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T'S LAMPLIGHTING TIME IN THE VALLEY
(Harold Goodman / Sam C. Hart / Joe Lyons / Curt Poulton / Dean Upson)

The Vagabonds - 1933

Also recorded by: Marty Robbins; Tex Ritter; Slim Dusty;
Wayne King; Hylo Brown; Bob King; Lester Flat; Ann Case;
Mac Wiseman; Norman Blake & Rich O'Brien.


There's a lamp burning bright in a cabin
In a window it's shining for me
And I know that my mother is praying
For her boy she is longing to see

When it's lamp lighting time in the valley
Then in dreams I go back to my home
I can see that old light in the window
It will guide me wherever I roam

In the lamplight each night I can see her
As she rocks in her chair to and fro
Though she prays that I'll come back to see her
Still I know that I never can go

When it's lamplighting time in the valley
Then in dreams I go back to my home
But I've sinned against my home and my loved ones
And now I must evermore roam

So she lights up the lamp and keeps waiting
For she knows not the crime I have done
But I'll change all my ways and I'll meet her
Up in Heaven when life's race is run

When it's lamp lighting time in the valley
Then in dreams I go back to my home
I can see that old light in the window
It will guide me wherever I ro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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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9. 구원 얻는 믿음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 다시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예수님께 찾아온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만남이 극적으로 교차한 중에 나타난 두 사람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같은 12년을 전혀 다르게 살아 온 두 사람의 운명과 우리의 모습을 대조해 보았을 때, 같은 동시대에 이 교회에 모인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 이 시간에 모여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나의 부족한 어떤 점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힘들고 지친 세상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면 그러한 정신적 위안을 받는 일도 많습니다만, 그런 일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과녁을 잘못 조준한 양궁선수나 사격선수처럼 엉뚱하게 다른 선수의 과녁에 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은 야이로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는 도중에 중간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만남이 일어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자신이 유대교의 회당장인데 다른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체면이나 입장이나 명예보다 자기 딸이 더 소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의 입장에서 구약의 한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바로 나아만입니다.

 

열왕기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아람(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개인적으로 인생의 최고점에 이른 사람이고, 국가적으로 왕 빼놓고 전 국가에서 일인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다른 나라의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자기의 소중한 딸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삶의 극한 상황까지 몰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마귀에게서 찾아오십니다.

 

, 이제 야이로는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 듯 야이로를 앞세우고 따라 가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 주위로 구경하기 위해 몰려듭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혹은 지금이 어려운 때라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거나 기억해보십시오. 그런 때를 대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이 왔는데 서리가 껴서 더 추운 겁니다. 서리가 언 것은 추운 바람이 분 것입니다. 눈만 와도 영하의 날씨인데 바람까지 붑니다.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하지요.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야이로가 그랬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이 갑자기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자기 옷을 누가 만졌다고 합니다. ‘내 딸이 지금 막 죽어 가는데 이 많은 사람 중에 옷 좀 만진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야이로의 속이 거의 뒤집어 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중요했습니다.

 

마가복음 5:25~30,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아마 이 혈루병을 고침 받은 여인도 왜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가시는지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면 자기 병도 고침 받을 것까지는 기대했을지라도 예수님이 자기를 직접 찾으실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옷을 누가 손댔다고 마치 짜증내는 것 같은 내용의 말에 제자들이나 야이로는 좀 당황하기도 하고, 답답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마가복음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제자들은 당연한 상식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부딪치며 가는데 다들 손이나 팔이 닿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여러분이 야이로라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몰려가던 수 백 명도 갑자기 행진을 멈추느라 좀 더 혼란스럽다가 곧 잠잠해졌을 겁니다. 사람들이 좀 웅성웅성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밀었대?” “누가 저 사람에게 손댔대!” “? 소매치기야?” “아니, 옷을 만졌대.”

 

겨우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문제의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내렸습니다. “아니, 저 여자는 옆 마을 혈루병자 아냐?” “저런, 저런, , 비켜. 혈루병자다!” “, , , 저 여자가 저 선생을 만졌나봐.” “신통두 허이, 그러게 이적을 행하지.” “아하, 그러니까 저 부정한 혈루병 여자가 부정하게스리 자기를 만졌으니 화가 난 게야.”

