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8. 증거

 

마가복음 14:53~72,

[53]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다보면 특이한 사건의 전개방식으로 본문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개최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안까지 들어가고 정체가 발각되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두 번씩 교차하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가가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마가의 스승인 베드로가 자신만이 알던 두렵고도 부끄러운 이 장면을 마가에게 아주 자세히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부인한 죄인이었습니다.

 

53절과 55절에서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 세 그룹은 산헤드린이라는 공회가 모이는 공식 임원들입니다. 전에는 그들이 모여서 보통 종교적인 문제를 토론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개최 목적이 예수님에 대한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내려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죽일만한 정당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라도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십계명까지 스스로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게다가 그들은 정상적인 산헤드린 개최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제사장의 집에서, 그것도 한 밤 중에 모이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는 중간 과정에 54절에 베드로가 그들이 모이는 장소 가까이 다가가는 장면이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베드로는 바로 이곳 제사장의 앞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두 가지 내용이 한 주제를 가지고 휘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용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베드로가 자기를 알아 본 증인을 만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묘하게도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거를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문에서는 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를 내어 놓지만 제대로 맞지가 않아서 결국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데 예수님 자신에게 네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증거를 삼겠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너 같은 시골뜨기 목수가 어떻게 감히 그리스도가 되겠느냐는 시기심과 복수심, 그리고 열등감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서는 하녀(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네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의 하나다라고 당당하게 증거를 내어 놓고 있습니다.

 

한 곳에서는 제사장들의 불법적이고 말도 안 되는 증거들이 실패하자 예수님의 말로 트집과 증거를 잡으려 하고 있을 때, 다른 옆에서는 정말 말이 되는 증거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시기심과 원한도 있었지만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가 어떤 분이냐에 대한 성경을 잘못 이해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관은 이렇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이 세상의 현실적인 고통에서, 당시로서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구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구약의 말씀이 시편 2편입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군왕들, 권세 잡은 자들을 마치 질그릇 깨뜨리듯이 없애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납작해지고 떱니다. 모든 세계 위에 올라서 지배하는 분으로 이렇게 구약에서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만 예언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같은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이사야 50, 53).

 

같은 시편(22:6~8, 16, 18; 34:20; 69:4, 21절 등)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시는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스가랴 11:13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로 받은 돈을 나중에 양심의 가책으로 제사장들에게 던져주고 자살하는데 그 시체를 그 은 30개로 산 토기장이의 밭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11:12~13,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정적인 모습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영광이 가득한 승리자여만 했습니다. 그 관점이 오늘날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예수가 너무 쉽게 잡혔습니다. 마치 기다려준 것처럼. - 사실 예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는 자신 앞에 붙잡혀 온 힘없는 목수 출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 이런! 기대 이상으로 싱겁게 잡혔습니다. 자기들이 듣기로는 제자 중 하나가 칼질을 했다는데 그것도 잡히는 중에 있던 예수가 만져줘서 정상이 되었다니 기가 막히지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절대 그리스도일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도 자신의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할리는 없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이미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당시의 메시야관의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까지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요한의 생각에는 아마도 예수님이 썩어빠진 종교계를 뒤엎고 성전제사와 종교제도를 개혁하고 정치계까지 바로잡아 주실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은 안 하고 사방을 몇 사람들과 돌아다니면서 요한의 생각에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오죽했으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6, (CF. 누가복음 7:18~35)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한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 숙원이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린 분이 전혀 종교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병이나 고치고 다니십니다. 많이 답답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정말 당신이 그리스도이시거든 그리스도답게 왕처럼 다스려 주세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다른 증거라도 보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씀이 있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광야에서의 금식과 시험을 마치신 후 고향 나사렛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4:16~19,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시면 요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이적을 능력으로만 보고, 그리스도는 당연히 철장으로 유대와 세계를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일 것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어떻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입니다. 헌금 많이 하고 충성하면 물질 축복, 건강 축복 받는다는 오해입니다. 대형 교회와 성공이 복이라는 오해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증거로 방언을 하고 어떤 신비한 이적이 나타나야한다는 괴상한 현상들이 복음이라고 오해하고 그것을 진리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물론 복 받는 신앙이지만 그 복이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습니다. 전혀 이득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복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신앙의 증거라고 거짓 증거하는 설교자들은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는 거짓 선지자’(마태복음 24:11,24)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개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과 그 권능만 봅니다. “, 이적을 행하시니 대단하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그것이 아니지요!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고침 받는 이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경이었던 이전 상태와 눈을 뜨고 보는 상태의 차이, 평생을 땅바닥을 기던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난 그 변화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앉은뱅이가 걷게 되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각막이식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유전자 공학으로 질병을 낫게 하는 변화가 아니죠. 돈으로도 할 수 없는, 세상천지가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병 고침 받는 역사와 이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이적 자체가 목표가 되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슨 계급 올라간 것처럼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 특이한 신유사역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가 있습니다. 일산에 있는 한소망교회(류영모 목사)입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류영모 목사님은 영국에서 시작된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인 알파코스의 한국 이사장직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시행하던 알파코스 과정 중에 기도하다가 넘어지는현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래전 한국 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기성 있는 넘어짐도 과거에 있었긴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회에서 신자의 치아를 치료한 아말감이 금으로 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이 한 번이 아니고 또 한 교회에서도 아니고 다른 알파코스 교회에서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지금 대다수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들에서는 긍정적인 반응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큽니다. 이단의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인 알파코스 교회들에서는 이런 현상들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며칠 전, 문제의 핵심인 류영모 목사님은 발표를 통해서 한국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넘어짐현상이나 금이빨 사역을 중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의 진위는 저 개인으로서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현상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중단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계속 그런 현상에 대한 집착과 유혹에 가까이 하면 언제든지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고, 말씀 위에 선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고,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미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이런 현상보다 더 놀라운 일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으로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 데에,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데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는 자리까지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몸에 그리스도를 죽게 한 것즉 십자가를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 변화입니다. 천지가 변한 것처럼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법이 변한 것입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나야 신기해하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진정한 가치는 이렇게 세상의 썩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었는데 왜 저들보다 더 못합니까?”로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기도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뭡니까? 좋은 조건을 달라는 겁니다. 조건이 불충분하니까 불편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불평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은과 금을 우선시하는 생각입니다.

