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
: 왜냐하면

 

 

마가복음이 미완성(未完成)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으로서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글(복음서)로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사명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단서를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16:9 이하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괄호로 묶여있음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주석을 보신 분들은 더욱 놀랄만한 설명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충격 받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6:9~20,*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

 

맨 처음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을 성경 원문(原文)’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문을 보고 베낀 것은 사본(寫本)’이라고 부르고, 원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본(飜譯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최초의 성경 원문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모두 사본과 번역본을 참고로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한글 성경은 그런 번역본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이라는 문서 자체가 어떤 절대적인 신성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죽은 의문(儀文)이 될 수도 있고 생명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마가복음 16:9~20은 신약 성경에서 사본학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은 본문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신약 성경의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사본에 속하는 시내사본 바티칸사본에 마가복음 16:9~20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내사본, 바티칸사본은 카톨릭사본 혹은 ‘소()사본이라고도 불립니다.

 

시내사본: S, Codex Sinaiticus. 1859년 티셴도르프가 시내 반도 산타 카타리나(캐더린) 수도원에서 발견했다. 구약의 일부는 빠져 있지만 4세기의 신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

바티칸 사본: Vaticanus. 1481년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도서관에서 발견된 바티칸의 최고의 보물.

 

시내사본에는 허니스의 목자 바나바의 서신 같은 위조문서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내사본에는 많은 단어가 삭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어와 문장이 2번 이상 쓰이기도 했습니다. 시내사본의 신약성경에는 어떤 절이 바로 앞에 있는 절과 같은 단어로 끝나기 때문에 삭제해 버린 큰 실수가 115번 이상 발견됩니다.

 

바티칸사본은 자체에도 오류가 많아 같은 단어를 두 번씩 연달아 쓴 구절도 발견됩니다. 4복음서에서만 무려 1,491번이나 단어나 전체 절을 삭제했습니다. 10세기경에 카톨릭 서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소수사본의 편집 실수는 대부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또 다른 소수사본에는 엉셜사본(4~5세기 제작)이 있습니다만 오류가 심각해서 신뢰성이 없습니다. 이들 소수사본(Minority Text)은 카톨릭이 지지하는 사본입니다. 반대로 다수사본(Majority Text)은 개혁교회에서 사용하는 사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에도 이런 소수사본을 참고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틀을 세운 교부(敎父)들 가운데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유세비우스(260~340)나 제롬(347~420)과 같은 사람들은 16:9~16은 원래 마가가 쓴 내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저스틴(100~165)이나 터툴리안(155~230), 그리고 이레니우스(2C~220)와 같은 교부들은 16:9~20이 원래부터 마가복음의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多數사본)과 번역본들에도 16:9~20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사본을 비교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규명하는 학문을 본문비평이라고 합니다. 주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인간의 지성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계통의 학자들이 시도하는 분야입니다.

 

그런 학문의 결과로 기독교가 많은 오해를 받고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정보를 퍼뜨리면서 기독교가 근본인 성경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문체를 보아서도 마가의 성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16:9 이전까지는 kai(and)가 평균 한 절에 한 번 나타났는데 16:9 이후에서는 평균 2개절에 한 번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첨가되지 않았다고 반박할만한 좋은 증거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이나 목사들도 이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결론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왜 16:9~16이 마가복음에 첨가되었을까요? 10세기에 쓰인 아르메니안 사본은 16:9~20을 사도 요한의 제자가 첨가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가가 원래부터 16:9~20을 포함한 복음서를 썼지만, 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결론 부분이 손실되거나 없어졌다(또는 삭제되거나 제거되었다).

 

2. 마가가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복음서 저작을 완성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3. 마가는 원래부터 16:8에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다.

 

그러나 1번 가설은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두루마리를 말아서 보관했기 때문에, 오히려 끝 부분보다 첫 부분이 더 손실되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2번의 가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견해는 3번의 주장입니다.

