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8. 증거

 

마가복음 14:53~72,

[53]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다보면 특이한 사건의 전개방식으로 본문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개최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안까지 들어가고 정체가 발각되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두 번씩 교차하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가가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마가의 스승인 베드로가 자신만이 알던 두렵고도 부끄러운 이 장면을 마가에게 아주 자세히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부인한 죄인이었습니다.

 

53절과 55절에서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 세 그룹은 산헤드린이라는 공회가 모이는 공식 임원들입니다. 전에는 그들이 모여서 보통 종교적인 문제를 토론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개최 목적이 예수님에 대한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내려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죽일만한 정당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라도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십계명까지 스스로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게다가 그들은 정상적인 산헤드린 개최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제사장의 집에서, 그것도 한 밤 중에 모이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는 중간 과정에 54절에 베드로가 그들이 모이는 장소 가까이 다가가는 장면이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베드로는 바로 이곳 제사장의 앞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두 가지 내용이 한 주제를 가지고 휘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용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베드로가 자기를 알아 본 증인을 만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묘하게도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거를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문에서는 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를 내어 놓지만 제대로 맞지가 않아서 결국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데 예수님 자신에게 네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증거를 삼겠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너 같은 시골뜨기 목수가 어떻게 감히 그리스도가 되겠느냐는 시기심과 복수심, 그리고 열등감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서는 하녀(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네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의 하나다라고 당당하게 증거를 내어 놓고 있습니다.

 

한 곳에서는 제사장들의 불법적이고 말도 안 되는 증거들이 실패하자 예수님의 말로 트집과 증거를 잡으려 하고 있을 때, 다른 옆에서는 정말 말이 되는 증거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시기심과 원한도 있었지만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가 어떤 분이냐에 대한 성경을 잘못 이해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관은 이렇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이 세상의 현실적인 고통에서, 당시로서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구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구약의 말씀이 시편 2편입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군왕들, 권세 잡은 자들을 마치 질그릇 깨뜨리듯이 없애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납작해지고 떱니다. 모든 세계 위에 올라서 지배하는 분으로 이렇게 구약에서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만 예언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같은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이사야 50, 53).

 