 

좋은 조건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좋은 신앙을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지위, 상태가 목표가 안 됩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조건에 따라 내 신앙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함에도 풍부함에도 모든 일에도’(4:12)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마가복음의 베드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때 무서워서 도망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잡히신 곳까지 따라옵니다. 그러나 한 하녀의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죠.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변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평생을 주님과 동행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인 세력과 그 분위기에 눌려 도망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이 죽인 예수를 전합니다.

 

그러다가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성전에 들어가던 중 성전 문 앞에 앉아있던 한 걸인과 마주치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앉은뱅이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의 고백인즉, 은과 금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은과 금으로도 살 수 없는, 바로 내게 있어 증거가 되시고 며칠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만 있다는 말입니다. 그 예수를 갖고 있습니까?

 

그가 처음으로 이적을 일으킨 첫 번째 대상이 앉은뱅이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오심의 증거가 다시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고 그 생명을 믿는 바로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가 남긴 서신에서 우리 신자들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약속하는 복은 썩는 것들, 이 세상에 속한 것들 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와 권능도 하나님이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능력, 방언, 병 고치는 능력, 쓰러지게 하는 능력, 혀가 쑥 빠지고 이상한 웃음을 웃는 것이 신앙의 표시요 증거라고 생각하면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게 미혹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받은, 그리고 받을 복은 썩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금보다 더 귀한 복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하여 판정할 때 무엇을 보고 판정합니까? 먼저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목사를 봅니다. 그것도 교회의 크기를 보지 않고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나를 보지 않습니다. 볼 능력도 없구요. 그 교회가 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을 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 알고자 할 때 또 무엇을 보고 판정합니까? 여러분을 봅니다. 그것도 예수 믿으세요라고 웃으며 전도하고 구제하는 얼굴을 안 보고, 돌아서 가는 여러분의 뒤통수를 보고 판정합니다.

 

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동시에 재판 당했듯이, 사람들은 나 하나를 보고 동시에 나와 하나님 두 가지를 재판합니다. 여러분이 증인이요 살아있는 표적입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마가복음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마가복음 5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가복음 14:32~52,

[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정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 사람들은 때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당당히 죽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 예수님도 역시 사람이라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셨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다보고 계셨던 십자가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신 죽음이십니다.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의 고통은 인류의 대표와 둘째 아담으로서 지옥 형벌의 고통을 홀로 담당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지옥에 가서 지옥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사람의 인체기관 중 유일하게 뇌와 직접 신경이 연결된 감각기관이라고 합니다. 눈은 마치 뇌의 일부처럼, 뇌가 세상이 궁금하여 밖으로 연결한 장치라는 말입니다. 눈은 빛에 가장 민감합니다. 사람의 감각기관 중에 가장 뛰어나고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부는 약간은 빛을 느낄 수 있겠지만 눈처럼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은 죽을 때에 죽음의 고통을 영혼으로 겪으면서도 피부가 빛을 감각할 수 없듯이 그 고통을 제대로 감각할 수 없습니다. 즉 보통 사람은 죽음의 영적 고통을 겉핥기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영적 고통의 무게와 본질까지 체험하신 유일한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원한 죽음의 속까지 들어가셨고 온 인류의 심판의 무게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마라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이유입니다.