 

3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래 마가가 쓴 복음서는 16:8에서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후에 익명의 한 저자가 16:9~20을 첨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저자는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내용을 신약 정경에 포함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6:9~20이 처음에는 제거되었지만, 1세기말에 사도 요한이 그 내용의 진실성을 승인한 후에, 그의 제자가 다시 삽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이 옳은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6:9~20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모두 다른 복음서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9~20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른 성경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6:9~11 =  20:11~18

 

2. 두 명의 여행자에게 나타나심

 16:12~13 =  24:13~32

 

3. 11제자에게 나타나심

 16:14~18 =  28:16~20,  24:36~49,  20:19~23

 

4. 승천 및 사도 선교의 시작

 16:19~20 =  24:50~51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마가가 직접 기록한 내용은 아닐 수 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른 보조자에 의해 첨가되었고 그 전체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별 문제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직접 쓴 마지막 8절에 이상한 부분이 또 있습니다. 8절에서 끝날 때 헬라어 단어 gar로 끝납니다. gar는 영어로 치면for에 해당합니다. 우리말로는 왜냐하면 혹은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이런 단어를 문법적으로 접속사(接續詞, conjunction)라고 합니다. 두 개의 문장을 이어주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8절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그들은 무서웠다. 왜냐하면(그러므로).”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6: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한글개역)

 

And they went out quickly, and fled from the sepulchre; for they trembled and were amazed: neither said they any thing to any [man]; for they were afraid. (KJV)

 

영어성경(KJV, NIV)에서는 for를 앞에 두었습니다. gar를 번역하여 넣으려다 보니 영어성경으로는 그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라는 말이 되고 말았지만 원래는 그냥 그들이 두려워했다. 왜냐하면...’입니다.

 

원칙적으로 접속사란 영어나 우리말처럼 문장 앞에 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접속사가 뒤에 붙어 있습니다. 즉 원래 저자인 마가는 하고자 하는 말을 그만 두고 말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 원문으로는 8절이 미완성 문장의 형태로 끝났고, 9절부터 어울리지 않는 연결부분이 첨가되어 결국 9절 이하는 첨가된 부분이라는 점이 명확해 집니다.

 

요즘 어떤 영화는, 원래 내용과 결론이 다른 버전을 별도로 만들어서 다른 결말의 내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일부러 결론을 우리에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자신의 글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만난 사람들의 생애에 어떤 이유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러므로라고 마치면서 여러분이 이어나갈 다음의 행동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가는 무슨 이유를 묻습니까? 그리고 어떤 행동을 기대합니까? 이것이 여러분이 마가복음을 보시면서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16:8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마가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마가의 스승이며 마가복음의 제공자인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쓴 베드로전서에서 이 의문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따라 사는 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베드로나 마가와 같은 십자가 신앙 부활의 소망을 따라 주님의 제자로 살기 바라며 마가복음을 시작하려 합니다.

 

베드로전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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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2.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마가복음의 첫 부분인 1절부터 8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서론이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어떤 이야기로 시작합니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의 시작으로 보통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으로 시작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잠깐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왕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하나님 되심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의 목적은,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종 되심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마가는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셨던 지상 사역을 중점적으로 나타냈습니다.

 

1장을 보시면, 마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그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인간적 고난에 대한 기록은 13절 한 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종 되심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마가복음 1:2~3,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말라기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려는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바벨론의 이스라엘 침략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말라기는 주전 5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후, 국가가 세워지지 않아 낙담해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엘리야가 앞서서 올 것을 예언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되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마가복음의 당면한 문제는 아기 탄생 사건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직접적인 사역부터 시작합니다. 그분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십니다. 바로 이 분이 세상에 나타나시기 전에 바로 앞서서 그분의 사역이 어떠할지를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먼저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베푸는 자(Baptist) 요한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나타내기 위해 세움 받은 사람이고 복음 그 자체인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 오늘날의 복음은 많이 변질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성경말씀이고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딱딱하고 메말라 버린 교회, 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 말씀이 정말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선언이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희를 위한 구주가 오실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렇게 복음으로 살고 그 복음을 위해 살았던 그리고 그 복음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마가의 복음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지 않고 이사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세례 요한이라는 한 인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외쳤고 살았고 보여주었던 것은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미리 보여주는 그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 복음은 세례 요한과 함께 시작했는가?

