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1. 요한 마가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마가임을 믿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마가(요한)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번 나옵니다.
① 사도행전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② 사도행전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③ 사도행전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④ 사도행전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⑤ 사도행전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⑥ 사도행전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⑦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⑧ 디모데후서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⑨ 빌레몬서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⑩ 베드로전서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혹시 여러분이 마가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보시면서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특이하게도 마가에 대한 각 성경기록이 그 순서대로 그의 인생의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으로, 유대식 이름은 요한입니다(행 12:12). 마가(Markos)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마가를 ‘마가라 하는 요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행 12:12,25; 15:37). 그래서 그의 정식 이름은 요한 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가는 위대한 전도자인 바나바의 조카이기도 합니다(골 4:10). 그가 바나바의 조카였다는 점에서 마가는 지중해의 구브로(Kuvpro, Cyprus)섬 출신의 레위족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사도행전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또한 마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마가복음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1~52,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가 만일 마가복음 14:51의 청년이었다면, 그는 생전에 주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마가의 나이가 미성년 정도의 어린 이유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일종의 집합소요 기도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 만한 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비자(婢子, 하녀)를 두고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꽤 넉넉한 살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12~14, (성경에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도 불립니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가 전도에 관계한 최초의 기록은 오순절의 성령 임재 사건으로부터 15~6년 후, 예루살렘 부조(扶助)를 마치면서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안디옥 교회에 갔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12:24~25,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안디옥 교회에서 큰 신뢰를 얻은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울의 ‘수종자(隨從者)’로 동행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3:1~5,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로 인하여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일행에서 탈퇴하여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사도행전 13:13~14,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마가)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이 사건은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가려 했으나 바울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자기 조카에 대한 인정이 작용을 했고, 바울은 효율적인 사역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 문제로 둘은 심히 다투었으며,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5:36~41,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이때 그는 바나바를 따라 구브로에 건너갔으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그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이름을 보게 되는 것은 바울의 서신에서인데, 그로부터 11~2년 후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그가 바울과 더불어 옥에 갇히거나 그 주변에서 생활을 하면서 바울을 섬긴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후, 마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아리스다고와 유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었으며 바울은 마가에게서 진정한 위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를 골로새교회에 추천하여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로새서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났을 때, 바울은 마가를 그리워하여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올 것을 부탁했으며, 그를 가리켜 ‘나의 일에 유익한 자’라고까지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9~11,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심지어 바울은 그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소개합니다.
빌레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전에는 걸림돌이나 방해거리 취급을 당한 그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습니다.
그 후(아마 바울이 죽은 직후) 그는 베드로를 도와 일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기원후 2세기경의 초대교부인 브루기아의 히에라볼리의 감독 파피아스(Papias)는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헬라어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나, 로마에서의 설교는 통역을 세워야 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의 통역자가 된 마가는, 주님이 이야기하고 행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한, 순서는 바르지 않지만, 정확히 기록했다. 왜냐하면,그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도 아니고, 주를 수행한 것도 아니고, 앞서 말한 대로 후에 베드로를 따랐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때그때)필요에 따라 (그를) 가르쳤을 뿐, 주님의 어록(語錄)을 조직적으로 기술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가는 기억하고 있던 것을 기록했으나, (내용에 있어서) 조금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들은 것을 빠뜨리거나 오전(誤傳)하지 않도록 전심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39),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3.39에 인용].
이렇게 마가가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회고록을 편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입니다.
마가의 만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치 않은 여러 가지 전설로 전해집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손가락 불구자였다고 하는 로마의 힛포리다스(3세기 초엽)의 전설인데, 실제로 불구였는지, 비유적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애굽의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바나바행전, 마가행전 등 4,5세기의 외경) 근거가 희박합니다.
어렸을 때는 가족과 주변의 분위기에 의해 믿음을 가졌지만 충동성과 고집으로 자칫 실패한 인생이 될 뻔했던, 그러나 다시 신앙과 소명을 회복하고 진정한 종의 모습으로 돌아 온 마가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바로 이 마가라는 사람이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가의 인생을 통해 마가복음을 바라보는 접근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고 간결한 내용을 갖고 있어서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쉽게 대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4복음서 마다 각각의 특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을 많이 기록한 책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강조한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남을 섬기는 종이 되심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남 섬기는 종으로서 훈련시키시는 제자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에스겔서에 나타난 그룹(천사)들의 4가지 모습을 보고 4복음서의 성격을 일치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이 아주 적절합니다.
