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 안식일의 주인
마가복음 2:23~28,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어떤 일을 행할 때 그 일의 가장 중심적인 목표와 방향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그 일은 제대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공 확률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그 일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면 마치 버스는 탔는데 잘못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을 짚어주시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요,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시간적 장치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날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일을 했다고 예수님께 비난을 합니다.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도 아닙니다. 구약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허용한 사항입니다.
신명기 23:24~25,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
구약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런 일이 안식일에 노동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추수하고 타작한 것으로 일부러 확대해석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덜면 코걸이가 되는 격인데 바리새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예수님의 일행이 안식일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39가지로 확대했으며 예를 들어 안식일에 바느질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바늘을 갖고 다니지 못하게 한 규정도 있을 정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율법해석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임의로 세운 규정들까지 구약 율법처럼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존중받는 기쁨을 위해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안식일 기쁨을 빼앗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규정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받은 종교적 규칙 외에 종교적이라고 인정받는 조직이나 사람들이 정한 규정까지 지켜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관성(慣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위기에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데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주변적인 규정들을 우선시하는 경우들입니다. 그 예로 교회에서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것들은, 술 담배 문제,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문제, 새벽기도 등등이 있죠. 이런 문제들은 매우 예민할 수 있습니다. 오해 없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을 일일이 짚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예수님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중요한 일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신앙의 주인이 되어야 하느냐?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목적과 방향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신실한 의지로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 구하여 헌신하는 삶을 사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있는 것이고 안식일의 주인이 당신이심을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다윗의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나면서 배가 고픈 때에 성막에 바쳤다가 일주일에 한 번 새것으로 교환되고 물려 나온 진설병을 제사장으로부터 얻어먹었습니다.
진설병이란 성막(성전)에 바치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레위기 24:5~9,
[5]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이 떡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그리스도의 육신을 예시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성만찬이나 신앙의 결단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받아들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떡이 물려 나올 때에 그 떡은 제사장들이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떡을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은 것입니다.
사무엘상 21:1~6,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어떤 유대인도, 바리새인도 다윗이 그 떡을 먹은 사실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사실에 대해 어떤 말씀도 없습니다. 우리도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그 일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요 6:35)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예 그리스도로 인정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 특히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준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제사장으로부터 떡을 얻어먹은 시점부터 그는 십년 이상의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떡을 먹는 것은 영광된 것이 아니라 고난에 동참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신자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외형적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술 담배 안하고, 십일조 잘하고, 새벽기도와 금식기도 잘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어떤 기준과 도덕규범을 잘 지켜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비밀스러운 교제가 있어서 남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자신만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요, 그의 고난에 동참하여 결국 그의 영광의 자리까지 초대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듭나는 순간 다윗과 함께 진설병을 같이 먹은 ‘그의 동행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목표는 다윗이 예시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다윗 일행처럼 사울을 피해 다녀야하는 정도의 약한 세력이고 그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위해 늘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서울 서초세무서에서 부도난 공장에게 은행대출을 알선해주고 결국 밀린 세금 23억 원을 받았다는 신문 기사(2008년 6월)를 보았습니다. 결국 회사도 살리고 세무서도 업적을 쌓고 사회적으로도 칭찬받는 세무서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해야 할 일(세금 받는 일)을 제대로 알고 그 목표를 위해 납세자를 위한 일을 했더니 서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세무서죠. 받지 못할 돈을 결국 받아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을 보고 한 가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거꾸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있고 그 고난에 동참하여 사는 사람이라면 예배를 안 드려도 되고,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기에 인간의 눈으로 어떤 상황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도 정말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를 정확하게 알고 따르면, 비록 사람의 눈에 좀 어긋나 보여도 하나님께 칭찬받는 결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 달 전 저희 교회가 어느 새터민을 위한 결혼식을 주일 오후에 할 때, 오후예배를 교회 밖에서 그것도 결혼식으로 해도 되느냐는 약간의 우려가 있었습니다.
정식 예배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시행하는 제도나 프로그램을 무시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아마 조직적인 큰 교회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큰 교회 목사님께 오후 예배를 결혼식으로 대체해 달라는 배짱 있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물론 옛날 이스라엘의 안식일이 오늘날의 주일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연장선상에 있기에 요즘에도 주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의 문제로 말이 많은 것입니다.
과거 유럽의 종교개혁 시절에는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일부러 결혼식을 주일에 잡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나님이 정하신 성스러운 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그 새터민 부부가 주일에 날짜를 잡을 수밖에 없었기에, 새로 출발할 부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인 결혼식을 우리 교회가 도움을 제공하여 준비하고 예식을 예배 형식으로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부부와 대부분이 새터민인 축하객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복음이 기억이 된다면 저는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고 그 복을 담임 목사님이 다 가져가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결정과 행동이 안식일은 하나님이 정하셨지만 사람을 위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제도와 소유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을 위해 복되게 쓰인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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