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4. 소자의 실족

 

마가복음 9:41~50,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섬김의 삶에 많은 할애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십자가의 도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을 로마의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알려 그들이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로마 박해로 말미암는 고난이지만 한편으로는 승리의 희망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또 자신의 신앙의 푯대로 삼기까지 순간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된 것 같아도 언제든 십자가를 등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과 이적으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쳐 주셨지만 열두 제자들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가르쳐 주시는 데도 거의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누가 크냐에 대하여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논현동 주공아파트 2단지에 가보니 어떤 감리교회 건물이 건축 중이었습니다. 아파트 10층 높이이고 부속시설들이 어마어마합니다.

 

대형 교회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인이 많아서? 그렇다면 잘못입니다. 다른 지역에 교인들을 파송하거나 그 지역들에 작은 교회들을 몇 개 더 세우면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대부분 대형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들 하지요. “대형 교회가 더 힘이 있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요. 아닙니다. 그 생각은 교회의 힘과 사역의 목표를 세속적 기준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제 금액으로, 파송 선교사 숫자로 자신을 과시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건물을 짓는 이유가 혼자 다 가지려하고 누리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총회장 되고 싶고, 교단의 어른 대접 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시대에 현재의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대형 교회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들이 대부분 현재의 사용 목적이 관광지로 쓰입니다. 텅 비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 건물들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자신들의 세력을 자랑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것들이 천국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땅의 문화유적지가 하나님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울이나 베드로 등 초대교회 교회 개척자들은 교회 건물을 지으려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시작한 곳은 가정집, 다락방, 심지어 지하무덤이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높으냐, 누구 교회가 더 크냐로 경쟁하는 것이 한국 교회 모습입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테리어 장식일 뿐 그 길을 가야한다는 관심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스러운 자리만 동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정 누가 큰 자인지 누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인지 옆의 어린 아이”, 아람어로 과 같은 단어인 소자를 안고 제자들이 소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38절에서 40절까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다는 요한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답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았으면 어쨌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41절로 넘어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요한의 말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제자들의 문제에 접근하여 해결하십니다.

 

요한은 우리 편이 아니니 그를 금해 주세요라는 요청이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알고 너희에게 누군가 물 한 그릇을 주었다면 그는 상을 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소자를 가치 없다고 취급하고 죄짓게 하면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 이상의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소자를 대접하는 작은 일이 큰 상을 얻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을 무시한 사람은 대가는 너무나 크다고 합니다.

 

41절과 42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그에 대하는 행위에 따른 상벌이 서로 대칭이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41절에서는 너희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나오고, 42절은 소자라고 표현이 됩니다.

 

41절에서는 그들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했을 때의 받는 상을 말하고, 42절은 그들을 실족케 한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린다고 합니다.

 

즉 물 한 그릇 만큼의 작은 친절과 소자는 둘 다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의 상과 연자 맷돌은 매우 큽니다.

 

내세의 크고 영원한 것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의 아주 작은 것이라는 내용이 바로 두 절의 말씀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실족케 한다범죄케 한다라는 단어입니다. 원어에서는 같은 한 단어입니다.

 

실족케 하면이라는 뜻의 동사는 스칸달리세(σκανδαλιση), 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 길에 덫을 놓다, 걸려서 넘어지게 하다)가 원형입니다.

 

이 단어는 이미 6:3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6: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서 우리말로 배척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의 스캔들로도 말이 전하여 졌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감정이 상하다, 불쾌하게 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그 헬라어의 뜻은, “걸려 넘어지는 돌에서 유래합니다. (6:1~6설교, 2008.8.24)

 

본문에서, 이 실족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형제들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지 말라 입니다.

3. 세상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

 

이 내용은 4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이 부분은 앞에서부터 계속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연자 맷돌입니다. 연자 맷돌은 형제를 실족케 했을 때 받는 형벌이 작은 것에 대조가 되어 상대적으로 큰 물체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조선시대 육시, 능지처참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범죄자의 목에 연자 맷돌을 걸고 바다나 강에 던집니다. 이 방법은 당시 로마가 쓰던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장면입니다. 대부분 어부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았거나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일설에는 사도행전 5:37에 가말리엘의 연설 중에 예로 등장하는 폭도 갈릴리 유다가 이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연자 맷돌 처형 장면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사형수의 시체가 물속에서 조류에 떠밀려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진저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자들끼리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범죄하게 할 수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일이 본문에서도 예로 나타나는 분파주의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영적 교만과 시기에서 나옵니다. 적극적으로는 모함과 언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표적인 분파주의로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구원과 관계없는 경건에 관한 문제로 믿음의 형제들을 자신과 비교하는 일은 자신이 결국 신앙적으로 덜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를 들면 음식 문제로 누군가 오해할만한 일이 있으면 본래 먹어도 되지만, 믿음이 약한 그 형제를 위해 아예 먹지를 않겠다고 합니다.

 

로마서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린도전서 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그러므로 신자의 생활은 자신을 기준 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기준하기도 해야 합니다.

