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3. 무슨 권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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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27~33,

[27]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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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18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꾸짖으시고 내쫓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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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장사꾼들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가 아니라 성전을 그렇게 방치했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는, 자신들의 위신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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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이라고 합니다)의 대표들인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하며 책잡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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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은 마치 집주인이 돌아왔는데 집주인을 몰라보고 그 동안 집 지키던 하인들이 집주인을 해치려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12:1~12에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불의한 농부의 이야기로 그런 악한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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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핑계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대답하기 어려운 네 가지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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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질문 내용

성경 구절

질문자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과 비유로 대답하심

11:27~12:12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세금에 대한 질문

12:13~17

바리새인, 헤롯당

부활에 대한 질문

12:18~27

사두개인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12:28~34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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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주제는 예수님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에서부터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것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주제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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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는 모든 질문 공격을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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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의 위대한 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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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가지 질문마다 독특한 내용들이 있지만 첫 번째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이 가장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 가지들은 간접적으로 책잡으려는 것들이었지만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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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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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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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이 질문에는 사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 (사본마다 다르지만) “혹은”(ἢ), “또는”(καί)이라는 말이 끼어있습니다. 첫째는 권세의 성질을 묻고, 둘째는 권세의 유래를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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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지자냐 메시야라도 되느냐라는 말이고, 그 사이에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도대체 누가 네게 이런 일을 하라고 했느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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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왜 이렇게 권세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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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사회라는 무리 속에서 사는 이상 서로 부대끼며 살다보면 이익과 욕심 때문에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권세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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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는 쉽게 말하면 입니다. 큰 권세가 있는 자는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무시당하며 살지 않을 정도로라도 적은 권세를 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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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권세를 추구하거나 그 권세에 의탁해 살려고 권세에 부침합니다. 때로는 그 권세를 얻기도 하고 그 권세 때문에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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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그런 권세와 상관없이 살려고 해도 인간 사회 속에서 사는 한 권세와 힘이라는 보이지 않는 지구 전기장 같은 세력권 속에서, 그 너울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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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세를 손에 얻고 그것으로 단물을 빨고 사는 인생들은 결코 그 권세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세의 주인이 오셨는데도 그 주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빼앗길까봐 두려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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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성전이 존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자신들에게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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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전의식과 종교 활동을 다루는 지배계급들은 자연적으로 종교적인 권세를 가진 자들로 인정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자신들의 권세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가 자기들과 다른 식의 권세를 갖고 나온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반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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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죠.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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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는 하늘에서 온 것이며 이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분을 통해 입증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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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전국의 지방 회당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와 예배의식행사를 주관했고 율법을 해석하는 천직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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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의 종교 체제가 그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권세의 근거였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세를 받고 있는 자라는 주장을 하고도 남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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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세계관을 갖고 있는 당시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성전 위주의 제도가 아닌, 즉 땅에 속한 권세가 아닌 하늘의 것을 들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이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반역자, 이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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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은 유대의 종교 조직이 주는 권세에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 권세나 경제적 권세, 정치적 권세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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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 가진 자들의 눈으로는 그는 경제적 배경도, 정치적 권력도, 군사적 무력도 갖지 못한 세상적으로는 권세 없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리는 권세 가진 자들의 양심을 떨게 했습니다.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그가 고개 숙인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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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어떠합니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시골 동네 출신입니다. 오죽하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는 속어가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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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의 연관성도 전혀 없어 보이는 지방 청년입니다. 그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속해 있던 종교 조직의 권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한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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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권세에 놀란 구절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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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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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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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대 종교 지도층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세와 전혀 무관한 시골 목수 출신에게 사람들이 몰리니 그들로서는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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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는 본질이 하늘의 것이고 영적인 눈으로라야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성전도 그 나라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이고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자신의 이익과 반대된다는 이유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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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나 목수 출신 예수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지탱해주는 권세와 무관한 새로운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권세인데도 그들은 애써 무시하며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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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반문(反問)질문을 하십니다.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역으로 다시 질문을 함으로써 하는 질문을 반문식질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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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반문식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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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격적인 질문에 그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인정하면 자신들이 요한을 반대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고. 아니다 라고 하면 여전히 요한을 따르는 백성들의 비난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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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 질문에 의해,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와 세례를 믿어야 할 줄은 알았으면서 의식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이 태도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았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외면한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찌르는 일에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옳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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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권세는 핵무기와 최첨단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서 주어지는 권세는 몇 년이면 사라지고 마는 대통령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1억 연봉과 복권 당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세상의 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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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권세는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인 우위를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잠시라도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품고 삽니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남들보다 손해 보지는 않았나, 남들보다 더 차지할 수는 없나 늘 계산하고 경쟁합니다. 그러니 삶의 태도가 항상 공격적일 수밖에 없고 주변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운전하다가 양보하는 운전자를 만나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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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를 얻는 자들은 다릅니다. 일찍이 바울은 예수님의 권세를 몰랐을 때 세상 권세를 좇았던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도를 해악으로 여기고 도리어 그 도를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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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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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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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훗날 그가 진정한 하늘의 권세를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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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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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자들이 받은 권세는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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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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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그 복음을 전하며 그 복음을 따라 사는 권세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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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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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권세는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권세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위한 이해득실에 대한 초조함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 진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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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궁극적 권세는 예수님이며 영원히 마르지 생수의 강이십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주님의 권세는 무한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과 비교하며 계산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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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되, 여러분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장하시도록 하시면 그 속에 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 삶이 하늘의 무한 확장 영역으로 변하여 하늘나라가 임하는 제자가 되는 복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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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 무화과나무의 저주

