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마가복음 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NIV

[14]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15]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KJV

[14] Now after that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came into Galilee,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15]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ye, and believe the gospel."

 

 

예수님이 광야 시험 후, 세례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듣고 곧 바로 갈릴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 거의 일 년 가까이 유대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1~3)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수개월간의 유대 지방의 사역을 생략하고 곧바로 갈릴리 지방에서의 사역을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 요한의 체포 사건과 곧바로 연결시키기 위해 유대 지방의 사역은 생략하고 갈릴리 지방의 사역으로 직진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나라는 셋으로 분할되었고 세 명의 총독이 다스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의 유대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가 다스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며,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군대를 모으고, 로마제국을 쳐부수며, 모든 나라를 그 발아래 굴복시킬 것이라고 구약을 해석했고 그렇게 믿으면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로마제국 같이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폭동을 유발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스는 유대인에게 메시야 비전을 심어주는 세례 요한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두려워 요한을 옥에 가두고 있다가, 자기와 결혼한 헤로디아의 딸(살로메, 헤롯 빌립과 헤로디아의 딸, 헤롯 빌립은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와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는 죽은 동생 빌립의 아내와 결혼함,  6:17~18)이 춤을 춘 일에 대한 상으로 할 수 없이 요한을 죽이게 됩니다. 이 일이 마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의 전기를 쓰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이 무슨 이유로 어디에서 어떻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의 순교에 관해서 마가는 6(14~29, 요한의 죽음에 대한 과거사 기록)에 이르러 비로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제 요한의 시대가 지나가고, 예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붙잡힌 시기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것도 요한이 체포된 갈릴리 지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시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역사의 뒤로 사라져 가고, 광야에서 돌아온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시는 이 역사적 교차점에는 한 가지 공통된 단어가 운명처럼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paradidomi”입니다. 마가는 요한이 잡혔다(arrested)고 묘사할 때 헬라어 동사 파라디도미(paradidomi)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으로 유대인의 관원들에게 넘겨졌다(handed over)고 할 때도( 9:31; 10:33; 14:21,41) 똑같은 헬라어 동사 파라디도미(paradidomi)를 사용합니다. , 이 헬라어 동사는 요한이 붙잡혀 처형당했듯이 예수님도 결국 붙잡혀 처형당할 운명임을 암시해 줍니다.

 

파라디도미(paradidomi, 넘겨주다)는 본래 헬레니즘 세계에서 범죄자들에게 사용되는 법률용어인데,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의 기록들은 이 어휘를 주로 예수의 고난과 재판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paradidomi는 또한 우리 말 넘기운다는 단어로 예수님이 잡혀 죽게 되는 장면에도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마가복음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또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다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자러라

 

바울의 편지들에서도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버리다라는 뜻으로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에베소서 5:2,25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내어주다라는 뜻으로도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므로 마가는 세례 요한의 체포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예수님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의 관점은 요한의 체포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최종 목표인 십자가에 일치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증언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 아셨습니다. 요한처럼 붙잡혀 처형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붙잡혀 처형을 눈앞에 둔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첫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시작부터 죽음을 예약해 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길은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십자가입니까? 그것으로 제자냐 아니냐가 구분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첫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전하신 복음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있었을까요?

 

1. 복음적입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고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목사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는 모든 믿는 자들의 사명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도들도 자신들의 신앙의 이유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복음전파는 성도들 모두의 몫입니다.

 

사도행전 11:19~20,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복음이란 사람을 위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 중심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목적을 두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 중심주의(神本主義)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입니다.

 

3.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말씀입니다. 구약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예언했고 그것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그러므로 성경적입니다. 거꾸로 성경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4. “때가 찼고

 

구약에 예언된 구원의 때를 시작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여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권세가 적용되고 말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이 지상에서 보이는 세상 권세가 아닌 영적인 삶입니다.

