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가복음 14:32~52,
[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정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 사람들은 때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당당히 죽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 “예수님도 역시 사람이라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셨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다보고 계셨던 십자가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신 죽음이십니다.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의 고통은 인류의 대표와 둘째 아담으로서 지옥 형벌의 고통을 홀로 담당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지옥에 가서 지옥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사람의 인체기관 중 유일하게 뇌와 직접 신경이 연결된 감각기관이라고 합니다. 눈은 마치 뇌의 일부처럼, 뇌가 세상이 궁금하여 밖으로 연결한 장치라는 말입니다. 눈은 빛에 가장 민감합니다. 사람의 감각기관 중에 가장 뛰어나고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부는 약간은 빛을 느낄 수 있겠지만 눈처럼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은 죽을 때에 죽음의 고통을 영혼으로 겪으면서도 피부가 빛을 감각할 수 없듯이 그 고통을 제대로 감각할 수 없습니다. 즉 보통 사람은 죽음의 영적 고통을 겉핥기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영적 고통의 무게와 본질까지 체험하신 유일한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원한 죽음의 속까지 들어가셨고 온 인류의 심판의 무게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마라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이유입니다.
동산에 계신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가룟 유다가 무리와 함께 왔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은 왜 같이 가자고 하십니까? 어디로요? 남들이 가지 않는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 Via Dolorasa 입니다.
그 가는 길은 복 받고 치유 받는 길이 아닙니다. 돈 버는 길이 아닙니다. 나의 고통에서 회복하고 나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는 종교적 심리치유도 아닙니다.
그 가는 길은, 남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패배고 슬픔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떳떳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곳을 “함께 가자.” 나 자신에 나의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서 모든 것을 능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께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극동방송을 듣다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연세가 그렇게 높은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50대 정도로 카랑카랑하고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설교 내용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더군요.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십일조를 해라. 어렸을 때 어머니의 교육으로 십일조를 잘해서 거부가 된 록펠러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잘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사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파스터 폴 조’라면 다 압니다. 나중에는 데이빗으로 개명하셨나요? 그분이 한국 교회 부흥운동, 성령 운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 이상으로 큽니다. 한 마디로 한국의 신앙을 망쳐놨습니다.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잘하면 내세의 천국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복 받고 잘산다는 신앙이 많은 한국 교인들의 머릿속에 세뇌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앙이 우리들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노력에 대한 대가를 교회와 신앙을 통해 로또 대박같이 얻으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필 대부분의 십일조 설교가 왜 록펠러입니까? 록펠러라는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십일조 이상의 돈을 헌금했고 말년에 사회사업과 자선사업을 위해 뿌리다시피하며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그를 나쁘다고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가 말년에 엄청난 돈을 사회에 환원시킨 이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이지요.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냉혹하고 무서운 사업가였다는 사실이 그가 뿌린 돈으로 많이 미화되었습니다.
록펠러는 아마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비밀(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3)을 늙어 죽기 바로 전에야 깨닫고 실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쌓아 온 돈더미의 바닥에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에게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업상 문제점과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당시 사회적인 논란이 많았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이런 문제는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총기까지 사용했다니 한국의 노동 문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들에서는 십일조하면 록펠러처럼 복 받는다는 단순 논리로만 비유로 제시하는 일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도 좋다는 식입니다. 록페러 가문이 엄청나게 헌금해서 성장한 미국의 대형 교회 설교자들의 영향을 한국 교회가 받지 않았겠습니까?
왜요?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그것이 한국 교회의 수준이고 현주소입니다. 이제 제발 십일조 이야기에서 록펠러 비유는 한국 교회 강단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합니까? 물질 축복, 건강 축복, 대학 합격, 취직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에 가서 죽으라는 길입니다. 그곳을 함께 가자라고 하십니다.
함께 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배신하여 스승을 적에게 팔 때에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부하들과 로마 군병들을 끌고 왔습니다. 무죄한 자를 폭도와 강도 잡듯이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잡히시기 위해 오히려 마중 가듯 찾아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무력에 순순히 잡히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본 제자들은 놀라고 화가 나고 또 겁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칼을 뽑아 든 자도 있었고,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 오다가 그것마저 벌고 벌거벗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도망가고 맙니다.
사실 주님이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 길은, 당신 자신이 잡히시고 고난당하신 바로 그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그 길을 따라갑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언덕에 올라갔던 3명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거의 똑같은 순교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순교하고, 요한은 천수를 누리지만 밧모섬에서 인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당시의 제자들은 믿음이 약해서 주님이 같이 가자는 초청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들은 모두 그 길을 같이 갑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닭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님을 부인한 기억이 얼마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구약 아가서에도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가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겉으로만 보면 신앙에 대한 말씀도, 역사에 대한 기록도 아닙니다. 노골적인 남녀의 애정 묘사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당당하게 성경에 끼게 되었는지 의심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고 술람미 여인은 그의 백성이며 신부인 신자들을 대신합니다.
특히 본문 2장 10절 이하에서는 솔로몬왕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연약해서 지치고 쓰러진 우리들을 당신의 신부라 칭하시고 또한 도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쉽게 맺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가서에는 시처럼 묘사가 되어있어서 구체적인 사건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들 신랑 신부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신랑 솔로몬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고 노래합니다. 그것은 단지 계절의 변화만이 아니라, 병이 날 정도로 어려웠던 고난의 시절들이 끝나고 그들의 사랑이 열매 맺게 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랑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할 때, 그때는 돈도 벌고 자녀들도 자기 앞가림 할 때가 됐고, 은퇴하여 농촌에서 유기농 텃밭을 일구며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돈도 없고, 자녀들도 어리고, 힘들고 여유가 없이 한창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때입니다. 게다가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들이 있을 것입니다.
1912년 4월 12일, 세계 최고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첫 항해에서 침몰할 때 일입니다. 이 배의 비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중에도 유명한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시도어 스트라우스는 독일 태생이었는데 아홉 살 때 가족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민자 가족 출신이기에 미국 땅에 기반이 없던 젊은 시절의 이시도어는 형제와 함께 어느 백화점 한 구석에서 그릇을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났을 때는 열심히 일한 덕분에 미국 최대 백화점의 단독 소유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지만 정계에 진출해서 의원 활동도 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한 미국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네 살 연하의 아내 아이다와 결혼한 지 41년이 되었을 때 스트라우스 부부는, 장성한 아이들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황혼을 즐기기 위해 유럽 여행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1912년 4월 처녀항해를 나선 타이타닉호의 1등 선실에 승선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배는 빙산에 부딪쳐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설마 침몰하겠느냐’는 방심으로 구명보트를 승객 수에 맞추어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보트에 타는 비상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당연히 스트라우스 부부도 부인만 구명보트에 타고 남편 스트라우스는 점점 바다로 가라앉는 타이타닉호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서 이미 한 쪽 다리를 보트에 걸치고 있던 부인은 갑자기 몸을 돌리며 급히 자신의 하녀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금은보석 장신구들을 다 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녀에게 보트에 타라고 지시하고 혼자 남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Where you go I go!” -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그리고 두 부부는 서로 껴안고 최후를 마쳤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스트라우스 부인이 남편과 함께 마지막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사랑이야말로, ‘진짜 침몰하지 않는 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분에게 달려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다 내어버린 세상의 금은보화 이상의 것을 천국에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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