 

마가복음 11:12~33,

[12]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26] (없음) [27]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무화과나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언급하신 말씀이 13장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3:28~29,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이 구절의 무화과나무는 원문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이고 여기에서 가리키는 무화과나무는 11장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입니다.

 

특히 13:28이하는 종말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4월과 6월에 열매를 맺습니다. 4월은 우리나라의 여름에 해당하고 6월은 우리나라 9월이 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찾으신 때는 유월절 시기니까 4월입니다. 그런데 4월에 맺는 무화과 열매는 작은 녹색의 혹 같은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는 6월에 열립니다. 마가복음도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1:13)고 했습니다.

 

무화과는 우리나라에서도 재배가 가능하지만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입니다. 즉 팔레스탄인, 이스라엘 지방의 무화과나무가 본산입니다. 그래서 무화과열매를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말로 이라고 할 때, 요리하지 않은 볍씨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요리하면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쌀이 열리는 일년생 풀을 라고 합니다. 그러나 쌀이든 밥이든 벼든 영어로는 모두 rice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는 쌀밥을 주식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대상에 대한 단어가 여러 가지로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이고 그 방면에 대한 문화가 발달했다는 말입니다.

 

무화과도 그렇습니다. 우리말로는 꽃이 없다는 뜻으로 무화과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원산지인 무화과는 그 나라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과일입니다. 그래서 무화과에 대한 많은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사과나 배처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고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성경에는 60번 이상 무화과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트에나(3:7)와 헬라어 쉬케(21:19)가 있습니다. 트에님(13:23)과 쉬콘(7:16)은 무화과 열매를 말합니다.

 

또 열매가 어떻게 익었느냐에 따라 열매를 가리키는 단어가 다릅니다. 비쿠라(28:4)는 보통 6월에 익는 열매이고, 히브리어 파가(2:3)와 헬라어 올륀토스(2:370인역, 6:13?, 참조: 34:4)는 겨울나무에 잎이 달리기 전에 열리는 이른 봄의 청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드벨라(삼상 30:12)와 헬라어 팔라테(삼상 25:18 70인역)는 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반죽하여 짓이긴 무화과 열매입니다(왕하 20:7=38:21). 물론 품종에 따라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열매 맺는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스라엘에서 30년을 살아오신 예수님이 먹는 무화과 열매철과 못 먹는 열매철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먹을 수 없는 열매 맺는 철에 일부러열매를 찾으셨습니다. 비유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과일나무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주 이스라엘로 상징되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8: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호세아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나훔 3:12,

너의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한창 여름철에 예수님 앞에 서있던 무화과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잎사귀만 무성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식민지였어도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겉보기에는 종교적인 열심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비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상업화된 시장이 되었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상업행위를 묵인하며 자신들의 종교계급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첫 날에 성전을 그냥 둘러보셨습니다. 아마 그때도 여전히 성전의 장사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 예루살렘 부근에 있던 베다니에 머무셨다가 오후쯤에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는 중에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17). 이 장면을 보고 대제사장 쪽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합니다(18).

