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1. 능력있는 믿음

 

마가복음 9:9~32.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30]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지난 (2009) 11일 어느 일간지에 우리나라의 두 사람의 천주교 추기경 중 한 사람인 정진석씨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5천명의 사람들이 각자 준비했던 도시락을 꺼내 먹은 것이다.” 저는 그 기사를 보고 한국의 천주교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적을 믿어야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상식과 가치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임을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참고.

중앙일보 11일자 42: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난해 1229, 서울 명동성당 옆 집무실에서 정진석(78·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을 만났다. 경기 한파의 찬바람이 몰아치는 신년 벽두를 향해 정 추기경은 고통참다운 행복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를 돌아보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일화다윈 200주년, 진화론 150주년에 대해 깊고도 파격적인 답을 던졌다.

-일주일 전 성탄 메시지에서 경제만 좋아지면 우리의 모든 삶이 다 해결될 것이란 헛된 기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헛된 기대입니까.

사람은 물질만 가지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부탄이나 방글라데시 국민을 보세요. 그들의 행복지수는 문명국보다 더 높아요. 행복의 요건은 물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거죠. 마음 여하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질, 그 자체가 행복을 좌우하진 않아요. 행복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겁니다. 물질을 가져도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을 가졌으면서도 그걸 초월하죠. 그런 사람들은 덕()이 있는 이들이죠.”

오병이어일화는 기적 아닌 사랑

그 말끝에 정 추기경은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일화를 꺼냈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자와 아이들은 제외한 수치)의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적(異蹟) 일화다. 정 추기경은 그 사건을 기적으로 풀지 않았다. 대신 예수의 마음예수의 사랑으로 풀었다.

성경을 보세요. 어린이와 여자를 빼고도 5000명이 모였죠. 그럼 적어도 70008000명은 됐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50명씩, 혹은 100명씩 무리 지어 앉게 하셨어요. 서로 낯선 이들이었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죠. 물론 그중 일부는 같은 마을 사람도 있었겠죠.”

당시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모인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성경에는 기록돼 있다.

정 추기경은 사람들 사이에는 친밀도가 있다고 했다. “가장 친밀한 이들이 가족이죠. 그 다음에 학벌로 뭉친 이들, 이권을 위해 모인 사람들 등이죠. 그럼 가장 친밀도가 낮은 이들은 누굴까요. 시장 바닥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음을 안 여는 사이죠.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모인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죠.”

정 추기경은 예수가 올린 감사의 기도에 주목했다. “그게 어떤 기도였을까요. 그건 마음을 열어라.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저마다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도시락을 꺼냈던 거죠.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이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죠. 그렇게 나누고 남은 게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는 겁니다. 거기에 오병이어일화의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그건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사람들 마음 여는 기적 필요한 때

-그럼 오병이어일화에서 예수가 보인 기적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도 없어요.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진정한 기적은 뭘까요. 다름 아닌 꼭꼭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여신 거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도시락을 나누게 하신 거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죠.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10년 전 외환위기 때를 보세요.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죠. 그런 공동체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한마음이 돼야 합니다. 한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요.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고가 아닙니다.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 중략

진화론은 신의 섭리 알아가는 과정

2009년은 진화론의 해.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의 고전인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다. 한때 발명가의 꿈을 꿨던 공학도(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답게 정 추기경은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은 우주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은 결국 신의 섭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며 진화론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답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시간을 전제로 한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등생물이 나왔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럼 시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를 알아야죠. 시간은 빅뱅 때 생겼습니다. 빅뱅으로 인해 이 우주가 생겼고, 그로 인해 시간과 공간도 생긴 거죠. 그래서 매 순간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하느님도 시간의 영향을 받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계신 분이죠. 그러니 시작이 없고, 변화가 없고, 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14,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모세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라고 기록돼 있는 겁니다. 그게 영원한 법이죠.”

 

이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단지 사랑이시니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그들의 요지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셨거나 사흘 만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에 집착하지 말고 사랑의 정신만을 붙들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런 신학과 사상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그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은 허무맹랑한 종교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세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의 한 흐름입니다. 특히 정진석씨는 한 가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고 여러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을 인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가 합해진 잡종입니다. 그 이론들은 벌써 오래된 이론이고 이 인간중심적인 논리들 속에서도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의 진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목사나 신부가 성경은 가짜다라고 해야 박수 쳐주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이런데서 이상한 정신도착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과거에는 천주교나 기독교나 성경 진리를 위해 순교까지 했는데 요즘은 그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성경과 그 진리를 부인해야 인기를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뿐 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도 복음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신앙을 가장한 이상한 이론들과 궤변들이 마치 진리인양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그들에게 물러가라 사탄아라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리와 믿음이 혼탁한 때에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인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되 그야말로 겨우 믿어주는 바닥을 기는 믿음입니다. 즉 능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변화산의 영광에서 내려 온 제자들은 세상의 현실과 고난에 직면해서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신앙의 문제는 신자가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고 사람을 높이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윤리적 기준을 주님보다 더 내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8:27~33에 있었던 사건과 내용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27~33,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을 구체적으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고난의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채근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을 해보신적 없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 성령 충만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다 되는데 왜 그렇게 답답한 상태에서 굳이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셨을까요? 나중에 성령 받으면 다 알 텐데.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미리 가르치셨을까요?

