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9. 구원 얻는 믿음②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 다시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예수님께 찾아온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만남이 극적으로 교차한 중에 나타난 두 사람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같은 12년을 전혀 다르게 살아 온 두 사람의 운명과 우리의 모습을 대조해 보았을 때, 같은 동시대에 이 교회에 모인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 이 시간에 모여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나의 부족한 어떤 점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힘들고 지친 세상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면 그러한 정신적 위안을 받는 일도 많습니다만, 그런 일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과녁을 잘못 조준한 양궁선수나 사격선수처럼 엉뚱하게 다른 선수의 과녁에 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은 야이로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는 도중에 중간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만남이 일어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자신이 유대교의 회당장인데 다른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체면이나 입장이나 명예보다 자기 딸이 더 소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의 입장에서 구약의 한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바로 나아만입니다.
열왕기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아람(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개인적으로 인생의 최고점에 이른 사람이고, 국가적으로 왕 빼놓고 전 국가에서 일인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다른 나라의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자기의 소중한 딸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삶의 극한 상황까지 몰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마귀에게서 찾아오십니다.
자, 이제 야이로는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 듯 야이로를 앞세우고 따라 가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 주위로 구경하기 위해 몰려듭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혹은 지금이 어려운 때라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거나 기억해보십시오. 그런 때를 대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이 왔는데 서리가 껴서 더 추운 겁니다. 서리가 언 것은 추운 바람이 분 것입니다. 눈만 와도 영하의 날씨인데 바람까지 붑니다.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하지요.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야이로가 그랬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이 갑자기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자기 옷을 누가 만졌다고 합니다. ‘내 딸이 지금 막 죽어 가는데 이 많은 사람 중에 옷 좀 만진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야이로의 속이 거의 뒤집어 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중요했습니다.
마가복음 5:25~30,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아마 이 혈루병을 고침 받은 여인도 왜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가시는지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면 자기 병도 고침 받을 것까지는 기대했을지라도 예수님이 자기를 직접 찾으실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옷을 누가 손댔다고 마치 짜증내는 것 같은 내용의 말에 제자들이나 야이로는 좀 당황하기도 하고, 답답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마가복음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제자들은 당연한 상식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부딪치며 가는데 다들 손이나 팔이 닿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여러분이 야이로라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몰려가던 수 백 명도 갑자기 행진을 멈추느라 좀 더 혼란스럽다가 곧 잠잠해졌을 겁니다. 사람들이 좀 웅성웅성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밀었대?” “누가 저 사람에게 손댔대!” “뭐? 소매치기야?” “아니, 옷을 만졌대.”
겨우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문제의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내렸습니다. “아니, 저 여자는 옆 마을 혈루병자 아냐?” “저런, 저런, 야, 비켜. 혈루병자다!” “어, 어, 어, 저 여자가 저 선생을 만졌나봐.” “신통두 허이, 그러게 이적을 행하지.” “아하, 그러니까 저 부정한 혈루병 여자가 부정하게스리 자기를 만졌으니 화가 난 게야.”
마가복음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때, 여러분이 야이로라면 계속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예수님, 제가 좀 급하거든요?” “그 여자 나중에 좀 보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잡아 놓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속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그 시간이 모두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야이로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자초지종을 고백합니다. “이러이러해서 고생하다가 예수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나설 형편도 못돼서 옷깃이라도 만졌습니다.” 아마 2,3분이 더 걸렸을까요?
그런 사정을 예수님이 몰랐을까요? 아셨죠.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를 건너시기 전에 바다 건너 동편에 거라사 지방 출신의 귀신들린 자가 마귀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딱 그 한 사람만 고치시고 곧바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하루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야이로를 만날 것을 아셨고, 그 와중에 이 여인을 만날 것을 아셨습니다. 물론 또한 그 여인의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물어 보십니다. 왜요?
마가복음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진행할 때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체크해 나갑니다. 여러분이 야이로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의 행동이 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좀 급하거든요. 이렇게 일이 꼬이게 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지 않습니까?
잠깐 혈루병 치료를 받은 여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신유(병 고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유의 능력을 행할 때, 자신에게서 기운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은사는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낫게 하시지만 즉시 낫는 경우 은사를 행하는 사람도 그 변화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능력이 나간 것이 바로 혈루병 걸린 여인의 믿음의 행위가 원인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허용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찔러서 절 받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이 상황을 무시했다면 그 여인은 혼자 감사는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겠지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건드린다면, 여러분에게서 어떤 것이 나오겠습니까? 길 가다가 사람들이 툭툭 건드리면 짜증이 나옵니까? 운전하다가 자동차를 꽝 건드리면 욕이 나옵니까? 누군가 여러분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건드렸을 바로 그 때, 순간적으로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생명입니까? 아니면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나만 주장하는 의지입니까?
왜 여인이 앞으로 나오게 만드셨을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 다른 신자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구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죽기 직전 회개하고 예수님 믿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극악한 범죄자가 사형선고 받고 감옥에서 회개하고 신앙을 갖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죠. 그렇게도 구원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은 가져도 교회 다니는 것을 불편해 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싫어하기도 합니다. “목사들은 위선자들이다. 성경은 믿겠지만 교회는 못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이 지금 내 옷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라고 한 마디만 하셔도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이 누군지 다 압니다. “아, 혈루병 여자!”
