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6. 제자도

 

마가복음 10:1~16,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며칠 전 제 친구 목사가 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제게 자신이 기도 중에 체험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예배가 끝났는데도 교회 일로 너무 마음이 답답해서 교인들을 모두 보내고 강대상에서 혼자 기도하는데 누군가 옆에 서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었답니다. 환상이죠.

 

그리고 자신에게 예수님이 종말의 주님을 전하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면서 현대의 종말의식이 사라지고 현실과 물질에 안주한 교회들을 한탄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말씀을 전해야 겠다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나 위대한 부흥을 일으킨 신앙의 선각자들은 종말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진정한 제자로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종말을 인식하고 행동한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순절기간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보아 온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일부러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곧 그 길을 갈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제자들도 훗날 그 길을 기쁘게 갑니다. 이것이 종말의식입니다.

 

제가 주보에 쓸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찾다가 아주 재미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외국에서 오래 전에 어느 전신주에 붙은 전도지를 찍은 사진입니다. 그 밑에 달린 댓글이 더 재미있습니다. “Damn, I missed it.” 번역하면, “젠장, 놓쳤잖아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독교의 영향을 받은 거의 모든 외국에서도 그랬습니다. 결국 당시의 과격한 종말론도 자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입품이었던 겁니다.

 

1992년 그때 얼마나 떠들었습니까? 거짓 종말론 신봉자들이 그날 밤 휴거한다고 모여서 기도하는 장면을 자정까지 TV로 찍고 생방송을 했는데 결국 생 쇼가 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죠.

 

그래서 진정한 종말론이 무색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교회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면 이단시되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시각을 웃기는 말로 치부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것도 매우 위험합니다만, 종말론에 대한 바른 신학과 신앙이 우선해야 합니다.

 

진정한 종말신앙은 매일의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의 십자가 제자로서 잊지 않는 것이 진정한 종말의식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0장에서는 이혼 혹은 결혼에 대한 말씀과 어린아이와 천국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지난 마가복음 강해 시간에는 특히 이혼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대해 같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혼문제와 어린아이의 문제를 같이 묶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한 내용은 신명기 241~2절에 기록되어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신명기 24:1~2,

[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리고 당시 기원전 100여 년 전부터, 힐렐학파와 샴마이학파라는 두 개의 유대교 학파들이 이혼의 문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정리를 하자면, 샴마이파는 이혼에 대해 보수적이었는데, 이혼의 근거로 수치 되는 일을 강조하여 간음이나 성적 범죄에 대해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힐렐파는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아주 사소한 이유라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힐렐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가 길에서 자신의 친오빠를 만나 장시간 이야기하는 것도 이혼 사유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어떤 학파인지는 모릅니다만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혼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면 예수님이 둘 중 한 학파의 견해를 지지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반대 학파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니고 거꾸로, ‘적의 친구는 적이다라는 사고지요.

 

그들은 예수님과 근본적으로 사고방식의 구조부터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 때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어 보내도록 명한 것은 이혼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피해를 고려하여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즉 어떤 여성이 남편에게 학대 받고 이혼 당했을 때 공식적인 이혼증서를 받게 하여 나중에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법은 남자들에 의해 무절제하게 행하여지던 이혼을 억제시키기 위한 것이며 당시 사회적 약자들인 여자들이 남자들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내가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 증서만 써주고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다는 그들의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5절 이하에 있습니다.

 

[5] ...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과 결혼에 대한 진리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완악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둔감하고 사랑이 결핍된 마음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로서 남자들이 함부로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자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혼을 최소한으로 억제시키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혼 증서가 없으면 이혼 후에도 여성은 한 남편의 아내로 계속 남아있게 되고, 다시 결혼하면 사람들로부터 창녀 취급당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여성이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신명기 24장 전체를 잘 읽어보면, 구약 율법의 취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24장에서는 처음에는 이혼의 문제, 다음은 결혼한 지 일 년 동안은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는 내용,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생활필수품으로 돈을 꾸게 하지 못하게 하는 등, 특히 당시의 가장 힘없는 약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고아와 과부를 위한 규정으로 24장을 마치고 있습니다.

 

즉 신명기 24장을 비롯한 구약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세히 규정한 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세상의 법제도의 관점에서 보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려하니까 바리새인들 같은 오류가 나오게 됩니다.

 

결혼에 있어서 처음부터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결혼하면 그 결혼의 결과로 당연히 이혼할 확률이 많아집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전 세계 3위인 50%로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혼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가정 내의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 폭력, 도박을 포함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도 사람들이 살다보면 진짜 어처구니없고 어쩔 수 없는 이혼의 사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런 사회현상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저는 용서와 화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깨어진 가정일지라도 다시 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들도 이제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가정 상담과 신앙훈련에 준비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한다면, 교회는 이 세상의 머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머리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모두 교회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세상에서 이혼과 가정의 파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그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제대로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사탄이 기뻐하는 일들이 당연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한 달도 안 되서 이혼한 부부도 보았습니다. 그런 이혼을 청년이혼이라고 한답니다. 요즘에는 대입이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 가는데 지장이 갈까봐 꾹 참았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맘 놓고 이혼하는 겁니다. ‘황혼이혼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오래 전에 재혼한 90대 할아버지와 80대 할머니가 재산문제로 이혼한다고 합니다.