 

2. 자신을 실족케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43절에서 48절까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에는 손, , 눈이 등장합니다. 만일 이것들이 범죄하면 이것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이것들 가지고 지옥 형벌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이 말하는 신체 절단은 문자 그대로 신체 절단이 아닙니다. 성경이 손, , 눈을 잘라내라는 말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근원은 죄를 지은 손과 발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20~23,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가 죄를 대할 때에 마치 신체를 잘라내듯 죄와 떨어지라는 말씀입니다.

 

3. 세상이 실족케 하지 말라.

 

49, 50절 말씀입니다.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과 불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나타나는 요소들입니다. 소금은 제사의 필수요소입니다.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즉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희생 제사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제사, 영적 제사를 말합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가지를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둘 다 불에 태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불형벌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완벽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제사였습니다.

 

우리 안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소금이 음식을 짜게 해서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게 하고 맛을 내는 것처럼, 희생과 십자가의 삶을 우리가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의 삶의 모습은 이렇다는 것을 골로새서에서 소금과 신자의 언행을 두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을 뿌리듯 하다는 것은, 은혜 가운데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자기 부정과 헌신, 희생이 은혜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듯이, 신자의 삶에서 십자가가 없으면 역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가 전도가 어려워지고, 오히려 신자 수가 감소되었습니다. 2006년 통계로는 한국의 기독교인의 숫자가 861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숫자가 과거 10년 전보다 약 14 만 명이 줄어든 숫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종교들, 불교나 천주교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기독교만 유일하게 줄어든 종교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는 원인이, 교회가 부족해서 아닙니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도 아닙니다. 여러 설문 조사에 의하면,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도 많은 이슈가 되어 온, 목회자들의 윤리문제가 가장 큽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보고, 기독교를 욕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난 기독교인들에게는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다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방식이 싫었다. 왜 기독교를 믿지 않느냐고 물으면 간디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다.”

 

간디의 이 말은 이렇게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그러하듯 힌두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존경했습니다. 심지어 산상수훈의 구절들을 종종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E. 스탠리 존스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간디를 만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탠리 존스의 묵상집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침마다 읽는다고 합니다. “간디씨, 그리스도의 말씀을 종종 인용하시면서, 왜 그분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거부하십니까?”

 

간디가 대답하기를, “저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단지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당신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젊었을 때 영국에서 유학해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 후 고국인 인도에 돌아왔다가 몇 년 후 남아프리카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아프리카도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는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인으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비인격적이고 치욕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느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물론 교회는 서양인들의 교회였습니다. 그가 교회로 들어가려 할 때, 입구에서 한 사람이 길을 막고 기분 나쁜 말투로 말했습니다. “넌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검둥아.” “저는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려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간디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검둥이를 위한 자리는 없다. 꺼져! 사람들을 시켜서 너를 쫓아내겠다.” 그 후에 간디가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겠습니까?

 

말하자면, 간디가 만났던 그 사람이 간디를 실족하게 했습니다. 지금 간디는 위대한 인물이고 당연히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으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인도는 물론 세계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봅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뒤통수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보고 복음의 결과를 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치와 진실을 규정하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믿는 형제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그들이 나로 이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는 숨어있는 헌신으로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43. 제자도, 종과 어린 아이

 

마가복음 9:33~40,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병행 본문: 18:1~5, 9:46~48, 9:49~50

 

누가복음 9:49~50,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우리너희의 차이)

 

 

마가복음 8장에 접어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그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제자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9장의 갈멜산상에서의 변화 사건도 이러한 십자가의 원리를 가르치는 한 재료였습니다. 즉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결국 얻게 될 것이지만, 그 제자들은 반드시 주님의 고난도 같이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8장부터 10장까지 연속적으로 말씀되어집니다.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마가복음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말씀을 하신지 얼마 안지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적과 권능을 행하실 때는 누구나 대단한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로마를 때려 부수고 부활한 다윗왕권의 권세의 한 자락씩을 잡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사장들과 자기 백성들, 그리고 제자 중 한 명에게 배신을 당하고 로마병사에 의해 십자가에 형벌을 받게 되자 모두들 겁에 질리고 실망하여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행동과 믿음 없음이 오늘날의 우리와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이적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관심을 갖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원하신 것은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향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 앞에서 모두 다 도망갑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다를까요?

 

제자가 되시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리되기 위해 오늘의 성경말씀을 듣고, 왜 예수님이 제자도와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종과 어린 아이로 그 말씀의 재료로 다시 삼으시는지 생각하십시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누가 큰 자인지 길을 가면서 계속 논쟁하던 제자들에게 무엇이 큰 자인지,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제자인지, 즉 십자가를 가르치기 위해 두 가지 사건 재료 혹은 예화를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과 어린 아이입니다.