 

동산에 계신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가룟 유다가 무리와 함께 왔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은 왜 같이 가자고 하십니까? 어디로요? 남들이 가지 않는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 Via Dolorasa 입니다.

 

그 가는 길은 복 받고 치유 받는 길이 아닙니다. 돈 버는 길이 아닙니다. 나의 고통에서 회복하고 나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는 종교적 심리치유도 아닙니다.

 

그 가는 길은, 남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패배고 슬픔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떳떳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곳을 함께 가자.” 나 자신에 나의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서 모든 것을 능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께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극동방송을 듣다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연세가 그렇게 높은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50대 정도로 카랑카랑하고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설교 내용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더군요.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십일조를 해라. 어렸을 때 어머니의 교육으로 십일조를 잘해서 거부가 된 록펠러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잘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사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파스터 폴 조라면 다 압니다. 나중에는 데이빗으로 개명하셨나요? 그분이 한국 교회 부흥운동, 성령 운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 이상으로 큽니다. 한 마디로 한국의 신앙을 망쳐놨습니다.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잘하면 내세의 천국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복 받고 잘산다는 신앙이 많은 한국 교인들의 머릿속에 세뇌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앙이 우리들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노력에 대한 대가를 교회와 신앙을 통해 로또 대박같이 얻으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필 대부분의 십일조 설교가 왜 록펠러입니까? 록펠러라는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십일조 이상의 돈을 헌금했고 말년에 사회사업과 자선사업을 위해 뿌리다시피하며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그를 나쁘다고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가 말년에 엄청난 돈을 사회에 환원시킨 이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이지요.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냉혹하고 무서운 사업가였다는 사실이 그가 뿌린 돈으로 많이 미화되었습니다.

 

록펠러는 아마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비밀(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19:23)을 늙어 죽기 바로 전에야 깨닫고 실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쌓아 온 돈더미의 바닥에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에게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업상 문제점과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당시 사회적인 논란이 많았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이런 문제는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총기까지 사용했다니 한국의 노동 문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들에서는 십일조하면 록펠러처럼 복 받는다는 단순 논리로만 비유로 제시하는 일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도 좋다는 식입니다. 록페러 가문이 엄청나게 헌금해서 성장한 미국의 대형 교회 설교자들의 영향을 한국 교회가 받지 않았겠습니까?

 

왜요?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그것이 한국 교회의 수준이고 현주소입니다. 이제 제발 십일조 이야기에서 록펠러 비유는 한국 교회 강단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합니까? 물질 축복, 건강 축복, 대학 합격, 취직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에 가서 죽으라는 길입니다. 그곳을 함께 가자라고 하십니다.

 

함께 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배신하여 스승을 적에게 팔 때에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부하들과 로마 군병들을 끌고 왔습니다. 무죄한 자를 폭도와 강도 잡듯이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잡히시기 위해 오히려 마중 가듯 찾아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무력에 순순히 잡히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본 제자들은 놀라고 화가 나고 또 겁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칼을 뽑아 든 자도 있었고,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 오다가 그것마저 벌고 벌거벗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도망가고 맙니다.

 

사실 주님이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 길은, 당신 자신이 잡히시고 고난당하신 바로 그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그 길을 따라갑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언덕에 올라갔던 3명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거의 똑같은 순교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순교하고, 요한은 천수를 누리지만 밧모섬에서 인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당시의 제자들은 믿음이 약해서 주님이 같이 가자는 초청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들은 모두 그 길을 같이 갑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닭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님을 부인한 기억이 얼마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구약 아가서에도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가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겉으로만 보면 신앙에 대한 말씀도, 역사에 대한 기록도 아닙니다. 노골적인 남녀의 애정 묘사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당당하게 성경에 끼게 되었는지 의심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고 술람미 여인은 그의 백성이며 신부인 신자들을 대신합니다.

 

특히 본문 210절 이하에서는 솔로몬왕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연약해서 지치고 쓰러진 우리들을 당신의 신부라 칭하시고 또한 도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쉽게 맺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가서에는 시처럼 묘사가 되어있어서 구체적인 사건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들 신랑 신부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신랑 솔로몬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고 노래합니다. 그것은 단지 계절의 변화만이 아니라, 병이 날 정도로 어려웠던 고난의 시절들이 끝나고 그들의 사랑이 열매 맺게 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랑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할 때, 그때는 돈도 벌고 자녀들도 자기 앞가림 할 때가 됐고, 은퇴하여 농촌에서 유기농 텃밭을 일구며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돈도 없고, 자녀들도 어리고, 힘들고 여유가 없이 한창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때입니다. 게다가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들이 있을 것입니다.