 

그리고 다음 날, 즉 셋째 날 아침에 제자들이 말라죽은 무화과나무를 발견했습니다. 베드로가 놀라서 예수께 말하기를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했을 때 주님은 믿음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시고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그 나무 하나로 끝나지 않고 이제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예언처럼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오해하고 일부러 거절하기까지 한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물론 최후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도 어느 정도 구원의 반열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만 십자가 이후 현재까지는 그들이 본래 누렸어야 할 영광된 자리는 이방인의 교회 즉 우리에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 들어와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일을 했고 신약에서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보통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이방인에 속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좀 섭섭한 기분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 하나를 특별히 취급하고 나머지는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나누어주기 위해 부름 받은 민족입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고 약속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로마서 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진정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약속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로마서 9:6~8,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져서, 즉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백성들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이방인을 구원하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단들은 그 TO 숫자가 144천명이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말씀이 역시 로마서에 있습니다.

 

로마서 11:16~27,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민수기 15:20에 보면,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곡식가루를 하나님께 바쳐 그 해의 모든 수확을 다 바친 것으로 대표하게 합니다. 그런 상징적 행위가 그 해의 음식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게 하고, 로마서의 떡덩이도 거룩하다는 바로 그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이 대표원리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처음 족장들입니다. 그들이 구별된 것처럼 그들의 모든 후손들이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단순한 혈통이 아닙니다. 하나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에서 하나를 보는 방식이 하나님의 구원 원리입니다. 이 방식을 바울이 설명하려고 참감람나무라고 하는 이스라엘민족의 약속의 혈통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 되었다고 말합니다(정상적인 접붙임 농법과는 반대입니다). 또한 그 감람나무의 뿌리는 약속의 조상이라는 뿌리라고 또 말합니다.

 

그런데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민족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구원 받을 전체 숫자를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 대신 이방인을 구원 받게 한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충만한 수가 헬라어에서는 πλρωμα(충만)이란 단어입니다. 즉 어떤 특정한 숫자가 아니고 이방인을 포함하여 구원함으로,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말합니다.

 

27절의 온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도 빠짐이 없는 전체의 숫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중 구원 얻는 자들의 총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 눈을 뜨고 구원 받는 숫자가 찰 때에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는. 즉 하늘에서 오는 종말이 올 것입니다.

 

이 구원 방식이 바울의 그리스도 안이라는 개념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로마서 12:5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12:5)”고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전 인류가 죄인으로 출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중에서 당신의 구원 받을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노아를 사용하셨고, 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이 구약과 신약에서 계속 실패함으로 그 후 2천년 동안 전 세계에서 유리하며 고통 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2천 년 전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라고 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로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 죽인 죄값을 자신들이 받겠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자신들의 선언대로 결국 그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이 이어졌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공격을 당하고 함락되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예 박멸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패망한 이스라엘 때문에 당시 노예 값이 땅에 떨어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중 2차 대전 직전 와중에 독일 나치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역사를 알고 계시죠.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고 그 피값을 자신의 후손에게 넘긴 민족의 결과입니다.

 

성경에서는 빌라도 법정에 참석한 유대인들이 다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지만 당시 전국의 유대인들 모두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선동자들이 군중심리를 몰아서 만들어낸 일이 전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그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 죄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대표원리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왕국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일을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 완수에 따라 지구와 역사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맡은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직분을 혈통적인 신분으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로 그 신분됨이 계급화되기도 하고 권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그 직분을 계급과 권력으로 갖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분은 영적인 신분에서 옵니다. 우리는 하늘의 권세에 속한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이루신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어 그 권세와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의 직분, 신분이 더 고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죄도 비록 용서받은 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정죄될 것입니다.

