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8. 종이 원하시는 종들

 

마가복음 3:7~19,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13).

 

제자들을 부르신 세 가지 목적:

1. 14,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2. 14, “보내사 전도도 하며

3.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가복음에 의해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이 이제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에 이스라엘 동서남북에서 이스라엘민족과 이방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의 증거를 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의 증거를 받기 원하셨고 제자들이 그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합니다자신이 제대로 인정받으면 적은 보수나 고된 업무까지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그는 믿는 자들의 인정과 믿음을 원하셨습니다그래서 곧 12 제자를 세우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15절에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세’(權勢)를 주셨다고 합니다헬라어의 권세(exousia)는 원래 힘 혹은 능력이라는 뜻이고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를 의미합니다그리스도의 권세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하여야 할 복음의 사명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12란 숫자는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떠올리게 합니다요한계시록에는 새예루살렘성에 12개의 진주문이 있습니다. 12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숫자입니다.

 

12 제자 선택에 대한 기록이 있는 다른 복음서를 비교해 봅시다마가복음을 포함한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12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몇 개의 특징이 있습니다요한복음에는 명단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1~4,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도마와 세리 마태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가복음 3:16~19,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누가복음 6:14~16,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

 

사도행전 1:13,26,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1. 약간의 순서가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베드로의 이름이 처음에 있고가룟 유다가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들은 4명씩 3그룹으로 묶여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복음서에 순서가 다름)

두 번째 그룹빌립바돌로매도마마태

세 번째 그룹야고보다대오젤롯(열심당유다가룟 유다

 

2. 마태복음은 2명씩 짝을 이루어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가복음에도 둘씩 짝지어 전도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막 6:7).

 

마태복음 10:2~4,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①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②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③ [3] 빌립과 바돌로매,

④ 도마와 세리 마태,

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다대오 - Lebbaeus, whose surname was Thaddaeus, KJV. 다대오(마 10:3, 막 3:18)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눅 6:16, 행 1:13)로서 동명이인입니다.

⑥ [4]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3. 청년들을 부르셨습니다.

 

청년들은 아무래도 사역의 기회가 많습니다아마도 그들은 예수님 또래 혹은 그 나이 아래로 젊었을 것입니다물론 나이 들어도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그러나 특별히 사도로서 훈련을 받는 것은 평생을 쓰임 받는 일입니다젊었을 때어렸을 때 주님께 부름 받는 일은 더 영광된 일입니다.

 

4. 평범한 사람들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제자들은 부요하지도능력이 있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제자로 만들어 가셨습니다그들에게는 별명이 있습니다시몬은 베드로(바위), 야고보와 요한은 우레의 아들들(보아너게)입니다.그것으로 보아 그들이 원래 갖고 있는 인성과 자질이 그대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어떤 이는 그래서 그런 제자들을 질그릇 제자도라고 합니다.

 

5. 다양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인생경험이 다양합니다다양한 영적 경험이 있습니다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요한의 설교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베드로와 나다나엘은 빌립에 의해 도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빌립과 마태는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여러 다른 인생의 배경이 있고 신앙의 과정이 있었습니다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실 때 다른 과정이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야고보 같은 이는 가장 일찍 순교를 했고요한은 가장 오래 산 제자입니다안드레는 베드로를 인도했습니다빌립은 나다나엘을 인도했습니다나다나엘은 완벽주의자입니다도마는 의심이 많았고마태는 민족의 배반자입니다열심당 시몬은 민족주의자입니다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아무 특징이 없습니다다대오는 순진한 사람입니다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또 도적이라 했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13,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러분은 각자 교회와 세상에서 하는 일이 다르지만 모두 한 가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서로 돕고 섬기는 일을 하는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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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남 보성의 한 작은 교회의 목사 부부가 자신의 세 아이들을 굶기고 폭행을 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고 이 사건이 기독교를 비웃는 가십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고 이단적인 종교 같습니다. 그 목사 또한 정상적인 신학교육도 거치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뒤에서 사주한 여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 계파가 아무래도 김기동파(귀신론 주장)나 그 비슷한 종류 같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나라들에서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기독교 사회에서는 그런 종파들을 발생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쇠퇴기에 접어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세조차 물욕과 명예욕에 찌든, 마치 구약 아모스 시대의 북이스라엘의 상태와 같습니다. 

목사의 자녀살해 사건은 한 이단적인 교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전체 한국 교회의 한 단면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미 본질을 잃어버린 이단과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 중심의 권위주의(목사의 차별화, 계급화된 교회 직분제), 율법화시키는 제도 중심의 억압(주일성수의 오도, 십일조 및 험금의 강요), 사람을 혹하게 하는 물질중심(크고 화려한 건축과 인테리어)입니다. 특히 요즘에는 신자들의 세상적 성공을 보장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하는 교묘한 언변으로 복음을 변형시키는 일이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는 마치 휴대폰 시장처럼, 성공한 미국의 교회를 흉내내기 위한 성공주의의 신화의 재현이고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생명체가 괴물이 될 수 있다면, 한국의 교회는 인간의 추악함이라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비정상이 되었습니다. 