둘째,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설교는 같았는가? 입니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 16:1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 후부터 그 때부터라는 말씀입니다. 즉 요한의 때와 함께 복음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12사도의 수를 채우기 위해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뽑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21~22,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베드로도 복음의 시작을 요한의 세례로 보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의문인 두 가르침이 동일한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은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에서 보듯이, 죄 사함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또한, 마태복음 1:1~3,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요한의 복음과 내용이 같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프로토타입 혹은 베타판이라고 하지요. 요한은 자신의 설교와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살면서 예수님을 예표 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절에 보면, 그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가 그의 집입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사막이나 황량한 들판입니다.생명체가 살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어성경에는 Jeshimon(사해 남부의 고지 황야지대)이라고도 표현됩니다.

 

민수기 21:20,

바못에서 모압 들에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렀더라

 

And from Bamoth in the valley, that is in the country of Moab, to the top of Pisgah, which looketh towardJeshimon. ( 21:20, KJV)

 

And Balak brought Balaam unto the top of Peor, that looketh toward Jeshimon. ( 23:28, KJV)

 

Then came up the Ziphites to Saul to Gibeah, saying, Doth not David hide himself with us in strong holds in the wood, in the hill of Hachilah, which is on the south of Jeshimon? (삼상 23:19, KJV)

 

And they arose, and went to Ziph before Saul: but David and his men were in the wilderness of Maon, in the plain on the south of Jeshimon. (삼상 23:24, KJV)

 

And the Ziphites came unto Saul to Gibeah, saying, Doth not David hide himself in the hill of Hachilah, which is before Jeshimon? (삼상 26:1, KJV)

 

And Saul pitched in the hill of Hachilah, which is before Jeshimon, by the way. But David abode in the wilderness, and he saw that Saul came after him into the wilderness. (삼상 26:3, KJV)

 

이스라엘의 광야는 지리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좋은 땅인 요단강 서쪽지방 너머와 사해 아래쪽에 이르기까지 위치해 있는 거친 환경의 땅입니다. 그곳에는 분필가루 같이 숨 막히는 먼지가 휘몰아칩니다. 물이 거의 없습니다. 바닥은 거친 모래나 날카로운 자갈로 덮여 있습니다. 여기저기 메마른 잡풀과 바위 사이에 전갈이나 사막의 독사가 선뜻 선뜻 나타나는 곳입니다. 태양빛을 받았을 때는 마치 온 땅 아래에서 지옥의 화염이 끓고 있는 것 같은 열기를 뿜어내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죽음의 장소일 뿐 아니라 격리의 상징이자, 시험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격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거나 시험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훈련이 바로 광야에서 일어납니다.

 

광야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내가 있고, 소리가 있습니다.

 

모세가 만났던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사역에 지쳐 있을 때 들었던 세미한 음성의 바위굴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살았고 예수님도 그곳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 채플실(강당)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게시판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

 

마태복음 11:7~8,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세상의 영광과 좋은 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자기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광야의 고독과 고통 속에 한번쯤은 서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가지도록 이끄는 곳이 광야입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을 그 광야에서 거하면서 거의 모든 활동을 그곳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한의 집은 광야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상태가 광야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백성들이 요단강 주변의 광야로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광야를 보면서 자기 조상들이 과거에40년간 광야를 지났던 경험과 역사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들의 죄를 생각할 때에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앞에 놔두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가려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요한과의 만남을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무엇을 입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6절을 봅시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은 구약의 엘리야선지자의 후신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엘리야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다시 올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활동했습니다.

 

요한은 오늘날의 유명한 설교자처럼 화려한 조명과 방송설교를 하고 고급 양복을 걸치고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형교회의 주인으로, 세상의 주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원시인처럼 짐승의 가죽을 두른 사람의 말을 누가 들으려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세련되고 멋있게 호텔 같은 인터리어가 된 교회에서, 멋진 성가대와 최고급 방송시설이 된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태리제 양복이 아니라,약대털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메뚜기와 석청(石淸)입니다. 석청은 야생꿀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 뿐 아니라 조리가 필요 없는 음식을, 음식이라기보다는 야생에서 얻을 수 있고 율법에 금하지 않은 먹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것을 먹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규정한 율법이 있습니다.