 

궁극적으로 종말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이루어 질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온전한 그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중간 단계의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 전파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는 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으라. 그리고 죄에서 돌이켜라. 너희를 구원하는 복된 소식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죄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께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교회에 나오고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만약 다른 목적이 있어서 교회에 온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진리는 아주 심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기 있는 설교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그리스도인 자신이나 그 자녀의 출세와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좀 더 세련된 설교가들은 기독교 신앙이 생존의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게 해 줄 것으로 설교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적극적인 혹은 긍정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으로 규정하고, 기독교 신앙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업 정신을 낳게 한다고 설교합니다. 이 모든 설교들은 듣는 이들이 화려한 삶을 예약해 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영국에서 ‘Gospel Illusion, 혹은 Magic’이라는 마술쇼로 설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인터넷(유투브) 검색하면 동영상도 나옵니다. 주일 강단에서 마술을 하며 사람들의 집중과 흥미를 끌어당깁니다. 그런 이벤트를 하는 설교자들은 교인들이 졸면서 예배드리는 일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용이어야 합니다. 그런 이벤트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좋은 방법은 될 수 있지만 이미 믿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교회 안에서 쇼를 하듯 하는 것은 설교가 제 자리를 잃어버린 모양을 보여줍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에서 크게 벗어난 설교들입니다. 복음에 입각한 설교는 화려한 삶을 예약하는 설교가 아니라 죽음을 예약하는 설교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이 역사해야지 왜 이벤트와 재미가 역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고난의 길을 가셨고, 그 사역을 고난을 암시하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과 우리가 믿는 복음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내용도 아니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도 아닙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우리는 또한 그 복음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당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행적을 들려주면서 그들의 현실과 복음의 삶을 연결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가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다면 고난을 당신의 목표로 시작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그 길을 걸어간 것처럼 고난을 능히 받되 또한 이겨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2: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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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5. 광야에서

 


마가복음
 
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광야시험의 특징:

 

40일의 시험이었으나 그 후로도 계속된(imperfect) 시험입니다. 40일은 실제 역사이며 또한 성도와 교회에 대한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마가는 시험에서의 승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상 죄를 지신 고난 받으시는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는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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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가셨다는 것과,  그 모든 일을 성령께서 몰아내시는 방법으로 보내어졌고,  받을 필요가 없는 시험을 받으셨어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오늘은 특히 13절 부분에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는 부분을 통해 마가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 주고자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마태, 누가)에 비해 간략하게 2개의 절로 기록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직후 그분의 가실 곳을 번쩍이는 예루살렘성이 아니고 거친 들판,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는 광야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기록함으로써 마가의 복음서를 읽었던 당시 고난 받던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특히 예수님을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유혹과 시험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합니다.

 

전에는 죄로 인해 죄로 여기지도 못했던 것들을 이제 죄와 유혹의 것으로 알게 됩니다. 전에는 세상의 도덕적 기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았지만, 이제 너는 내 아들이라, 내 자녀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과 자신들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것들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성경이 죄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려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리고 있을 때에(벧전 5:8)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이미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겨 나갑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유혹을 이겨내기 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은 더 심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영광스러운 산꼭대기 보다 산 아래 계곡에서 믿음을 더 잘 배웁니다. 누구나 있고 싶고 일하고 싶은 예루살렘 왕궁 안에서 보다 광야에서 주님의 제자가 탄생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 받으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시험 받는 문제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1:13~15,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수님은 삼위일체로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맞지가 않는 건가요? 우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시험받는 것은 현실이잖습니까?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두 가지 인격(흔히 생각하는 도덕성이 아니라 자아 개체입니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시험 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가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여 구원하는 방법 외에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또한 두 번째 의문인, ‘우리가 시험 받는다는 문제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야고보서의 1 13절의 시험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직접적으로 주는 시험입니다. 그것이 처음에 고난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무릎 꿇고 신앙을 저버릴 정도에서 갈등을 하면 그것은 시험 즉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소명을 저버리게 할 정도의 시험이라면 마귀가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험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유익과 내세에의 소망을 더 든든히 갖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마귀가 주는 시험마저도 그 주권 아래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욥의 고난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마가복음 1 1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장소가 광야라고 했습니다. 들짐승과 함께 40일을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광야가 생물이 살기에 거친 장소이기는 해도 자연적으로 그런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식물, 곤충들과 그밖에 야생짐승들이 광야에 꽤 있었습니다. 위험한 대형 포식동물인 자칼, 하이에나, 심지어 사자도 있었습니다. 요즘 중동지방에는 사자가 멸종되었지만 구약 성경책의 약 3분의 2에 사자가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흔한 짐승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단지 굶어서 배고픈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험한 야생동물들의 위험도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시험을 받는다는 단어를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처럼 시험을 받았다가 아니라, “시험을 받는 중이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3,