 

1912412, 세계 최고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첫 항해에서 침몰할 때 일입니다. 이 배의 비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중에도 유명한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시도어 스트라우스는 독일 태생이었는데 아홉 살 때 가족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민자 가족 출신이기에 미국 땅에 기반이 없던 젊은 시절의 이시도어는 형제와 함께 어느 백화점 한 구석에서 그릇을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났을 때는 열심히 일한 덕분에 미국 최대 백화점의 단독 소유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지만 정계에 진출해서 의원 활동도 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한 미국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네 살 연하의 아내 아이다와 결혼한 지 41년이 되었을 때 스트라우스 부부는, 장성한 아이들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황혼을 즐기기 위해 유럽 여행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19124월 처녀항해를 나선 타이타닉호의 1등 선실에 승선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배는 빙산에 부딪쳐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설마 침몰하겠느냐는 방심으로 구명보트를 승객 수에 맞추어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보트에 타는 비상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당연히 스트라우스 부부도 부인만 구명보트에 타고 남편 스트라우스는 점점 바다로 가라앉는 타이타닉호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서 이미 한 쪽 다리를 보트에 걸치고 있던 부인은 갑자기 몸을 돌리며 급히 자신의 하녀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금은보석 장신구들을 다 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녀에게 보트에 타라고 지시하고 혼자 남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Where you go I go!” -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그리고 두 부부는 서로 껴안고 최후를 마쳤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스트라우스 부인이 남편과 함께 마지막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사랑이야말로, ‘진짜 침몰하지 않는 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분에게 달려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다 내어버린 세상의 금은보화 이상의 것을 천국에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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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6.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마가복음 14:1~3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이미 양심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일개인 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와 공적인 일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단체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욕심을 위해 개인의 양심을 쉽게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적으로 결집력이 없는 다른 더 큰 집단 즉 국민과 세상을 기만하기도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조선 등 왕국 시대에는 권세 잡은 자들이 더 권세를 누리기 위해 견해와 입장이 다른 집단이나 개인들을 잔인하게 없애버리는 정변과 사화들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룟 유다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 양심을 팔아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어떤 시대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하듯, 예수님 시대에도 자신들의 집단의 무궁 권세를 위하여 조금의 반대적인 성향의 어떤 움직임도 말살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미워한 유대교 지배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기반으로 한 제사장과 서기관 계급들은 예수님을 죽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연합전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백성들을 선동하고 로마총독부에 압력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1절에,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구원되어 나온 사실을 기념하는 큰 명절이며,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7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름만 다르지 사실 같은 명절입니다. 이 명절의 첫 날 곧 유월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양을 잡는 일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에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에 발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난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재앙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유월은 여호와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뜻이고 무교는 누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유월절은 우리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잡히어 죽으심이 유월절의 때에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자신들의 민족의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예표의 주인공이 왔는데 그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종교제도의 가장 상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했다고 합니다. 과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성경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해야 할 자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악한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인간상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할 때에, 먼저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명예를 건드린 죄 즉 괘씸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상의 논쟁에서도 예수님께 말 한마디 못했고, 예수님은 사회법으로도 무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는 일과 증인들을 가짜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비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덮어씌우고자 한 것을 볼 때에 자신들은 결국 하나님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믿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단지 백성들입니다. 2절에,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들은 이렇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에는 유월절에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누가복음 223절에,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3,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언제 들어갔습니까?

 

요한복음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마가복음에 의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리자(14:1~9; 26:6~13; 11:54~12:11) 제자들이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항상 어렵게 살림을 유지하던 예수님 일행에게 마리아의 이 행위는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분명히 대부분의 제자들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것을 선동한 자는 유다(12:4~5)였습니다.

 

요한복음 12:4~5,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난한 자들을 돕고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회운동에 앞 장 서는 일들이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 설 수 없습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그 뒤를 따라 평생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89세의 강희남 목사가 (2009) 66일 유다처럼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그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초대 의장을 지냈고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북한 세습주의를 찬양한 남쪽의 북한 체제 동조자입니다. 그쪽 세력권들의 눈에는 그런 죽음들이 아마 영웅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목사의 탈을 쓴 북한 추종자입니다.

