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성령의 은사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은사란 선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신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나 체험을 말합니다. 가장 흔하게는 자신도 전혀 몰랐던 외국어로 말하게 되는 방언이 있고, 환상, 예언, 심지어 의학적으로 쉽게 고칠 수 없는 병도 고치는 치유의 은사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방언처럼 언어가 아니고 글로 쓰는 방서라는 것도 본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많은 은사의 종류가 있는데 그 소개는 생략합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 한국 교회에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거치는 무슨 통과의례 같은 것으로 주입되어져 왔습니다. 이 은사운동은 80년대 후반,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변화가 생기면서 부흥의 열기가 잠시 약화되다가 그러다가 90년대 미국에서 온누리교회를 통해 들어온 빈야드운동으로 다시 불붙었습니다.

기독교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서구교회의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령의 이적 현상까지 부인하는데, 한국 교회에서의 은사운동은 전성기 때 그야말로 교단과 신학을 떠나 유행병처럼 들끓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을 가짜로 만들어 사기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류 기독교층에서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가끔 금이빨현상 같은 일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국 교회가 얼마나 은사운동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그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에 은사운동이 일어나면 분명 교회적으로 좋은 일도 있긴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일이 됩니다. 은사를 받은 신자는 좀더 확실한 신앙을 갖는 듯합니다. 당연히 교회 분위기는 기도나 집회에 있어서 더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목회에 더 힘을 얻고 신이 납니다. 물론 신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은사운동이 단기간적으로 교회에 긍정적인 힘을 실어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그 속을 살펴보면, 성령의 체험이나 은사 자체가 전혀 나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부조화가 흐르는 일이 반드시 발생합니다. 

교회나 주변에 은사운동이나 체험 분위기가 형성이 되면 그런 체험이 없는 신자들은 체험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가장 흔한 방언도 못하면 마치 자신이 신앙이 부족하거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계급인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백이면 백 다 모두 체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 체험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들 모두 다 겸손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고린도교회처럼 은사가 제대로 은사로 취급된 것이 아니라 (말은 그렇게 잘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계급장으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어떤 과정에 의해 신앙(구원)과 성령의 감동이 두 가지로 별다른 것처럼 갖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구원과 성령의 오심은 동시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이 내 주관(의식적인 판단)으로 확실하고 성경이나 교리적으로(객관적으로) 틀림이 없다면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어합니다. 좀 더 뭔가 있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어떤 현상에 의해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대단한 각성의 경험이 없다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어떤 뜨거움이 좀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감정의 세계냐 지식의 세계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구분하자면 신앙은 의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교할 수 있는 신앙은 감정적으로 뜨거워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가득해서도 아닙니다. 감정이나 지식의 조건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신앙에 대한 굽히지 않는 의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즉 감정, 지식, 의지는 우리의 신앙 인격이 외부로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의지가 제일 중요해 보이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하나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적, 이적, 체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감격에 거꾸러뜨림을 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일뿐인데 그것조차도 나의 구원을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습게도 이 구원의 확신문제로 한국 교회가  엄청나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계속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사운동의 결과적인 맹점으로 나타난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자들에게 최종적인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은사 자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추구하고 원하는 사람들이 은사와 성령 체험을, 앞에서 말했듯 교회내 계급과 성도 개인의 어떤 능력치 평가, 그리고 은근한 과시와 자랑, 심지어 도덕성이 결여된 은사운동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본질에서 흐려진 은사운동은 성도 개인의 구원이나 세상에서의 가치관 형성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죄의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장 큽니다.

그리고 공허한 성도들의 영혼 속에 비집고 먹혀들어가기 시작한 것이 구원파, 베뢰아의 이론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똑똑하고 열정적인 신자들이 그곳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목사들 중에 그쪽 계통에서 성경공부라는 과정을 통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굵직한 교단, 선교단체, 조직들에 많이 분포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구원파 뿐만이 아니라 의식있는 청년들을 향해 신천지도 들어왔습니다. 이단은 기존 교회의 반면교사요,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구약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앗수르, 바벨론, 바사제국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은사운동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은사는 교회에서 있어야 할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어떤 체험이나 좁은 것으로 보고, 그 체험을 이기적으로 사용할 때 은사가 무가치해지는 것입니다. 은사는 체험하는 은사 외에도 훨씬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추구보다도 더 많은 풍성한 성장과 경험의 기회들이 성경말씀과 교회 공동체에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낮아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단한 은사를 받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말로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데, 모두 자기는 살고 영광 받겠다고 하니 교회가 살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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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시골집에 헤더의 선교원 선생님이신 공태숙 선생님과 그 선생님의 친구인 김유신희 선생님이 방문하여 밤늦게까지 친교를 나누고, 그 다음날 부여읍내 백마강변의 코스모스관광지와 무주 나마스떼하우스를 방문했습니다.

두 분과의 계속적인 만남과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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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는 시골에서 자라는 사자견(엄마)과 삽살개(아빠) 믹스견입니다. 털색은 엄마를 닮고, 체형은 아빠를 닮았습니다. 점점 자라면서 그 중간의 모습을 띄는데, 약 20kg정도입니다. 크기는 사자견처럼 크지는 않습니다. 털이 흔들거리는 모습은 사자견 모습입니다.

오랜만에 헤더 언니랑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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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세기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제국(후에 신성로마제국이 됨)의 샤를마뉴 황제가 있었습니다. 유럽은 로마시대 이후 황제라고 불리운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첫 번째가 되었고, 훗날 나폴레옹, 심지어 히틀러까지 이런 로마제국의 영광을 흠모하며 샤를마뉴 같은 세계 제패자가 되기 원했습니다.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768~814 재위)는 흔히 칼 대제라고도 잘 알려진 프랑스와 독일 지방의 옛 왕국인 프랑크의 국왕이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신자였고 그의 서유럽 통일로 인해 유럽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침입을 저지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과 영광만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난 후 나를 무덤에 묻을 때, 로마 황제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앉힌 채, 머리에는 왕관을 씌운 채로, 그리고 손에는 내가 살아서 권위를 휘두르던 황제의 홀은 내 손에 쥔 채로 장사지내라. 또 잊지 말 것은 내 몸과 어깨에 황제의 망토를 걸치고 내가 원하는 책 한 권을 펴 놓은 상태로 내 무릎위에 올려놓도록 해다오.”

마침내 황제는 주후 814년에 죽게 되었고, 그 후 약 200년의 세월이 지난 후(997) 오토 3세라고 하는 황제는 기록을 통해 샤를마뉴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신하들을 명하여 과연 샤를마뉴 황제의 유언에 따라 유족과 신하들이 샤를마뉴 황제의 시신을 장사지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무덤발굴단은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조사 결과 모든 것이 샤를마뉴 황제의 요구대로 시행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렇게 대리석 옥좌에 앉힌 황제의 모습은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황제의 망토는 좀 벌레에 의해 거의 다 갉아 먹혀 버렸고, 황제의 몸은 뼈만 남은 채 그의 과거의 위엄과 권위로 가득 찼던 모습은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섬뜩한 분위기 속에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무릎 뼈 위에는 자신이 원했던 책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손가락 뼈 중 하나는 그 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36)

디지털 황제인 스티브 잡스가 죽었습니다. 그만큼 세계에 영향을 많이 끼친 이도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도 준비했을까요?

죽음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최고의 발명품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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