 

의인(성도)의 심판에 대한 구절들:

마태복음 13:30,40~43,49; 25:14~23,34~40,46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세상 영광과 물질위주의 성공을 추구한다면 과거 주님이 저주하신 예루살렘의 무화과나무처럼 심판받을 것입니다.

 

저는 본 교회가 속한 노회가 분열되고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7,80년대 한창 합동측이 갈라지고 교권싸움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감리교 같은 좀 거리가 있는 교단 쪽에서만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남의 문제가 아니네요.

 

각 교회의 대표는 노회에 참석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입니다. 만약 노회가 그렇게 결정이 났다면 자의든 타의든 노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 결정한 것이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의결한 자들이 가장 크겠지만 노회에 속한 모든 교회 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대표원리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대의정치가 장로교에서 나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저희 담임목사님이 임시노회에서 분리된 쪽의 목사 면직은 부당하다고 과감하게 의견을 내놓으신 일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심판 때에 장목사님 덕분에 우리 교회는 조금 덜 책임을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교세가 크고 선교를 잘하고 사회봉사를 잘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모든 겉으로 보여지는 행위의 동기가 욕심과 자기 영광이었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드러납니다. 잎만 무성하고 주님의 원하시는 일을 채우지 못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란 숫자와 크기가 아닙니다. 마치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고 하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요 성결입니다. 또한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일이 아니고 남의 죄를 용서하는 낮아짐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내가 구원의 은혜의 범위 안에 들어간 것이 주님이 우리의 대표, 맏아들이요 머리가 되심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몸의 지체로 믿으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교회의 대표요, 주님의 몸의 모습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삶에 의해 주님의 영광의 모습이 그대로 세상에 비쳐질 것이고, 그 행한 만큼 천국에서 칭찬과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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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1. 제자 바디매오 (어린이주일)

 

마가복음 10:46~52,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55일 어린이날은 1923년 방정환 선생님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가들이 어린이들의 지위향상과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하기 위해 시작한 날입니다. 외국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기념일입니다.

 

요즘은 미래 사회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티 없이 맑고 바르며,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어린이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이 날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신 일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5~16,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서는 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바로 어린이 여러분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5월 첫 주일을 어린이주일로 만들었습니다.

 

(사진 전시)

1. 송경화(, 0), 1991.3.18. 서울역

2. 유채빈(, 2), 2003.11.22. 충남 공주시

3. 정승연(, 3), 2006.10.24.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부근

4. 우정선(, 5), 2004.9.19.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5. 허지환(, 12), 2009.3.14. 서울 광진구 중곡동

6. 김희영(, 13), 2006. 8.21. 대구 수성구 파동 집근처

7. 박수진(, 16), 2004.10.9. 충남 천안시 성황동

 

이 아이들 어때요? 참 예쁘고 잘 생겼죠? 0세부터 13세까지의 어린이들입니다.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는 어렸을 때의 저희 아이들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신 이 어린이들은 실종 어린이들입니다. 미아(迷兒)라고도 하지요. 물론 여기 7명뿐만이 아닙니다. 수천 명의 어린이가 지금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자기 집 앞에서 놀다가, 혹은 학교에서 집으로 오다가, 혹은 어느 복잡한 곳에서 사라진 후 지금까지 몇 년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을 못 가는 어린이들도 괴롭지만 정말 괴로운 사람은 그 부모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자식을 잃어버리면 부모는 거의 미치게 됩니다.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남극의 펭귄들이 새끼들을 헌신적으로 키우는데 갈매기들이 새끼들을 채가서 잡아먹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일을 당한 부모 펭귄들은 거의 미칩니다. 그래서 남의 새끼들을 훔쳐서라도 새끼를 키우려는 이상한 행동들을 하기도 합니다. 짐승들도 그러는데 사람은 더욱 괴로워합니다.

 

일 년 전(200855) 어린이날에 실종아동에 대한 어느 인터넷 기사입니다.

 

[노컷TV] 오늘 어린이 날이지만 아이들 잃어버린 부모들의 마음은 속이 타들어 갑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의 심정은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그 자체'입니다.

금방이라도 아이가 찾아올 것 같은 마음에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갑니다. 아이를 찾느라 전단지도 만들고 온 곳을 찾아다니면서 제대로 된 가정생활을 할 수 없고 결국 모든 것을 탕진하게 됩니다.