 

마가복음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때, 여러분이 야이로라면 계속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예수님, 제가 좀 급하거든요?” “그 여자 나중에 좀 보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잡아 놓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속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그 시간이 모두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야이로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자초지종을 고백합니다. “이러이러해서 고생하다가 예수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나설 형편도 못돼서 옷깃이라도 만졌습니다.” 아마 2,3분이 더 걸렸을까요?

 

그런 사정을 예수님이 몰랐을까요? 아셨죠.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를 건너시기 전에 바다 건너 동편에 거라사 지방 출신의 귀신들린 자가 마귀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딱 그 한 사람만 고치시고 곧바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하루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야이로를 만날 것을 아셨고, 그 와중에 이 여인을 만날 것을 아셨습니다. 물론 또한 그 여인의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물어 보십니다. 왜요?

 

마가복음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진행할 때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체크해 나갑니다. 여러분이 야이로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의 행동이 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좀 급하거든요. 이렇게 일이 꼬이게 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지 않습니까?

 

잠깐 혈루병 치료를 받은 여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신유(병 고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유의 능력을 행할 때, 자신에게서 기운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은사는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낫게 하시지만 즉시 낫는 경우 은사를 행하는 사람도 그 변화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능력이 나간 것이 바로 혈루병 걸린 여인의 믿음의 행위가 원인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허용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찔러서 절 받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이 상황을 무시했다면 그 여인은 혼자 감사는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겠지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건드린다면, 여러분에게서 어떤 것이 나오겠습니까? 길 가다가 사람들이 툭툭 건드리면 짜증이 나옵니까? 운전하다가 자동차를 꽝 건드리면 욕이 나옵니까? 누군가 여러분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건드렸을 바로 그 때, 순간적으로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생명입니까? 아니면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나만 주장하는 의지입니까?

 

왜 여인이 앞으로 나오게 만드셨을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 다른 신자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구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죽기 직전 회개하고 예수님 믿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극악한 범죄자가 사형선고 받고 감옥에서 회개하고 신앙을 갖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죠. 그렇게도 구원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은 가져도 교회 다니는 것을 불편해 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싫어하기도 합니다. “목사들은 위선자들이다. 성경은 믿겠지만 교회는 못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이 지금 내 옷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라고 한 마디만 하셔도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이 누군지 다 압니다. “, 혈루병 여자!”

 

그 여인이 앞으로 일부러 나오지 않게 하고 그렇게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왜 군중들 앞으로 나오게 하셨어요? 바로 신앙은 가져도, 성경은 믿어도 교회 나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대개 그런 분들은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상처를 받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닫습니다. 그런 분들은 영적으로 혈루병에 걸린 것처럼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마음의 피를 흘렸습니다. 착합니다. 남을 욕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웁니다. 피를 흘립니다. 이런 병은 참 낫기가 힘듭니다.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해결이 안 됩니다. 자기는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참 기쁨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부족해서 그래.” 즉 자기는 부족하지 않다. 내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 사람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정말 희한한 일들도 많고, 말도 많고, 오히려 안 나갔을 때보다 더 피곤한 일, 괴로운 일을 겪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그냥 극장에 가듯 맘 편하게만 가려고 합니다. 헌금도 극장표 사듯, “예배 쇼 잘 봤으니 인사는 해야지?”

 

하나님이 왜 그곳에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내 교만과 자존심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교회인데 우리는 탕자처럼, 호세아의 부인처럼 다른 곳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보다 못한 수준의 설교를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아멘 할 수 있으면 그 때가 진정으로 병 고침을 받는 순간입니다. (이때는 아멘하면 안되는데...)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의 장미희 같은 집사,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려는데 자꾸 딴죽 거는 장로의 까탈스러움을 허허, 아멘하며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때 병 고침을 내가 받은 겁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교회 안 나가면 압록강 바로 앞에 놔두고 일사 후퇴한 겁니다. 아직까지 38선이죠.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고 무너졌을 때, 주님은 나를 모든 우주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혈루병 고침 받은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부르셨습니까? “딸아.”

 

예수님은 이 여인을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천국을 상속받은 당신의 백성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공적으로 이 여인이 고침 받았음과 이제는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됨을 증거 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 여인을 앞에 나오게 하셨고, 자신의 입으로 믿음을 증명하게 하고, 이제 예수님이 그 여인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그 여인이 군중들 앞으로, 자신 앞으로 나서게 부르십니다. 누가 자신의 옷을 만졌는지도 다 알면서 누가... 대었느냐라고 물으시며 그 여인이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다시 야이로에게 돌아옵시다. 야이로에게는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도중입니다. 진짜 설상가상입니다.

