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7. 제자도3 - 호산나찬송 (종려주일)

 

마가복음 11:1~1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듣기: 베토벤(1770.12.17.~1827.3.26)9번 교향곡 합창

 

이 곡은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의 가사로 합창을 붙인 교향곡입니다. ‘환희의 송가는 독일 18세기의 괴테와 함께 고전주의를 대표한 시인인 프리드리히 쉴러가 1785년 청년 시절에 발표한 시로서 당시 독일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작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빌헤름 텔을 쓴 사람입니다.

 

베토벤이 쉴러 환희의 송가에 감동을 받고 20년 넘게 그가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구상해 오던 이 9번 교향곡 합창은 그의 음악적 위기가 한창 고조될 때 완성되었습니다. 중이염을 앓아오던 베토벤은 30세 무렵에 난청의 징조를 보였고, 40대 후반에 완전히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 후 5년 후 1824년에 이 곡을 완성했습니다.

 

그가 모든 악기와 사람의 목소리까지 동원하여 만들어 낸 이 환상의 하모니는 교향곡 중 단연 최고하는 찬사를 받습니다. 당시로서는 기악과 성악을 같은 비중으로 다룬 최초의 획기적인 곡이었습니다. 악보로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최고의 음악 중 하나입니다.

 

베토벤이 1824년 이 곡의 지휘를 맡아 초연할 당시 귀가 완전히 멀었기 때문에 등 뒤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이끌어주어 뒤를 돌아섰을 때에야 그 엄청난 갈채와 환호를 보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전곡의 중심사상은 이 환희의 송가에 집중되어 있고 1,2,3악장과 4악장의 전반부는 궁극적인 환희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악장은 강렬한 의지와 분투를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궁극적인 환희에 도달하려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2악장은 경쾌한 형식으로 혼란스러운 열광적인 난무를 그렸습니다. 이 악장은 인간이 쾌락을 추구함으로서 환희를 얻으려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3악장은 아름다운 사랑의 황홀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타인 또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통해 환희를 추구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따라서 1,2악장에 비해 숭고한 느낌을 가집니다.

 

마지막 4악장은 환희의 송가입니다. 관악기와 팀파니가 격렬한 리듬으로 환희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4악장은 시작됩니다. 이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연주를 통해 그러한 격렬함은 환희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됩니다. 이어서 1악장의 테마 강렬한 의지와 분투가 다시 짧게 소개되고 그 역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부정됩니다.

 

계속해서 2악장의 테마 열광적인 난무3악장의 테마 아름다운 사랑의 황홀경이 각각 연주되고 그들도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 후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이중주로 연주하며 조심스럽게 환희의 정의를 제시하고 타악기들이 가세하며 환희를 표현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바리톤 솔로가 등장합니다. 이 솔로 부분은 4악장 전반부에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여러 형식과 테마로 제시된 환희의 모습을 부정할 때와 같은 선율이며 우리가 원하는 환희의 소리는 이런 것이 아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음악의 흐름이 동시대를 살았던 헤겔(1770~1831)의 변증법 이론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4중창과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합주를 통해 궁극적인 환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결론지으며 4악장의 막을 내립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악기들만으로 환희의 선율이 연주되었을 때 바리톤 솔로에 의해 부정된 점입니다. 아마도 악기들은 인간을 제외한 우주만물을 의미하는 것 같고 4중창과 합창은 인간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목소리와 자연 또는 우주를 대변하는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며 주의 성호를 찬양할 때 진정한 기쁨, 환희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Ode

Friedrich von Schiller

(1~3줄은 베토벤이 씀)

O Freude, nicht diese Tone!

Sondern laß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Freude, schoner Go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uder.

Wo dein sanfter Flugel weilt.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u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osen

Folgen ihrer Rosenspur.

Ku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u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be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acsht' gen Plan,

Laufet, Bruder, euer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uder! uber'm Sternenzelt

mußein lieber Vater wohnen.

Ihr stu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opfer, Welt?

Such'ihn uber'm Sternenzelt!

Uber Sternen muß er wohnen.

 

환희에 부쳐

프리드리히 폰 쉴러

 

오 친구들이여, 이러한 소리가 아니라!

우리들은 좀 더 기쁜 노래를 부르자

좀 더 환희에 넘치는 노래를!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과 같은 빛남,

낙원의 딸이여,

우리는 광휘에 취해서

천사의 당신 성역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당신의 조화를 다시 결속시켜 놓으리라

이 세상의 풍습이 엄하게 갈라놓았던 것들을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어라,

당신의 온유한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하나 친구가 된다는,

커다란 포부를 실현한 사람,

정숙한 아내를 맞이한 사람,

그들은 환호를 울려라!

그렇다. 지구 위에서 오로지 하나의 영혼만이라도

그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함께!

하지만 이런 것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눈물 흘리며 이 단합에서 물러가야 하리.

모든 존재가 환희를 마시는

자연의 가슴에서

모든 선량한 사람, 모든 악인들까지도

그들의 장미꽃 길을 걸으리라.

자연은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송이를 주며,

죽음의 시련 겪는 친구들에게도,

한낱 벌레에게 마저 만족이 주어져

그리하여 창조주 앞에는 천사가 서리라!