더구나 아이 실종을 두고 가정 내 갈등이 심각해져 가정이 해체되기도 합니다. 실종아동 인권찾기협회 박혜숙 대표도 5년 전 두 살짜리 아들을 잃어버린 뒤 큰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2008.5.6.)

 

TV나 인터넷 동영상으로 실종 어린이들의 부모들을 보게 되면 내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는 아니지만 그 장면을 보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부모들이 잃어버린 자식을 찾게 되면 그 기쁨이 어떨까요? 그 기쁨과 감격은 말로 할 수 없겠지요? 세상의 어느 부자도 부럽지 않겠지요?

 

지금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과 같이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상태입니다.

 

때로 말썽 피우고, 공부도 못하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좀 모자라더라도, 다른 자식과 바꾸시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제일 행복합니다.

 

잠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으로 저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저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들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부모가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배워가고 자녀가 있기에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갑니다.

저희에게 천국과 같은 가정을 주셨습니다. 때로 세상에서 힘들고 가족의 문제로 힘이 들지만 그 속에서 천국을 맛보고 훈련을 하도록 주셨음을 알고 저희에게 허락하신 가족과 가정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읽은 마가복음 10장의 내용은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 나옵니다.

 

장소는 여리고입니다. (지도)

여리고(Jericho)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과 사해(死海)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습니다. 각종 과실수(특히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방향(芳香)의 성읍, 또는 종려나무성이라 불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길인데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온갖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도 고치시고, 다섯 개의 떡덩이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 교만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 가의 한 걸인 소경이 그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디매오입니다. ‘란 아들이란 뜻이니까 디매오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선학동에 저희 교회가 있을 때에 걸인들이 찾아오는 것을 몇 번 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주일마다 늘 찾아와서 주급 받듯이 얼마씩 받아가는 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일에 그 교회 목사님이 길에서 그 걸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걸인은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있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제는 성공해서 잘 사는가 보다고 반가운 마음에서 그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걸인도 목사님을 알아보고 냅다 도망가더랍니다. 목사님 옆에 있던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사람이 우리 앞 집 이층집 집주인입니다. 저 사람이 일부러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마다 찾아가면서 구걸하는데 그런 교회만 천 교회가 넘는다고 합니다.”

 

만약 걸인에게 100원짜리 동전을 주면 화를 냅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직업적인 걸인들은 사실 걸인이 아닙니다. 모두 같지는 않겠지만 그 수입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산적인 노동 없이 남의 동정을 얻는 행위를 하나의 로 보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쩌다가 혹은 잠시 구걸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일이 평생 직업이 되고, 더 효과를 얻기 위해 남을 속이면서 구걸을 전문으로 하는 것은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의 대한민국은 장애인들이 기초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보장을 해주는 시대입니다. 한국의 상황이 기본적으로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구걸을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인천) 구월동 터미널 사거리의 뉴코아 아울렛 앞에서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그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청각장애인입니다.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고 주문을 받고 팝니다. 열심히 살고 있고 장사가 아주 잘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여리고의 바디매오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라에서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던 시절입니다. 특히 소경이고 가족이 없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가짜 소경도 아니고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하여 늘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에게 구원의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등장입니다. 여리고는 이미 세리 삭개오에 대한 사건으로 예수님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의 기대가 가득한 곳이 된 도시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근처를 지나가시자 계실만한 방향을 향하여 힘껏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감히 소경 거지 주제에 시끄럽게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바디매오를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바디매오는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더욱 심히라는 표현은 얼마나 그가 큰 소리로 질러댔는지를 말합니다.