 

이것이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입니다.

 

마가복음 8:34~3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가 요구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제자가 마땅히 가야할 길, 제자도 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몇 주 전에 그 십자가는 상황에 따라 겪는 고난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길 뇌두고 어려운 길 가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이루어가는 제자는 자기의 의()가 부수어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것을 온 인격에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성령 체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성령 체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 체험의 감동과 경험이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갖가지 상황과 사건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하는 지혜까지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제자들이 복음의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억했던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체험도 살아있는 말씀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성령 충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단 한 번의 그냥 은혜로운 사건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우리도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그 주님의 열심과 의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도를 가르치는 상황이 변화산 사건(9:1~8)을 통해 다른 국면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변화산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거의 얼이 빠졌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고난을 예언하셨습니다. 즉 변화산의 영광은 앞으로의 영광이며 고난이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의 40일 광야에서 시험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이미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서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영광이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이 있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에는 16세기의 유명한 화가인 라파엘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변화입니다. 맨 위에는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된 모습이 있고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맨 아래 부분에는 귀신들린 아이와 그 부모, 그리고 다른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라파엘은 이 그림을 통해 극적인 두 가지 장면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산 아래 세상의 밑바닥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의 입장으로 상상해 보시면서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황홀하면 걷기는 걷되 구름을 걷듯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산을 내려올 때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장소에서 점차 땅으로 내려올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한 소년과 그 가족들의 절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한 고백이 이 사건과 비교하여 하나의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8~9,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 영광스러운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살 때에는 어떠하다고요? 모든 세상의 구경거리처럼 세상의 대접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산을 내려오니 소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예수님이 묻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즉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마가복음 9:17~18,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간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가복음 9: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상태를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살 수도 없고 귀신의 의지대로 쓰러지고 불과 물에 자기 몸을 던집니다. 그런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의 심정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의 현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그 현장으로 가야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주께서 택한 자들을 그런 상황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직장만 잘 다니면 그럭저럭 편히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이 세상의 고통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착각과 오해를 깨뜨리고 살도록 때로는 극한적인 상황으로도 밀어 넣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세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교육?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마가복음 9:18,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믿음이 없는 세대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먼저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는 병 고치는 능력을 받고 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선생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OO교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보고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기 시작합니까?

 

마가복음 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할 수 있거든.” 죽은 자도 살리신 분에게 할 수 있거든 해 주시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 원인은 제자들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고 그런 무능한 모습은 그들이 따르고 있는 선생님 즉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제자를 보고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무능은 바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믿음입니다.

 

28, 29절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9:28~29,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이다입니다. 제자들은 과거의 자신들의 경험과 능력을 믿고 기적을 행하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영적인 삶의 진정한 시험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기도까지 하고...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주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자세와 심정으로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하고 금식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에게 십자가는 필수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일부러 내 것으로 만드십시오. 쉼 없이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분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마가복음 40. 십자가와 영광

 

마가복음 8:27~9:13,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6:13~28,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적 행하심과 말씀으로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과 십자가의 비밀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두 번에 걸친 적은 분량의 떡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과 병 고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참고.

가이사랴 빌립보:

예루살렘 북쪽 20마일, 갈릴리해 북쪽 20마일, 헐몬 산속에 있는 성. 데가볼리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중에 하나로 다메섹 남서쪽 약 80Km지점. 헐몬 남쪽의 경사가 심하며 경치 좋은 산간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1) 구약 시대 바알갓(11:17) 또는 바알 헤르몬(3:3).

(2) 분봉왕 헤롯 빌립이 화려하게 확장하고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이사랴라 하였고 자기의 이름을 붙여 빌립보를 추가 하였다.

(3)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 했던 곳(16:13~16).