 

레위기 11:21~23,

[21]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그는 자신의 단순한 섭생(攝生, 다이어트)을 통해 자신이 낮추어지고 겸허히 사는 모습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가장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최우선이었고 그의 모든 삶의 모습이 그 목표를 위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 섬기는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요한의 설교를 듣기위해 전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사입니다.

 

마태복음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누가복음 3장에는, 세리와 군인들도 찾아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3:12~14,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개중에는 요한이 누구인가 보기위해 온 사람들도 있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세례 받으러 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그리스도이신가라고 의논할 때에 요한은 자신은 그분을 예비하는 자이고 그분의 종이 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3:15~16,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스라엘에서 제자는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랍비)이 교실에서 가르치는 내용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따라하며 배워나갑니다. 그러나 선생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그 사회에서 이나 노예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의 종, 노예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주인공은 예수이시지 자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28~30,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오늘날의 우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 대접 받기를 원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어느 모임에서나 내 말이 통해야 하고, 내 의견이 존중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교회 일이나 기독교적인 사역을 가장해서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다 챙겨가는 우리들입니다. 종은 없고 레드카펫 밟으려는 주연배우들만 넘치는 요즘입니다.

 

그의 삶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나 자신과 다른지요! 얼마나 우리들과 다른지요!

하나님의 복음은 식었고 말씀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교회건축이 경쟁입니다.

 

아무도 빈들의 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기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집, , 우리의 음식, 우리의 모든 것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나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그만한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방향을 바꿔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망할지언정 그리스도가 흥하면 그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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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1. 요한 마가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마가임을 믿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마가(요한)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사도행전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사도행전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도행전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사도행전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디모데후서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빌레몬서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베드로전서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혹시 여러분이 마가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보시면서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특이하게도 마가에 대한 각 성경기록이 그 순서대로 그의 인생의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으로, 유대식 이름은 요한입니다( 12:12). 마가(Markos)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마가를 마가라 하는 요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2:12,25; 15:37). 그래서 그의 정식 이름은 요한 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가는 위대한 전도자인 바나바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4:10). 그가 바나바의 조카였다는 점에서 마가는 지중해의 구브로(Kuvpro, Cyprus)섬 출신의 레위족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사도행전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또한 마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마가복음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1~52,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가 만일 마가복음 14:51의 청년이었다면, 그는 생전에 주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마가의 나이가 미성년 정도의 어린 이유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일종의 집합소요 기도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 만한 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비자(婢子, 하녀)를 두고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꽤 넉넉한 살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12~14, (성경에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도 불립니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가 전도에 관계한 최초의 기록은 오순절의 성령 임재 사건으로부터 15~6년 후, 예루살렘 부조(扶助)를 마치면서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안디옥 교회에 갔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12:24~25,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안디옥 교회에서 큰 신뢰를 얻은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울의 수종자(隨從者)’로 동행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3:1~5,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로 인하여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일행에서 탈퇴하여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사도행전 13:13~14,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마가)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이 사건은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가려 했으나 바울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자기 조카에 대한 인정이 작용을 했고, 바울은 효율적인 사역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 문제로 둘은 심히 다투었으며,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5:36~41,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이때 그는 바나바를 따라 구브로에 건너갔으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그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이름을 보게 되는 것은 바울의 서신에서인데, 그로부터 11~2년 후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그가 바울과 더불어 옥에 갇히거나 그 주변에서 생활을 하면서 바울을 섬긴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후, 마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아리스다고와 유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었으며 바울은 마가에게서 진정한 위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를 골로새교회에 추천하여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로새서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났을 때, 바울은 마가를 그리워하여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올 것을 부탁했으며, 그를 가리켜 나의 일에 유익한 자라고까지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9~11,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심지어 바울은 그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소개합니다.

 

빌레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전에는 걸림돌이나 방해거리 취급을 당한 그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습니다.