추악한 인간의 대표자 중의 하나가 아기 예수님을 살해하려한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살해한 일은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성의 목사 부부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잘못된 신앙관을 만들어낸 한국 교회의 근본이 인간의 영광을 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보성의 사건은 모든 한국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종의 하나입니다. 보성의 죽은 아이들이 한국 교회의 자녀들입니다.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비통함이 없이는 절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교회가 현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낮아지고 부족함 중에서 참된 부요와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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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7. 안식일의 완성

 

마가복음 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마가복음 2장에서부터 예수님은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으셨습니다.

 

1.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끼리 질문합니다.

 

마가복음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 세리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마가복음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3. 금식에 대하여 예수께 질문합니다.

 

마가복음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4. 안식일에 대하여 예수께 질문과 비난을 합니다.

 

마가복음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5. 오늘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3:1~2,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시험하려 했습니다

 

즉 그들의 관심과 목적은 예수를 죽이려는 송사이고그 방법은 엿보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이런 모든 계략을 미리 알고 계셨음에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고 당당하셨습니다오히려 그들의 계략보다 한 발 더 나가시었습니다그 일을 통해 당신의 능력과 복음 전하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만일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행하시어 그들의 미끼에 걸린다면 예수님을 고발하고 심지어 죽일 계획까지 꾸미고 있었습니다.

 

1절에 보니 손 마른 자가 회당에 있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손 마른 자에 대한 의사인 누가의 기록은 좀 더 자세합니다.

 

누가복음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2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엿보았다고 합니다그들은 회당의 앞자리에서 가운데를 향해옆으로’ 돌려 앉았으며그런 식으로 강단과 회중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그 곳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했습니다.

 

엿보다는 말은 헬라어 동사의 하나인 미완료동사(imperfect verb)입니다. “계속해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옆에서’(para) 보고 있습니다.

 

2절에 보니 그 엿보는 목적이 있습니다. ‘송사(訟事)’하려 함입니다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적으로 인민재판식으로 정죄하고 형벌을 주기 위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권리가 있을까요?

 

안식일 준수의 시작은 모세의 십계명에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31:14~17,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어떤 경우가 율법을 지키는 것인지 혹은 안 지키는 것인지 정확하게 구별하기 위해 자기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했습니다그것이 전통으로 굳어졌습니다그리고 그것이 구약성경과 같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전통과 해석에 의하면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이 위급할 때는 도울 수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사람이 병이 있으면 안식일인 경우 바리새인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죽을병인지살 병인지 부터 먼저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누가 만약 안식일에 손을 베었다면생명에 위급한 것은 아니죠그래서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1.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는 동정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3.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는데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은 몇 년 동안 손이 불편한 것 외에손을 베인 것도 아니고 심각한 고통을 당하는 것도 아니니 평상시처럼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게 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양심적으로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예수님을 시험하는 대상으로 아주 적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함정을 설치했습니다예수님이 걸리기만 기다립니다예수님은 그들의 계획을 이미 아셨습니다이 상황을 알고 있는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죽을병은 아니다내일까지 내버려 두자아니 그냥 놔두자...”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묻습니다.

 

마가복음 3:3~4,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한 가운데 일어서라” -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1.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일어서라.

2. 네 상태가 어떤지 모든 사람이 똑똑히 볼 수 있게 일어서라.

3. 바리새인들이 너를 어떻게 이용하려하는지 모두가 볼 수 있게 일어서라.

4. 네가 치료받는 장면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일어서라.

 

그가 가운데 일어섬으로 모든 장면이 한 눈에 드러납니다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이 드러납니다손 마른 사람의 질병이 드러납니다그리고 무엇보다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사악한 마음들이 드러납니다오히려 바리새인들의 계략이 악하고 그들이 마음속에 죄악을 품고 있음이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속에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예수님은 그것을 바리새인들에게 거꾸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마음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느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있느냐 아니면 악을 행하고 있느냐?”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고 있느냐 아니면 죽이려고 하느냐?”