 

35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뭇 사람)섬기는 자가 되어라 하시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섬기는 자”(servant, diakonos) 혹은 하인을 말합니다. 바로 이 헬라어 단어에서 집사”(deacon)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마침 옆에 있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나다. 나에게 하듯 이 아이에게 대하라는 실물교육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강해 중에 제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듯이, 이 마가복음은 당시 로마황제의 핍박아래 있던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한 복음서가 마가복음입니다.

 

신약성경은 거의 대부분이 당시 국제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영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제자들이 실제 사용한 언어는 헬라어가 아닌 당시 이스라엘의 지역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원래의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언어입니다. 옛적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사용한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부터 나온 언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멸망한 북이스라엘 지역에 내려와 살게 되고, 남유다 마저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사왕국에서 포로생활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본래 히브리어와 비슷한 아람어를 유다민족의 공용어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과도기 시대의 기록인 다니엘서의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백성들의 일상 언어로는 아람어를 사용했지만, 때로 국제 공용어린 헬라어나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도 필요에 따라 자주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라틴어나 헬라어는 웬만큼 배운 사람들이나 국제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언어적 특징은, 4복음서 중에서 아람어 단어와 라틴어 단어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헬라어 발음으로 음역해서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아람어 단어들이 달리다 굼(5:41), 에바다(7:34), 아바(14:36) 등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의 뜻을 기억하십니까?

 

Aramaic phrases in Mark

 

Talitha qoum (Ταλιθα κουμ)

Mark 5:41, And taking the hand of the child, he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is translated, "Little girl, I say to you, get up".

The Aramaic is ţlīthā qūm. The word ţlīthā is the feminine form of the word ţlē, meaning "young". Qūm is the Aramaic verb 'to rise, stand, get up'.

In Aramaic, it could be ימוק אתילט or ימוק אתלט 

(* 히브리어 철자가 원래는 반대 순서인데 여기에서는 순서가 변경이 안됩니다)

 

Ephphatha (Εφφαθα)

Mark 7:34,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ighed and said to him, "Ephphatha", which is 'be opened'.

In Aramaic, it could be חתפתא or חתפא. In Hebrew חתפה

 

Abba (Αββα)

Mark 14:36, Abba, Father," he said,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Abba, an Aramaic Hebrew word (written Αββα in Greek, and 'abbā in Aramaic). Romans 8:15 and Galatians 4:6.

In Aramaic, it would be בא

 

마가복음에서 특히 많은 아람어 단어들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이 책이 비 아람어 독자들을 대상으로 즉 로마교회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두 단어를 봅시다. 그것은 어린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아람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아람어로 talyâ입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하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문둥병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의 하녀가 어린 소녀(왕하 5:1~3)였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도 똑같이 어린 아이라는 단어가 하인이나 노예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하시고, 바로 어린 아이 하나를 안아주시면서 어린 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섬기는 자, 즉 종과 어린 아이는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어린 양이라는 단어도 같은 아람어 탈랴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아이와 종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If John made his proclamation in Aramaic, he said, "talya de laha" (ref: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page 62). The phrase is ambiguous because it can mean Lamb or Servant of God. The Aramaic word talya does not mean lamb; it means child or servant (the Aramaic word for lamb is immer). However, talya took on a double-meaning when the Targums used the word idiomatically (in Pseudo-Jonathan Targum Gen 30:40) capitalizing on its similarity to the Hebrew word taleh (lamb). Although John's proclamation had a double entendre, it was the Servant that Israel was anticipating (Isa 42:1-4; 49:5-6; 52:13; 53:7; Mat 12:18-21; Mat 20:28). 인용: http://glad-u-see.com/sin_world.html

 

아마 제자들은 이 경험을 하면서 그 단어들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 재료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요한의 불평입니다.

 

예수님이 종과 어린 아이에 대한 말씀이 끝나자마자,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최소한 예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의 두 가지 예화를 다시 정리하자면, ‘어린 아이를 예수님으로 영접하는 것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인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와 같이 어린 아이가 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자의 위치가 되고, 남들을 섬기는 자, 종이 되어라,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든지 우리에게 반대를 하지만 않으면 서로 같은 위치에서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하고 힘없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두렵고 힘드니까 다 도망갑니다. 그래도 자신들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거짓 예수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몇 년 전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한다는 책이 나왔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 자신은 물론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했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공부를 잘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로 그 책을 이해한다면 공부 못하는 보통 이하의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대학입학을 앞 둔 자녀들에게, “서울대냐 지방대냐?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겠느냐?”로 공부 좀 잘 하라고 설득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설득이 아니고 협박이지요. ‘서울대 가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논리는 제자도가 아닙니다.