 

이스라엘의 최북단 헤르몬산의 발치에 자리 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이 BC 2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Augustus)로부터 선물로 얻은 도시로, 희랍시대에는 판(Pan) 신전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자기의 수도로 정하면서 로마의 황제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더한 가이사랴 빌립보라 칭하였습니다. 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물(초당 20)이 이 도시를 적셔줄 뿐만 아니라 요단강을 통하여 갈릴리 호수로 모이게 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 북쪽 끝에 있고 페니키아, 다른 한쪽으로는 수리아와 접경을 하고 있는 변방지역입니다. 자연히 그곳은 이방 민족의 종교에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우상인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헬라 문명이 침투하자 그 우상에 심취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명 자체가 로마 황제 가이사와 분봉 왕 빌립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우상, 그리이스의 신화, 그리고 로마 황제의 신격화가 어우러진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요, 바로 그곳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27)고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 요한,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마태복음은 예레미야 첨가)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열거한 인물들은 영웅적, 신화적, 이상적인 존재들입니다. 불의를 질타한 세례 요한, 신비로운 권능을 지닌 엘리야,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같은 모습을 예수에게서 발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과 욕망을 채워줄 구세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거룩하신 하나님, 구세주로 알지 못하고, 또 믿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맞추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 축복을 주시는 능력자, 혹은 사랑을 실천하는 휴머니즘의 화신으로 예수를 받듭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고 물으신 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고 물으셨습니다. 즉 온 유대 사람들이든, 가이사랴 빌립보 사람이든지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말하고 믿든지 너희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개인적인 결단과 고백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과 결단을 지닌 사람만이 교회의 일원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 누구의 도움도 그분과 나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나를 어떻게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늘 홀로 결단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올바른 대답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전 떡을 떼시어 수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시고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고 답답한 제자들을 걱정하실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었습니다.

 

주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기름 부음 받으신 메시야이시고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예수님의 일부분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기대하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켜주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 영웅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사람들, 죄인들을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구원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30절 이후).

 

그런데 먼저 이 말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시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공적으로 공포하면 메시야를 고대하던 백성들이 로마에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십자가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이 어그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8:30~31,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합니다.

 

마가복음 8:32~33,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2에서는 좀 더 자세한 베드로의 말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6:22,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가복음 8:32에서 간하다라는 말은 3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epitimao, 꾸짖다, 경계하다, 간하다, 책망하다)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간한 것은 공손한 태도가 아니고 감정이 드러나는 강한 제안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후 줄곧 예수님의 언행과 행적은 십자가를 향하신 일로 발전해 나갑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부터 제자들에게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인기를 얻고 왕이 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망하고 죽겠다는 그리스도라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시면 이제는 이 민족과 세상을 한 번 돌아보셔야지요. 지금까지 당신을 따라다닌 우리는 뭡니까?”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도 이 점에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수준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와 제자는 같기도 하면서 다릅니다.

 

신자들은 주님을 향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원하고 가기를 원하는 곳은 주님이 원하는 곳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당시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고 죽으시겠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광이 우선이지 십자가가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33절에, 제자들을 향하여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베드로가 간곡히 말했던 것은 실은 사탄이 역사한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한 베드로가 곧 이어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신자들에게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믿음으로 한다고 했을 때, 숨어있던 자기의 의와 자기의 욕심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육에 숨어있는 자기 의는 그 모든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예수님도 이 문제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참된 제자도를 위한 십자가는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죽음입니다.

3.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의 원리는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도는 잃는 것이 복입니다. 남을 누르고 경쟁해서 이기고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신이 참된 신이라고 믿는 것이 세상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었고 인간들의 이런 욕망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리는 위선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서기 9세기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제국(후에 신성로마제국이 됨)의 샤를마뉴 황제가 있었습니다. 유럽은 로마시대 이후 황제라고 불리운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첫 번째가 되었고, 훗날 나폴레옹, 심지어 히틀러까지 이런 로마제국의 영광을 흠모하며 샤를마뉴 같은 세계 패자가 되기 원했습니다.

 

참고.

샤를마뉴 대제

샤를 1, 카를 1세라고도 함. 별칭은 대제(Carolus Magnus/Charles le Grand/Karl der Grosse/Charles the Great).

742. 4. 2.~814. 1. 28. 아우스트라시아 아헨(엑스라샤펠),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는 흔히 칼 대제라고도 잘 알려진 프랑스와 독일 지방의 옛 왕국인 프랑크의 국왕이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신자였고 그의 서유럽 통일로 인해 유럽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침입을 저지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과 영광만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난 후 나를 무덤에 묻을 때, 로마 황제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앉힌 채, 머리에는 왕관을 씌운 채로, 그리고 손에는 내가 살아서 권위를 휘두르던 황제의 홀은 내 손에 쥔 채로 장사지내라. 또 잊지 말 것은 내 몸과 어깨에 황제의 망토를 걸치고 내가 원하는 책 한 권을 펴 놓은 상태로 내 무릎위에 올려놓도록 해다오.”