에스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마태복음은 왕인 사자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남을 섬기는 소의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사람의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신성을 보여주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복음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종이나 위치가 낮은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지도 깊은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의 일생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이 남 섬기는 참된 본을 보여주신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그렇게 깊은 신앙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처음에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20대 청년으로 여겨지는 마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하던 일이 수종자라고 합니다. 그 말의 뜻은 과거 한국교회사에 있었던 조사(助事, 외국 선교사를 돕는 수종자)직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심부름이나 식사준비 같은 일이 마가의 주 업무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고 꿈 많은 마가가 그런 것에서부터 불만이 쌓여갔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가 전도 일행에서 탈퇴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가가 2차 전도여행에서 헤어진 후 나중에 어떤 계기로 다시 화해했고 서로 없어는 안 될 존재로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마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밖에 추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바울의 평가와 칭찬처럼 바울을 위해 헌신하는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는 그런 모습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렇게 남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며 헌신하는 행동의 바탕 위에서, 이 세상에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마가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뒷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마가는 젊은 혈기로 전도여행에 문제를 일으켜 두 위대한 전도자들이 반목하게 했고 몇 년간을 바울과 교제를 하지도 않고 지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참된 섬기는 자로 사용하시려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베드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베드로의 아들로 불리기도 할 정도로 베드로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의 가르침과 설교를 정리하여 마가복음을 기록까지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실패”하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로마군인에게 잡혔을 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 울 때에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통곡을 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갈릴리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요 21장)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경험을 누구보다 강하게 갖고 있던 베드로는 역시 실패자로 살고 있는 마가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성격상 유약하고 게으른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입니다.
마가복음 14:51~52,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한 청년’은 마가 자신으로 여겨집니다. 마가는 아마 자거나 졸던 중에 예수님이 어디 가시나 따라가 보라는 어머니의 부탁에 겨우 일어나서 천만 두르고 따라가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벌거벗고 도망친 경험이 있는 청소년이었습니다. 어쩌면 부잣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의지도 약하고 게으르기도 한 마가였을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베드로의 도움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 된 모습을 중점으로 보여줍니다.한때 실패한 종이었던 마가는 자신이 변화된 후 완벽한 종이신 예수님을 마가복음에서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수종자로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헤어진 후 삼촌 바나바를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바울과 베드로가 죽기까지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신뢰를 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가야말로 남 섬기는 참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묘사할 때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기록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을“주”로 많이 부른 반면에 마가복음은 “선생”이라는 호칭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가복음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마가복음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마가복음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마가복음 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마가복음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마가복음 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마가복음 10: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마가복음 12: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가복음 12: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마가복음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마가복음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마가복음 14: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왜 마가복음이 이렇게 예수님의 종 되심을 강조할까요?
1.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이방인’을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구약을 인용한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 즉 당시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많이 사용한 아람어도 뜻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보아너게 3:17; 달리다굼 5:4; 에바다 7:34; 아바 14:36).
2. 두 번째, 마가는 그의 책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강조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어떻게 십자가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오늘날까지 걸림돌이 됩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그런 비슷한 일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창시자들은 마지막이 언제나 영광스럽거나 평안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만든 종교이기 때문에 그 추종자들인 사람들의 최대 공통관심인 행복에 부합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창시자랄 수 있는 예수님의 죽음이 안 좋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후 부활하셨지만 그것도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 부활도 믿어야 사실로 받아들이지, 창시자가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에 죽은 종교를 믿으라니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에 기독교 특유의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와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 가운데에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사 상태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이성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정 받아들이면 그 은혜만한 역사가 없습니다.
3. 세 번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마가복음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록된 성경입니다. 베드로는 마가복음 내용의 가장 큰 제공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을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큰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고난주간에 대한 기록이 마가복음 전체의 3분의 1이 넘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새벽)에도 말씀드렸듯이 바울과 네로황제의 만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네로의 박해가 극을 달했을 때 일부러 로마 황제를 찾아간 바울이었고 베드로였습니다. 그들은 둘 다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 순교 장면을 직접 본 마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도 고난에 참예한 자라고합니다.
고린도후서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저는 한국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은 것이 실제로 우리 자신의 신앙에 거의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박해 시절에 기독교인들은 숫자가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순결했고 죽음까지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교회와 성도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히 그 소수라고 큰소리칠 수는 없겠지만 그 소수에 들기를 희망합니다. 그 소수의 신자들이 로마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입니다.
유럽의 17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그 소수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화형과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 소수의 한국 교회 신자들도 그 고난에 참예한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소수의 무리 가운데 들기를 원하는 분들이라면 마가복음을 읽고 들을 때에 이러한 신령한 욕망과 결단이 여러분의 속에서 끓어올라야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날 선 검처럼 여러분의 강퍅한 영혼과 인생 속으로 뚫고 들어오실 것입니다.
E.V. Rieu(문고판 시리즈 ‘펭귄클래식스’의 ‘일리아드’ 번역자)라는 사람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펭귄출판사로부터 4복음서를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의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낼 성경이 어떨지 궁금하군.” 무신론자가 번역할 성경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은 곧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복음서들이 만들어 낼 아버지가 궁금해지는데.” 결국 그 아들의 예언대로 그는 일 년도 안 되어 주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마가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종 되심을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마가복음을 읽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까요?
윌리암 부스가 영국에서 구세군을 창시하고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을 때 미국의 브렝글(Samuel Logan Brengle, 1860~1936)이라는 한 젊은이가 그 소문을 듣고 자신도 그 사역에 참여하고 싶어서 영국으로 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세군단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부스는 그에게 다른 사관들의 구두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는 사관들의 검은 구두를 앞에 놓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해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가?” 그때 그 마음속에 예수님이 한 어부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주님,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듯이 저도 이 신발들을 닦겠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인 마가복음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그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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