 

제가 제일 거북스러운 교회 직분 중에 권사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집사에서 권사 되면 거의 인품이 달라졌습니다. 권사직에 귀신이 붙는 겁니까? 권사님들이 다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분들도 있다고 듣긴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고질병의 하나가 자리싸움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에서 올라갈수록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감리교에는 감독회장이 하나여야 합니다. 그런데 작년(2008)에 두 명이 선출이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고 감독회장의 직인까지 몰래 훔쳐가면서 잘 싸웠다는데 현재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 제자의 모습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습이 어제 오늘이 아니고, 장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은 겉에 나타나는 세력과 힘과 높아짐을 추켜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결과를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하는가 그 모습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내게 지금 허락된 것,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최근에 제가 보는 책이 본회퍼의 최후라는 책입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의 히틀러 지배 당시의 목사님입니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메시야로 생각하는 나치즘이 판을 치고 히틀러를 반대하는 사상들은 모두 적으로 돌려 깡그리 몰살시키던 시대에,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목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히틀러는 20세기 문명의 탈을 쓴 악마였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몇몇 군인들과 주요 인사가 가담한 암살 계획에 동조하여 모종의 연락책을 담당했는데 그만 발각이 되어 모든 가담자들과 함께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심문과 투옥생활 끝에 그만 독일이 항복하기 한 달 전에 교수형을 당합니다.

 

그가 독일군 나치 장교로부터 심문을 당하면서 (일제시대 독립군 심문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고 간 대화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낭독 내용 생략)

 

나치들이 보기에는 본회퍼는 목적을 이루진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제자로서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통해 영광된 이름을 얻었습니다.

 

당시 독일교회는 지금도 서구 교회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소속이 된 공무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특정한 종교 제도권이라는 고급 계급사회에 소속이 되어 그 관리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은 무미하고 건조하고 자유주의신학에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각성하면서, ‘고백교회라는 국가제도에서 보호받는 교회가 아닌 독립적인 교회들이 나타났고, 본회퍼는 그 교단의 목사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로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로 학생들에게 영성훈련을 시킵니다. 그렇게 나온 지은 책 중에 제자의 대가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싸구려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제자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고 한 참이 지나면 번영과 고난의 시간들이 반복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한국은 부침하는 역사와 함께 또 빠른 경제성장 속도와 같이 교회들의 변화도 매우 심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쇠퇴기입니다. 아니면 또 다른 고난의 시기, 사회적으로 돌 맞는 고난의 시기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는 이상한 환상과 착각이 지배적입니다. 아시다시피 7,80년대까지 교회를 부흥하게 했던 주요 흐름은 신유은사, 방언, 이적 등등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유행하던 말을 사용하면, “능력전도즉 능력을 나타내면 전도가 된다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허울 좋은 전도와 심령부흥집회 시절을 지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던 목사들과 교회들, 그리고 그 속에 같이 묻어 간 기독교인들의 숨어있는 욕망의 정체가 들어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부흥의 깊숙한 동력원은 인간의 허영, 권세, 영광을 바라는 욕망이었습니다. 큰 것이 복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에 따른 수적 성장에 의해 물질적 성장, 교회의 대형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약 20여 년 동안 성경공부, 제자훈련, 영성훈련 등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 내면을 잘 살펴보면 과거의 은사위주, 기복주의가 더 이상 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고 있는, 그릇된 교회성장에 대한 개혁적 움직이라기보다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들입니다. 목적은 같고 방법만 달라진 것입니다.

 

진정한 말씀과 제자도에 의한 회개와 개혁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교회성장의 시도들이 거의 대부분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성장에 보탬이 되기 위한 여러 방법론과 변형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작금의 현상을 꿰뚫어 보십시오. 지금은 한국 교회의 공백 기간입니다. 텅 빈, 마치 태풍의 눈의 시점과 같습니다. 다음 단계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긍정적으로만은, 지금까지 기대했던 외적 교회성장면으로는 예측되지 않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목사들의 윤리문제, 세습화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방송을 타고 대두되면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추락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과거의 성장 관성이 남아 있어서 과거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한국 교회 상황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양적으로, 물질적으로 성장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진정한 제자들과 알곡을 고르기 위해 잠시의 양적인, 물질적인 성장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지금까지 능력과 힘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교회의 전체로 이해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의 영광과 병고치고 귀신 쫓는 능력 행하심에 한껏 기대를 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르치시는 진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보이는 것, 능력, 누가 더 높아지느냐에 자리다툼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교회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가 버린 제자들처럼, 앞으로 한국교회에 고난이 닥칠 때에 대다수의 교인들이, 교회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때에도 진정한 제자를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참고.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독일의 이름 있는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목회자 집안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유산을 물려받은 가정이었지만, 교회생활에 적극적이거나 충실히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정신의 맥이 숨어 있었던 탓일까. 본회퍼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3년 열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튜빙겐대학에 진학한 본회퍼는 그 곳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후 베를린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가 신학을 하던 1920년대는 자유주의 신학이 몰락하고 변증법적 신학이 독일의 대학가를 휩쓸 때였다. 그러나 베를린대학만큼은 자유주의 신학 전통의 마지막 보루였고 그런 대학의 분위기에서 본회퍼는 하르낙과 칼홀, 제베르히, 칼 바르트 등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의 신학 세계를 키워나갔다. 그는 겨우 23세에 신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강의를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논문은 당시 신학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교수들이 본회퍼를 천재적 신학도라고 입을 모을 만큼 그의 신학적 학문의 깊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재적 신학자로서 빛을 발하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교수 취임 후 2년 반 동안 베를린대학의 교수로서 생활하던 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2년 간 목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다시 독일로 돌아왔을 때는 이전의 천재적 신학자, 교수로서의 본회퍼가 아니었다. 그는 고백교회 운동가 본회퍼, 실천적 신앙인 본회퍼였다.

