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2. 무화과나무의 저주
마가복음 11:12~33,
[12]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26] (없음) [27]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무화과나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언급하신 말씀이 13장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3:28~29,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이 구절의 무화과나무는 원문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즉 “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이고 여기에서 가리키는 무화과나무는 11장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입니다.
특히 13:28이하는 종말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4월과 6월에 열매를 맺습니다. 4월은 우리나라의 여름에 해당하고 6월은 우리나라 9월이 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찾으신 때는 유월절 시기니까 4월입니다. 그런데 4월에 맺는 무화과 열매는 작은 녹색의 혹 같은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는 6월에 열립니다. 마가복음도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1:13)고 했습니다.
무화과는 우리나라에서도 재배가 가능하지만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입니다. 즉 팔레스탄인, 이스라엘 지방의 무화과나무가 본산입니다. 그래서 무화과열매를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말로 ‘쌀’이라고 할 때, 요리하지 않은 볍씨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요리하면 ‘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쌀이 열리는 일년생 풀을 ‘벼’라고 합니다. 그러나 쌀이든 밥이든 벼든 영어로는 모두 rice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는 쌀밥을 주식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대상에 대한 단어가 여러 가지로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이고 그 방면에 대한 문화가 발달했다는 말입니다.
무화과도 그렇습니다. 우리말로는 ‘꽃이 없다’는 뜻으로 무화과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원산지인 무화과는 그 나라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과일입니다. 그래서 무화과에 대한 많은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사과나 배처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고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성경에는 60번 이상 무화과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트에나(창 3:7)와 헬라어 쉬케(마 21:19)가 있습니다. 트에님(민 13:23)과 쉬콘(마 7:16)은 무화과 열매를 말합니다.
또 열매가 어떻게 익었느냐에 따라 열매를 가리키는 단어가 다릅니다. 비쿠라(사 28:4)는 보통 6월에 익는 열매이고, 히브리어 파가(아 2:3)와 헬라어 올륀토스(아 2:3의 70인역, 계 6:13?, 참조: 사 34:4)는 겨울나무에 잎이 달리기 전에 열리는 이른 봄의 청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드벨라(삼상 30:12)와 헬라어 팔라테(삼상 25:18 70인역)는 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반죽하여 짓이긴 무화과 열매입니다(왕하 20:7=사 38:21). 물론 품종에 따라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열매 맺는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스라엘에서 30년을 살아오신 예수님이 먹는 무화과 열매철과 못 먹는 열매철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먹을 수 없는 열매 맺는 철에 ‘일부러’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비유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과일나무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주 이스라엘로 상징되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8: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호세아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나훔 3:12,
너의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한창 여름철에 예수님 앞에 서있던 무화과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잎사귀만 무성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식민지였어도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겉보기에는 종교적인 열심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비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상업화된 시장이 되었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상업행위를 묵인하며 자신들의 종교계급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첫 날에 성전을 그냥 둘러보셨습니다. 아마 그때도 여전히 성전의 장사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 예루살렘 부근에 있던 베다니에 머무셨다가 오후쯤에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는 중에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17절). 이 장면을 보고 대제사장 쪽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합니다(18절).
그리고 다음 날, 즉 셋째 날 아침에 제자들이 말라죽은 무화과나무를 발견했습니다. 베드로가 놀라서 예수께 말하기를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했을 때 주님은 믿음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시고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그 나무 하나로 끝나지 않고 이제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예언처럼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오해하고 일부러 거절하기까지 한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물론 최후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도 어느 정도 구원의 반열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만 십자가 이후 현재까지는 그들이 본래 누렸어야 할 영광된 자리는 이방인의 교회 즉 우리에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 들어와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일을 했고 신약에서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보통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이방인에 속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좀 섭섭한 기분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 하나를 특별히 취급하고 나머지는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나누어주기 위해 부름 받은 민족입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고 약속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3(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로마서 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진정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약속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로마서 9:6~8,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져서, 즉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백성들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이방인을 구원하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단들은 그 TO 숫자가 14만 4천명이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말씀이 역시 로마서에 있습니다.