같은 시편(22:6~8, 16, 18; 34:20; 69:4, 21절 등)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시는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스가랴 11:13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로 받은 돈을 나중에 양심의 가책으로 제사장들에게 던져주고 자살하는데 그 시체를 그 은 30개로 산 토기장이의 밭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11:12~13,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정적인 모습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영광이 가득한 승리자여만 했습니다. 그 관점이 오늘날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예수가 너무 쉽게 잡혔습니다. 마치 기다려준 것처럼. - 사실 예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는 자신 앞에 붙잡혀 온 힘없는 목수 출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 이런! 기대 이상으로 싱겁게 잡혔습니다. 자기들이 듣기로는 제자 중 하나가 칼질을 했다는데 그것도 잡히는 중에 있던 예수가 만져줘서 정상이 되었다니 기가 막히지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절대 그리스도일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도 자신의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할리는 없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이미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당시의 메시야관의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까지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요한의 생각에는 아마도 예수님이 썩어빠진 종교계를 뒤엎고 성전제사와 종교제도를 개혁하고 정치계까지 바로잡아 주실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은 안 하고 사방을 몇 사람들과 돌아다니면서 요한의 생각에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오죽했으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6, (CF. 누가복음 7:18~35)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한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 숙원이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린 분이 전혀 종교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병이나 고치고 다니십니다. 많이 답답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정말 당신이 그리스도이시거든 그리스도답게 왕처럼 다스려 주세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다른 증거라도 보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씀이 있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광야에서의 금식과 시험을 마치신 후 고향 나사렛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4:16~19,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시면 요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이적을 능력으로만 보고, 그리스도는 당연히 철장으로 유대와 세계를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일 것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어떻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입니다. 헌금 많이 하고 충성하면 물질 축복, 건강 축복 받는다는 오해입니다. 대형 교회와 성공이 복이라는 오해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증거로 방언을 하고 어떤 신비한 이적이 나타나야한다는 괴상한 현상들이 복음이라고 오해하고 그것을 진리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물론 복 받는 신앙이지만 그 복이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습니다. 전혀 이득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복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신앙의 증거라고 거짓 증거하는 설교자들은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는 거짓 선지자’(마태복음 24:11,24)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개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과 그 권능만 봅니다. “, 이적을 행하시니 대단하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그것이 아니지요!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고침 받는 이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경이었던 이전 상태와 눈을 뜨고 보는 상태의 차이, 평생을 땅바닥을 기던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난 그 변화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앉은뱅이가 걷게 되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각막이식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유전자 공학으로 질병을 낫게 하는 변화가 아니죠. 돈으로도 할 수 없는, 세상천지가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병 고침 받는 역사와 이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이적 자체가 목표가 되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슨 계급 올라간 것처럼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 특이한 신유사역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가 있습니다. 일산에 있는 한소망교회(류영모 목사)입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류영모 목사님은 영국에서 시작된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인 알파코스의 한국 이사장직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시행하던 알파코스 과정 중에 기도하다가 넘어지는현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래전 한국 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기성 있는 넘어짐도 과거에 있었긴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회에서 신자의 치아를 치료한 아말감이 금으로 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이 한 번이 아니고 또 한 교회에서도 아니고 다른 알파코스 교회에서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지금 대다수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들에서는 긍정적인 반응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큽니다. 이단의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인 알파코스 교회들에서는 이런 현상들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며칠 전, 문제의 핵심인 류영모 목사님은 발표를 통해서 한국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넘어짐현상이나 금이빨 사역을 중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의 진위는 저 개인으로서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현상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중단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계속 그런 현상에 대한 집착과 유혹에 가까이 하면 언제든지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고, 말씀 위에 선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고,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미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이런 현상보다 더 놀라운 일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으로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 데에,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데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는 자리까지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몸에 그리스도를 죽게 한 것즉 십자가를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 변화입니다. 천지가 변한 것처럼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법이 변한 것입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나야 신기해하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진정한 가치는 이렇게 세상의 썩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었는데 왜 저들보다 더 못합니까?”로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기도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뭡니까? 좋은 조건을 달라는 겁니다. 조건이 불충분하니까 불편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불평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은과 금을 우선시하는 생각입니다.

 

좋은 조건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좋은 신앙을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지위, 상태가 목표가 안 됩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조건에 따라 내 신앙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함에도 풍부함에도 모든 일에도’(4:12)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마가복음의 베드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때 무서워서 도망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잡히신 곳까지 따라옵니다. 그러나 한 하녀의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죠.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변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평생을 주님과 동행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인 세력과 그 분위기에 눌려 도망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이 죽인 예수를 전합니다.

 

그러다가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성전에 들어가던 중 성전 문 앞에 앉아있던 한 걸인과 마주치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앉은뱅이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의 고백인즉, 은과 금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은과 금으로도 살 수 없는, 바로 내게 있어 증거가 되시고 며칠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만 있다는 말입니다. 그 예수를 갖고 있습니까?

 

그가 처음으로 이적을 일으킨 첫 번째 대상이 앉은뱅이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오심의 증거가 다시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고 그 생명을 믿는 바로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가 남긴 서신에서 우리 신자들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약속하는 복은 썩는 것들, 이 세상에 속한 것들 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와 권능도 하나님이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능력, 방언, 병 고치는 능력, 쓰러지게 하는 능력, 혀가 쑥 빠지고 이상한 웃음을 웃는 것이 신앙의 표시요 증거라고 생각하면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게 미혹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받은, 그리고 받을 복은 썩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금보다 더 귀한 복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하여 판정할 때 무엇을 보고 판정합니까? 먼저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목사를 봅니다. 그것도 교회의 크기를 보지 않고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나를 보지 않습니다. 볼 능력도 없구요. 그 교회가 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을 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 알고자 할 때 또 무엇을 보고 판정합니까? 여러분을 봅니다. 그것도 예수 믿으세요라고 웃으며 전도하고 구제하는 얼굴을 안 보고, 돌아서 가는 여러분의 뒤통수를 보고 판정합니다.

 

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동시에 재판 당했듯이, 사람들은 나 하나를 보고 동시에 나와 하나님 두 가지를 재판합니다. 여러분이 증인이요 살아있는 표적입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마가복음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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