1930년대 독일에서는 이미 혁명의 힘이 잉태되어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국가 전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 있었던 선거 뒤 제국의회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리는 12석에서 107석으로 늘어났고, 1932년 선거에서는 나치당이 의회에서 271석을 차지해 압도적 지배당이 되었다. 1933130일에는 드디어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3공화국,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됨으로 20세기의 신화가 남기고 간 인류의 죄악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회퍼가 교수를 그만두고 실천적 신앙인으로 활동하던 때는 바로 그 시기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고 세계 제패의 야욕을 안고 있던 때. 그 때 본회퍼가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것은 바로 독일적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를 단지 정치적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메시아로, 그리고 나치즘을 행동하는 적극적 기독교로 받아들여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나 한국의 유영모, 중국의 본색교회 운동가들의 민족적 기독교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나치즘은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만을 배타적으로 존중하고 유대민족과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핍박과 학대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했던 바가 결코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히틀러의 교묘한 술책에 의해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에 절대적 충성을 맹세했다.

고백교회 운동은 이런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독일 복음주의교회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교회를 나치의 선전도구화하려는 히틀러 정권에 저항한 신앙부흥운동이며 반나치 단체였던 것이다.

본회퍼는 바로 이 고백교회 운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신앙적 실천을 시작했다. 이전의 학자로서, 목회자로서 만의 삶이 아닌 자신 앞에 놓인 국가적 위기 앞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직접적 저항운동이었던 것이다. “고백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것은 나를 구원으로부터 멀리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할 정도로 고백교회에 대한 사명이 대단했던 본회퍼는 교회가 영원한 진리나 원칙들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한 형태로서의 고백교회는 본회퍼의 신앙과 신학적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의 실천적 신앙은 고백교회 운동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 고백교회 운동의 정신이 흐려지면서 운동성이 약해지자 본회퍼는 나치즘에 대항하는 지하 운동세력에 적극 가담하여 반나치 운동에 직접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 본회퍼의 교수직은 박탈됐고 그가 가르치던 핑켈발데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독일 안에서 그가 책을 출판하는 것도 금지됐고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감시를 받아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본회퍼는 더욱 적극적으로 반히틀러 세력에 가담하여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본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위탁된 목회자의 과제를 넘어서 왜 정치적 항거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자로서 히틀러에 반대하고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복음의 실천이요, 선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미친 사람이 베를린의 번화한 거리에서 인도 위로 차를 몰고 달린다고 하면, 나는 목사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가정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내가 만일 이 장소에 있다면 나는 뛰어 덤벼들어서 그 미친 운전사가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당시 나치즘 하에서의 상황과 그의 마음가짐을 잘 드러낸다.

본회퍼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얼마 후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 1944720일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지하활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수용되었다. 본회퍼는 그가 37세되던 1943년 그의 자택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다. 테겔 형무소에 18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그가 가담했던 히틀러 암살 음모의 내막이 드러나면서 게슈타포 감옥으로, 다시 북켄발트 수용소, 플로센뷰룩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549.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형무소의 의사는 본회퍼의 최후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아마도 5~6시였던 것 같다. 죄수들을 감방에서 불러내다가 선고문을 읽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본회퍼 목사를 봤다. 죄수옷을 입은 채 꿇어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의 열심과 확신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의 소원은 순교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이미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여서 믿음을 위한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와 순교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 있는 사람이 남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고 떠드는 허황된 말. 나는 두 번째의 경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다.

아이큐도 없고 상식도 없고 믿음도 없는 두 번째의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가복음 42. 큰 자들과 소자 하나

 

마가복음 9:33~50,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이 기록된 당시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에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 마가복음의 목적입니다. 그 제자도의 핵심이 바로 마가복음 9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도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는 과정, 헌신의 길입니다. 이 제자도는 과거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현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나 나쁜 행위들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자기 부인(否認)이라고 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제자가 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인격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가 되심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기독교에 기대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신자라면, ‘지옥으로부터 구원죄 사함에 대하여 듣기를 좋아합니다.

 

때로 어떤 이들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싸워서, 목사님이 바람이 나서, 목사와 장로가 싸움질을 해서 그 꼴 보니 싫어서 교회 안 다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비극입니다. 그런 교회들도 문제지만, 신앙의 조건을 그런데서 찾는 당사자 자신도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는 비극만 가득한 드라마입니다.