 

마침내 황제는 주후 814년에 죽게 되었고, 그 후 약 200년의 세월이 지난 후(997) 오토 3세라고 하는 황제는 기록을 통해 샤를마뉴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신하들을 명하여 과연 샤를마뉴 황제의 유언에 따라 유족과 신하들이 샤를마뉴 황제의 시신을 장사지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무덤발굴단은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조사 결과 모든 것이 샤를마뉴 황제의 요구대로 시행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렇게 대리석 옥좌에 앉힌 황제의 모습은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황제의 망토는 좀 벌레에 의해 거의 다 갉아 먹혀 버렸고, 황제의 몸은 뼈만 남은 채 그의 과거의 위엄과 권위로 가득 찼던 모습은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섬뜩한 분위기 속에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무릎 뼈 위에는 자신이 원했던 책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손가락 뼈 중 하나는 그 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가복음 8:36)

 

참고.

Here he died, and entered his tomb in the church himself had founded. Into this sepulchre the emperor Otho III. dared to penetrate in the year 997, impelled by a motive of vile and varlet-like curiosity. They say the dead monarch confronted his living visitor in the great marble chair in which he had been seated at his own command, haughty and inflexible as in life, the ivory sceptre in his ivory fingers, his white skull crowned with the diadem of gold. The peeping emperor looked upon him with awe, half afraid of the mysterious and penetrating shadows that reached forth out of his rayless eyes. Before he left, however, he peered about, touched the sceptre and the throne, fingered this and that, and having, as it were, trimmed the nails and combed the beard of the great spectre, retired with a valet's bow. Observing that Charlemagne had lost most of his nose, he caused it to be replaced in gold very delicately chiseled and enchased. The sacrilege was repeated by Frederick Barbarossa in 1165, who went farther and forced Charlemagne to get up from his chair before him. The corpse, in rising, fell in pieces, which have been dispersed through Europe as relics. We saw such of them as remain here at the Chapelle. I was allowed, for about the equivalent of an American dollar, to measure the Occidental emperor's legthey call it his arm. And then, as a makeweight in the bargain, the venal sacristan placed in my hands the head of Charlemagne.I thought Hohenfels would have sunk to the ground with disgust. He colored deeply and dragged me into the air. "I am ashamed of every drop of German blood in my veins," he cried. "What are we to think of the commerce of these wretches, for whom the very wounds of Cæsar are the lips of a money-box?"

I had given back the skull, as Hamlet returns the skull of Yorick to the grave-digger, and was dusting my fingers with a handkerchief, as hundreds of Hamlets have dusted theirs. I said, "'Thrift, thrift, Horatio.'"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고생스러운 시어머니일까요? 공부 안하는 자식일까요? 괴롭히는 직장 상사일까요? 아니면 질병, 경제적 어려움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이것들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십자가로서의 일을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우리가 환경에 의해 겪어나가는 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고난을 택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좋은 것을 버리고 싫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들로부터 무시와 멸시, 미움, 고난, 박해, 심지어 배반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있었나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말하자면 사탄의 시험에 간당간당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하신 6일 후,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한 것과 어쩌면 비슷합니다. 그곳이 변화산이라고 흔히 말해지는 헬몬산입니다.

 

9장에 변화산 장면이 나옵니까? 8장의 베드로의 고백과 십자가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이 제자도가 아니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제자도인데 그 고난의 뒤에는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몇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온 몸이 하얗게 변하시고 그 옆의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십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하늘의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의 영광이 이 지상에서 잠시나마 이루어졌습니다.

 

이 장면에 같이 참여했던 이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스승입니다. 그가 이 장면을 마가에게 구술할 때 아마도 엄청난 감동으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가에게 이 복음서를 쓰게 하고 얼마 후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억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고난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지키고 위로를 주고 그들의 믿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하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네로 황제의 유혹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 그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영광이나 핍박이 그의 십자가 죽음을 결코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전에는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했고 십자가 직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진정 제자였습니다.

 

그 베드로가 직접 쓴 기록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6~11,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4:12~1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변화산의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후의 예수님의 모습, 앞으로 오실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영광된 주님의 모습에 우리도 같이 참여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7:22~23,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렇게 변화되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합니다. 변화하신 예수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죽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직접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볼 모든 살아있는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9:7에 하늘의 음성이 울려 퍼지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십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고난은 없고, 십자가는 단지 믿음의 표시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로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차에 태워져서 처형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호송하던 한 군인이 이렇게 그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죽으러 가는데 무섭지 않으냐?” 선교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친구.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소.”