 

제자들의 어리석은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고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유다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연합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 가운데도 사탄이 역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들어간 자는 같은 마귀가 들어간 다른 자들과 연합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까? 한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업고 멸시받고 억압받던 자신의 사회적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세상에 군림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열망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야로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뜻과 계획이 일치되었습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이유는 예수님이 회개의 마지막 기회를 주셨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누가 그 자인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 13:36,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면 혼비백산하고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리고 죄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진짜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지적당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귀에 잠식당한 자들은 강호순 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전자 이상이나 정신병이 아니라 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유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말리지도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한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은 말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일을 예정하셨으니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이 없을까요? 누가복음 22: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셨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었고 특히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몇 년을 같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그 영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두려웠고 자신들의 체면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다는 욕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마리아에게는 아마 거의 모든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시집갈 밑천일수도 있고 물려받은 최후의 재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비싼 물건이라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비할 바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향유를 허비하듯이 하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을 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되었는데(9)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도 잘 준비하여야 하고 잘 죽어야 합니다.

 

요즘 존엄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배경에 김 할머니(75)라는 분이 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그 할머니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9) 62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기를 제거하였는데 그 순간 그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그 눈물은 무의식 상태에서 조건반사적인 현상으로 나온 것이지 할머니의 감정으로 인한 눈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게다가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호흡기 없이 자연호흡으로 생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존엄성을 갖고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과연 존엄성을 갖고 살아왔을까요? 김 할머니의 예는 존엄성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이슈이지 그분의 삶 자체를 평가할 문제도 아니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도덕성에서 우리의 삶이 한 인격체로서 제대로 살아왔느냐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고 싶습니다.

 

신문기사를 보니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바로 파라 포셋이라는 미국 여배우입니다. 이 여배우의 죽음은 바로 전날의 마이클 잭슨의 전세계를 놀라게 한 죽음과 함께 더 우리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62세의 나이에 직장암으로 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 사람이 등장한 미녀 삼총사를 열심히 본 기억이 있습니다. ‘6백만불의 사나이의 주인공(리 메이저스)과도 결혼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신문기사에는 젊었을 때의 파라 포셋의 머리칼이 원래 금발이었던 것을 밝은 은청색으로 염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젊었을 때 얻은 명예와 인기의 한 힘이 되었던 그 자랑스러운 머리털을 다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의 머리털이 점점 사라지는 장면들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머리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다라고요.

 

죽음도 잘 죽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삶입니다. 과연 어떤 삶과 죽음이 우리를 더 값지게 합니까?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그 삶과 죽음을 작정하신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분을 통해 자신의 모든 근거를 찾을 때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포가 아니라 그 분의 창조와 심판의 권능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각각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람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애굽을 나오자마자 앞에 홍해를 두고 뒤에 애굽 군대를 두고 자신들을 쫓아 온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4:10,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만 눈에 보이고 온 세상을 지으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기를 받던 산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마가복음 14장 이후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며칠 전부터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갖가지 반응과 행동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는 가룟 유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따라 간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다는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세상 세력과 사람들이 두려워 결국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가거나 부인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시간에 가장 극명하게 보여지는 이 사람들의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혼란과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근거를 이 세상에 두기 때문에 세상의 세력과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부나 재산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인기도를 두려워하고, 인터넷 클릭수를 두려워하고, 추락하는 증권시세와 부동산가격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일은 안 풀리고 사방이 꽉 막힌 듯이 보이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편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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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5. 말세의 때와 징조

 

마가복음 13:1~37,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답한 말씀의 내용이 바로 마태복음 24,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장에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아름다운 현재만 볼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미래와 세상 모든 것의 종말을 내다 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AD 70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있던 시기와의 간격은 약 40년 정도입니다. 40년은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예수님께는 한 순간입니다. 여러분도 만약 과거의 40년 전을 생각하거나, 40년 후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파괴를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종말이란 말은 반드시 세상 끝나는 마지막 시기의 짧은 시간을 말하지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넓은 개념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관점, 영원의 시점에서는 예수님의 때와 마지막 시기의 때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대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즉 종말이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전체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초림 이후의 모든 시간이 말세입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 13장에서 그렇게 세상을 보시면서 말씀하셨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훗날 자신도 그 입장에서 계시록을 영감 받아 기록한 사도 요한도 그렇게 세상의 시간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때도 세상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이 나오기 직전에 이 종말론이 등장하느냐 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가복음은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해와 고난 중에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마가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절정의 사건이 등장하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이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십자가에 익숙해져서,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만 보기 쉽습니다. 물론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본래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도구였습니다. 형벌의 도구요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이 있습니다. 가장 큰 예로, 바로 유대민족 이스라엘이 그 본보기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부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했고 그들의 모든 것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구원의 핵심인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값을 자신과 자신들의 후손이 받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 그들은 그 죄값을 받고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지구상에서 이스라엘 국가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중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 후 1948년 독립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나라를 세울 때까지 거의 2천년을 박해받고 유리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말씀하실 때 이 모든 상황과 앞으로의 세계 종말에 대해서도 동시에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그들의 죄를 거꾸로 드러내게 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2천년을 방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 세력에 대하여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때마다 사실 심판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원죄로 심판을 당하게끔 되어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할 때 그들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냐 심판이냐!

