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 중풍병자와 마비된 한국 교회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문까지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였습니다. 그 집안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2: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어떤 사람들은 신기한 이벤트를 원하고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길 원하고 병 고침을 받기를 원했겠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진실한 고통과 문제는 돈이 아니고 가족, 직장이나 사업이 아닙니다. 생명이요, 그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까?
제가 오늘의 본문에 대한 설교를 과거에 들었던 기억에 의하면,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협력해서 도왔으니 ‘전도하자’로 결론을 맺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핵심은 빠뜨리고 단지 ‘전도’라는 주제를 위해 본문의 상황만을 이용한 해석입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까지 데리고 온 사람들은 환자의 침상을 들고 온 네 사람을 포함해서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목을 끈 사람들은 네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그 중풍병자가 스스로는 올 수 없는 완전한 무능력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 병자에게, 그리고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 와야 한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그들의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선언을 통해 인간의 질병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죄의 문제와 구원을 연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병자를 죄 사함이라는 선언으로 구원하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여전히 몰라보는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영적인 병자들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내용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의 만남을 통해 죄의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절망적일만큼 아느냐?그리고 그 구원자는 자신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죄인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근원적인 치유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던 서기관들은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참람되다 즉 불경스럽다’고 서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까지 보시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9~11,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9절에서 “더 쉽다”는 헬라어 단어(ευκοπωτερον)에는 “더 좋다”(better)는 뜻이 또 있습니다. 즉 9절 말씀은 “말로 하기에 어떤 표현이 더 편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절망적인 사람에게 어떤 말로 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더 좋겠느냐”는 뜻입니다.
사람의 병이 죄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믿는 유대인들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절망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죄를 늘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의 근원은 물질이나 질병이 아니고 죄에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쳐 주시려고 죄 사하는 선언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제대로 알고 듣는 자는 모든 인생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고통들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 시민이 되는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 후에도 죽습니다. 요한복음의 나사로는 예수님의 이적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언젠가 다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후의 결과에 대해, 어떤 사람의 구원에 대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단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았다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비가 된 자들은 그 환자가 아니라 그 집 안에 앉아있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앉아 있었고 예수님이 어떤 잘못을 하지 않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관심도 없고 단지 적대적인 의심과 불신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몇 가지 질병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문둥병(한센병, 나병)은 사람의 신체 전체에 한센균이 감염되어 모든 지체가 하나씩 죽어가는 병입니다. 신경조직, 뼈,눈까지 감염합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감각기관들이 기능을 상실합니다. 이런 원인과 증상 때문에 성경에서는 문둥병을 죄로 인한 일반적인 인간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중풍은 신체에 감염된 세균이 원인이 아니고 뇌의 문제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경색) 터져서(출혈) 뇌신경이 죽으면 죽은 뇌신경에 연결된 신체부위들이 아무리 건강했어도 당연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머리가 죽으면 지체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중풍을 종교 지도자들의 죄와 타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가버나움 마을의 한 중풍병자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을 대표한 경우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그 지역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와 있었거나 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대한 감시를 목적으로 파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과거 80년대 후반까지 후진을 모르는 전진 성장만 해 왔습니다. ‘교회 성장’이 실제 목표인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교회 성장 이론을 꺼내오기는 하지만 정말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장한 교회의 결과를 보면 압니다. 결국 목사든 신자들이든 인간의 영광이 목표입니다.
한국 교회의 머리들이, 지도자들의 영적인 혈관이 욕심과 세상 정욕에 막혀서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 정신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몸이, 교회가 마비되어갑니다.
더 크고 성공한 목사가 되기 위해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조건, 학력, 시스템, 건물(건축) 등으로 교회를 채워 넣고 있습니다. 설교가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아니라 교양미를 내세우고 위로의 내용만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영적 마비 현상을 개탄하는 제 은사(합신)이신 어느 목사님의 글을 잠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마비되어 가고 있다”
- 김명혁 (강변교회 원로목사)
첫째, 한국 교회는 지금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에 마비되어 있다. 한국 교회의 예배는 어느덧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음악 및 율동적인 소양을 지닌 젊은이들이다. 저들은 음악 및 율동을 하면서 감동적인 언어와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감동적인 음악과 율동 또는 통성 기도가 반복되다가 예배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음악과 율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중세교회는 물론 일부 개혁교회들은 감정을 흥분시키는 음악과 악기를 자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다.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유명한 목회자의 유명 카리스마에 마비되어 있다. 목회자의 진실한 삶보다는 목회자가 각종 두드러진 유명 카리스마를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게 되었다. 그것이 설교의 카리스마이든지 방언의 카리스마이든지 치유의 카리스마이든지 뒤집어짐의 카리스마이든지 코미디의 카리스마이든지 정치력의 카리스마이든지 경제력의 카리스마이든지 반공의 카리스마이든지 상관이 없다. 수천수만 명의 청중들을 사로잡기만 하면 된다. 카리스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모여든다.
“지금 일부 한국 교회는 바른 삶보다는 흥분과 기현상을 나타내 보이고 그것들을 추구하게 만들므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진실한 삶보다는 약간 무당적이고 약간 귀신적이고 약간 이단적인 요소들을 나타내 보여야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문선명 집단이나 김기동 집단에만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아니다. 유명 카리스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약간 무당적이고 약간 귀신적이고 약간 이단적일수록 사람들은 몰려온다. 지금 한국 교회는 유명한 목회자의 유명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있다. 최근에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설교 세미나와 능력전도 세미나에 몰려드는 것은 유명한 목회자, 성공한 목회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목회자가 되려는 야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셋째, 한국 교회는 지금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마비되어 있다. 목회자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죄와 허물을 지적하는 책망보다는 모든 것을 눈감아주는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이미 오래 전에 로버트 슐러가 했다. 로버트 슐러는 죄를 지적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결국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 조언에 따라 죄에 대한 설교는 가능하면 하지 않게 되었다. 위로와 축복만 강조하게 되었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는 이런 말까지 했다. “교회의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중진들이 주일을 범하고 주일에 다른 곳에 가서 딴 짓을 해도 모른 척하여야 합니다.”
결국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회개와 헌신의 기본 신앙을 지니지 못해도 출석만 잘하고 헌금만 잘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치켜 세워주게 되었다. 결국 목회자는 속이고 신자는 스스로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운’ 목회라고 피차 착각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마비되면 전신이 마비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참된 영성을 회복해야 마비된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납니다.
종교 제도와 조직과 건물과 부흥과 승진과 개인의 성공지향의 인생관이 우리의 영적 혈관을 막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치유자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을 먼저 깨닫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0) | 2012.02.12 |
---|---|
마가복음 14. 죄인들을 부르심 (0) | 2012.02.09 |
마가복음 12. 예수께 나아가자 (0) | 2012.02.02 |
마가복음 11. 종의 만지심 (0) | 2012.01.29 |
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0) | 2012.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