 

이 말이 저 자신의 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의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 39.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마가복음 8:10~26,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성경에 소경’(혹은 맹인)으로 기록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소경이 고침 받는 사건이 왜 이 본문에 등장하며 그 전후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너무 심하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이 증명해 주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엄청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의 증거를 제시하라는 요구는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정말 당연한 건가요?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증거를 듣고 보았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선언했고, 예수님 자신의 이적과 신령한 가르침을 그들이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하늘에서 오는 표적”, 말하자면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 같은 뭔가 찬란하고 보암직한 증거를 더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만약 모세의 중재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고 착각하고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다시 그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멀리서 그의 음성만 듣고도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9:16~21,

[16]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그런데 과연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확실히 하고자 요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성경적이 아니거나 실패를 했을 경우 예수님을 잡아내기 위해서였고, 그 모든 함정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시기하는 마음과 참된 거룩을 이해 못하는 그들의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선적인 일을 꾸미는 바리새인들을 떠나 예수님과 그 일행은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마침 여행 중에 음식이 떨어져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해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오해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6장의 5천명 먹이신 일과 8장의 4천명을 먹이신 일을 하시면서 누룩의 경고 말씀을 이해 못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벳새다에서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사건과 가르침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그 흐름 속에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17, 18절의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이 그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종류의 사람들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 벳새다 소경입니다. 이 세 번째 사람인 소경의 배후에는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7:31~37에 나타났던 귀먹고 어눌한 자입니다. 8장의 소경과 7장의 귀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은 실제적으로는 다른 각각의 사람이지만, 18절의 말씀을 보건대 같은 한 가지를 보여주는 동일한 비유입니다.

 

다시 세 종류의 사람들을 정리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꽉 막혀서 예수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 심적 소경이며 귀머거리입니다. 두 번째 부류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 다니지만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적인 소경입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경을 주님이 특이한 방법으로 고치시면서 제자들이 현재 어떤 영적 소경의 상태에 있는 빗대어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1. 먼저 바리새인들의 영적, 심적 소경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그 행위로 의롭게 사는 것을 신앙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순수했던 그들의 의도가 점차 자신의 신앙을 남과 비교하는 차별의 도구로 삼고, 사람에게 보여주는 외형적인 형식에 치우쳐서 권력화된 위선자들의 집단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와 하늘의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당연히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꼬투리를 찾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이적 행하심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들에게 정신적 충격은 될지언정 영혼의 감격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마음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런 영혼과 마음의 태도는 처음부터 그러했습니다. 마가복음 3:22을 기억하십니까?

 

마가복음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그들은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나 손길로 고쳐지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5천명, 4천명의 사람들이 단지 떡 몇 개로 배불리 먹고도 남는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일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고, 아니면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런 마음 닫힌 태도를 가진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수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설교를 들기도 하고 성경을 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내가 구원받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이 흘러가기만 하였다면, 예수님이 나의 인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라면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기에서 잠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하늘의 표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 가운데 흐르던 이야기에 의하면,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등장할 것이라는 통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시험한 사건을.

 

누가복음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사탄은 바리새인들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시험을 할 때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환영할만한 그럴듯한 이벤트를 생각했습니다. “만인이 바라보는 성전 위에 나타나 번지점프를 하면서 성전 앞에 착 내려앉으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라고 복잡하게 증명할 필요 없이 누구나 다 믿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왕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에게는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런 일 한 번만 하면, 3년 반 씩이나 돌아다니면서 고생하면서 오해받으면서 복잡하게 수고하고 떠들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도 필요 없겠지요?

 

그런 사탄의 유혹이 다시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나옵니다. “하늘의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겠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뿐입니까? “당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당신 교회에 나가겠소.” 이 요구에 화답하여 대단한 목사, 대단한 교회 건물을 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들입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이 못된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복음을 믿고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교회 겉모습을 보고, 사람의 껍데기를 보고 교회에 나가니 마니를 결정하겠다는 태도는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핑계를 대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마가복음 8:12~13,

[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저희를 떠나...

 

주님은 하늘을 보시며 탄식하십니다. ‘탄식하다라는 단어 ναστενάξας 천둥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에서 끓어올랐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깊은 속의 아픔이 하늘을 향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표적들을 보고도 또 올무를 씌우기 위한 표적을 구하는 저들을 보시고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향해서 예수님은 탄식하고는 그들을 떠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최후의 날에는 그들의 불신앙이 응당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증거와 말씀을 듣고서도 마음 문을 닫고 주님을 떠나 살려고 하는 이 세대에 대한 주님의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버리운 자들은 결국 어떤 기회도 없이 주님도 떠나시고 맙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의도적으로 주님을 거부하고 복음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주님께 자신의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시길 권합니다. 주님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도 다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선택은 여러분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주님을 믿고 예배하기 위해 오신 분들은 가장 고귀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2. 두 번째로 제자들의 영적 소경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침 배 안에 떡 한 개 밖에 없어서 예수님이 그 떡 하나를 가지고 실물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답답한 제자들이 그 말씀을 오해합니다. 자신들이 먹을 것이 준비하지 못해서 예수님이 기분 나쁘신가 보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기 12장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2:14~15,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10번째 재앙의 날에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하나의 절기를 삼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입니다. 이때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데 그 기간을 무교절이라 합니다.

