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3. 무슨 권세로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마가복음 11:27~33,
[27]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1:15~18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꾸짖으시고 내쫓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장사꾼들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가 아니라 성전을 그렇게 방치했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는, 자신들의 위신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이라고 합니다)의 대표들인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하며 책잡으려 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현상은 마치 집주인이 돌아왔는데 집주인을 몰라보고 그 동안 집 지키던 하인들이 집주인을 해치려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12:1~12에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불의한 농부의 이야기로 그런 악한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핑계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대답하기 어려운 네 가지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 네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질문 내용 |
성경 구절 |
질문자 |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과 비유로 대답하심 |
11:27~12:12 |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
세금에 대한 질문 |
12:13~17 |
바리새인, 헤롯당 |
부활에 대한 질문 |
12:18~27 |
사두개인 |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
12:28~34 |
서기관 |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질문의 주제는 예수님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에서부터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것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주제들이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는 모든 질문 공격을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의 위대한 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드셨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네 가지 질문마다 독특한 내용들이 있지만 첫 번째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이 가장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 가지들은 간접적으로 책잡으려는 것들이었지만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질문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8절,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이 질문에는 사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 (사본마다 다르지만) “혹은”(ἢ), “또는”(καί)이라는 말이 끼어있습니다. 첫째는 권세의 성질을 묻고, 둘째는 권세의 유래를 묻고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즉 “네가 선지자냐 메시야라도 되느냐”라는 말이고, 그 사이에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도대체 누가 네게 이런 일을 하라고 했느냐”는 말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들은 왜 이렇게 권세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사회라는 무리 속에서 사는 이상 서로 부대끼며 살다보면 이익과 욕심 때문에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권세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권세는 쉽게 말하면 ‘힘’입니다. 큰 권세가 있는 자는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무시당하며 살지 않을 정도로라도 적은 권세를 얻고자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람들은 그 권세를 추구하거나 그 권세에 의탁해 살려고 권세에 부침합니다. 때로는 그 권세를 얻기도 하고 그 권세 때문에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반대로 그런 권세와 상관없이 살려고 해도 인간 사회 속에서 사는 한 권세와 힘이라는 보이지 않는 지구 전기장 같은 세력권 속에서, 그 너울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권세를 손에 얻고 그것으로 단물을 빨고 사는 인생들은 결코 그 권세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세의 주인이 오셨는데도 그 주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빼앗길까봐 두려워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성전이 존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자신들에게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성전의식과 종교 활동을 다루는 지배계급들은 자연적으로 종교적인 권세를 가진 자들로 인정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자신들의 권세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가 자기들과 다른 식의 권세를 갖고 나온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반역이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죠.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는 하늘에서 온 것이며 이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분을 통해 입증된다고 생각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전국의 지방 회당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와 예배의식행사를 주관했고 율법을 해석하는 천직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의 종교 체제가 그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권세의 근거였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세를 받고 있는 자라는 주장을 하고도 남을 만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 세계관을 갖고 있는 당시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성전 위주의 제도가 아닌, 즉 땅에 속한 권세가 아닌 하늘의 것을 들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이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반역자, 이단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세례요한은 유대의 종교 조직이 주는 권세에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 권세나 경제적 권세, 정치적 권세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권세 가진 자들의 눈으로는 그는 경제적 배경도, 정치적 권력도, 군사적 무력도 갖지 못한 세상적으로는 권세 없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리는 권세 가진 자들의 양심을 떨게 했습니다.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그가 고개 숙인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시골 동네 출신입니다. 오죽하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는 속어가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권력과의 연관성도 전혀 없어 보이는 지방 청년입니다. 그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속해 있던 종교 조직의 권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한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권세에 놀란 구절들이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마가복음 1: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마가복음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결국 유대 종교 지도층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세와 전혀 무관한 시골 목수 출신에게 사람들이 몰리니 그들로서는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는 본질이 하늘의 것이고 영적인 눈으로라야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성전도 그 나라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이고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자신의 이익과 반대된다는 이유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세례 요한이나 목수 출신 예수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지탱해주는 권세와 무관한 새로운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권세인데도 그들은 애써 무시하며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반문(反問)식’ 질문을 하십니다.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역으로 다시 질문을 함으로써 하는 질문을 ‘반문식’ 질문이라고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님의 반문식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충격적인 질문에 그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인정하면 자신들이 요한을 반대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고. 아니다 라고 하면 여전히 요한을 따르는 백성들의 비난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님의 이 질문에 의해,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와 세례를 믿어야 할 줄은 알았으면서 의식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이 태도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았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외면한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찌르는 일에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옳다고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늘의 권세는 핵무기와 최첨단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서 주어지는 권세는 몇 년이면 사라지고 마는 대통령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1억 연봉과 복권 당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세상의 권세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세상의 권세는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인 우위를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잠시라도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품고 삽니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남들보다 손해 보지는 않았나, 남들보다 더 차지할 수는 없나 늘 계산하고 경쟁합니다. 그러니 삶의 태도가 항상 공격적일 수밖에 없고 주변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운전하다가 양보하는 운전자를 만나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를 얻는 자들은 다릅니다. 일찍이 바울은 예수님의 권세를 몰랐을 때 세상 권세를 좇았던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도를 해악으로 여기고 도리어 그 도를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도행전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도행전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훗날 그가 진정한 하늘의 권세를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골로새서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 믿는 자들이 받은 권세는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두 번째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그 복음을 전하며 그 복음을 따라 사는 권세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권세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마태복음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의 권세는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권세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위한 이해득실에 대한 초조함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 진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궁극적 권세는 예수님이며 영원히 마르지 생수의 강이십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주님의 권세는 무한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과 비교하며 계산할 필요도 없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여러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되, 여러분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장하시도록 하시면 그 속에 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 삶이 하늘의 무한 확장 영역으로 변하여 하늘나라가 임하는 제자가 되는 복된 삶입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55. 말세의 때와 징조① (0) | 2012.10.27 |
---|---|
마가복음 54. 두 렙돈 (0) | 2012.10.25 |
마가복음 52. 무화과나무의 저주 (0) | 2012.10.18 |
마가복음 51. 제자 바디매오 (어린이주일) (0) | 2012.10.14 |
설교 (0) | 2012.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