peirazomenos (pres.[현재형] pass. part. peirazo, to tempt)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And he was there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tempted of Satan; and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ministered unto him. (KJV)

 

마태복음 4:1,

peirasthenai (aor.[부정시제] inf. pass.)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Then was Jesus led up of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of the devil. (KJV)

* aorist(부정시제)란 부정(不定) 시제에, 즉 어떤 시점에 (1)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나, (2) 이미 끝난 일이나, (3)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일을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4:2,

peirazomenos (마가와 같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Being forty days tempted of the devil. And in those days he did eat nothing: and when they were ended, he afterward hungered. (KJV)

 

* 요한복음에는 광야시험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의 현재형 동사 표현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험은, 고난은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그래서 3가지 시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만 말하면 광야의 40일이 3가지 시험과 배고픈 일 외에는 큰 문제가 없는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험이 3가지 이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귀의 시험은 종류가 세 가지였지만 그것이 단숨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거의 40일간 계속된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마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은 그 40일간의 3가지 시험의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은 광야40 이후에도 예수님의 남은 3년 반의 기간 동안 계속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40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0은 특히 광야와 관련하여 특별합니다. 모세의 광야 40,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방랑.......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이 그 40년으로 끝났던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고난도 단순히 광야 40일로 끝나지 않았다고 마가는 우리에게 두 절의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0은 이와 같이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특별한 숫자입니다. 모든 주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인생을 광야 40년의 세월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광야입니다.

 

마가는 특이하게도 마태복음과 다르게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결과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천사들이 수종든 것”( 4:11,  1:13)으로 보아 예수님이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겨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처럼,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라는 유명한 말씀도 없습니다. 11절에 마귀가 물러갔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은 그런 이야기도 없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는 기록을 굳이 나타내지 않음으로 마가복음을 읽는 성도들이 고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언제 어디에서 끝납니까?

골고다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최후의 고난이면서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의 광야는 어떻습니까?

 

이제 왜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고난 받으셔야 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라고 하면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그 모든 양떼 대신 당신 혼자 죗값을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이사야 53:6,11,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선한 목자로 비유되시어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0:11,14~15,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불순종으로 범죄하여 죄를 세상에 들여놓았으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기에 고난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으나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 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의 어떠한 환난이나 고난에도 우리가 망하지 않도록 지키시고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받으셨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선언하신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H.C. Trumbull, 1830~1903)이 교도소의 죄수들을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감자들을 찾아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른 점은 단지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어떤 수감자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에게 하신 말씀 중에 당신의 인생을 다르게 만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때문이라는 겁니까? 정말 그것이 당신을 우리 같은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 유일한 것인가요?” 그 죄수는 목사님으로부터 더 자세히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종신형으로 있습니다. 이제는 이곳에서 만족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죄수가 되어 나의 형제가 되어주신 분이 이곳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광야에서 수많은 고난과 시험을 받습니다. 이 세상이 감옥입니다. 모든 사람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이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의 사망 권세까지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나의 형제가 되어서 나의 모든 고난과 죄짐을 지신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주님이 이 광야에 계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 광야를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고난의 광야를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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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놀자. 목사님들아.

어떻게 당신들이 여태 그러고 살 수 있나?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칭 간판이나마 두렵지도 아니하냐?
 
교인들이 당신들 봉이니? 호구니?

어떻게 고급 자동차가 싫증이나서 부흥회 열고 BMW로 바꿔 달라고 헌금을 요구할 수 있니? 

어떻게 부교역자, 전도사들은 아이들 학비도 없어 쩔쩔매는데 당신들은 자동차 바꿔 달라고 어리광 부릴 수 있니?