 

누룩은 밀가루 음식을 부풀게 하는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이로운 곰팡이입니다. 옛날에는 쉽게 음식을 부풀리기 위해 집집마다 누룩덩어리를 준비해 놓고 사용했는데 무교절에는 그 누룩을 집 안에서 모두 없애버립니다. 이것은 아주 적은 물질이 큰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의 화학적 현상을 통해서 죄악이 얼마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지 경계하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그들의 율법형식주의입니다.

 

헤롯은 당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악한 왕입니다. 헤롯 집안은 대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 교회를 핍박한 자입니다. ‘헤롯의 누룩이란 자신의 세상 권세와 욕망을 위해 진리를 저버리는 세속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조금 전,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피해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종교적인 위선과 세상 사랑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죄가 얼마든지 한 사람과 공동체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먹을 떡이 없다고 그러시는가?’ 수군댑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인 눈이 떠있지 않는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에도 이런 수준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수준을 육적 상태라고 합니다. 영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육신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미 6장에 미리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6: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음이 둔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닫혀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 다음에 질문 세례를 몇 번이나 퍼 부우십니까? 17절에서 20절까지 물음표가 들어갈 말이 몇 번인가 세어 보세요. ... 9번입니다. 저 같으면 한 대씩 쥐어박았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건망증 증상이 있는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글쎄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줄곧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잊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간()이 아마 새까맣게 탔을 겁니다. 얼마나 까마귀고기를 먹은 민족인지 아예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마에, 팔목에 들으라 이스라엘아라며 성경구절을 붙여 놓고 보게 했겠습니까? 그렇게 해도 불순종했잖아요?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 서있는 저나, 여러분도 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갈릴리 바다 위의 제자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시편 103:1~22,

[1]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7]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8]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사람을 잊지 아니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과거에 어떤 은혜로운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서, 지금, 어떠하십니까?

 

과거에 주님의 예비하심을 체험하셨습니까? 그러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이 그렇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어째서 주님이 5천명 먹이고, 4천명 먹이신 이적이 마가복음에 두 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는지 여러분의 삶에서 이해가 되나요?

 

3.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육신의 소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벳새다의 소경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배 위에서 예수님이 떡 한 덩어리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현실 모습을 보여주는 실물 설교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기억하고 자신의 제자인 마가에게 기록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야 깨달았던 것이지요. 이제 그것을 우리 교회 성도들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마가복음 7:31 이하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 이 소경과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벳새다의 소경입니까? 귀먹고 어눌한 자는 이방인입니다. 벳새다는 유대인 지역이나 신약에서 문제가 많은 곳입니다.

 

마태복음 11: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 지역은 이미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 완악함이 마치 바리새인과 같은 불신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를 고치시고도 소문을 내지 말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을 고치시는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합니다. 보통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모습과 다릅니다. 대개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침을 바르고 안수하고, 또 다시 안수하시면서 그 눈이 점차 시력을 회복하는 상황이 하나하나 묘사됩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마가복음 8:23~25,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처음에 소경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마치 나무 같다고 합니다. 즉 희끗희끗해서 사람인지 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시력이 아주 낮은 수준입니다. 그의 시력은 완전히 장님은 아니지만 아직 불완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안수하셨을 때에야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모두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던 제자들은 소경의 말을 들으면서 뭔가 부끄러운 느낌을 받았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소경의 상태가 자신들과 같다는 것을 나중에는 제대로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어떤 사람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13~32,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떡을 떼어주셔야 겨우 우리는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의 몸이 뜯겨 피를 흘리셔야 겨우 주님의 사랑을 아주 적게나마 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결국 세상 만물을 보게 된 벳새다 소경처럼 우리는 지금 비록 온전히 주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나 결국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다 알지 못하고 불순종의 삶의 흔적들이 많으나 주께서 우리의 소경된 눈을 이미 고치셨으니 점차 나아질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요한계시록 22:3~4,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이 자리에 아직 주님을 모르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권합니다. 주님께 구하면 들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직 세상의 일과 염려에 마음에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지 못한 영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힌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중심을 드려 결단하십시오. 주께서 점차 우리를 주님의 제자들로 삼아 믿음을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38.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추수감사절)

 


마가복음 8:1~10,

[1]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오늘 본문의 이적 이야기는 마가복음 6장의 오병이어 이적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그 두 이야기를 구별해 나가기 위해 편의상 간단히 5천명 이야기, 4천명 이야기로 부르고자 합니다. 먼저 두 이야기의 차이를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다른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4천명을 먹이신 이 이야기는 오직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39,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2. 5천명 이야기에서는 그 5천명의 사람들이 하루 동안 예수님과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4천명은 사흘입니다(2).

 

3. 5천명 이야기에서 사용된 음식은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4천명 이야기에서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입니다.

