과거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한국 교회 상황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양적으로, 물질적으로 성장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진정한 제자들과 알곡을 고르기 위해 잠시의 양적인, 물질적인 성장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지금까지 능력과 힘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교회의 전체로 이해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의 영광과 병고치고 귀신 쫓는 능력 행하심에 한껏 기대를 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르치시는 진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보이는 것, 능력, 누가 더 높아지느냐에 자리다툼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교회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가 버린 제자들처럼, 앞으로 한국교회에 고난이 닥칠 때에 대다수의 교인들이, 교회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때에도 진정한 제자를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참고.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독일의 이름 있는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목회자 집안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유산을 물려받은 가정이었지만, 교회생활에 적극적이거나 충실히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정신의 맥이 숨어 있었던 탓일까. 본회퍼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3년 열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튜빙겐대학에 진학한 본회퍼는 그 곳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후 베를린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가 신학을 하던 1920년대는 자유주의 신학이 몰락하고 변증법적 신학이 독일의 대학가를 휩쓸 때였다. 그러나 베를린대학만큼은 자유주의 신학 전통의 마지막 보루였고 그런 대학의 분위기에서 본회퍼는 하르낙과 칼홀, 제베르히, 칼 바르트 등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의 신학 세계를 키워나갔다. 그는 겨우 23세에 신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강의를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논문은 당시 신학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교수들이 본회퍼를 천재적 신학도라고 입을 모을 만큼 그의 신학적 학문의 깊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재적 신학자로서 빛을 발하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교수 취임 후 2년 반 동안 베를린대학의 교수로서 생활하던 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2년 간 목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다시 독일로 돌아왔을 때는 이전의 천재적 신학자, 교수로서의 본회퍼가 아니었다. 그는 고백교회 운동가 본회퍼, 실천적 신앙인 본회퍼였다.

1930년대 독일에서는 이미 혁명의 힘이 잉태되어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국가 전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 있었던 선거 뒤 제국의회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리는 12석에서 107석으로 늘어났고, 1932년 선거에서는 나치당이 의회에서 271석을 차지해 압도적 지배당이 되었다. 1933130일에는 드디어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3공화국,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됨으로 20세기의 신화가 남기고 간 인류의 죄악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회퍼가 교수를 그만두고 실천적 신앙인으로 활동하던 때는 바로 그 시기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고 세계 제패의 야욕을 안고 있던 때. 그 때 본회퍼가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것은 바로 독일적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를 단지 정치적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메시아로, 그리고 나치즘을 행동하는 적극적 기독교로 받아들여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나 한국의 유영모, 중국의 본색교회 운동가들의 민족적 기독교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나치즘은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만을 배타적으로 존중하고 유대민족과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핍박과 학대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했던 바가 결코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히틀러의 교묘한 술책에 의해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에 절대적 충성을 맹세했다.

고백교회 운동은 이런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독일 복음주의교회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교회를 나치의 선전도구화하려는 히틀러 정권에 저항한 신앙부흥운동이며 반나치 단체였던 것이다.

본회퍼는 바로 이 고백교회 운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신앙적 실천을 시작했다. 이전의 학자로서, 목회자로서 만의 삶이 아닌 자신 앞에 놓인 국가적 위기 앞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직접적 저항운동이었던 것이다. “고백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것은 나를 구원으로부터 멀리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할 정도로 고백교회에 대한 사명이 대단했던 본회퍼는 교회가 영원한 진리나 원칙들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한 형태로서의 고백교회는 본회퍼의 신앙과 신학적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의 실천적 신앙은 고백교회 운동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 고백교회 운동의 정신이 흐려지면서 운동성이 약해지자 본회퍼는 나치즘에 대항하는 지하 운동세력에 적극 가담하여 반나치 운동에 직접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 본회퍼의 교수직은 박탈됐고 그가 가르치던 핑켈발데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독일 안에서 그가 책을 출판하는 것도 금지됐고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감시를 받아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본회퍼는 더욱 적극적으로 반히틀러 세력에 가담하여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본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위탁된 목회자의 과제를 넘어서 왜 정치적 항거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자로서 히틀러에 반대하고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복음의 실천이요, 선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미친 사람이 베를린의 번화한 거리에서 인도 위로 차를 몰고 달린다고 하면, 나는 목사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가정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내가 만일 이 장소에 있다면 나는 뛰어 덤벼들어서 그 미친 운전사가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당시 나치즘 하에서의 상황과 그의 마음가짐을 잘 드러낸다.

본회퍼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얼마 후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 1944720일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지하활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수용되었다. 본회퍼는 그가 37세되던 1943년 그의 자택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다. 테겔 형무소에 18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그가 가담했던 히틀러 암살 음모의 내막이 드러나면서 게슈타포 감옥으로, 다시 북켄발트 수용소, 플로센뷰룩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549.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형무소의 의사는 본회퍼의 최후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아마도 5~6시였던 것 같다. 죄수들을 감방에서 불러내다가 선고문을 읽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본회퍼 목사를 봤다. 죄수옷을 입은 채 꿇어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의 열심과 확신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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