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6.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마가복음 14:1~3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이미 양심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일개인 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와 공적인 일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단체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욕심을 위해 개인의 양심을 쉽게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적으로 결집력이 없는 다른 더 큰 집단 즉 국민과 세상을 기만하기도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조선 등 왕국 시대에는 권세 잡은 자들이 더 권세를 누리기 위해 견해와 입장이 다른 집단이나 개인들을 잔인하게 없애버리는 정변과 사화들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룟 유다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 양심을 팔아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어떤 시대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하듯, 예수님 시대에도 자신들의 집단의 무궁 권세를 위하여 조금의 반대적인 성향의 어떤 움직임도 말살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미워한 유대교 지배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기반으로 한 제사장과 서기관 계급들은 예수님을 죽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연합전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백성들을 선동하고 로마총독부에 압력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1절에,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구원되어 나온 사실을 기념하는 큰 명절이며,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7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름만 다르지 사실 같은 명절입니다. 이 명절의 첫 날 곧 유월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양을 잡는 일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에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에 발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난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재앙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유월은 여호와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뜻이고 무교는 누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유월절은 우리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잡히어 죽으심이 유월절의 때에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자신들의 민족의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예표의 주인공이 왔는데 그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종교제도의 가장 상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했다고 합니다. 과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성경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해야 할 자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악한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인간상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할 때에, 먼저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명예를 건드린 죄 즉 괘씸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상의 논쟁에서도 예수님께 말 한마디 못했고, 예수님은 사회법으로도 무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는 일과 증인들을 가짜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비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덮어씌우고자 한 것을 볼 때에 자신들은 결국 하나님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믿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단지 백성들입니다. 2절에,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들은 이렇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에는 유월절에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누가복음 223절에,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3,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언제 들어갔습니까?

 

요한복음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마가복음에 의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리자(14:1~9; 26:6~13; 11:54~12:11) 제자들이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항상 어렵게 살림을 유지하던 예수님 일행에게 마리아의 이 행위는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분명히 대부분의 제자들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것을 선동한 자는 유다(12:4~5)였습니다.

 

요한복음 12:4~5,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난한 자들을 돕고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회운동에 앞 장 서는 일들이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 설 수 없습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그 뒤를 따라 평생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89세의 강희남 목사가 (2009) 66일 유다처럼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그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초대 의장을 지냈고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북한 세습주의를 찬양한 남쪽의 북한 체제 동조자입니다. 그쪽 세력권들의 눈에는 그런 죽음들이 아마 영웅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목사의 탈을 쓴 북한 추종자입니다.

 

제자들의 어리석은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고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유다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연합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 가운데도 사탄이 역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들어간 자는 같은 마귀가 들어간 다른 자들과 연합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까? 한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업고 멸시받고 억압받던 자신의 사회적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세상에 군림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열망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야로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뜻과 계획이 일치되었습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이유는 예수님이 회개의 마지막 기회를 주셨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누가 그 자인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 13:36,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면 혼비백산하고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리고 죄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진짜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지적당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귀에 잠식당한 자들은 강호순 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전자 이상이나 정신병이 아니라 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유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말리지도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한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은 말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일을 예정하셨으니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이 없을까요? 누가복음 22: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셨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었고 특히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몇 년을 같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그 영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두려웠고 자신들의 체면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다는 욕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마리아에게는 아마 거의 모든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시집갈 밑천일수도 있고 물려받은 최후의 재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비싼 물건이라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비할 바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향유를 허비하듯이 하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을 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되었는데(9)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도 잘 준비하여야 하고 잘 죽어야 합니다.

 

요즘 존엄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배경에 김 할머니(75)라는 분이 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그 할머니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9) 62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기를 제거하였는데 그 순간 그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그 눈물은 무의식 상태에서 조건반사적인 현상으로 나온 것이지 할머니의 감정으로 인한 눈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게다가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호흡기 없이 자연호흡으로 생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존엄성을 갖고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과연 존엄성을 갖고 살아왔을까요? 김 할머니의 예는 존엄성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이슈이지 그분의 삶 자체를 평가할 문제도 아니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도덕성에서 우리의 삶이 한 인격체로서 제대로 살아왔느냐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고 싶습니다.

 

신문기사를 보니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바로 파라 포셋이라는 미국 여배우입니다. 이 여배우의 죽음은 바로 전날의 마이클 잭슨의 전세계를 놀라게 한 죽음과 함께 더 우리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62세의 나이에 직장암으로 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 사람이 등장한 미녀 삼총사를 열심히 본 기억이 있습니다. ‘6백만불의 사나이의 주인공(리 메이저스)과도 결혼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신문기사에는 젊었을 때의 파라 포셋의 머리칼이 원래 금발이었던 것을 밝은 은청색으로 염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젊었을 때 얻은 명예와 인기의 한 힘이 되었던 그 자랑스러운 머리털을 다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의 머리털이 점점 사라지는 장면들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머리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다라고요.

 

죽음도 잘 죽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삶입니다. 과연 어떤 삶과 죽음이 우리를 더 값지게 합니까?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그 삶과 죽음을 작정하신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분을 통해 자신의 모든 근거를 찾을 때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포가 아니라 그 분의 창조와 심판의 권능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각각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람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애굽을 나오자마자 앞에 홍해를 두고 뒤에 애굽 군대를 두고 자신들을 쫓아 온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4:10,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만 눈에 보이고 온 세상을 지으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기를 받던 산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마가복음 14장 이후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며칠 전부터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갖가지 반응과 행동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는 가룟 유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따라 간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다는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세상 세력과 사람들이 두려워 결국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가거나 부인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시간에 가장 극명하게 보여지는 이 사람들의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혼란과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근거를 이 세상에 두기 때문에 세상의 세력과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부나 재산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인기도를 두려워하고, 인터넷 클릭수를 두려워하고, 추락하는 증권시세와 부동산가격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일은 안 풀리고 사방이 꽉 막힌 듯이 보이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편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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