 

4. 5천명은 유대인이었지만, 4천명은 거의 모두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5천명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했고, 4천명에서는 이방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5. 5천명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지만 4천명에서는 그냥 땅 바닥에 앉았습니다.

 

6. 5천명에서는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같이 축사하셨으나, 4천명에서는 각기 따로 축사하셨습니다. 4천명의 경우에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자 각기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란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는 뜻입니다.

 

7. 5천명에서는 남은 음식이 12바구니입니다. 작은 크기의 바구니입니다. 그러나 4천명에서 남은 일곱 광주리는 우리가 옛날 쌀집에서 본 쌀 담는 볏짚 광주리 크기입니다. 같은 단어가 바로 사도행전에서 사울이 다메섹에서 탈출할 때 타고 내려간 그 광주리입니다. 즉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큰 광주리입니다.

 

사도행전 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그러니까 4천명 이야기에서는 숫자로서는 비록 적지만 양에 있어서는 오히려 5천명 이야기보다 많이 남은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의 비슷한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또 여기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러분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기 위하신 것일까요?

 

8장의 다음 부분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두 이야기를 일부러 사용하셨고, 그 두 사건을 비교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8:19~21,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즉 주님은 5천명과 4천명을 먹이신 두 이야기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제자들은 비슷한 이적을 두 번 경험하고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이적들이 반복의 형태로 기록된 이유는 반복그 자체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아무리 똑똑한 학생이라도 단번에 기억은 해도 그 단번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는 학습이 때로 지겹고 힘들지만 그것만큼 좋은 학습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걸음을 배울 때 어떻게 배웠습니까? 어떤 사람도 석가모니처럼 태어나자마자 걸으면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하며 외칠 수는 없습니다. 서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구구단도 될 때까지 지겹게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 번의 반복 학습에서 실패했습니다. 무엇을 실패했습니까?

 

1.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천지를 뒤집어서라도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런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5천명을 먹이실 때의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15백 년 전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건을 연상시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이적을 경험하고 새로운 왕이 나왔다고 열광적인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적을 통해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떡임을 특히 요한복음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을이 베들레헴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떡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병점이라는 지명이 여럿이 있습니다. 병점도 떡거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늘의 만나의 원형이고 생명의 떡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의 근원과 공급자가 바로 예수인 것을 말씀하는 내용이 그 이적들의 이유입니다.

 

2.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갖고 계신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듯 예수님도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의 삶의 필요에도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아시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4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먹을 것을 다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여기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오지 그 분만이 우리의 영생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떡과 물고기를 떼어 나누어 주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면서 각기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한 조각씩을 제자들에게 전하십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종들의 손길을 이용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제자들의 손길을 사용하시는 방법을 원하셨습니다. 해리 포터 같은 영화에서는 식탁 위의 촛불을 한꺼번에 켤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의 접시에 동시에 같은 종류의 음식을 장만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마법 같은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장면이 마가복음 6장과 8장에 세밀하게 묘사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마가복음 8:6~7,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12바구니가 남은 5천명 이야기에서는, 12란 숫자는 특히 이스라엘 12지파를 생각나게 하고 유대인인 12 제자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4천명을 먹이고 7 광주리가 남았을 때, 7이란 숫자는 또한 성경에서 완벽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7: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출애굽기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여호수아 6:15,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마태복음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일곱 별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4천명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나라의 복을 얻을 수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똑같이 구원의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7장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이방인들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경우를 다른 유대인들 앞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명은 이방인인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여지게 되었습니다.

 

8절에, 4천명의 이방인들은 5천명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배불리 먹고도 풍족해서 음식이 남았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채워주십니다. 7광주리의 남은 음식은 12바구니보다 훨씬 많이 남은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적은 것으로도 다 채우시고도 남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떡이나 물질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적습니다. 아니 모든 것에 불가능하고 아예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다시 받은 것으로 세상에 전해보십시오. 우리의 복은 더욱 넘칩니다.

 

플라나리아라는 물속에 사는 작은 생물이 있습니다. 1~2cm 정도입니다. 아주 맑은 물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생물은 스스로도 번식을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반으로 잘라도 일주일이면 각기 잘려진 반 토막이 각각의 하나로 성장해서 두 마리로 됩니다. 이 내용이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무가 자랄 때 어떻게 자랍니까? 먼저 땅에서 새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작은 줄기에서 나뭇가지들이 갈라져 나옵니다. 즉 스스로 잘라지고 나누어지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몸이 자랄 때 어떻게 자랍니까? 몸을 이루는 세포가 덩치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포가 분열합니다. 나누어집니다.