 

무엇이 옳으냐의를 행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자신들의 계략이 탄로가 났다고 판단한 바리새인들이 만약 예수님의 질문에 어떤 대답이라도 하다면 결국 그들이 위선과 죄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그래서 저희가 잠잠하거늘.” 아무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5(전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둘러보시고의 말뜻은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빨리 주변을 둘러보셨다는 말입니다이 때 두 가지 감정이 예수님께 있었습니다근심과 분노입니다근심은 그냥 염려하는 감정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슬픔입니다현재완료형인데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처음부터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위선이 드러났음에도 그들은 모른 척아닌 척 하고 있었습니다예수님은 그 장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앙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자비 없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자기를 죽이려 계획하려는 악한 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왜 슬퍼하고 분노하셨습니까그들은 가난하고 병에 걸린 사람이 치료받는 것보다 자기들의 종교전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직시와 자신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을 알고 양심에 찔린 바리새인들은 당황했습니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3:5(후반),

...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셨습니다그러기에 아무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치료하셨다고 비난할 수도 없었습니다.약도 안주었고붕대도 안 감았습니다즉 치료를 위한 어떤 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손을 내밀라는 한 말씀에 손 마른 자의 손이 완벽하게 나았습니다.

 

마가복음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당시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그런데 그들이 예수님 죽이는 일에 하나로 뭉쳤습니다.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자기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 헤롯당과 힘을 합칩니다.

 

헤롯당은 정통 유대인들이 아닙니다이방인들도 섞여있습니다그들은 이방인(에돔)인 헤롯왕의 측근들이요 헤롯을 지지하는 자들입니다정치세력입니다지배자인 로마에 아첨하는 자들입니다유대인들과는 상극인 무리들입니다. 6장에서 헤롯은 유대인의 존경을 받은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집단이요 스스로 죄악과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인 바리새로 불렸습니다그들은 정치적으로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심지어 로마와 관계가 있다고 세리들과도 어울리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로마세력인 헤롯당과 어울리는 것은 스스로의 전통과 관습을 깨뜨리는 것입니다왜요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기로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짭니다그것도 그들이 지금까지 미워한 무리들과 말입니다세상에 속한 자들은 서로 목적이 다르고 때로 대적하면서도 천국운동과 교회에 대한 반대운동에는 합심하기도 합니다왜냐하면그들이 원래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손이 마른 자구원이 필요한 자를 말합니다그는 일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참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구원 얻은 신자들뿐입니다.

 

만일 신자가 허영심과 사리사욕에 끌려서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시는 힘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육신이 살아가는 세상일에만 매달린다면 그는 참다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참다운 일을 하여야 합니다참다운 일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고 참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나에게 평안과 기쁨이 없으면 아무리 겉모양으로는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를 할지라도 안식과 관계가 없는 거짓 예배와 봉사입니다이 안식은 오직 주님을 기뻐하는 순종의 마음에서만 나옵니다이 안식을 누리고 기쁨 가운데 사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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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 안식일의 주인

 

마가복음 2:23~28,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어떤 일을 행할 때 그 일의 가장 중심적인 목표와 방향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그 일은 제대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공 확률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그 일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면 마치 버스는 탔는데 잘못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을 짚어주시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요,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시간적 장치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날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일을 했다고 예수님께 비난을 합니다.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도 아닙니다. 구약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허용한 사항입니다.

 

신명기 23:24~25,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

 

구약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런 일이 안식일에 노동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추수하고 타작한 것으로 일부러 확대해석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덜면 코걸이가 되는 격인데 바리새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예수님의 일행이 안식일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39가지로 확대했으며 예를 들어 안식일에 바느질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바늘을 갖고 다니지 못하게 한 규정도 있을 정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율법해석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임의로 세운 규정들까지 구약 율법처럼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존중받는 기쁨을 위해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안식일 기쁨을 빼앗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규정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받은 종교적 규칙 외에 종교적이라고 인정받는 조직이나 사람들이 정한 규정까지 지켜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관성(慣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위기에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데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주변적인 규정들을 우선시하는 경우들입니다. 그 예로 교회에서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것들은, 술 담배 문제,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문제, 새벽기도 등등이 있죠. 이런 문제들은 매우 예민할 수 있습니다. 오해 없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을 일일이 짚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예수님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중요한 일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신앙의 주인이 되어야 하느냐?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목적과 방향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신실한 의지로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 구하여 헌신하는 삶을 사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있는 것이고 안식일의 주인이 당신이심을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다윗의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나면서 배가 고픈 때에 성막에 바쳤다가 일주일에 한 번 새것으로 교환되고 물려 나온 진설병을 제사장으로부터 얻어먹었습니다.

 

진설병이란 성막(성전)에 바치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레위기 24:5~9,

[5]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이 떡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그리스도의 육신을 예시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성만찬이나 신앙의 결단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받아들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떡이 물려 나올 때에 그 떡은 제사장들이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떡을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은 것입니다.