 

이혼을 하면 당사자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오랜 시간을 고통을 받습니다만 가장 큰 피해자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요즘에는 워낙 이혼하는 가정들이 많아서 이제는 그런 아이들도 상처를 덜 받을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한 번 받은 상처가 평생을 지배하고 모든 사회생활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장난감, 컴퓨터, 게임기, 휴대폰, 연예인 되기 등이겠지만, 아마 조금 있으면 부모가 이혼하지 않는 것혹은 이혼한 부모가 다시 합하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엄마만 뿔나지 않습니다. 부모의 이혼에서 가장 뿔나는 사람은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이혼문제에 대해 학파차원의 심각한 논쟁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그 당시에도 이혼문제가 사회적으로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당시의 이혼은 오늘날의 이혼과 다릅니다. 당시 이혼이란 다분히 남자 위주의 결정이었고, 그 원인도 인간의 완악함, 용서 없는 마음, 그리고 욕망이었습니다. 당시는 성인 남성위주의 사회구조였기 때문에 여자들이나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초기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율법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기득권자들은 당시 성경인 구약 율법을 하나님의 순전한 영감으로 해석하기보다 사회 주도층인 성인남자들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학파들의 논쟁이 오히려 이런 잘못된 관행을 용납하는 배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악함과 욕심이 율법의 해석이라는 방법으로 선한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 목적은 약자를 지켜주기 싫다는 겁니다. 이런 일에 바리새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화석화된머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듯,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악함은 그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전 사회적이고 어떤 역사에도 없었던 특이한 가정 파괴 현상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교회 안의 이혼 가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혼한 사람들, 이혼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혼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장자연 리스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일면입니다. 그 리스트에 들어간 사람들은 실제로 그 일에 관계가 없더라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식입니다.

 

나는 이혼 안 했으니 거룩한 가정이라고요? 천만의 말씀, 다 마음으로는 벌써 백 번 이혼했고, 다 파괴범이고, 다 음행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리스트에서 주님의 보혈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단지 이혼과 가정의 분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죄와 고통이 현실화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안했으니 문제없다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독사의 자식들 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독사의 자식들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다는 교회들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혼문제로 시험하려 했고, 바리새인들보다는 낫겠지만 제자들까지도 어린아이를 예수님이 가까이하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고 아이들을 가까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분해하셨습니다. 즉 속이 상했다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는 말은 섬긴다는 뜻이 아니고 받아들인다(receive)’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단지 나이만 어린 어린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 어린아이와 같이입니다. 즉 어른이라도, 노인이라도, 부자라도, 어린 아이와 같이 주님을 믿는다면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어린이처럼 됩니까? 어린이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어린이도 사람인 이상 죄가 있습니다. 이기적일 때가 있고 그릇된 고집이 있습니다. 말썽도 피우고 분별력이 없는 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어린 아이의 수준은 부모를 따라 주님의 축복하심을 바라고 나온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 부모가 건강하고 행복한 부모인지 아니면 이혼 직전의 불행한 부모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한 삶은 자신들의 자녀에게는 반복되지 않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주님께 찾았고, 앞으로의 자녀들의 행복이 바로 주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가 자녀들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기꺼이 순종하고 얌전하게 주님을 바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도 가정도 없습니다. 자녀들도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 뿐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 완벽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깨진 마음이고 상한 마음입니다.

 

이 시간에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것이 진리인줄로 아는 모든 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설교를 무조건 믿으면 영적으로 무지한 겁니다. 잘 분별하십시오. 말세가 가까울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때로 설교를 죽 쑬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설교자가 다 설교를 능숙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한 가지 공통된 하나가 있는데, ‘그 말씀을 위해 죽기로 각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삯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점을 느끼시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비록 재주는 부족하여도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주님의 기뻐하시는 제자로 살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온갖 풍상이 있습니다. 가정의 위험으로 사탄은 우리를 시험합니다. 비록 한 때의 고통으로 가정의 분열을 겪은 분들은 그 상태 그대로 주님께 나아오시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나만 잘되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도움을 구하지 마시고,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간구를 하십시오. 비록 용서 못할 배우자였더라도, 못난 자식들이었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진짜 죄인인 내가 은혜로 용서받은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사랑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십자가일지 누가 압니까?

 

마가복음 10장에는 이렇게 결혼의 신성함과 어린아이에 대한 말씀이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그러한 기록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주님의 제자인 교회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심정으로 가정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약한 자들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어제 신문(2009.3.21, 중앙일보)에 시골(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 배제비골)의 어느 가난한 목사님 가정(윤익상 48, 이명자 49)이 자신들도 외동딸자식이 있는데도 10년 동안 일곱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대신 키워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혼하거나 버림받은 아이들, 신체적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경계하고 마음을 열지 않다가 결국 헌신적인 그 부부의 사랑에 부모의 사랑을 느꼈다고 합니다.

 

천국 제일 좋은 곳은 아마 순교자들 다음으로 이 부부가 갈 것 같습니다. 이 분들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분들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당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정말 중요한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사는 일입니다.

 

내 고집과 내 주장과 내 자존심마저도 주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소서.

 

그것을 경험하는 일들이 무슨 영화처럼 멋진 배경음악이 나오는 순간이 아닙니다. 모욕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철저히 깨지는 때입니다. 죽음처럼 정말 견디기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먼저 십자가를 살면서 체험한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4:11,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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