 

대개 구원 받으라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은 냉랭합니다. 자꾸 들으면 열 받습니다. 그리고 반감을 갖습니다. ‘너희들만 구원이 있냐?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면 되지 왜 굳이 믿어야 하느냐? 그러는 너희들은 잘났느냐? 오히려 못하지 않느냐?’

 

자신들은 모르고 하는 말들이지만 그런 말과 태도는 피값과 심판을 받겠다는 유대인의 선언과 똑같습니다. 그들도 그런 말을 한지 한 세대, 40년도 안되어 예루살렘이 멸망할 줄 몰랐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종말론자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짐승들을 본 환상을 통해,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 직후의 전세계의 종말과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자, , 표범, 열 뿔 달린 짐승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이 구약에서 처음 인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가 그 짐승으로 대변되는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세계열강들이 서로 잡아먹게 하다가 최후로 그들을 심판합니다.

 

다니엘 7:1~14,

[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1]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 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 바 되었으며 [12]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았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갖고 있는 분들은 열 뿔 달린 짐승을 현대의 세계열강이나 EU 연합 등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이 세력을 잡고 전 세계인을 다스리면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즉 열 뿔 짐승이 적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최종 종말에 등장할 어떤 인격체나 세력집단 만은 아닙니다. 다니엘서의 열 뿔 달린 짐승만이 적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적그리스도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에 그를 죽이려 한 헤롯왕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계속 기독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신자들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과 인격체들이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세력들을 파괴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그리스도 인자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권세를 주신 것을 모르고 자기의 욕망에 취한 세상 권세들을 최종 징벌하십니다. 그 일들은 이 땅에 인간들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따른 제자도를 행한 일에 대하여 보응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인자가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7~28,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 있던 12제자들 모두 다 순교하거나 늙어 죽었습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제자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거짓 증인들을 시켜서 예수님의 죄를 찾아내려고 했을 때,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마태복음 26:63~64,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이, ‘대제사장, 너는 내가 심판하러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대제사장이 아직 살아있습니까? 그는 아마도 나이가 많아서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도 보지 못하고 늙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세력들이 적그리스도이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세상 최후의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물론 계시록의 최후의 백보좌 심판이 분명히 역사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세상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개인 일생에서 주님의 심판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실 때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과 소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과 심판의 때입니다.

 

요한일서 4:1~6,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말세의 때와 징조는 막연히 어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상 최후의 때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세는 현재, 현실에도 있습니다. 처처에 나타나는 지진, 기근, 전쟁, 불행, 그리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고난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오늘을 그 때로 알고 주님 오실 징조를 느끼시길 바랍니다. 물론 진정한 그 마지막 때는 마치 여름에 실과가 맺어 그 시기를 가늠하게 하듯이 분명히 경고성을 갖고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베드로처럼 천국 열쇠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을 주님께 드리고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는 제자로서의 매일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심판의 때입니다. 종말의 때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기시고자 주님이 십자가 사건 직전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을 심판과 종말로 살지 못하면 최후의 날에도 신자라할지라도 그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한 달란트 숨겨둔 방탕하고 게으른 종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내일부터 다이어트하겠다, 금연하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하지 못합니다. 오늘 다이어트하겠다고 시작하는 사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 오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화려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시면서 그 파괴와 멸망을 보신 것처럼,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가가 쓴 복음서를 읽었던 로마교회의 성도 여러분입니다. 그때 그들은 상대적으로 우리 21세기 한국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신앙의 환경 속에서 믿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기본 신앙의 정신, 세상의 심판과 종말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은 똑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신앙의 이 싸움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신앙에 마음이 없는 사람들과 세력들은 이 거룩한 싸움에 나서지도 못합니다. 이 싸움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싸우지 않으면 내일의 종말을 승리로 맞을 수 없습니다.

 

타이거 우즈 보고 골프 잘한다고 말하면 욕이랍니다. 그는 세계 최고 프로 골프 선수입니다. 대신 야구 잘한다고 해야 칭찬이 됩니다. 야구는 타이거 우즈가 골프 다음으로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학생 때는 야구장학생이었다가 도중에 골프로 바꿨다고 합니다.

 

중고등 학생들이 시험 끝나면 꼭 이런 일이 보입니다. 이번에 시험 잘 봤다고 나대는 학생은 공부에 진정한 관심이 없는 학생입니다. 지금까지 잘 못했다가 어쩌다 시험을 잘 본 겁니다. 그러나 시험 못 봤다고 시무룩한 사람은 평소에 잘했거나 적어도 잘하려고 애쓰고 기대했던 학생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키고 싸워야 하는 본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했다고 칭찬받을 가치가 없을 정도로 당연히 잘해야 하는 일입니다. 조금 못한 것으로 마음 아파하고 신경 써야하는 우리의 영토인 것입니다.