당신들이야말로 그렇게 설교에서 까대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누구겠니?

바리새인이란 2천년전 율법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종교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권력으로 삼는 자들이 아니냐.

당신들이 그 독사의 자식들과 나은 점이 무엇이 있느냐?

이제 그만, 철 없는 장난 그만하고, 모든 것 다 던지고 무릎꿇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의 불이 곧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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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전달자

하나님은 설교자를 자근자근 다져 놓으신다. 그 다져진 상처 중의 하나로 청중의 상처와 만나게 하신다. 그것이 설교자와 청중이 하나되는 유일한 통로다. 그 설교자가 진정한 말씀의 전달자이다.

설교자의 외침이 왜 허공에만 울리는가? 이 상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南山玄豹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 부스스 얼룩덜룩하던 털이 내면이 충실해지면서 어느 순간 빛나는 무늬로 바뀐다.

 


마가복음
 
04. 종의 시험

 

마가복음 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광야고난 이야기 중 세 가지 시험과 그것을 이기신 내용까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광야 기록이 가장 짧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가가 게을러서였을까요? 아니면 어떤 다른 뜻이 있어서였을까요? 아마도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마가복음이 다른 두 복음서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자세한 내용에 마음이 빼앗겨 마가복음이 가장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에 집중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 되심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분의 종인 우리들이 유혹과 시험도 또한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종이심을 보이려고 먼저 세례 요한이 그것을 예비하였고 그분을 나타내는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도 비둘기처럼 내려오셔서 그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가장 분명하게 그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로 가셨다는 말씀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구약의 대표자로서 세례 요한, 하늘의 성령님과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말씀하면서 또한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또한 고난 당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도 또한 광야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가장 영적으로 영광 받으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혹은 즉시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바로 그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중심이 아닙니다. ‘사건이 중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으시자마자라는 뜻입니다. 가장 좋고 은혜롭고 기쁜 상태가 나타나자마자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세례의 영광과 광야의 시험 사이에 아무 간격이나 쉼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9장에는 산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화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마가복음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라고 하시고 이후 얼마 안 있어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세례 직후 곧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의 하나님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있자마자 사탄의 사악한 미소가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 두 발짝 뒤로 가는 것 같아.” “마치 산을 올라가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복을 경험하면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곧 이어지는 그 다음의 시련에 부딪치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은혜와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갈멜산의 좋았던 교제와 하늘 영광의 감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거친 광야와 십자가 고난 같은 경험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하면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떤 보상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혹을 이겨낸 승리의 간증들이 본인과 다른 신자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이 우리의 안전과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요셉조차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으나 그 대가는 감옥행이었습니다.

 

성경은,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고난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겨내는 영적 승리보다 때로 실패와 고난을 통과한 은혜가 신자에게 영적 유익과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게 보이는 장면인 세례와 갈멜산 정상의 사건 이후에 고난의 길을 직접 가시거나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은 성령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가복음 1 12절에서 우리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마가복음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εκβαλλει)

 

몰아내다라는 말로 사용된 단어는 ekballo[to eject, bring forth, cast (forth, out), drive (out), expel, leave, pluck (pull, take, thrust) out, put forth (out), send away (forth, out)]입니다.

 

같은 장면을 묘사한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이끌림을 당했다는 수동태인데, 마가복음은 성령께서 행동하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누가복음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두 가지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지요? 마태와 누가는 성령께서 가이드를 하셨다는 말씀이고 마가는 강제적으로 추방했다는 말입니다.

 

ekballo라는 단어가 다른 장면에서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마가복음 1: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마태복음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같은 단어가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 성전을 청결히 하실 때에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을 때처럼, 그리고 성전의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으실 때처럼, 성령은 예수님을 강제적으로(강하게) 광야로 내보냈습니다.예수님에게 대하여 성령님이 주장하셨고 예수님은 그것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사람으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으로서 시험을 받으셔야 했고 그 시험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긴 첫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신 첫 번째 종이 되셨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신자인 우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 6:6)으로 선택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결국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도망치도록 허락받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맞닥뜨리되 이미 승리한 싸움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광야에서 승리하셨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시험과 유혹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과 그리스도인의 삶과의 관계는 우리가 늘 경험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쓰러지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경험으로 더 복된 영광에 참여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 형제들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4~8,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이긴 자만이 원수를 가까이 초대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모진 세월의 고난을 주셨지만 결국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그가 총리가 되어 세상이 말하는 성공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F.B. 마이어라는 미국의 유명한 성경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책을 찾던 중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은혜는 마치 높은 책장에서 책을 찾듯이 위를 향할수록 은혜가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책장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내가 몸을 굽힐수록 더 큰 은혜가 있었다.”