 

그 후(아마 바울이 죽은 직후) 그는 베드로를 도와 일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기원후 2세기경의 초대교부인 브루기아의 히에라볼리의 감독 파피아스(Papias)는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헬라어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나, 로마에서의 설교는 통역을 세워야 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의 통역자가 된 마가는, 주님이 이야기하고 행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한, 순서는 바르지 않지만, 정확히 기록했다. 왜냐하면,그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도 아니고, 주를 수행한 것도 아니고, 앞서 말한 대로 후에 베드로를 따랐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때그때)필요에 따라 (그를) 가르쳤을 뿐, 주님의 어록(語錄)을 조직적으로 기술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가는 기억하고 있던 것을 기록했으나, (내용에 있어서) 조금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들은 것을 빠뜨리거나 오전(誤傳)하지 않도록 전심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39),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3.39에 인용].

 

이렇게 마가가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회고록을 편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입니다.

 

마가의 만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치 않은 여러 가지 전설로 전해집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손가락 불구자였다고 하는 로마의 힛포리다스(3세기 초엽)의 전설인데, 실제로 불구였는지, 비유적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애굽의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바나바행전, 마가행전 등 4,5세기의 외경) 근거가 희박합니다.

 

어렸을 때는 가족과 주변의 분위기에 의해 믿음을 가졌지만 충동성과 고집으로 자칫 실패한 인생이 될 뻔했던, 그러나 다시 신앙과 소명을 회복하고 진정한 종의 모습으로 돌아 온 마가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바로 이 마가라는 사람이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가의 인생을 통해 마가복음을 바라보는 접근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고 간결한 내용을 갖고 있어서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쉽게 대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4복음서 마다 각각의 특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을 많이 기록한 책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강조한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남을 섬기는 종이 되심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남 섬기는 종으로서 훈련시키시는 제자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에스겔서에 나타난 그룹(천사)들의 4가지 모습을 보고 4복음서의 성격을 일치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이 아주 적절합니다.

 

에스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마태복음은 왕인 사자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남을 섬기는 소의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사람의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신성을 보여주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복음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종이나 위치가 낮은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지도 깊은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의 일생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이 남 섬기는 참된 본을 보여주신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그렇게 깊은 신앙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처음에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20대 청년으로 여겨지는 마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하던 일이 수종자라고 합니다. 그 말의 뜻은 과거 한국교회사에 있었던 조사(助事, 외국 선교사를 돕는 수종자)직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심부름이나 식사준비 같은 일이 마가의 주 업무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고 꿈 많은 마가가 그런 것에서부터 불만이 쌓여갔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가 전도 일행에서 탈퇴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가가 2차 전도여행에서 헤어진 후 나중에 어떤 계기로 다시 화해했고 서로 없어는 안 될 존재로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마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밖에 추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바울의 평가와 칭찬처럼 바울을 위해 헌신하는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는 그런 모습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렇게 남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며 헌신하는 행동의 바탕 위에서, 이 세상에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마가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뒷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마가는 젊은 혈기로 전도여행에 문제를 일으켜 두 위대한 전도자들이 반목하게 했고 몇 년간을 바울과 교제를 하지도 않고 지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참된 섬기는 자로 사용하시려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베드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베드로의 아들로 불리기도 할 정도로 베드로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의 가르침과 설교를 정리하여 마가복음을 기록까지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실패하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로마군인에게 잡혔을 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 울 때에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통곡을 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갈릴리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21)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경험을 누구보다 강하게 갖고 있던 베드로는 역시 실패자로 살고 있는 마가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성격상 유약하고 게으른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입니다.

 

마가복음 14:51~52,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한 청년은 마가 자신으로 여겨집니다. 마가는 아마 자거나 졸던 중에 예수님이 어디 가시나 따라가 보라는 어머니의 부탁에 겨우 일어나서 천만 두르고 따라가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벌거벗고 도망친 경험이 있는 청소년이었습니다. 어쩌면 부잣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의지도 약하고 게으르기도 한 마가였을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베드로의 도움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 된 모습을 중점으로 보여줍니다.한때 실패한 종이었던 마가는 자신이 변화된 후 완벽한 종이신 예수님을 마가복음에서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수종자로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헤어진 후 삼촌 바나바를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바울과 베드로가 죽기까지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신뢰를 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가야말로 남 섬기는 참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묘사할 때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기록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을로 많이 부른 반면에 마가복음은 선생이라는 호칭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가복음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마가복음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마가복음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마가복음 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마가복음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마가복음 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마가복음 10: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마가복음 12: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가복음 12: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마가복음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마가복음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마가복음 14: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왜 마가복음이 이렇게 예수님의 종 되심을 강조할까요?