 

교회에 실망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착각했든지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도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요한복음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제자도에는 올인해서 운이 좋다면 곱빼기로 이문을 남긴다는 약속이 전혀 없습니다. 올인은 기본인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보상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자가 되려고 하면 지금까지의 경력과 명예를 다 잃어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그러한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된다고 믿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아무든지는 가정(假定) 상황이 전제된 말입니다. “만일 ~하려 하면입니다. 그 의미는 반대로 네가 원치 않는다면 제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제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구원은 받겠으나, 그 사람의 이 세상의 삶은 우리 주님께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돌덩이와 보석의 차이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새예루살렘이 정금이니, 보석이니, 진주 등등의 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 보물들이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한 보물이 아닙니다. 바로 새예루살렘, 즉 그리스도의 신부된 신자의 영광된 모습을 보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8~22,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계속 이 한 가지 문제로 신자의 자아와 다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권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이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도하기 전에는 나는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관계를 주님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신앙생활에는 대가(cost)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도의 조건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인 열띤 논쟁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열띤 논쟁은 바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곧 로마를 정복하고 왕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큰 자가 누구냐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짜 누가 천국에서 큰 자고 첫째가 되는 자인지 가까이에 있던 어떤 어린아이를 데리고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작은 자, 즉 소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참된 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남보다 높아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남보다 낮추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탄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렇게 큰 자와 소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던 중에, 제자인 요한이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고자질을 합니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과 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화 산 아래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기에 어떤 어린아이를 말 못하고 귀먹게 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그 사람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질투, 시기심이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속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들을 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작은 사람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매우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단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주님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으로 일하는 형제들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9장 후반에 나타난 제자들의 첫 번째 문제는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남보다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은 제자 사회라는 울타리를 두르고 남들보다 자신들이 더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선권을 주장하며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는 말씀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9:35)는 말씀처럼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게 되는 희한한 법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권세 있고 돈 있는 큰 자들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즉 가진 자가 높은 자요, 먼저 된 자가 먼저 누리는 곳이 세상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고대 세계에서 한편으로는 문명이 발달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 가장 야만적인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즉 권세 계급이며 지배계층인 로마의 귀족들과 왕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향락과 권세를 위해 갖은 추악한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세계에서는 모든 제국의 백성들은 로마 황제만을 주()라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황제가 신처럼 숭배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마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가 그들을 그대로 둘리가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을 굶주린 야수들의 발톱으로 찢었으며 그들의 눈을 뽑았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당시의 성도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남을 정죄하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수족을 베는 듯한 과감한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또한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 치듯하다는 말은 죄인이 지옥에서 불로 형벌을 받을 때 마치 소금으로 맛을 내게 하듯 불이 죄인에게 뿌려진다는 뜻입니다(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NIV).

 

특히 마지막 절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9:50,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가운데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금 그 소금 맛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금은 소금 맛이 필요할 때 소금을 필요로 하는 곳에 던져져야 할 터인데 우리는 던져져서 그래서 녹아 없어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이미 전혀 엉뚱한 일로 소금 맛을 다 잃어버려서 던져져 봐야 아무 쓸모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요?

 

더럽고 부패하기 쉬운 것일수록 소금을 필요로 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짠 맛을 지녀도 싫다고 배척하려 하지만 우리가 짠 맛을 잃으면 더 더욱 우리를 무시할 것이며 그 때에는 우리를 이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이라고 더 맹렬히 핍박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세상과 짝하여 적당히 지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더 우리 본연의 짠 맛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의 제자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제자들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을 되찾아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요즘 제직훈련 중에 제직으로서, 성도로서 교회 생활하는 모습에 그 역할에 대해 집사님들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남을 돌보고 섬기는 거룩한 부담감으로서의 직분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성도님 가운데는 이런 분들이 안 계시지만, 어떤 교회들 가운데는 직분을 명예처럼 여기고, 서로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훨씬 낫다는 우월감이 있다면 영적인 교만이 됩니다. 남과 나를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되지 않았다는 비교입니다.

 

또 사람을 누구 편이냐?’로 가릅니다. 교회는 우월의식이 아닙니다. 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인간의 가장 본성적인 싸움은 권력 싸움입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이면 권력 싸움을 합니다. 누가 더 우선권이 있느냐?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작은 공동체 안에도 권력 다툼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에서는 더욱 심합니다.

 

TV 드라마 중에 요즘(20091)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랍니다. 그 내용의 핵심이 어떤 부잣집에 시집간 평범한 집 출신의 며느리가 마음이 너무 착해서, 남과 경쟁하지 못해서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무시 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마음을 바꾸고 요녀로 변신한다는 줄거리라고 합니다. 현대 세상에서는 친구에게 남편을 뺏길 정도로 순진하기만 하고 남을 의심할 줄 모르면 가진 자들과 더 똑똑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간에, 장로와 장로 간에, 집사와 집사 간에, 교회 안에서조차 계급화, 권력화 되어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 직분을 출세로, 감투로, 벼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의 제일 좋은 칭호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당회장이라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예전에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 소도시 던펌린에 현대전자가 반도체 공장을 세웠는데 그 직원 중에 몇 명이 제가 공동 목회하던 에딘버러 한인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인교회 청년회를 제가 맡았는데 청년회장이 한 번은 청년들이 부탁한 일을 하러 그 공장에 갔습니다. 직원인 청년회원들이 회장님이다라는 말을 하니까 갑자기 전체 공장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회장님 오셨다!” 현대그룹 왕회장님’(당시 생존)이 기습 방문을 한줄 알고 말입니다. 호칭이 문제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은 늦게 예수를 믿고 훗날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분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삼일운동 준비를 할 때는 장로였습니다.