 

마가복음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제 끝났습니다. 야이로의 무릎의 힘이 쭉 빠졌겠지요. 기가 막혔겠지요. 아마 길에서 5분 정도 더 지체하지 않았다고 딸이 죽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보장은 못하겠지만, 왜 일이 이렇게 절묘합니까?

 

이 여자가 하필 이 시간에 나타나가지고... 왜 이 선생은 일부러 쓸데없이 시간을 보낸거야?” 야이로는 딸의 죽음의 소식에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생각은 못했을지라도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소식을 전한 사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선생을 더 오시게 하지 않아도 돼. 귀찮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상식입니다.

 

우리도 또한 야이로 같이 얼마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까?

 

몇 년 전 영국의 아이리스 지오프리라는 중년여인이 로터리에 당첨되었습니다. 영국의 로또(로터리)는 당첨금이 어마어마합니다. 자그마치 2천만 파운드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20,000,000 X 2,000 = 40,000,000,000 . 010개 붙으면 얼마입니까? 400억 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마 전 식도암으로 판정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돈으로도 자기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남을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냥 주어버렸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이 영국 여인에게 삶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신앙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없어지는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무덤에 돈을 갖고 가서 무슨 소용입니까?

 

어제 저녁 스폰지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몇 십억의 로또 1등 당첨금을 타고도 도벽에 중독이 되어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수중에 수십억 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둑질을 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한국인 도둑은 그 인생의 의미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죠. 그것이 없으면 로또 1등 당첨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야이로에게 인생의 가장 큰 의미는 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최우선 순위를 자꾸 걸어 넘어뜨립니다. 급한 야이로를 놔두고 12년을 앓고 있는 여인,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고 난 후에 만나도 될 일을, 그 여자는 왜 하필 지금 나타나가지고, 아니 이따가 몇 시간 후에, 내 딸 좀 살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지. 왜 이 시간에 교묘히 나타나서!

 

이 모든 사건을 움직인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모든 우주를 움직이십니다. ... 때로는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일이 틀어지게 하실지 모릅니다. ... 때로는, 우리의 죽음까지도 허용하십니다.

 

그러한 야이로의 마음 상태까지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36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마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충격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야이로는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이미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의 기준은 자기 딸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의 근거가 되는 자기 딸의 생명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끝났습니다. 그만 돌아가세요.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마가복음 5장이 이렇게 끝났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단지 병 고침을 소원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까지도 이기시는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상식도 없는 막 되먹은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것을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상식은 믿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사람의 상식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미 끝났어, 더 이상 소용없어!”라고 우리의 상식은 말하지만, 하나님은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그때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박국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마가복음 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손이 오늘 절망 가운데 처한 우리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 손은 십자가에 박히셨던 손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 손에 못이 박혔나요?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손 안에 있는 신자들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29,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리고 달리다 굼하시며 소녀를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일으키셨습니다.

 