 

1.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이방인을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구약을 인용한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 즉 당시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많이 사용한 아람어도 뜻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보아너게 3:17; 달리다굼 5:4; 에바다 7:34; 아바 14:36).

 

2. 두 번째, 마가는 그의 책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강조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어떻게 십자가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오늘날까지 걸림돌이 됩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그런 비슷한 일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창시자들은 마지막이 언제나 영광스럽거나 평안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만든 종교이기 때문에 그 추종자들인 사람들의 최대 공통관심인 행복에 부합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창시자랄 수 있는 예수님의 죽음이 안 좋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후 부활하셨지만 그것도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 부활도 믿어야 사실로 받아들이지, 창시자가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에 죽은 종교를 믿으라니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에 기독교 특유의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와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 가운데에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사 상태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이성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정 받아들이면 그 은혜만한 역사가 없습니다.

 

3. 세 번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마가복음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록된 성경입니다. 베드로는 마가복음 내용의 가장 큰 제공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을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큰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고난주간에 대한 기록이 마가복음 전체의 3분의 1이 넘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새벽)에도 말씀드렸듯이 바울과 네로황제의 만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네로의 박해가 극을 달했을 때 일부러 로마 황제를 찾아간 바울이었고 베드로였습니다. 그들은 둘 다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 순교 장면을 직접 본 마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도 고난에 참예한 자라고합니다.

 

고린도후서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저는 한국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은 것이 실제로 우리 자신의 신앙에 거의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박해 시절에 기독교인들은 숫자가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순결했고 죽음까지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교회와 성도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히 그 소수라고 큰소리칠 수는 없겠지만 그 소수에 들기를 희망합니다. 그 소수의 신자들이 로마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입니다.

 

유럽의 17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그 소수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화형과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 소수의 한국 교회 신자들도 그 고난에 참예한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소수의 무리 가운데 들기를 원하는 분들이라면 마가복음을 읽고 들을 때에 이러한 신령한 욕망과 결단이 여러분의 속에서 끓어올라야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날 선 검처럼 여러분의 강퍅한 영혼과 인생 속으로 뚫고 들어오실 것입니다.

 

E.V. Rieu(문고판 시리즈 펭귄클래식스 일리아드 번역자)라는 사람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펭귄출판사로부터 4복음서를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의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낼 성경이 어떨지 궁금하군.” 무신론자가 번역할 성경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은 곧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복음서들이 만들어 낼 아버지가 궁금해지는데.” 결국 그 아들의 예언대로 그는 일 년도 안 되어 주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마가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종 되심을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마가복음을 읽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까요?

 

윌리암 부스가 영국에서 구세군을 창시하고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을 때 미국의 브렝글(Samuel Logan Brengle, 1860~1936)이라는 한 젊은이가 그 소문을 듣고 자신도 그 사역에 참여하고 싶어서 영국으로 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세군단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부스는 그에게 다른 사관들의 구두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는 사관들의 검은 구두를 앞에 놓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해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가?” 그때 그 마음속에 예수님이 한 어부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주님,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듯이 저도 이 신발들을 닦겠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인 마가복음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그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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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편견


이메 김재천(1950~)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라는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그냥 시를 시로 접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것입니다.

혹 시를 감상적인 여린 글 또는 아름다운 언어의 결정체쯤으로

치우쳐 여기고 있다면 그 또한 어리석습니다.

시는 시인의 아픈 고백입니다.

아파야 시인입니다.

그 아픔을 다 털어놓을 줄 모른다면 시 다운 시를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귀를 바짝 대고 있어야 합니다.

화자가 언제 어느 부분에서 어떤 고백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백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고백은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늘 용감하게 당신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만큼 당신에게 바보처럼 열려있는 자입니다.

마음의 어느 켜를 굳게 닫은 시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정한 시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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