 

왜 여러분이 전도하는 회수와 기도 시간, 읽은 성경의 장수로, 헌금의 액수로 판정이 되어야 합니까? 만일 어떤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성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 자녀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남자가 여자를 미모로만 평가하면 정상적인 가정이 되겠습니까?

 

더 높은 신앙으로 자라야 할 여러분들이, 남들이 하는 무슨 프로그램을 해야 하고 또 거기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그 행사의 결과로 교회와 신자의 수준을 가늠하려 하는 일은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먼 일들을 혼동하는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의 권고의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을 종말처럼 살아가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군사로서 여러분이 가야할 신앙의 목표를 끝까지 견고하게 잡는 수준으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12~14,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마가복음 54. 두 렙돈

 

마가복음 12:35~44,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질문 내용

성경 구절

질문자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과 비유로 대답하심

11:27~12:12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세금에 대한 질문

12:13~17

바리새인, 헤롯당

부활에 대한 질문

12:18~27

사두개인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12:28~34

서기관

 

마가복음은 십자가로 향하신 주님과 그 십자가를 따라야 할 제자들의 앞길을 위한 제자도를 가르치신 주님의 행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장까지는 대중들에게 이적 행하심과 가르치심으로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중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즉 말씀의 주제가 많이 좁혀졌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당신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아셨고,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자연적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집중적인 질문과 관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동과 가르치심의 주제가 그들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기시고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과의 논쟁을 통해 바로 그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진실입니다. 진실됨이란 양심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입니다.

 

신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인 것은 신앙으로 알겠는데 삶과 행위에 있어서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신감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타인과 세상에 불의하지도 불법도 아니라면 사람은 양심의 자유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세상에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세상에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처럼 권세를 잃었을 때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12장의 논쟁들은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의 전쟁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었고(11:27~28), 예수님도 맞받아치시는데 이승엽이 홈런 치듯 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바리새인들의 따귀가 돌아갈 지경입니다.

 

그리고 12:1~11의 반역하는 농부들의 비유 이야기는 아주 노골적이었습니다. 이에 발끈한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그렇다고 그들이 케이오 패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다고 합니다.

 

책잡다라는 뜻이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뜻이지만 예수님에게 객관적인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기분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시험한 것입니다.

 

사자와 호랑이를 같이 키우는 사파리에서는 사자와 호랑이는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습성도 모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같이 힘을 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동물이 나타날 때입니다.

 

라이거라고 사자와 호랑이의 잡종이 있습니다. 라이거는 보통의 사자나 호랑이보다 체격이 더 크고 힘이 셉니다. 그래서 라이거가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 나타나면 이들은 라이거에게 같이 덤벼든다고 합니다.

 