 

삼일운동 직전, 독립선언서에 쓰일 민족대표들의 이름을 쓰려고 할 때 사람들 간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냐 기독교의 대표인 이승훈이냐 누구의 이름을 먼저 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잠시 바깥에 나가있던 이승훈선생이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義菴,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

 

교회 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먼저 죽는 순서입니다. 남보다 내려가는 순서입니다. 누구 뒤에 썼다고 누구 다음에 내 순서라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에는 상식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을 위해 순교까지 하는 기독교인데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로 살 때 가족들이 불화하고 분쟁하는 일도 있다고도 했습니다(10:35, 12:53).

 

하지만 우리의 제자의 삶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나 우월의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헌신, 자기 부인, 사랑이라는 신앙의 행위 속에서 조차 내가 남들에게 우월하게 보이려는 마음이 없는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 능력, 남을 돕는 구제 그 모든 행위들이 내가 남보다 더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는 동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큰 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여전히 살아있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일은 어린 아이, 소자와 같은 영혼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제자들은 자기를 낮추고 자기가 죽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제자로 부름 받은 분들입니다.

 

마가복음 41. 능력있는 믿음

 

마가복음 9:9~32.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30]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지난 (2009) 11일 어느 일간지에 우리나라의 두 사람의 천주교 추기경 중 한 사람인 정진석씨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5천명의 사람들이 각자 준비했던 도시락을 꺼내 먹은 것이다.” 저는 그 기사를 보고 한국의 천주교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적을 믿어야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상식과 가치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임을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참고.

중앙일보 11일자 42: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난해 1229, 서울 명동성당 옆 집무실에서 정진석(78·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을 만났다. 경기 한파의 찬바람이 몰아치는 신년 벽두를 향해 정 추기경은 고통참다운 행복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를 돌아보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일화다윈 200주년, 진화론 150주년에 대해 깊고도 파격적인 답을 던졌다.

-일주일 전 성탄 메시지에서 경제만 좋아지면 우리의 모든 삶이 다 해결될 것이란 헛된 기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헛된 기대입니까.

사람은 물질만 가지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부탄이나 방글라데시 국민을 보세요. 그들의 행복지수는 문명국보다 더 높아요. 행복의 요건은 물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거죠. 마음 여하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질, 그 자체가 행복을 좌우하진 않아요. 행복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겁니다. 물질을 가져도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을 가졌으면서도 그걸 초월하죠. 그런 사람들은 덕()이 있는 이들이죠.”

오병이어일화는 기적 아닌 사랑

그 말끝에 정 추기경은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일화를 꺼냈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자와 아이들은 제외한 수치)의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적(異蹟) 일화다. 정 추기경은 그 사건을 기적으로 풀지 않았다. 대신 예수의 마음예수의 사랑으로 풀었다.

성경을 보세요. 어린이와 여자를 빼고도 5000명이 모였죠. 그럼 적어도 70008000명은 됐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50명씩, 혹은 100명씩 무리 지어 앉게 하셨어요. 서로 낯선 이들이었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죠. 물론 그중 일부는 같은 마을 사람도 있었겠죠.”

당시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모인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성경에는 기록돼 있다.

정 추기경은 사람들 사이에는 친밀도가 있다고 했다. “가장 친밀한 이들이 가족이죠. 그 다음에 학벌로 뭉친 이들, 이권을 위해 모인 사람들 등이죠. 그럼 가장 친밀도가 낮은 이들은 누굴까요. 시장 바닥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음을 안 여는 사이죠.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모인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죠.”

정 추기경은 예수가 올린 감사의 기도에 주목했다. “그게 어떤 기도였을까요. 그건 마음을 열어라.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저마다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도시락을 꺼냈던 거죠.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이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죠. 그렇게 나누고 남은 게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는 겁니다. 거기에 오병이어일화의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그건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사람들 마음 여는 기적 필요한 때

-그럼 오병이어일화에서 예수가 보인 기적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도 없어요.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진정한 기적은 뭘까요. 다름 아닌 꼭꼭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여신 거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도시락을 나누게 하신 거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죠.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10년 전 외환위기 때를 보세요.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죠. 그런 공동체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한마음이 돼야 합니다. 한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요.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고가 아닙니다.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 중략

진화론은 신의 섭리 알아가는 과정

2009년은 진화론의 해.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의 고전인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다. 한때 발명가의 꿈을 꿨던 공학도(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답게 정 추기경은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은 우주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은 결국 신의 섭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며 진화론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답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시간을 전제로 한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등생물이 나왔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럼 시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를 알아야죠. 시간은 빅뱅 때 생겼습니다. 빅뱅으로 인해 이 우주가 생겼고, 그로 인해 시간과 공간도 생긴 거죠. 그래서 매 순간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하느님도 시간의 영향을 받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계신 분이죠. 그러니 시작이 없고, 변화가 없고, 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14,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모세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라고 기록돼 있는 겁니다. 그게 영원한 법이죠.”

