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8. 제자도4 - 행진 (고난주간중)

 

마가복음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이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십니다. 예전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단순한 방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가복음은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만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33,34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매를 맞고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앞일을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인줄 모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미래에 대한 도움을 구하고자 점집이나 타로카드집을 찾습니다.

 

만약 자신이 몇 년 안에 암으로 죽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모든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어떤 불행을 당하기는 하지만 눈앞의 위험과 고난을 스스로 알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2절에 보면 오히려 제자들 앞서서 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각오가 어떠했는지 주변에 함께했던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추호도 머뭇거림이나 뒤로 물러섬이 없이, 단호하고 꿋꿋하게 당신이 가야할 그 길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구원의 목적과 준비된 그 십자가 길을 향하여 주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고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여러 번역본들과 다른 공관복음서의 병행구절을 통해 그 자세한 분위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라고 우리말 성경과 NIV 영역본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과 다른 무리가 같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가복음 10:32,

They were on their way up to Jerusalem, with Jesus leading the way, and the disciples were astonished, while those who followed were afraid. Again he took the Twelve aside and told them what was going to happen to him.

 

하지만 여러 사본에 의한 구체적인 해석은, 명사 좇는 자들은 제자들 외의 다른 추종자들이 아니고, ‘좇아가면서라는 진행형 분사형태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 대한 여러 개의 헬라어 사본이 있습니다. 당시 여러 교회와 신자들이 돌려보기 위해 글을 베끼다보니 손으로 베낀 사본들마다 약간의 오차가 발생하게 되고, 고고학자와 성경학자들의 손에 들어온 그 헬라어 사본들이 오늘날까지 여러 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각각의 사본에서 발견되는 차이점들을 성경(헬라어 성경)의 각주로 집어넣어 그 차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성경 전체의 본래의 뜻과 많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마가복음 1032절을 권위 있는 사본 각주를 통해 정확히 그 뜻을 살펴보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제자들이 좇아가는 중에 놀라기도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영어성경도 어느 헬라어 사본의 전통을 따르느냐에 의해 번역이 달라집니다. NIV 성경은 70년대에 완성된 그래도 최근 번역본에 속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영역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다고 일컬어지는 KJV 영역본을 보면 제가 소개한 해석과 일치합니다.

 

마가복음 10:32,

And they were in the way going up to Jerusalem; and Jesus went before them: and they were amazed; and as they followed, they were afraid. And he took again the twelve, and began to tell them what things should happen unto him,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헬라어 성경에는 본문에 두 개의 미완료시제 동사(εθαμβουντο, εφοβουντο)가 나옵니다. 우리말로 놀라고두려워하더라로 번역되었습니다. 미완료시제란 어떤 동작이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 동작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영어의 “~하고 있었다는 과거진행형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이 본문을 설명하자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그 걸음걸이가 마치 행진하듯이 걸음을 빨리해서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는데,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워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이런 특징이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마가는 이 사건을 눈으로 본 듯 조목조목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사건 속에 직접 참여한 동행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마가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하는데 도움을 준 베드로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 장면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가복음의 내용 하나 하나를 고난과 십자가라는 관점으로 구술해 준 사도 베드로가 누구보다도 그 사건을 심도 있게 기억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기록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마가는 이런 방식으로 이 장면을 기록했습니까? 그 당시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던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과거의 부족함과 믿음 없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즉, 우리로 하여금 이 한 구절에서 예수님의 단호한 십자가 행진과 제자들의 어정쩡하고 용기 없는 걸음을 비교하라는 뜻입니다.

 

이 장면을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9:51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누가복음의 기록은 마가복음보다는 직설적이지만, 오히려 그 생동감이 줄어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즉 마가복음은 이 장면을 우리에게 훨씬 생생한 표현으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구약의 시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9:133,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런 행적을 분명히 기억했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납니다(21). 그 때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주님께 달려간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요한복음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후회와 심적인 고통 가운데 밤새 헛된 그물질을 하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늘 예수님을 그리다가 부활하신 후 자신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자신들을 부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배가 육지에 닫기도 전에 급한 마음으로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 후 그의 달리기는 훗날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목표도 없고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다른 쪽 귀로 새어 나갑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야를 바라고,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인으로 대접받을 높은 자리만을 꿈꾸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들릴 리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내 신앙의 주체요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신앙을 위한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내 신앙이 이 정도 수준이다는 자기표현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가 기복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복신앙에 더해서 또 다른 문제점이 나타났는데 신자들의 만족신앙입니다. 만족신앙은 제가 이름붙인 것입니다.

 

만족신앙이란 신자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이 심리적 자기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교회도 그렇고, 절도 그렇고 종교단체에 찾아 온 신자들이 최대한의 만족감을 갖고 돌아갈 수 있도록 종교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신자들은 그것에 만족하면 그만큼의 지갑을 엽니다.

 

절에 가면 곳곳을 관광하면서 무슨 부처니, 무슨 기도니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심지어 지붕 기와 올리는데도 그 앞에 불전함이 신자들의 정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제대로 돌면 10만원은 기본이죠? 정성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자발적인 정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에 따라 사찰의 재정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는 무슨 헌금, 무슨 집회가 차고 넘칩니다. 비신앙인의 눈으로 이런 현실을 보면 절이나 교회나 비슷하겠지요.

 

경영방법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단체들은 신자들이 자발적인 헌금을 하도록 즉 그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종교적인 서비스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놀이공원의 경영방법을 생각하면 거의 일치합니다. 종교단체에서는 노는 것이 아니고 메마른 현대인의 기호에 맞게 마음의 평화니, 영혼의 쉼이니 이런 개념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꼈으면 합니다.

 

주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그들에게 멸시를 받고 능욕을 받고 매 맞음과 십자가의 고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범죄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대신해서 죗값을 대신 치러야 하는 사명 때문에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데 제자들은 서로 좋은 자리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습니다.

 

똑같은 길을 가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은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기에 주님은 원망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 길을 올라 가셨습니다. 신앙의 길은 외롭습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은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가야할 사람은 가야 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은 외롭지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사는 길이고 영생 얻는 길이기에 가야 합니다. 외롭고 힘이 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루살렘 길을 올라가신 것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외로운 예루살렘 행진은 결국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체험을 합니다. 제자들이 그 후 완전히 변했습니다. 단지 성령 체험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양심의 가책, 그리고 부끄러움과 죄책감 속에서 지내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들은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생의 모든 소망과 가치가 끝나는 줄 알았던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알았습니다. 다락방의 성령 체험은 그 확신을 확실하게 인증한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한 후,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제자였습니까? 예수님이 마가복음 10장에서 예루살렘으로 행진하실 때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고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요한은 마가복음 10장에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달라고 간청을 했던 바로 그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대표자 격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두 사람입니다.

 

이들이 성전 문 앞에 있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앉은뱅이 거지의 영혼 속에서 얼마 전의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거지는 하루하루 남의 도움으로 살면서 그것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예배와 구원의 장소인 성전을 구걸의 장소로 이용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앉은 장소는 아마 예루살렘에서 가장 목이 좋은 구걸 장소였고 그 앉은뱅이의 하루 수입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걸인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에게는 장애를 고치고 정상인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명예를 누리고 권세를 누리고 사는 것보다 영혼이 구원 받는 일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정말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가난한 어떤 사람들은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눈을 소경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소경으로 구걸해서 사는 것이 맨 눈으로 배고픈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과거 세상 중심으로 십자가를 모르고 살 때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 두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면서 구걸을 하던 사람을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적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담대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3:1~8,

[1]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베드로는 또한 훗날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갈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심정으로 자신의 베드로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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