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2.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마가복음의 첫 부분인 1절부터 8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서론이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어떤 이야기로 시작합니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의 시작으로 보통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으로 시작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잠깐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왕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하나님 되심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의 목적은,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종 되심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마가는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셨던 지상 사역을 중점적으로 나타냈습니다.

 

1장을 보시면, 마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그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인간적 고난에 대한 기록은 13절 한 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종 되심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마가복음 1:2~3,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말라기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려는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바벨론의 이스라엘 침략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말라기는 주전 5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후, 국가가 세워지지 않아 낙담해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엘리야가 앞서서 올 것을 예언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되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마가복음의 당면한 문제는 아기 탄생 사건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직접적인 사역부터 시작합니다. 그분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십니다. 바로 이 분이 세상에 나타나시기 전에 바로 앞서서 그분의 사역이 어떠할지를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먼저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베푸는 자(Baptist) 요한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나타내기 위해 세움 받은 사람이고 복음 그 자체인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 오늘날의 복음은 많이 변질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성경말씀이고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딱딱하고 메말라 버린 교회, 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 말씀이 정말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선언이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희를 위한 구주가 오실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렇게 복음으로 살고 그 복음을 위해 살았던 그리고 그 복음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마가의 복음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지 않고 이사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세례 요한이라는 한 인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외쳤고 살았고 보여주었던 것은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미리 보여주는 그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 복음은 세례 요한과 함께 시작했는가?

둘째,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설교는 같았는가? 입니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 16:1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 후부터 그 때부터라는 말씀입니다. 즉 요한의 때와 함께 복음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12사도의 수를 채우기 위해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뽑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21~22,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베드로도 복음의 시작을 요한의 세례로 보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의문인 두 가르침이 동일한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은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에서 보듯이, 죄 사함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또한, 마태복음 1:1~3,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요한의 복음과 내용이 같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프로토타입 혹은 베타판이라고 하지요. 요한은 자신의 설교와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살면서 예수님을 예표 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절에 보면, 그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가 그의 집입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사막이나 황량한 들판입니다.생명체가 살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어성경에는 Jeshimon(사해 남부의 고지 황야지대)이라고도 표현됩니다.

 

민수기 21:20,

바못에서 모압 들에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렀더라

 

And from Bamoth in the valley, that is in the country of Moab, to the top of Pisgah, which looketh towardJeshimon. ( 21:20, KJV)

 

And Balak brought Balaam unto the top of Peor, that looketh toward Jeshimon. ( 23:28, KJV)

 

Then came up the Ziphites to Saul to Gibeah, saying, Doth not David hide himself with us in strong holds in the wood, in the hill of Hachilah, which is on the south of Jeshimon? (삼상 23:19, KJV)

 

And they arose, and went to Ziph before Saul: but David and his men were in the wilderness of Maon, in the plain on the south of Jeshimon. (삼상 23:24, KJV)

 

And the Ziphites came unto Saul to Gibeah, saying, Doth not David hide himself in the hill of Hachilah, which is before Jeshimon? (삼상 26:1, KJV)

 

And Saul pitched in the hill of Hachilah, which is before Jeshimon, by the way. But David abode in the wilderness, and he saw that Saul came after him into the wilderness. (삼상 26:3, KJV)

 

이스라엘의 광야는 지리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좋은 땅인 요단강 서쪽지방 너머와 사해 아래쪽에 이르기까지 위치해 있는 거친 환경의 땅입니다. 그곳에는 분필가루 같이 숨 막히는 먼지가 휘몰아칩니다. 물이 거의 없습니다. 바닥은 거친 모래나 날카로운 자갈로 덮여 있습니다. 여기저기 메마른 잡풀과 바위 사이에 전갈이나 사막의 독사가 선뜻 선뜻 나타나는 곳입니다. 태양빛을 받았을 때는 마치 온 땅 아래에서 지옥의 화염이 끓고 있는 것 같은 열기를 뿜어내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죽음의 장소일 뿐 아니라 격리의 상징이자, 시험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격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거나 시험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훈련이 바로 광야에서 일어납니다.

 

광야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내가 있고, 소리가 있습니다.

 

모세가 만났던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사역에 지쳐 있을 때 들었던 세미한 음성의 바위굴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살았고 예수님도 그곳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 채플실(강당)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게시판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

 

마태복음 11:7~8,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세상의 영광과 좋은 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자기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광야의 고독과 고통 속에 한번쯤은 서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가지도록 이끄는 곳이 광야입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을 그 광야에서 거하면서 거의 모든 활동을 그곳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한의 집은 광야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상태가 광야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백성들이 요단강 주변의 광야로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광야를 보면서 자기 조상들이 과거에40년간 광야를 지났던 경험과 역사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들의 죄를 생각할 때에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앞에 놔두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가려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요한과의 만남을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무엇을 입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6절을 봅시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은 구약의 엘리야선지자의 후신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엘리야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다시 올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활동했습니다.

 

요한은 오늘날의 유명한 설교자처럼 화려한 조명과 방송설교를 하고 고급 양복을 걸치고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형교회의 주인으로, 세상의 주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원시인처럼 짐승의 가죽을 두른 사람의 말을 누가 들으려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세련되고 멋있게 호텔 같은 인터리어가 된 교회에서, 멋진 성가대와 최고급 방송시설이 된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태리제 양복이 아니라,약대털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메뚜기와 석청(石淸)입니다. 석청은 야생꿀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 뿐 아니라 조리가 필요 없는 음식을, 음식이라기보다는 야생에서 얻을 수 있고 율법에 금하지 않은 먹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것을 먹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규정한 율법이 있습니다.

 

레위기 11:21~23,

[21]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그는 자신의 단순한 섭생(攝生, 다이어트)을 통해 자신이 낮추어지고 겸허히 사는 모습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가장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최우선이었고 그의 모든 삶의 모습이 그 목표를 위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 섬기는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요한의 설교를 듣기위해 전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사입니다.

 

마태복음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누가복음 3장에는, 세리와 군인들도 찾아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3:12~14,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개중에는 요한이 누구인가 보기위해 온 사람들도 있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세례 받으러 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그리스도이신가라고 의논할 때에 요한은 자신은 그분을 예비하는 자이고 그분의 종이 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15~16,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스라엘에서 제자는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랍비)이 교실에서 가르치는 내용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따라하며 배워나갑니다. 그러나 선생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그 사회에서 이나 노예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의 종, 노예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주인공은 예수이시지 자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28~30,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오늘날의 우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 대접 받기를 원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어느 모임에서나 내 말이 통해야 하고, 내 의견이 존중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교회 일이나 기독교적인 사역을 가장해서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다 챙겨가는 우리들입니다. 종은 없고 레드카펫 밟으려는 주연배우들만 넘치는 요즘입니다.

 

그의 삶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나 자신과 다른지요! 얼마나 우리들과 다른지요!

하나님의 복음은 식었고 말씀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교회건축이 경쟁입니다.

 

아무도 빈들의 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기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집, , 우리의 음식, 우리의 모든 것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나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그만한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방향을 바꿔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망할지언정 그리스도가 흥하면 그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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