 

이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단지 사랑이시니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그들의 요지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셨거나 사흘 만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에 집착하지 말고 사랑의 정신만을 붙들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런 신학과 사상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그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은 허무맹랑한 종교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세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의 한 흐름입니다. 특히 정진석씨는 한 가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고 여러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을 인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가 합해진 잡종입니다. 그 이론들은 벌써 오래된 이론이고 이 인간중심적인 논리들 속에서도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의 진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목사나 신부가 성경은 가짜다라고 해야 박수 쳐주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이런데서 이상한 정신도착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과거에는 천주교나 기독교나 성경 진리를 위해 순교까지 했는데 요즘은 그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성경과 그 진리를 부인해야 인기를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뿐 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도 복음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신앙을 가장한 이상한 이론들과 궤변들이 마치 진리인양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그들에게 물러가라 사탄아라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리와 믿음이 혼탁한 때에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인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되 그야말로 겨우 믿어주는 바닥을 기는 믿음입니다. 즉 능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변화산의 영광에서 내려 온 제자들은 세상의 현실과 고난에 직면해서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신앙의 문제는 신자가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고 사람을 높이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윤리적 기준을 주님보다 더 내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8:27~33에 있었던 사건과 내용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27~33,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을 구체적으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고난의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채근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을 해보신적 없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 성령 충만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다 되는데 왜 그렇게 답답한 상태에서 굳이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셨을까요? 나중에 성령 받으면 다 알 텐데.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미리 가르치셨을까요?

 

이것이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입니다.

 

마가복음 8:34~3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가 요구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제자가 마땅히 가야할 길, 제자도 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몇 주 전에 그 십자가는 상황에 따라 겪는 고난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길 뇌두고 어려운 길 가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이루어가는 제자는 자기의 의()가 부수어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것을 온 인격에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성령 체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성령 체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 체험의 감동과 경험이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갖가지 상황과 사건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하는 지혜까지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제자들이 복음의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억했던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체험도 살아있는 말씀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성령 충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단 한 번의 그냥 은혜로운 사건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우리도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그 주님의 열심과 의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도를 가르치는 상황이 변화산 사건(9:1~8)을 통해 다른 국면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변화산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거의 얼이 빠졌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고난을 예언하셨습니다. 즉 변화산의 영광은 앞으로의 영광이며 고난이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의 40일 광야에서 시험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이미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서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영광이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이 있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에는 16세기의 유명한 화가인 라파엘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변화입니다. 맨 위에는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된 모습이 있고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맨 아래 부분에는 귀신들린 아이와 그 부모, 그리고 다른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라파엘은 이 그림을 통해 극적인 두 가지 장면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산 아래 세상의 밑바닥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의 입장으로 상상해 보시면서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황홀하면 걷기는 걷되 구름을 걷듯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산을 내려올 때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장소에서 점차 땅으로 내려올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한 소년과 그 가족들의 절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한 고백이 이 사건과 비교하여 하나의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8~9,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 영광스러운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살 때에는 어떠하다고요? 모든 세상의 구경거리처럼 세상의 대접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산을 내려오니 소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예수님이 묻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즉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마가복음 9:17~18,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간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가복음 9: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상태를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살 수도 없고 귀신의 의지대로 쓰러지고 불과 물에 자기 몸을 던집니다. 그런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의 심정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의 현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그 현장으로 가야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주께서 택한 자들을 그런 상황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직장만 잘 다니면 그럭저럭 편히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이 세상의 고통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착각과 오해를 깨뜨리고 살도록 때로는 극한적인 상황으로도 밀어 넣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세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교육?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마가복음 9:18,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믿음이 없는 세대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먼저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는 병 고치는 능력을 받고 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선생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OO교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보고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기 시작합니까?

 

마가복음 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할 수 있거든.” 죽은 자도 살리신 분에게 할 수 있거든 해 주시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 원인은 제자들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고 그런 무능한 모습은 그들이 따르고 있는 선생님 즉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제자를 보고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무능은 바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믿음입니다.

 

28, 29절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9:28~29,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이다입니다. 제자들은 과거의 자신들의 경험과 능력을 믿고 기적을 행하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영적인 삶의 진정한 시험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기도까지 하고...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주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자세와 심정으로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하고 금식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에게 십자가는 필수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일부러 내 것으로 만드십시오. 쉼 없이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분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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