 

사무엘상 21:1~6,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어떤 유대인도, 바리새인도 다윗이 그 떡을 먹은 사실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사실에 대해 어떤 말씀도 없습니다. 우리도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그 일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6:35)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예 그리스도로 인정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 특히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준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제사장으로부터 떡을 얻어먹은 시점부터 그는 십년 이상의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떡을 먹는 것은 영광된 것이 아니라 고난에 동참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신자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외형적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술 담배 안하고, 십일조 잘하고, 새벽기도와 금식기도 잘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어떤 기준과 도덕규범을 잘 지켜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비밀스러운 교제가 있어서 남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자신만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요, 그의 고난에 동참하여 결국 그의 영광의 자리까지 초대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듭나는 순간 다윗과 함께 진설병을 같이 먹은 그의 동행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목표는 다윗이 예시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다윗 일행처럼 사울을 피해 다녀야하는 정도의 약한 세력이고 그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위해 늘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서울 서초세무서에서 부도난 공장에게 은행대출을 알선해주고 결국 밀린 세금 23억 원을 받았다는 신문 기사(20086)를 보았습니다. 결국 회사도 살리고 세무서도 업적을 쌓고 사회적으로도 칭찬받는 세무서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해야 할 일(세금 받는 일)을 제대로 알고 그 목표를 위해 납세자를 위한 일을 했더니 서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세무서죠. 받지 못할 돈을 결국 받아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을 보고 한 가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거꾸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있고 그 고난에 동참하여 사는 사람이라면 예배를 안 드려도 되고,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기에 인간의 눈으로 어떤 상황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도 정말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를 정확하게 알고 따르면, 비록 사람의 눈에 좀 어긋나 보여도 하나님께 칭찬받는 결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 달 전 저희 교회가 어느 새터민을 위한 결혼식을 주일 오후에 할 때, 오후예배를 교회 밖에서 그것도 결혼식으로 해도 되느냐는 약간의 우려가 있었습니다.

 

정식 예배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시행하는 제도나 프로그램을 무시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아마 조직적인 큰 교회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큰 교회 목사님께 오후 예배를 결혼식으로 대체해 달라는 배짱 있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물론 옛날 이스라엘의 안식일이 오늘날의 주일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연장선상에 있기에 요즘에도 주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의 문제로 말이 많은 것입니다.

 

과거 유럽의 종교개혁 시절에는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일부러 결혼식을 주일에 잡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나님이 정하신 성스러운 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그 새터민 부부가 주일에 날짜를 잡을 수밖에 없었기에, 새로 출발할 부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인 결혼식을 우리 교회가 도움을 제공하여 준비하고 예식을 예배 형식으로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부부와 대부분이 새터민인 축하객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복음이 기억이 된다면 저는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고 그 복을 담임 목사님이 다 가져가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결정과 행동이 안식일은 하나님이 정하셨지만 사람을 위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제도와 소유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을 위해 복되게 쓰인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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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

Global Sharenfull Education Fund for Children (쉐어앤풀 해외 교육 지원)

히브리서 11,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세상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저개발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복음과 함께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날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에 힘을 모읍시다, 무엇을 합시다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은 이와 비슷한 일을 하시고 있는 분들도 있고, 적어도 이 사역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거나 훈련을 받은 분들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사역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각 개인의 인생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굳이 기독교 신앙, 믿음이 없이도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을 갖지 않아도 숭고한 사랑과 희생의 모습을 얼마든지 보여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이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는 전도와 선교, 구제와 긍휼을 베푸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하지만, 선교라는 대의명분이,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여러분의 소명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소명은 여러분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당시 문명의 중심에서 혜택을 받으며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거의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또 그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 통로가 되도록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의 소명 혹은 부르심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아브라함을 떠올리곤 합니다. 구약 창세기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인 신약 히브리서를 보면 그의 부르심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떤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단지 몇 마디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완전 정복이 되고 믿음의 정석이 된 것이 아닙니다.

1. “갈 바를 알지 못하고갈지라도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가 약속받은 땅은 정확한 위치와 면적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머물렀으면 내일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방랑자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나를 믿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내가 목회를 하고 있다면,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다면, 혹은 어떤 확실히 표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런 불확실성이 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이, 직업이 여러분의 진정한 소명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소명은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때로 살아가면서 나그네처럼 이 일, 저 일 손대보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소명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현실은 들판에서 목축업을 하는 일입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갈 바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부르심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리가 현실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교나 교육사업 같은 활동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정한 부르심은 천국이며 하나님 자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시험을 받을 때에구별하십시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7절을 보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시험하셨다는 사건 자체가 두려운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해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신자인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자신의 결론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과 의도를 터득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을 차지한 하나님에 대한 구조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계획과 선한 의지까지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 결과가 이삭을 실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큰 결단을 요구하거나 견디기 힘든 시련이 있을 때에 자신의 생각과 의지까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꺾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 더 큰 영광된 부르심과 계획으로 여러분을 초대하시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만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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