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9. 십자가

 

마가복음 15:1~47,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6]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13]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16]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42]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마가복음 14장과 15장의 흐름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십자가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으나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무서워서 도망갑니다.

 

두 번째 그룹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는 사람들, 즉 제사장 이하 바리새인들과 로마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 세력과 이익에 따라 따로 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파와 연합하고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연합했습니다.

 

이 두 그룹은 두 종류의 결말로 나뉩니다. 배반하고 도망갔으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십자가로 결정하고 나머지 생을 사는 사람들이 첫 번째 종류입니다. 이들은 주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또한 이 그룹에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당돌히 요구한(45)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예수님을 찔렀던 로마군인(19:34)이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백부장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니고데모 복음서라는 외경에 의하면, - 외경은 전통적으로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던 로마병사 롱기누스는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순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이 모든 사람들의 대표 선수는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다른 결말로 가는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위해 이 세상을 따라 살다가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다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때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빌라도 같은 사람은 미온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리고 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 두 번째 결말의 대표 선수는 유다입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게 됩니다. 같은 시간에 제사장, 장로, 서기관 등 바리새인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합니다. 이 상황이 마가복음 1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출신 유다가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원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싹터왔지만 결정적으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일에 대해 유다가 선동한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렸다는데 데에 있었습니다. 유다가 그때까지 원했던, 세상을 뒤바꾸고자 했던 계획과는 예수님이 거리가 너무나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엄청난 능력이 있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에 기대를 했었지만, 마리아가 옥합을 깬 사건을 통해 그가 이 세상의 정치와 돈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찾아가서 그를 배신하겠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반드시 유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그들은 예수라는 세력도 이제 끝이다라는 어떤 징조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기대대로 그 징조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그 대가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14:11).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합니다. 그 장소가 바로 마가복음을 지은 마가의 다락방, 요즘 식으로 넓은 옥탑 방이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을 맞이하는 기간입니다.

 

본래 유월절은 예수님 당시보다 약 1,500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 받은 날, 열 가지 재앙의 열 번째 재앙으로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 가족들의 목숨과 운명을 지켜 준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그리고 만찬 중에 성찬식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을 팔 제자가 있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배반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옹졸한 마음에서 하신 것이 아니고 유다가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만찬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모두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4:30)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도 역시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더욱 쓰라린 후회와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가복음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유다는 계획적이었고 베드로는 우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유다나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떤 결말에 이릅니까? 유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다른 복음서들에는 나오지 않고 마태복음 273절에서 10절까지에만 나옵니다. 그 상황이 오늘 본문 마가복음 15장의 예수님의 재판 장면이 나오는 부분과 같습니다. 성경은 유다도 뉘우쳤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1~5,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베드로도 뉘우쳤습니다. 유다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회개였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악행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제사장 이하 바리새인들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고, 예수님이 무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들었는데도 자신의 마음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재판으로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인 빌라도에게 재판권을 넘겨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형이 불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원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이 일으킬 민란이 두려웠고 그 민란으로 로마 중앙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추락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이 무고히 죽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과 지식으로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풀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은 해도 그 소신대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그룹 모두 함께 유다, 베드로, 바리새인들, 그리고 빌라도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양심은 알아도 행동을 그렇게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아마 이 자리의 여러분의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이상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튕겨냈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집에서 화분 몇 개에 오이, 딸기, 고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물도 열심히 주었는데 그런데 농사 결과는 오이 하나 나오다가 시들어 말라 죽고, 딸기는 세 알 열렸습니다. 그중 하나만 먹었습니다. 고추는 두어 개 나오다가 말라죽어 갑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흙입니다. 화분의 흙이 그 질이 좋지 않았습니다. 영양분이 없어서 꽃이나 식물이 별로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런 흙에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모양은 흙이지만 실제는 돌짝밭,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은 가시밭, 돌짝밭입니다. 우리는 옥토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선을 포장하고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 죄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좋은 밭을 만들 수도 없고 생명을 틔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좋은 밭을 우리 안에 만드시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보이는 것,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세상의 것들 속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지식, 지위, , 물질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를 말씀합니다. 세상의 가치에서 떨어지고 끊어지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일이 다 잘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어제도 지하철 타는데 누가 전도지를 줍니다. 내용이 병 고치려면 이곳으로 오라는 겁니다. 아직도 이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심볼이 아닙니다. 장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십자가가 나의 것으로 나의 죽음이 됩니다. 나의 신앙과 삶에서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 우리의 믿음의 열매들은 나의 결심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쥐어 터지고 나서 낮아지게 되었을 때, 십자가를 경험하고 내 의가 죽었을 때 싹이 트는 열매들입니다.

 

나는 죄악 덩어리다, 분토다라고 바울과 같은 고백이 문득 터지는 그 날, 자신의 속에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육신의 최악의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되는 경지로 갑니다.

 

그 상황은 여러분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장과 직원 사이에서 체험되어 지는 일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해 죄를 짓죠. 그렇게 나온 시가 51편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이 죄라고 합니다. 자신이 죄 자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16절 이하에서 갑자기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실 거룩과 의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시편 40편이 있습니다.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40:1~7,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마지막 말씀처럼 여러분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발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윗이 성공하고 위대한 왕이어서, 그래서 그의 노래가 권위 있고 믿을 만하기에 여러분의 감정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한숨과 고통과 고뇌가 진정 나 자신의 것인가를 발견하시느냐 말씀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이고 능력자이기에 자신을 바울의 글 속에 감정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그의 탄식과 양심의 고통을 같이 나누시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웅덩이에서 끌어올려 반석에 세우신다는 말씀은 사람이 못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사람이 만든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약의 내용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신약에서 반복됩니다.

 

히브리서 10:1~20,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래서 마가복음에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이 특별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31:31~33,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옛 언약으로도, 남편이 되기까지 했어도 그들이 언약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된다는 것은 당시 문화와 사고방식으로 말할 때, 약자에게 외형적인 최고의 보호와 혜택을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룻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룻과의 결혼은 룻의 가정을 구원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의 그런 보장과 혜택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시는데, 새 언약은 속을 바꾸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법을 우리 속에 두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불같이 기록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밭갈이하고, 흙을 다시 뒤엎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새 언약이 마가복음에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4:22~24,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참고.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장면을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은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거나 그런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믿을 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일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교회의 신앙 행태에서, 하나님이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설교들은 진정한 십자가의 신앙을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는 신자들의 헌금과 예배참석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외형적인 열심을 끌어내는 것과 진정한 십자가 신앙의 길로 가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목사 자신이 영광 받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목사 스스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목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와 신자의 관계는 선장과 승객의 관계와 같습니다. 선장은 승객의 요구에 항해를 하고 그 항해의 모든 책임은 선장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 책임은 목사가 지지만, 목사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원인은 교인들에게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앙 행태에 대한 모든 원인은 신자와 목사 둘 다에게 있습니다. 사무엘서에서 하나님께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은 사울왕을 세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 향한 욕심과 나를 향한 육적 소욕에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제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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