13절에서는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라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거의 상종하지 않는 파입니다. 헤롯당은 헤롯왕가를 지지하는 친로마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바리새인과도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 대망사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대교적이고 민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헤롯당과도 연합했고,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이 반대하던 로마법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연합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악한 감정을 품었는지 이 사실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로마에 세금 바치는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 대부분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금에 대해서 그랬습니다. 심지어 주후 6년에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다라는 민족 운동가가 일어나 로마에 세금 바치는 문제로 반대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금문제는 로마에 반대가 되고 반역이 되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유다가 로마의 속국이니 로마에게 강제적으로 세금을 바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납세가 옳다하면 유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에 반역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매우 현명한 답변으로 그들의 공세를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질문을 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본래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처음부터 잘못 본 것입니다. 천국 시민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육적으로는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더라도 신앙의 자유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세상 권력의 속박이나 의무사항이 있더라도 그 권세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 만큼 신자들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중요한 내용은 15절에,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예수님이 그들의 외식함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반대하면서도 헤롯당과 손을 잡았고, 헤롯당도 마찬가지로 만나지도 않는 그들과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세금문제를 단지 자신을 사로잡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이란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추악한 이익을 가리기 위해 거짓된 언행을 하는 일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양심을 속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2:18~27까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이란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새파에 비해 소수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명기 25:5의 말씀의 내용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나의 예로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은 후에 천국에 갔을 때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과 결혼한 한 여자와의 부부관계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신명기 25:5,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즉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도 믿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영국의 목회자의 75%가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는 오히려 덜 비양심적입니다. 물론 성경을 믿지도 않으면서 목회를 한다는 자체가 양심적이지도 않은 외식자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질문과 답변의 결과는 그들의 참패였습니다. 그들의 모략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질문과 답변을 듣고 있던 한 서기관이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12:28~34)라는 질문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성경에 남기신 율법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정한 장로들의 유전같은 전통적인 율법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때로는 그 계명들이 실생활에 서로 상충되는 상황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하는 서기관도 결국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답변에 옳소이다라고 하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첫 번째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 두 번째 세금에 대한 질문, 세 번째 부활에 대한 질문, 그리고 네 번째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2:41~46)과 누가복음(20:41~44)에서는 예수님이 서기관들에게 질문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질문하는 반문식 질문을 하신 것(12:35)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위기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거꾸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5,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즉 이 말씀은 메시야가 진정으로 다윗의 자손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것으로서 그들이 기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로마의 압제에서 다윗왕의 왕권을 회복하는 다윗의 후손인 구세주입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못하는 서기관들을 대신해 시편 110:1을 근거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님과 메시야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도덕적, 영적인 이해 부족을 폭로하셨고 예수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의 위선과 외식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시며 신앙의 순수와 진실함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 38절 이하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마침 성전 앞에 있는 연보궤에 어느 여인이 연보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여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의 전부를 연보하였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심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 여인의 행위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불의와 거짓은 감추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질문을 한 종교 지도자들과 완전히 대조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여인을 하나의 가르침의 본으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기도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의 가진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연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렙돈을 연보한 그 여인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과부란 당시 사회에서 약자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권세도 없고, 지식도 없고, 재산도 없지만 대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진실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위치는 가장 낮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진실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제자의 삶은 무엇인가요?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욕망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헌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과부는 그렇게 연보를 하고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으니 곧 복을 받고 가난한 형편을 면하게 되었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고, 혹은 어떤 병 고침이나 역사를 바라고 헌금을 하면 대가를 바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은 그냥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가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에 헌금을 하면 목사가 받아서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를 극렬히 반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목사가 다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단이나 그 비슷한 종교단체들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일반 교회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아까워하고 비록 할지라도 체면유지나 미안한 마음에서 부조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종종 헌금봉투에 기도 제목을 적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옳은지는 아직 저도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기도의 조건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기도와 헌금은 별개로 생각하세요.

 

여러분, 헌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과부를 칭찬한 것이 그의 중심을 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이 마케팅 가치가 높은 것, 즉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는 일들이 평범한 것 보다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연쇄 살인범 강호순이 옥중에서 회개하여 예수 믿는 것과 평범한 사람이 예수 믿는 것 중에 어는 것이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될까요? 똑같습니다. 다 같은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깡패가 회개해서 예수 믿고 몇 년 후에 목사가 되어 짠 나타나서 간증집회 다니면 더 은혜가 되고 뭔가 있을 줄 착각합니다. 절대 아닙니다.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전 개인적으로 연예인 출신이나 범죄자 출신 목회자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달란트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굳이 목사가 되어야 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자신의 인생이 종교적인 변화를 겪을 때 그 변화의 정점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인물로 종교지도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기존의 목사들도 특히 부흥사들이 자신의 세력과 추종자들을 구축하기 위해 좀 특이한 회심자들은 주의 종이 되시오라는 주문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전 두드러기가 나요.

 

1995629,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직후 많은 간증 들어보셨죠. 우리나라의 가장 호화로운 백화점이었습니다. 5층 건물이 부실시공과 건물주의 욕심으로 500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기 직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서 건물 밖으로 나갔더니 곧 바로 건물이 무너졌더라. 그래서 예수 믿게 되거나 아니면 그전까지 신앙이 약했다가 그 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줄 알고 신앙적인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비슷한 간증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부러우셨습니까? ‘, 나도 저런 비슷한 체험을 했으면 더 잘 믿을 텐데...’

 

강호순이 예수 믿는 것과 보통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다르지 않듯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병고침 받고 다시 살거나 기적적으로 어떤 체험을 해서 예수 믿는 것과 그냥 여러분 발로 평범한 가운데 또박또박 걸어서 교회 나오신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적인 인생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분들은 구원 받을 길이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하나님께 죄짓고 살았기 때문에 범죄자 출신 목사들은 인격적인 문제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병에서 고침 받는 것도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은혜죠. 진정으로 그런 체험을 하신 분들은 제 말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안되시면 한 번 더!

 

그러나 평범하게 예수 믿고 있는 여러분이 만약 특별한 체험이 더 멋있고 더 화끈하고 더 신앙이 있는 역사로 착각하시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세상적인 가치 있는 것을, 마케팅 가치가 높은 것을 바라고 산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눈여겨보신 가치 있는 과부의 연보는 남들 눈에 뜨이는 많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효험이 있어 보이는 어떤 체험이나 극적 변화가 아닙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그냥 평범한 동전 두 개 일뿐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이 상태에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목숨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가장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여러분 자신을 진심을 담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두 렙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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