로마서 11:16~27,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민수기 15:20에 보면,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곡식가루’를 하나님께 바쳐 그 해의 모든 수확을 다 바친 것으로 대표하게 합니다. 그런 상징적 행위가 그 해의 음식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게 하고, 로마서의 ‘떡덩이도 거룩하다’는 바로 그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이 ‘대표원리’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처음 족장들입니다. 그들이 구별된 것처럼 그들의 모든 후손들이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단순한 혈통이 아닙니다. 하나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에서 하나를 보는 방식이 하나님의 구원 원리입니다. 이 방식을 바울이 설명하려고 참감람나무라고 하는 이스라엘민족의 약속의 혈통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 되었다고 말합니다(정상적인 접붙임 농법과는 반대입니다). 또한 그 감람나무의 뿌리는 약속의 조상이라는 뿌리라고 또 말합니다.
그런데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민족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구원 받을 전체 숫자를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 대신 이방인을 구원 받게 한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충만한 수’가 헬라어에서는 πλήρωμα(충만)이란 단어입니다. 즉 어떤 특정한 숫자가 아니고 이방인을 포함하여 구원함으로,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말합니다.
27절의 ‘온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도 빠짐이 없는 전체의 숫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중 ‘구원 얻는 자들의 총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 눈을 뜨고 구원 받는 숫자가 찰 때에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는. 즉 하늘에서 오는 종말이 올 것입니다.
이 구원 방식이 바울의 ‘그리스도 안’이라는 개념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로마서 12:5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고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전 인류가 죄인으로 출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중에서 당신의 구원 받을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노아를 사용하셨고, 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이 구약과 신약에서 계속 실패함으로 그 후 2천년 동안 전 세계에서 유리하며 고통 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2천 년 전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라고 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로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 죽인 죄값을 자신들이 받겠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자신들의 선언대로 결국 그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이 이어졌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공격을 당하고 함락되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예 박멸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패망한 이스라엘 때문에 당시 노예 값이 땅에 떨어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중 2차 대전 직전 와중에 독일 나치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역사를 알고 계시죠.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고 그 피값을 자신의 후손에게 넘긴 민족의 결과입니다.
성경에서는 빌라도 법정에 참석한 유대인들이 다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지만 당시 전국의 유대인들 모두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선동자들이 군중심리를 몰아서 만들어낸 일이 전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그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 죄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대표원리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왕국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일을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 완수에 따라 지구와 역사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맡은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직분을 혈통적인 신분으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로 그 신분됨이 계급화되기도 하고 권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그 직분을 계급과 권력으로 갖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분은 영적인 신분에서 옵니다. 우리는 하늘의 권세에 속한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이루신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어 그 권세와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의 직분, 신분이 더 고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죄도 비록 용서받은 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정죄될 것입니다.
의인(성도)의 심판에 대한 구절들:
마태복음 13:30,40~43,49; 25:14~23,34~40,46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세상 영광과 물질위주의 성공을 추구한다면 과거 주님이 저주하신 예루살렘의 무화과나무처럼 심판받을 것입니다.
저는 본 교회가 속한 노회가 분열되고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7,80년대 한창 합동측이 갈라지고 교권싸움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감리교 같은 좀 거리가 있는 교단 쪽에서만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남의 문제가 아니네요.
각 교회의 대표는 노회에 참석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입니다. 만약 노회가 그렇게 결정이 났다면 자의든 타의든 노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 결정한 것이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의결한 자들이 가장 크겠지만 노회에 속한 모든 교회 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대표원리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대의정치가 장로교에서 나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저희 담임목사님이 임시노회에서 분리된 쪽의 목사 면직은 부당하다고 과감하게 의견을 내놓으신 일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심판 때에 장목사님 덕분에 우리 교회는 조금 덜 책임을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교세가 크고 선교를 잘하고 사회봉사를 잘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모든 겉으로 보여지는 행위의 동기가 욕심과 자기 영광이었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드러납니다. 잎만 무성하고 주님의 원하시는 일을 채우지 못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란 숫자와 크기가 아닙니다. 마치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고 하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요 성결입니다. 또한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일이 아니고 남의 죄를 용서하는 낮아짐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내가 구원의 은혜의 범위 안에 들어간 것이 주님이 우리의 대표, 맏아들이요 머리가 되심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몸의 지체로 믿으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교회의 대표요, 주님의 몸의 모습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삶에 의해 주님의 영광의 모습이 그대로 세상에 비쳐질 것이고, 그 행한 만큼 천국에서 칭찬과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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