 

기꺼이, 천상의 거대한 운행을 따라

태양들이 움직이듯

달려가라, 형제여, 그대의 길을,

기뻐하라, 승리를 향해 영웅 나가듯,

 

백만의 사람들이여, 너희 껴안으리!

온 세상에 보내는 입맞춤 받으라!

형제여! 별 반짝이는 저 높은 곳에

사랑스런 아버지 꼭 살아계시니

백만의 사람들아, 너희 무릎 꿇었는가?

세상이여, 너 창조주 계심을 깨달았는가?

별 반짝이는 저 높은 곳의 그를 알라!

저 높은 창조주 계시리니

 

웹사이트 참조:

http://home.nownuri.net/~gjsoft/music/beeth9.html

http://www.lifewater.co.kr/poempic/gpoet/schiller/schiller.html

 

마지막 코러스 합창 부분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Joy, beautiful divine spark, etc.

Let me embrace you, O millions!

This kiss is for the whole world!

Brothers, above the starry firmament

A loving Father must surely dwell.

Do you fall down, O millions?

Are you aware of your Creator, world?

Seek Him above the starry firmament!

For above the stars He must dwell.

 

하늘의 궁창 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 확실하도다.

그대들 모두 꿇어 엎드리는가 온 세상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창조주를 알고 있는가?

하늘의 궁창 위에 그 분을 찾으라

별 들 위에 그 분이 계시도다.

 

 

 

베토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신앙으로 이겨냅니다. 그 대표적 작품이 세계의 명곡인 9번 교향곡 합창입니다.

 

우리는 이 곡을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의도적으로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그 곡의 테마가 바로 그 드라마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어려운 환경과 역경을 음악에 대한 신념과 열정으로 이겨낸다는 메시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왔던 강마에의 유명한 대사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청력을 점점 잃어가는 여자 주인공 두루미에게 독설로 말합니다.

 

뛰어들어. 호수 보이지? 시퍼렇지? 아주 깊어. 게다가 먹통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죽고 싶을 거야. 아니 죽을지도 모르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을 수밖에 없는 거. 그게 바로 절망이고, 시련이고, 실감이야! 그걸 거쳐야만 네가 병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거고.”

 

그리고 악단이 해체되는 위기에 처한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신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자에게만 시련을 줍니다. 고로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물론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매개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비이성적인 현대세계에서 그나마 인생의 진실과 소중한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9번 교향곡 합창을 작곡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이나 그 곡에 영감을 불러 준 천재 시인 쉴러나 그들이 진정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으로 그 음악과 시를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들이 적어도 하나님께서 그 음악을 만드시도록 허락하신 자연계시를 받은 사람들이란 것은 틀림없습니다.

 

Copying Beethoven(2007)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인 9번 교향곡의 탄생 비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서 자신의 음악을 들을 수조차 없을 때입니다. 베토벤의 악보를 대신 받아 적게 되는 여자 주인공 안나 홀츠에게 베토벤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기의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게 이야기를 하는 하나님의 숨결이야. 음악은 하나님의 언어야. 우리 음악가는 인간들 중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 우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

http://usoc.snu.ac.kr/music-site/beethoven/sym-all/sym-dresden/5-04.mp3

 

그런데 베토벤의 같은 교향곡을 그대로 신앙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Henry van Dyke(1852~1933) 라는 사람으로 20세기 초의 미국의 목사이며 문학교수, 시인으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이 목사님이 1908년 윌리엄즈 대학의 신앙집회에 설교자로 초청되어 갔다가 그곳의 산천을 통해 영감을 받아 시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학 학장에게 그 시의 원고를 주면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맞춰 이 노래를 불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찬송가 13장입니다.

 

Copying Beethoven 지휘 장면:

http://blog.naver.com/happymil07?Redirect=Log&logNo=130043568304

http://video.naver.com/2008102822150798147

 

신앙을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무게와 고통에 당당하게 서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베토벤 바이러스카핑 베토벤이라면, 헨리 반 다이크는 그 감동과 의지를 찬송가로 표현했습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구름 걷히니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못알고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의 생각도 그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뻐하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의 환영을 당연한 것으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이시기에 자격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쉴러든지 베토벤이든지 TV 드라마든지 영화든지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런 작품들을 듣고 볼 때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것들이 예수님을 찬송하는 호산나 찬송으로 들리십니까?

 

세상과 자연에서, 산천초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예술가만 전율을 느끼지 않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아는 여러분들은 이 부활절을 기다리는 봄바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이 되는 누가복음 19장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찬양을 들으시는 장면에서 특이한 이야기가 더 첨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누가복음 19: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러자,

 

누가복음 19:39~40,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노래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돈이 있어야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평안은 건강해야, 잘 생겨야, 결혼을 잘해야, 직장이 든든해야 평화롭게 산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핵무기가 있어야, 미사일이 있어야 나라가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그런 것 하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평화를 전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전해 받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런 것들이 없어도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나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찬양하실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죽은 베토벤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야 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면 길바닥의 돌들도 소리 질러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상에서 어떤 상황과 위기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돌보다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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