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4. 소자의 실족

 

마가복음 9:41~50,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섬김의 삶에 많은 할애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십자가의 도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을 로마의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알려 그들이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로마 박해로 말미암는 고난이지만 한편으로는 승리의 희망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또 자신의 신앙의 푯대로 삼기까지 순간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된 것 같아도 언제든 십자가를 등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과 이적으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쳐 주셨지만 열두 제자들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가르쳐 주시는 데도 거의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누가 크냐에 대하여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논현동 주공아파트 2단지에 가보니 어떤 감리교회 건물이 건축 중이었습니다. 아파트 10층 높이이고 부속시설들이 어마어마합니다.

 

대형 교회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인이 많아서? 그렇다면 잘못입니다. 다른 지역에 교인들을 파송하거나 그 지역들에 작은 교회들을 몇 개 더 세우면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대부분 대형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들 하지요. “대형 교회가 더 힘이 있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요. 아닙니다. 그 생각은 교회의 힘과 사역의 목표를 세속적 기준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제 금액으로, 파송 선교사 숫자로 자신을 과시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건물을 짓는 이유가 혼자 다 가지려하고 누리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총회장 되고 싶고, 교단의 어른 대접 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시대에 현재의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대형 교회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들이 대부분 현재의 사용 목적이 관광지로 쓰입니다. 텅 비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 건물들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자신들의 세력을 자랑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것들이 천국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땅의 문화유적지가 하나님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울이나 베드로 등 초대교회 교회 개척자들은 교회 건물을 지으려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시작한 곳은 가정집, 다락방, 심지어 지하무덤이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높으냐, 누구 교회가 더 크냐로 경쟁하는 것이 한국 교회 모습입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테리어 장식일 뿐 그 길을 가야한다는 관심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스러운 자리만 동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정 누가 큰 자인지 누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인지 옆의 어린 아이”, 아람어로 과 같은 단어인 소자를 안고 제자들이 소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38절에서 40절까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다는 요한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답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았으면 어쨌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41절로 넘어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요한의 말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제자들의 문제에 접근하여 해결하십니다.

 

요한은 우리 편이 아니니 그를 금해 주세요라는 요청이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알고 너희에게 누군가 물 한 그릇을 주었다면 그는 상을 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소자를 가치 없다고 취급하고 죄짓게 하면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 이상의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소자를 대접하는 작은 일이 큰 상을 얻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을 무시한 사람은 대가는 너무나 크다고 합니다.

 

41절과 42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그에 대하는 행위에 따른 상벌이 서로 대칭이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41절에서는 너희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나오고, 42절은 소자라고 표현이 됩니다.

 

41절에서는 그들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했을 때의 받는 상을 말하고, 42절은 그들을 실족케 한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린다고 합니다.

 

즉 물 한 그릇 만큼의 작은 친절과 소자는 둘 다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의 상과 연자 맷돌은 매우 큽니다.

 

내세의 크고 영원한 것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의 아주 작은 것이라는 내용이 바로 두 절의 말씀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실족케 한다범죄케 한다라는 단어입니다. 원어에서는 같은 한 단어입니다.

 

실족케 하면이라는 뜻의 동사는 스칸달리세(σκανδαλιση), 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 길에 덫을 놓다, 걸려서 넘어지게 하다)가 원형입니다.

 

이 단어는 이미 6:3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6: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서 우리말로 배척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의 스캔들로도 말이 전하여 졌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감정이 상하다, 불쾌하게 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그 헬라어의 뜻은, “걸려 넘어지는 돌에서 유래합니다. (6:1~6설교, 2008.8.24)

 

본문에서, 이 실족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형제들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지 말라 입니다.