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옷을 믿음의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여자 아이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야이로는 설마하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릴까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의 유무를 떠나 당신의 구원 의지를 보여주시려고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믿음이 소녀를 살린 조건이 아니고 믿는 자의 복을 보여주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가 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군중 가운데서 비비적거리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사정이나 시간을 비껴 주님은 주님의 독특한 방식대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설혹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 소망이나 바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일처럼 보여도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진정 복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마가복음 28. 구원 얻는 믿음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35부터 5장 마지막 절까지 마가는 주님의 능력에 대해, 메시야의 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31~41에서는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자연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5:1~20에서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건에서 우리는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우리도 또한 사랑받을 수 없는 세상의 자식들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5:21~43에서는, 질병을 고치시고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의 병자가 같이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위해 등장하고 예수님을 모시어 가는 중에 길에서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자가 나타나 믿음으로 치료를 받고, 그 와중에 자기 딸이 죽고, 그리고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네 가지 사건과 이적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모두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사람의 상황이 극한적으로 몰려있을 때에야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음과 같은 간절한 문제와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연의 위험, 마귀의 지배, 질병과 사망의 고통 속에 처하여 있는 몇 가지 상황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상황입니다.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 주님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을 알고계시고 그 상황 속에 계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우리가 만나는 일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 그 지역 사람들의 배척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5: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들은 자신들에게 진정 중요하고 생명이신 당사자를 피하고 싶어 하고 당장의 이익과 피해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건너 오셨을 때 가버나움의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5: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한 사람이 예수님께 뛰어와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이며 장로인 야이로라 했습니다. 그 지역 유지입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임을 얻은 사람이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정적으로도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 온 종교적 명성, 사회적 명망을 다 버리고 한 젊은이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문제는 12살 난 딸이 병으로 고생하다가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재산으로도 그의 인맥으로도 그는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12살의 딸자식이라면, 그야말로 자식 키우는 때 중에 가장 기쁘고 사랑스러울 때입니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딸의 재롱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행복이 확 사라지고 이제 가장 고통스러운 자식의 죽음을 앞에 놔두고 있는 부모의 심정은 찢어질 듯합니다. 아마 대신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것이 모든 정상적인 부모의 마음일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아무 희망이 없을 때에 야이로는 자신의 회당에서 얼마 전 큰 사건을 일으켰던 한 청년이 다시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도 했고, 손 마른 자를 치료하기도 했고, 근처 마을에서 어느 여인(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많은 병 고치는 이적을 행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부터 들었고 보기도 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회당장이라는 직분 때문에 아니면 율법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면 그때는 딸의 병이 없어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배반자라고 비난할지라도, 회당장의 직분에서 물러나게 될지라도, 야이로는 자기가 지금까지 본 대로 이 예수라는 청년을 찾아가서 간절히 구하면, 그가 자기의 가장 큰 문제를, 딸을 고쳐줄 것으로 가대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자가 등장합니다. 요즘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혈루병이란 X염색체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원래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걸릴 수 없는 병입니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혈루병()은 상처에서 피가 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혈루병은 그런 혈루병이 아니고 요즘 말하는 여자의 자궁출혈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든 남자든 출혈이 발생하면 레위기 15장에서는 그 사람이 부정하다하고 7일간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데 이 여자는 12년을 계속적인 출혈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인 접촉이 종교적으로 금지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만지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같이 불결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여자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재산을 허비하고 오히려 병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5:25~26,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래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공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무리 속에 숨어 있다가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계획을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5:27~28,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12년을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여기 두 가지의 12년이 있습니다. 하나는 야이로가 경험한 12살 난 딸의 행복한 12년입니다. 그러나 그 12년도 이제 질병과 죽음으로 끝을 맞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혈루병 걸린 여자가 경험한 12년의 고통의 세월입니다. 물론 더 오래 그 병을 짊어지고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괴로움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내온 시간입니다.

 

한 사람의 어린 소녀는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12년의 행복을 보냈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죽음 같은 12년의 오랜 세월을 억지로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12년을 너무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이 한 순간의 장면에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의 너무 다른 인생이 절망이라는 끝에서 한 사람 예수 앞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각자 다른 시간들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동시대를 만났고, 비록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를 지라도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서로 만났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분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얽혀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문제를 주님께 드리는 믿음으로 지금 나와 있다면, 바로 이 자리가, 바로 이 교회가, 주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셨다는 믿는, 승리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상식적으로 정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내가 엎드러짐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어떤 조건이 있어야 교회에 나가겠다, 무엇이 없어서 못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이런 삶과 신앙의 한계를 넘어보지 못한 수준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투정만 하여야겠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몇 달 전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2시간 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한양공대 대학원까지 다닌 분이고 강사까지 하셨고 미국에서 몇 년 생활까지 하신 70이 가까우신 분입니다. 컴퓨터와 전자보안관리 시스템까지 경험과 지식이 꽤 있는 분이 지금은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어느 교회에서 관리집사직을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 관리직이라는 것이 큰 교회에서는 자기 맡은 전문만 담당하면 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중소규모 교회들에서는 크고 작은 궂은일을 다해야 하고 일 잘하면 아무 말 없고 실수하면 말 많은 직업이 관리직입니다. 그렇다고 노동에 비해 보수가 대체로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이 처음에는 순수하게 일을 시작했다가 여러 자존심 상하는 일들을 당했습니다. 다른 집사님들로부터, 교회 교역자들 심지어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통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답니다. 가끔 저하고 마음을 터놓는 이야기를 해서인지 제가 그 교회를 떠나고도 전화가 왔습니다. 말하자면 제게 화풀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그냥 듣기도 하고 그렇게 2시간을 통화하다가 마지막에 제가 한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면서 화가 납니다. 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에서는 더욱 조심해야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눈에 뜨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나를 그 교회로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런 믿음의 성장의 상황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잘나서 그 문제의 해결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이 내가 망치와 모루에 두들겨 맞고 뜨거운 불맛, 차가운 물맛 보면서 연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곳 외에는 나 같은 인간이 단련 받아 성장할만한 곳이 더 이상 없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교회가 그 연단의 장소입니다. 교회가 좋은 면만 내놓고 멋있게 찬양하고 멋있게 설교 듣고 앉아 있다가 헤어지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이 더 잘 해냅니다.