 

바디매오는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바디매오는 자신이 부르짖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이 시끄럽다고 꾸짖는 장면은, 사람이 처음으로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방해하는 사람이나 일들이 생긴다는 것을 은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돌아보시기를 바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그의 기도였습니다. 환난과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더욱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 어려움이 오히려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시편 123: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해결책을 어디에서 구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구원을 무엇으로 찾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또한 제대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라면, 그 자식을 찾을 때에 안방에서 가만히 앉아서 찾겠습니까? 모든 경찰, 모든 방송매체, 전단지를 만들어서라도 길거리를 다니며 자식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병에 걸리면서까지 자식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처지를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이 소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소경이어서 눈을 떠야겠다는 그 간절함이 있다면 예수님을 향해 어떻게 부르짖겠습니까?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

 

여러분에게 이 애통해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중얼중얼 부채도사 주문 외우듯이 주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절규하듯이 예수님을 바디매오가 부르자 예수님께서 그를 찾으십니다. 그러자 바디매오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갔습니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가 거지 일을 하기 위해 걸치고 있던 누더기 겉옷입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거지가 깡통을 차버린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겉옷을 미련 없이 던져버립니다. “다른 거지나 가져라! 나는 예수님께 간다.” 그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소경이 달리면 얼마나 잘 달릴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해서 달립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달립니까? 구원을 얻었다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 향락과 육신적인 일을 하는 것은 여전히 거지의 겉옷을 걸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특별히 제자도를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디매오를 고치시는 사건은 제자도가 무엇인지 가르치시는 교훈의 절정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1017절에서 예수님께 달려온 또 한 사람을 이미 보았습니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1, 22,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 꿇고 가르침을 구한 젊은 관원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고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 같이 생각했으나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했고, 천국의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 못했다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까? 믿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제자가 되어 따르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주님을 믿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소경 바디매오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부르짖어 결국 눈을 뜨게 된 성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눈을 뜨고 주님을 길에서 좇으며 따랐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모두가 소경이요 거지입니다. 아니 그 이상의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까?

 

바디매오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구원할 분이 예수님뿐인 줄 알고 그분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제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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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할 때는 설교자와 청중 간의 영적 교감이 있습니다. 제가 종종 설교하다가 어떤 성도를 바라봤을 때 뭔가 막히고 있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가 너무 어려워도 듣는 사람들이 이게 뭘까? 뭔가 있는 것 같은데?’하고 관심을 기울이면 내용이 좀 어려워도 설교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게 해도 설교에 반대하는 어떤 기운이 일어나면 무슨 커다란 댐에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일단 눈빛이 설교자를 거부합니다. 피곤해서, 지루해서 졸릴 수도 있습니다. 조는 것은 별로 신경이 안 쓰입니다. 저 사람 언제 말씀이 귀에 들어가 확 깰까 하고 잠간 잠간 신경 쓰이는 정도?

 

하지만 팽팽하게 신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설교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애들 훈계할 때 듣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느낌과 같습니다. 사실 설교에 저항하는 느낌은 그 이상으로 강하게 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한 사람이 있으면 점점 그 분위기가 퍼져갑니다. 반대로 은혜 받는 분위기가 되도 퍼져갑니다. 영적인 분위기란 참 묘합니다.

 

한 사람이 은혜 받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은혜가 파문처럼 퍼져 나가고,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를 누군가 만들면 전체는 아니더라도 부분, 부분 빨간 불 켜지듯 전염됩니다. 참 신기하죠. 미리 짜고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거부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설교자의 인격과 관계된 문제가 첫째인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설교자에 오히려 은혜 받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설교자의 인격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잘 아는 설교자에 대해서 역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설교자의 인격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때로 그 사람의 모자란 구석과 부족한 인간성을 보았기 때문에 설교를 그 설교자의 인격에 연관 지어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입장에서도 청중의 입장에서도 해결하기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설혹 설교자가 작은 교회 목사라서, 이름 없는 목사라서 설교도 별 볼일 없을 것으로 선입관을 갖고 있다면 그처럼 큰 실망은 없습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의 인격과 교양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설교의 내용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듯이 설교가 어렵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가 방언이 아닌 이상 아무리 어려워도 알아듣고 은혜 되는 부분들이 중간 중간 툭툭 튀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짧거나 신앙문제에 대하여 고민의 과정을 적게 겪은 분들은 제 설교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나가면 복 받으러 가는 거고, 교회에 가기 어려운 이유가 헌금 때문인 분들은 분명히 어렵습니다. 아직 거듭남의 문제를 해결 못한 경우입니다.