 

4세기의 가이사랴 지방의 주교였던 바실(St. Basilius, 330~379, Basil of Caesarea)이라는 분은 두통으로 늘 고생을 하던 중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두통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두통이 없어지자 마음속에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그 두통을 다시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는 변화산 정상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계곡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지금 고난의 계곡에 갇혀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고난의 계곡 가운데서 무릎 꿇어 본 분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고난을 은혜로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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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3. 종의 세례

 

마가복음 1:9~11,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3~17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행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장면이 있는데 마가복음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13~17,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요한의 거절은 요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한 하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사람(죄인)의 세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1. 하나님의 종이 죄인과 동일시되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에게서는 이 세상이 좋아할 만한 아름다움도 흠모할만한 것도 영광스러운 것도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키도 보통 키였을 것입니다. 이단들이 조작하기도 하는 후광도 없으십니다. 죄 있는 육체의 모습으로 오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심지어 요한복음 1장에서 경건한 유대인의 전형이랄 수 있는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말이었을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나사렛 출신이라 하면, 한국에서도 15세기 조선시대 때에 서북지역 출신들이 차별대우 받았던 것처럼 중앙에서 소외된 변방 사람들을 말합니다.

 

게다가 그냥 나사렛이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마가복음 1:9에서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세부지칭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렇게 죄인과 같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온전히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이 그의 설교와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죄인과 똑같이 세례 받음으로 순종하심으로써 자신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 구절의 받을 세례란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례를 통해 보여주시는 십자가로 죽음을 당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은 가장 큰 희생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에스겔 1: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포로 된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요단강가에 나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같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2. 주님의 사역을 위해 드려진다는 헌신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4:16)고 한 것은 자신이 할 일에 목숨을 내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루터도 종교재판의 현장에서 내가 여기 섰노라. 나는 아무것도 다른 것을 할 수 없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정신이 세례의 정신입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우리 자신을 드렸습니까?

 

10절에 보면 즉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지금 우리의 사역은 어떻습니까?

 

3. 하나님 아버지의 인준(認准)이 있었습니.

 

마가복음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선언은 시편 2:7과 이사야 42:1의 두 말씀이 인용된 말씀입니다.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아들 예수님의 순종에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며 하늘의 영광을 주십니다.

 

사무엘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겠고...

(영화 불의 전차의 주인공 에릭 리들에게 시합 전에 전달되어진 쪽지의 내용).

 

하나님은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들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세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술 배경은 박해시대의 로마교회입니다. 그들은 마가복음을 읽고 극심한 고난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 아들 예수님이 삼위일체입니다. 창세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의 형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구약에서 우리가 창조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세례 받으실 때 우리가 구원한다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 비둘기 같은 성령 + 강가의 예수님

 

예수님도 성령의 오심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이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셨다기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타나셔야 온전해지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죄인과 동일하게 되셨으며, 자신을 헌신하셨으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인준과 삼위 하나님의 등장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룰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10절에, “하늘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인간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예수님의 순종의 세례로 다시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 인간이 구원받았고, 갈라진 하늘을 통해 천국을 허락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여러분은 이제 그 순종과 어리석음의 십자가의 도를 사는 분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은 남들과 비교해 더 높고, 더 많고, 더 좋아야 똑똑한 자고 승리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미련해 보입니다. 남들보다 손해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남들보다 적게 갖고 낮추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십자가를 부인(否認)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가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례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이 우리들의 삶에서도 역사하게 하시고, 그 삶을 십자가로 따라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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