 

대형교회들이 전도 안 해도 사람이 몰리고, 인기 있는 이유가 그 이유입니다. 부담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헌금, 봉사, 준만큼 교양 있게 대접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신약서신들의 교회 어디에도 그런 교회가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문제 많은 인간들이, 때로 서로 말 많고, 상처를 주고, 지지고 복닥거려도 그래도 주님만은 붙들겠다는 곳이 교회입니다.

마가복음 27.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거라사가다라

 

마태복음 8:28~34가다라지방의 귀신들린 자와 마가복음 5:1~20, 누가복음 8:26~39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사건을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마태의 기록대로 가다라인지 마가나 누가의 말처럼 거라사인지가 문제입니다.

 

사실 거라사는 갈릴리 동편에 위치한 지방으로 갈릴리로부터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요단계곡 동쪽으로 2마일 이상 떨어져 있으므로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이라고 한 누가의 기록과는 일치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두 지방은 다같이 갈릴리 동남 편에 있어 헬라도시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경에 속하므로 거라사(데가볼리의 하나인)가다라 구역 안에 있는 도시로 보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복음서 기록자들이 각기 지명을 달리 표현한 것이므로 공관복음서간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가다라’(8:28 이하)와 마가복음, 누가복음(8:26 이하)거라사는 지리상 구분하면 다른 지역이지만 거라사는 가다라 안에있고 가다라와 거라사 둘 다 데가볼리에 들어가므로 복음서의 오류가 아닌 같은 지역을 이르는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데가볼리는 본래 유대의 한 지방이었는데 알렉산더 대왕 이후 열 개의 헬라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군 제 14군단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사문화와 상업주의 문화, 그리고 물질주의 문화가 결합되어 음란하고 죄악된 거라사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지형적으로도 갈릴리 해변에는 해수와 바람에 의해 괴상한 모양을 한 바위와 천연동굴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이런 천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해서 귀신이 들려서 무덤 사이에 거주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던 한 사람을 회복시키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세 가지 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사탄의 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그 지방 사람들이 아니라 귀신들리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입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뜻대로 살면서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를 지배하던 악한 영은 누가 자기에게 찾아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예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에게 그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물으신 이유는,

 

악한 영의 세력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그 형상의 본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그 형상을 회복하여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내면이 밝아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을 때 미움과 증오심이 생기고, 자학과 심한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악한 영은 죄와 어두운 생각을 심고, 참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배후세력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 한 편에서는 악령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당하거나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은 둘 다 사탄이 기뻐하는 현상입니다. C.S. 루이스는 사탄은 물질주의자들과 주술주의자들을 둘 다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참 자아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을 나타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입니다. 악한 영은 거라사인의 참 자아와 이름을 상실케 했습니다. '나는 버림받은 자이다', '쓸모없는 존재다', '죽어 마땅한 자다'라는 거짓 자아를 심어서 비참한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죄의 포로 된 삶을 살게 했습니다.

 

악령의 이름은 군대라고 했습니다. 빛이 비추이는 곳에 어둠이 물러가듯 영적 권세자 예수님의 음성 앞에 악한 영의 실체가 들어났습니다.

 

군대는 헬라어로 레기온으로 로마군인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입니다. 거라사인에게 엄청난 떼의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습니다. 정욕, 교만, 시기심, 자의식, 절망, 이기심, 안일, 물질, 반발심, 열등감 귀신 등, 갖가지 귀신이 그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는 더러운 군대귀신에 지펴 세상과 고립되어 무덤주위에서 살았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에 묶이기도 했으나 아무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가정과 자신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사탄과 마귀의 힘은 존재하며 여전히 하나님과 대적하고 믿는 자들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10:10).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사회의 힘

 

인간의 세상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어지럽히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못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따로 격리시킵니다.

