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가복음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금식의 문제로 부딪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이 날은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날이었던 모양입니다.

 

구약 율법 혹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한 번 금식하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그 날은 속죄일이라고 합니다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열심이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별도로 금식일을 만들었습니다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일을 정하고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자신들끼리 금식을 했습니다그 후로 신앙에 열심 있는 사람들은 그런 전통을 따랐습니다.그들은 금식을 자신들의 경건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경건하고 의로운지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일부러 누더기를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일부러 뺨을 홀쭉하게 들어가게 하고 심지어 창백하게 보이도록 분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하여 하신 말씀 중에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레는 일주일입니다평생을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고행을 하나님께 더 나가기 위한 경건의 훈련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바꾸었습니다그러한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 “왜 당신은 이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

 

이런 종류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왜 당신은 이런 규칙을 따르지 않느냐?” “왜 당신들 그룹은 모든 사람이 하는 이런 기준에 맞춰 살지 않느냐?”

 

이에 대해 예수님은본문에서 보듯이그들에게 길지 않은 내용으로 몇 가지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답해주셨습니다그리고 그 비유들의 결론으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1. 그 첫 번째가 결혼식입니다.

 

너희들은 이런 일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너희들은 지금 장례식에서나 할 행동을 하고 있다그러나 지금은 결혼식이다신랑이 이 세상에 와 있기 때문이다너희들조차 결혼식에는 그날이 금식하는 날일지라도 금식하지 않지 않느냐신랑인 내가 여기 있는 한 신랑의 친구들인 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즐기고 웃고 기뻐할 것이다그러나 신랑이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그 때 금식하는 것은 옳다.”

이 말씀에는 예언적인 부분이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그 때는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슬퍼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그러나 이 말씀을 적용할 때 우리가 고난주간에 금식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오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할 필요는 있지만 고난주간을 보내는 방법으로서 금식이 필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고난주간에 금식을 할 수도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어떤 규칙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금식하면 유익한 신앙의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을 규칙으로 정해 놓고 금식을 하지 않는 누군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적어떤 일로 금식하는 중에 이와 똑같은 말씀을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듣고 그 때 상당히 불쾌한 느낌일명 시험 든다고 말하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신앙경험이 부족했던 때죠그러나 지금은 고난주간에도 잘 먹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슬픈 경험이나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그 때에도 우리는 그런 문제를 극복하고 도우심을 얻기 위해 금식할 수도 있겠지요그러나 그것은 법칙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는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언제나 우리는 잔치를 하고 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가령 어린아이가 자기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는데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생각하고 슬퍼하는 것과 같습니다부모의 입장에서는 만약 그렇다면아주 당황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게다가 아이가 뭔가 간절히 필요할 때그것이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굳이 금식하면서 부모를 조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하나님께 대한 관점도 그렇습니다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면 그 하나님께 떼를 쓰는 한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40일 금식기도가 무슨 훈장은 아닙니다그 행위를 자랑스러워하고 남들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리면 금식한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금식기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저도 며칠씩의 금식기도를 몇 번 해봤고 누군가에게도 그럴 필요가 있는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금식기도를 어떤 기도응답을 경험하는 필수적인 방법으로 아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금식을 반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초대교회에서 금식한 기록으로 사도행전 13장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세움을 받을 때 교회에서 금식했습니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4장에서는 교회 장로들을 세울 때 금식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예수님은 이어서 두 가지 비유를 더 들어 설명하십니다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입니다이 두 가지는 낡은 것으로 새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데서 같은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2. 생베의 비유입니다.

 

생베 비유를 쉽게 풀이하면 이런 말입니다. “생베(새 천 조각)을 낡은 천에 덧대어 깁지 않는다그렇게 하면 나머지 낡은 천 조각이 더 해어질 것이다.” 같이 붙어있는 천들이 잡아당기는 힘을 견디는 능력이 다르면 오히려 전체 천이 더 빨리 상합니다.

 

3. 이와 마찬가지로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비유도 새것과 옛 것이 서로 견딜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 발효하는 새 포도주를 낡아서 늘어나지 못하는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낡은 부대가 터진다고 합니다가죽부대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물통입니다탄력이 있는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발효가 될 때 늘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낡은 부대는 탄력성을 잃어버려서 늘어나지 못하고 결국 터지고 맙니다.

 

집사람이 오래전에 성찬식에 필요한 포도주를 준비하기 위해 포도를 델몬트 오렌지병 속에 담갔던 적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참이 지났는데 부엌에서 하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그 두꺼운 유리병이 깨지고 포도주가 바닥에 다 쏟아졌습니다포도가 발효되면서 공기의 부피가 늘어나는 것을 병이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새 천조각과 새 포도주는 성령의 기쁨이고 능력입니다우리가 갖고 있는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은 예수님이고 다른 말로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이나 침묵수행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을 해야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분위기가 무겁고 고난스러워야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의식이 원인입니다이것이 모든 인간 속에 있는 바리새적인 기질입니다.

 

오래 전부터 영성운동이 한국 교회에 유행하고 있습니다영성을 찾는 것은 좋습니다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금식침묵명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즐거워하는 기쁨 속에 있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시끄러운 것보다 침묵이 더 좋습니다조용하더라도 그 속에 기쁨이 없는 침묵은 장례식 침묵이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사람들이 교회를 거부하고 신앙을 갖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바로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우리 안에 예수님의 실재가 없는데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왜 방 안에 누워 TV를 봅니까왜 골프를 치러 나갑니까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우리는 그렇다면 그 즐거움을 교회에서 만납니까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그 기쁨이 있습니까우리는 기쁨의 근원인 복음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인간들의 율법이나 형식주의에 의해 원형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었습니다사람들의 행위가 있어야 기독교가 더 고상해지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장식이 첨가되었을 때 기독교가 더 멋있어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변질되었습니다.

 

이사야 58:6~7,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어느 날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2~1226)가 제자들과 금식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프란시스에게 이번에는 우리의 참된 경건을 위해 죽 그릇을 상에 가져다 놓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이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모두가 금식을 시작했습니다눈앞에 먹을 것이 있기에 기도하며 금식하기란 더욱 어려웠습니다그러던 중 견디다 못한 한 제자가 몰래 죽을 약간 퍼서 먹었습니다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일제히 그 제자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 프란시스는 갑자기 죽 그릇을 들고 죽을 들이켜 버렸습니다어리둥절한 제자들의 모습에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함이 경건을 위한 금식함보다 낫다서로 사랑하라서로 사랑하라.” 공동체 안에서 나 한 사람의 경건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신앙에 필요한 규칙과 경건이라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랑이 사라지고 분쟁과 정죄가 생긴다면 그 규칙과 경건보다 우리가 정말로 지켜야하는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개인의 높은 경건보다는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서로 사랑함을 더 높이실 것입니다내 안에 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경험이 여러분의 새 포도주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그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 사람들이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13~17,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9:7~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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