3. 세상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

 

이 내용은 4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이 부분은 앞에서부터 계속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연자 맷돌입니다. 연자 맷돌은 형제를 실족케 했을 때 받는 형벌이 작은 것에 대조가 되어 상대적으로 큰 물체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조선시대 육시, 능지처참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범죄자의 목에 연자 맷돌을 걸고 바다나 강에 던집니다. 이 방법은 당시 로마가 쓰던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장면입니다. 대부분 어부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았거나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일설에는 사도행전 5:37에 가말리엘의 연설 중에 예로 등장하는 폭도 갈릴리 유다가 이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연자 맷돌 처형 장면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사형수의 시체가 물속에서 조류에 떠밀려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진저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자들끼리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범죄하게 할 수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일이 본문에서도 예로 나타나는 분파주의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영적 교만과 시기에서 나옵니다. 적극적으로는 모함과 언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표적인 분파주의로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구원과 관계없는 경건에 관한 문제로 믿음의 형제들을 자신과 비교하는 일은 자신이 결국 신앙적으로 덜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를 들면 음식 문제로 누군가 오해할만한 일이 있으면 본래 먹어도 되지만, 믿음이 약한 그 형제를 위해 아예 먹지를 않겠다고 합니다.

 

로마서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린도전서 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그러므로 신자의 생활은 자신을 기준 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기준하기도 해야 합니다.

 

2. 자신을 실족케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43절에서 48절까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에는 손, , 눈이 등장합니다. 만일 이것들이 범죄하면 이것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이것들 가지고 지옥 형벌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이 말하는 신체 절단은 문자 그대로 신체 절단이 아닙니다. 성경이 손, , 눈을 잘라내라는 말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근원은 죄를 지은 손과 발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20~23,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가 죄를 대할 때에 마치 신체를 잘라내듯 죄와 떨어지라는 말씀입니다.

 

3. 세상이 실족케 하지 말라.

 

49, 50절 말씀입니다.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과 불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나타나는 요소들입니다. 소금은 제사의 필수요소입니다.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즉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희생 제사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제사, 영적 제사를 말합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가지를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둘 다 불에 태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불형벌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완벽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제사였습니다.

 

우리 안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소금이 음식을 짜게 해서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게 하고 맛을 내는 것처럼, 희생과 십자가의 삶을 우리가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의 삶의 모습은 이렇다는 것을 골로새서에서 소금과 신자의 언행을 두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을 뿌리듯 하다는 것은, 은혜 가운데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자기 부정과 헌신, 희생이 은혜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듯이, 신자의 삶에서 십자가가 없으면 역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가 전도가 어려워지고, 오히려 신자 수가 감소되었습니다. 2006년 통계로는 한국의 기독교인의 숫자가 861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숫자가 과거 10년 전보다 약 14 만 명이 줄어든 숫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종교들, 불교나 천주교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기독교만 유일하게 줄어든 종교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는 원인이, 교회가 부족해서 아닙니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도 아닙니다. 여러 설문 조사에 의하면,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도 많은 이슈가 되어 온, 목회자들의 윤리문제가 가장 큽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보고, 기독교를 욕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난 기독교인들에게는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다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방식이 싫었다. 왜 기독교를 믿지 않느냐고 물으면 간디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다.”

 

간디의 이 말은 이렇게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그러하듯 힌두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존경했습니다. 심지어 산상수훈의 구절들을 종종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E. 스탠리 존스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간디를 만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탠리 존스의 묵상집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침마다 읽는다고 합니다. “간디씨, 그리스도의 말씀을 종종 인용하시면서, 왜 그분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거부하십니까?”

 

간디가 대답하기를, “저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단지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당신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젊었을 때 영국에서 유학해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 후 고국인 인도에 돌아왔다가 몇 년 후 남아프리카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아프리카도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는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인으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비인격적이고 치욕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느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물론 교회는 서양인들의 교회였습니다. 그가 교회로 들어가려 할 때, 입구에서 한 사람이 길을 막고 기분 나쁜 말투로 말했습니다. “넌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검둥아.” “저는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려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간디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검둥이를 위한 자리는 없다. 꺼져! 사람들을 시켜서 너를 쫓아내겠다.” 그 후에 간디가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겠습니까?

 

말하자면, 간디가 만났던 그 사람이 간디를 실족하게 했습니다. 지금 간디는 위대한 인물이고 당연히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으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인도는 물론 세계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봅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뒤통수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보고 복음의 결과를 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치와 진실을 규정하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믿는 형제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그들이 나로 이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는 숨어있는 헌신으로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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