 

제가 초신자나 불신자를 위한 전도설교, 구원설교도 종종 하지만 주로 하는 설교는 성화와 자람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렇더라도 대개 초신자인 분들은 성화에 대한 설교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거부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과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 설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거듭났다 하더라도 신앙에 대해 고민한 일이 적은 분들은 제 설교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혹은 제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설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물론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한 번 여행해보십시오. 믿음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진지해야만 구원 받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면 마치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열심히 믿는 것과 믿음이 자라는 문제는 다른 세계입니다. 아이들도 열심히 믿고 당연히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으로 평생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믿으면 구원! 그리고 그 다음에는? ...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됩니다. 자칭 보수적이라는 한국 교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은 당연히 율법적인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단 한 권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많은 경건서적들, 신학서적들이 구원 이후의 삶과 성화의 문제들을 다루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이 한 번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영적 전투를 싸워보지 못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부터 이해가 안 됩니다. 설교할 때 기껏 성화의 문제를 십일조 잘해라, 주일 잘 지켜라, 새벽기도 잘 나와라, 아브라함 닮아라, 바울 닮아라로 결론 맺습니다. 설교자 본인이 고민과 생각이 부족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그 찬란한 빛을 드러내기를 원하며 숨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성경 속에서 발견한 보화들을 여러분께 충실히 전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듣고 받아들이는 분들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제가 사람인 이상 실수로 설교 중에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상하게 하겠습니까? 설교자를 통한 성령님의 음성일수도 있습니다.

 

제 설교를 영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는 물론 제가 인간이 못나서 그럴 수도 있지만, 설교하는 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마시고, 제가 전하는 말이 진리일까 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며 성경말씀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렇게 연구한다면 제 설교와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될 겁니다.

 

제 설교가 지금까지 여러분이 생각하고 경험하신 말씀의 세계관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거부하지 마시고, 신앙의 양심으로 성경과 비교하고 기도하여 여러분이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권고합니다. 제가 이단적인 설교자가 아닌 이상 제 설교를 들을 때에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면, 그다음, 여러분의 인격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50. 제자도5 - 섬김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Luke 9:23-24

Jesus said to them all: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e will save it.

 

“I've just got to find myself.” Won't ever happen. We do not “find ourselves, our life” by pursuing it. We find it by losing it to something or someone greater than ourselves. We find our life be losing it to Jesus and the work of his Kingdom.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때에, 제자들은 여전히 서로 높아지고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진정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반대로 남을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제자도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세상에 태어나면 세포분열을 통해 성장을 합니다. 자란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신자도 자라야 합니다.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면 새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라납니다. 신자들이 자란다는 말은 육체의 성장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척도를,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 헌금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느냐로 가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호통 치는 교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범사에 그에게까지자라야 한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자의 머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인생관, 생각이 바뀌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이 내 삶이요 사고방식이었다면 신자의 가치관은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자동차가 소형이어서 기죽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못가서 창피하다면 그것은 삶의 철학도 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아직 자라나는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한 경우입니다.

 

머리가 변하십시오.

신자의 머리는 옛 사람의 머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자라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가끔 바울의 이름의 뜻이 작은 자라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일제시대 일본 성경학자의 잘못된 해석이 지금까지 전달), 이름이 작다라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바울 자신의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4세기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설교자요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4(133cm) 단구의 사람이지만 하늘에 닿은 듯이 큰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Ιωaννηs ο Χρυσwστομοs, 349~407)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세상의 원리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빼앗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이기려는 삶에서 속임, 거짓, 부패, 폭력이 나옵니다. 그러나 남에게 양보하고 주는 삶에서 평화, 용서, 기쁨, 행복이 나옵니다.

 

콰이(Kwai)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커다란 전축(요즘의 오디오)를 통해 그 주제곡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LP판이라고 요즘은 보기도 힘듭니다. 흑백영화에서 영국군들이 휘파람 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 영화는 원래 콰이(Kwai)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콰이(Kwai)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은 작가인 어네스트 골든이 자기가 겪은 일을 쓴 전기적 실화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얀마 국경 부근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포로로 잡혀온 영국군 대령 니콜슨(알렉 기네스)은 전형적인 군인 기질을 가진 완고한 장교이다. 일본군 포로수용소장 사이토 대좌(세슈 하야카와)는 엄격하지만 인간미를 갖추었다.