그 여인이 앞으로 일부러 나오지 않게 하고 그렇게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왜 군중들 앞으로 나오게 하셨어요? 바로 신앙은 가져도, 성경은 믿어도 교회 나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대개 그런 분들은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상처를 받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닫습니다. 그런 분들은 영적으로 혈루병에 걸린 것처럼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마음의 피를 흘렸습니다. 착합니다. 남을 욕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웁니다. 피를 흘립니다. 이런 병은 참 낫기가 힘듭니다.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해결이 안 됩니다. 자기는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참 기쁨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부족해서 그래.” 즉 자기는 부족하지 않다. 내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 사람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정말 희한한 일들도 많고, 말도 많고, 오히려 안 나갔을 때보다 더 피곤한 일, 괴로운 일을 겪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그냥 극장에 가듯 맘 편하게만 가려고 합니다. 헌금도 극장표 사듯, “예배 쇼 잘 봤으니 인사는 해야지?”
하나님이 왜 그곳에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내 교만과 자존심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교회인데 우리는 탕자처럼, 호세아의 부인처럼 다른 곳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보다 못한 수준의 설교를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아멘 할 수 있으면 그 때가 진정으로 병 고침을 받는 순간입니다. (이때는 아멘하면 안되는데...)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의 장미희 같은 집사,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려는데 자꾸 딴죽 거는 장로의 까탈스러움을 허허, 아멘하며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때 병 고침을 내가 받은 겁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교회 안 나가면 압록강 바로 앞에 놔두고 일사 후퇴한 겁니다. 아직까지 38선이죠.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고 무너졌을 때, 주님은 나를 모든 우주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혈루병 고침 받은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부르셨습니까? “딸아.”
예수님은 이 여인을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천국을 상속받은 당신의 백성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공적으로 이 여인이 고침 받았음과 이제는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됨을 증거 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 여인을 앞에 나오게 하셨고, 자신의 입으로 믿음을 증명하게 하고, 이제 예수님이 그 여인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그 여인이 군중들 앞으로, 자신 앞으로 나서게 부르십니다. 누가 자신의 옷을 만졌는지도 다 알면서 “누가... 대었느냐” 라고 물으시며 그 여인이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다시 야이로에게 돌아옵시다. 야이로에게는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35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도중입니다. 진짜 설상가상입니다.
마가복음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제 끝났습니다. 야이로의 무릎의 힘이 쭉 빠졌겠지요. 기가 막혔겠지요. 아마 길에서 5분 정도 더 지체하지 않았다고 딸이 죽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보장은 못하겠지만, 왜 일이 이렇게 절묘합니까?
“이 여자가 하필 이 시간에 나타나가지고... 왜 이 선생은 일부러 쓸데없이 시간을 보낸거야?” 야이로는 딸의 죽음의 소식에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생각은 못했을지라도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소식을 전한 사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선생을 더 오시게 하지 않아도 돼. 귀찮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상식입니다.
우리도 또한 야이로 같이 얼마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까?
몇 년 전 영국의 아이리스 지오프리라는 중년여인이 로터리에 당첨되었습니다. 영국의 로또(로터리)는 당첨금이 어마어마합니다. 자그마치 2천만 파운드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20,000,000 X 2,000 = 40,000,000,000 원. 0이 10개 붙으면 얼마입니까? 400억 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마 전 식도암으로 판정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돈으로도 자기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남을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냥 주어버렸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이 영국 여인에게 삶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신앙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없어지는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무덤에 돈을 갖고 가서 무슨 소용입니까?
어제 저녁 스폰지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몇 십억의 로또 1등 당첨금을 타고도 도벽에 중독이 되어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수중에 수십억 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둑질을 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한국인 도둑은 그 인생의 의미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죠. 그것이 없으면 로또 1등 당첨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야이로에게 인생의 가장 큰 의미는 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최우선 순위를 자꾸 걸어 넘어뜨립니다. 급한 야이로를 놔두고 12년을 앓고 있는 여인,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고 난 후에 만나도 될 일을, 그 여자는 왜 하필 지금 나타나가지고, 아니 이따가 몇 시간 후에, 내 딸 좀 살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지. 왜 이 시간에 교묘히 나타나서!
이 모든 사건을 움직인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모든 우주를 움직이십니다. ... 때로는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일이 틀어지게 하실지 모릅니다. ... 때로는, 우리의 죽음까지도 허용하십니다.
그러한 야이로의 마음 상태까지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36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마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충격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야이로는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이미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의 기준은 자기 딸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의 근거가 되는 자기 딸의 생명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끝났습니다. 그만 돌아가세요.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마가복음 5장이 이렇게 끝났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단지 병 고침을 소원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까지도 이기시는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상식도 없는 막 되먹은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것을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상식은 믿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사람의 상식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미 끝났어, 더 이상 소용없어!”라고 우리의 상식은 말하지만, 하나님은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그때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박국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마가복음 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손이 오늘 절망 가운데 처한 우리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 손은 십자가에 박히셨던 손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 손에 못이 박혔나요?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손 안에 있는 신자들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29,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리고 “달리다 굼”하시며 소녀를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일으키셨습니다.
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옷을 믿음의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여자 아이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야이로는 설마하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릴까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의 유무를 떠나 당신의 구원 의지를 보여주시려고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믿음이 소녀를 살린 조건이 아니고 믿는 자의 복을 보여주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가 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군중 가운데서 비비적거리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사정이나 시간을 비껴 주님은 주님의 독특한 방식대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설혹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 소망이나 바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일처럼 보여도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진정 복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