 

그래서 교도소가 있고 정신병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원인인 죄인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또 다른 결과로부터 안전히 지켜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자들이나 다루기 힘든 자들은 쫓아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를 멀리 격리시켰고 쇠사슬로 묶기까지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무슨 간구를 했습니까? (10)

 

[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정체가 들어난 악한 영들은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지방은 자신들이 터 잡고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악한 영이 거하기 좋은 환경이란 어떤 사회이겠습니까?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시되는 사회입니다. 물질이, 인간의 욕망들이 고상한 가치로 바뀌어, 혹은 쾌락이라는 허울로 바뀌어 인간의 생명과 고귀함보다 다른 것들이 우선시 되는 사회(17)입니다.

 

그런데 데가볼리 지역의 거라사(가다라) 사람들은 그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예수님께 간구(기도)했습니다. 뭐라고요?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돼지 2천 마리는 약 3억 원(돼지 1마리 고기 약 80kg, 현 국내산지 가격이 1kg에 약 2,000, 2천 마리 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한 영혼이 돼지 2천 마리나 몇 억 원보다 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골칫거리를 해결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두렵고 손해만 끼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돼지라는 동물을 미워하신 것도, 돼지 주인을 미워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을 바로 보기보다 자기에게 유익되고 편안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회의 원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고 그에 따르게 될 희생과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가 있어도 자신들의 이익에 해를 끼칠 것 같으면 진리를 외면합니다. 일본의 정권이나 극우파들은 독도가 자신들의 단합에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진실을 알면서도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있었을 때 아데미(아르테미스)우상제조를 업으로 하던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의 모함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19:23~29,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 주의 힘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악한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폭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가신 이유는 이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악한 영의 위협과 세상의 위험과 어려움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주님의 권능으로 구하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악령이 떠난 후 귀신 들렸었던 자는 예수님께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18).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19~20).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이 온전케 된 거라사인을 데가볼리 지역으로 파송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향해 가도록 하십니다.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귀신들린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아닐지라도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일 수도 있고, 내적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있고, 죽지도 못하고 무덤 사이에서 밤낮 울부짖는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 여러분 자신을 내어 드리십시오. 여러분을 묶고 있던 문제들과 고통을 돼지에게 옮겨 가라고 하십시오. 그 돼지가 여러분의 재산이든 어떤 귀한 것이든, 여러분의 영원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어느 날 내가 공부에 미쳤습니다 


박철범다산에듀, 2012




우리가 아직 물고기 배속에 있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이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계획을 갖고 애쓰더라도 그 노력의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 맞아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삶을 가로막으신다.


좋은 변화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과 우리의 노력 방향이 일치할 때 일어난다따라서 어떤 노력을 하기 전에 그분의 참뜻을 찾아야만 한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하나의 인격으로 서는 것이다그것은 지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직접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에게 고통을 주실 때는 목적이 있다그 목적을 우리가 알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모를 수도 있다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불행의 이유가 무엇인지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에서 그 답을 찾으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나 대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판기가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이며 경배의 대상이시다.


크리스챤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면서부터 삶의 가장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인생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면 권투에서 주먹이 날아와도 두려워하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고 내가 주먹을 날려야 할 그곳을 향해 주먹을 날리듯이 우리 인생의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우리가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짜서 꾸준히 실천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인내력과 규칙성을 지속하는 것이다공부는 관성을 이용해야 한다목표를 시각화시켜서 항상 머릿속에 그리면서 실행에 옮겨라.


다니엘처럼 평범한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라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이 결코 따라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무엇인가를 이루기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고 자신을 벼랑 끝에 몰아넣고 그것을 유지하면서 일을 해내야 한다.


세상은 공부만 잘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세상은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을 필요로 한다그 사람은 자신이 먼저 변화한 사람이다사람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영성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삶을 헌신하고자 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다루시는 방법은 첫 번째로 비젼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확실한 비젼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그 불확실한 비젼을 구체화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비젼을 구체화하면서 성장한다.


예배는 실력을 쌓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예배는 크리스챤의 목적이다공부를 잘하기 위해 예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에 빠짐없이 예배드리는 것이다예배란 주일에 드리는 시간만이 아닌 우리 삶 전체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공부하라크리스챤의 공부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참고: http://blog.naver.com/jinjin8585/154233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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