콰이강 계곡에 타이 방콕과 미얀마 양곤을 잇는 철도용 다리를 건설하라는 임무가 포로수용소에 주어지자 사이토 대좌는 니콜슨 대령과 마찰을 빚게 된다.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영국 장교까지 노동을 시키려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대항하는 니콜슨과 사이토의 알력 속에 미군 포로 시어즈(윌리엄 홀던)는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다. 니콜슨 대령은 사이토 대좌를 누르고 투철한 군인 정신과 지도력을 발휘해 독단으로 다리를 완공시킨다. 다리가 완공되는 날 시어즈는 영국군 유격대와 함께 나타나 다리에 폭파장치를 한다. 고관을 태운 첫 기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리를 건너다 니콜슨의 눈앞에서 다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다.

콰이강의 다리는 점령국 일본과 패전국 영국이 서로의 자존심을 대결하는 상징적 구축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파괴되고 만다. 다리가 파괴됨으로써 제국주의도 함께 붕괴되는 것을 영화 속에서 암시해준다. 다리와 기차가 함께 무너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윌리엄 홀던, 알렉 기네스, 잭 호킨스의 명연기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멋지게 울려퍼지는 주제가 콰이강의 행진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 그동안 멜러 작품을 만들어온 데이비드 린 감독은 웅장한 규모의 이 영화로 아카데미에서 첫 감독상을 받았다.

1958년 제3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어네스트 골든은 이차대전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콰이 계곡에서 일본군을 위해 태국 서부지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철교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포로수용소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굶주림, 가혹한 노동, 일본군의 학대, 이런 가운데서 수백 명의 포로가 죽어갑니다. 포로들은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사회가 되어 동물들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어네스트 골든은 포로가 될 때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상처에서 오는 고통은 날로 심해지고 굶주림도 견딜 수 없었고, 어느 날 어네스트 골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서 삶을 포기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같은 처지인 포로 한 사람이 자기를 정성껏 간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어네스트 골든을 간호해 준 포로는 이름 모르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크리스챤 동료 포로의 희생적인 봉사로 그는 용기를 얻었고 삶의 의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간호해 준 사람을 따라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힘을 합해 다른 포로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수용소를 관리하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본군에 대해서도 힘을 합해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일본군은 이 요구에 굴복하고 맙니다.

 

한 기독교인 포로의 봉사를 통해 육신의 생명을 되찾고 신앙을 갖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된 어네스트 골든은 훗날 자신의 이 체험을 소설로 쓰면서 그 소설에 이런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봉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인생의 본분을 게을리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어네스트 골든은 콰이 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뿌리와 전통도 또한 본래 남을 섬기는 제자도였습니다. 초기의 서양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골육이 이 땅의 거름이 되기까지 이 나라와 교회를 섬기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라는 묘비를 남기기까지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에 천국에서 큰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크게 성장한 원인 중의 하나가 외국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흔적을 마포 양화진의 선교사들의 묘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포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공원묘지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국을 위해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입니다. 그 무덤 앞에 서 있는 묘비의 묘비명들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헐버트 선교사)는 묘비명도 있고,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고 새겨진 묘비명도 있습니다.

 

헐버트 선교사(Hormer B. Hulbert)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고종황제는 열강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모두 다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7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오게 되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온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겪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다.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백악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있었다. 그 밀약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도록 되어있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한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왔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19498월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08년 떠나서, 40년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참으로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기간에 그를 부르셨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의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또한 그곳에는 다른 120명의 선교사들의 묘지와 같이 한국에 온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과 그 가족들이 거기 묻혀 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서 침몰할 때 순직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일단 육지까지 헤엄쳐 나왔는데 한국어 통역이 아직 나오지 못한 것을 구하러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1902.6.11).

 

그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주로 이화학당을 위해 많은 일(이화학당 제 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을 하다가 순직해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이 아펜젤러 선교사의 가족 묘지가 있는데 그 앞의 묘비명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양화진 제1묘역(-6)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을 섬기는 자들은 그 상급이 천국에서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제자도는 가장 행복한 자의 모습이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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