 

믿음이 자랄 때 어떻게 자랄까요? 나누어질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이 나누어졌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상징적입니다. 어떤 고대 사형 제도처럼 몸이 여러 개로 분시 되는 형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히고 창과 가시관으로 몸이 찔리면서 그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박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미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나중에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제자들이 깨닫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생명의 떡을 세상에 나누어주며 살아야 하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은 만날 때마다 떡을 떼며 주님의 가르침과 십자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사도행전에 여러 번 기록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사도행전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도행전 27: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또한 사도 바울도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4,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리고 바울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라 합니까?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살면서 누린 것,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일부를 주님께 감사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여러분의 전부를 담아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나눔의 방법으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의 적은 것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37.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시고

 

 

마가복음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비유가 많이 있지만, 귀신들리고 병든 자들을 고치신 이적들 자체도 비유가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귀먹고 어눌한 자, 즉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한 장애인이 주님을 만나 고침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몇 가지를 말씀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중요한 신체적 감각기관에 장애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죄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도 단절되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31절을 보면, 이 지역은 이방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데가볼리는 4장의 군대귀신 들린 자의 고향 거라사 지역입니다. 즉 이 사람은 민족적으로도 하나님과 본래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가신의 민족이나 친구, 가족들로부터 정상적인 대우나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그는 완전히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나 치료를 받았고 또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그런 사람에게서 시작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비슷한 상황 속으로몰아가기도 하십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렇게 시작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 영적인 상태는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낮아지고 자신의 죄악의 비참함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혹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그런 영적인 갈등과 고통을 심각하게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은 재벌 집에 태어났다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구원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런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그렇게 영적인 깨달음과 결단이 필요한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발견이 없으면 주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구원을 얻었는지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2절에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비록 그가 심각한 장애인이지만 아무것도 정보를 듣지 못하기에 병자를 고쳐주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글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정상인들도 힘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웃사람으로부터 적어도 동정을 받았습니다. 그를 친지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전도란 이것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전도는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예수님이 고쳐주시고자 하십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마가복음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먼저 그를 사람들로부터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아주 개인적으로 다루셨습니다. 이 사건을 마가복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이 있습니까? 그 경험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했습니까? 그 경험들이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시려 한다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믿지 않는 자를 주님이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실 때는 먼저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로 구별해 내십니다. 그는 예전에는 기쁜 일이었던 것들이 죄악으로 비추어지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전에는 싫고 귀찮은 일들이 이제는 반갑고 기쁜 일로 변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택한 자를 구원하시고 성령께서 그 속에서 역사할 때에, 그 사람은 세상과 구별되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이 좋아지기 시작할 뿐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개인적인 특별한 방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죄인인 우리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각자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단 하나뿐이지만, 우리의 기도와 문제를 다루시는 방법은 우리의 기대와 다른 주님의 방법들이 있으며 여러 가지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순서대로 우리의 신앙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 혀에 대셨습니다.

 

귀 먹고 어눌한 자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상징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감각적 신경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이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종의 수화(手話)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민한 귀속으로 누군가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종의 의사표시(싸인)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들을 수 있게 해주겠다.”

 

그러나 그 장면을 바라보는 주변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이게 뭐하는 짓이람? 더럽게!” “이런 행동들이 기적을 행한다는 하나님의 사람이 할 짓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건드리실 때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간절함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지?”

 

바로 그것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문둥병자를 가까이 해서도 만져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일부러 만지셨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그를 낫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만지셨습니다.

 

여기에서 만졌다는 단어는 그냥 슬쩍 건드린 것이 아니라 옛날 육영수여사가 문둥병자와 악수한 사진이 기억나는데 그런 식으로 움켜잡거나 껴안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문둥병에 걸리면 그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가족들로 부터도입니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이 끌어안았습니다.

 

주님은 귀먹은 사람이 듣던지 안 듣던지 그냥 말씀만 하셔도 그를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만질 수 없는 사람을 만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하시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버림받은 사람, 즉 죄인들을 향해 오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이 여러분을 끌어 안으셨습니까?

 

나는 너의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다 이해한다.”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고 침을 묻혀 그의 혀에 바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말하게 해주겠다.”

 

이제 주님과 그의 눈이 서로 빛났을 것입니다. “알겠니? 그리고 믿겠니?” “, 알겠습니다. 그리고 믿겠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모습은 이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 59:1~3,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역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환경을 통해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신자로부터 경함했을 수 있습니다. 친구들, 이웃사람... 혹은 성경을 읽다가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만지심입니다.

 

2. 예수님이 하늘을 보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늘을 바라보셨을까요? 귀 먹은 자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말을 걸고 계신 것입니다. 그의 시선을 이제 하늘로 돌리십니다. “너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느냐?”

 

시편 121:1~2,

[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출애굽기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도움이 오는 유일한 곳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 것이 너무 쉽다고 생각해서 기독교의 구원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으려면 사람들의 의로운 일들이 더 첨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행, 율법준수 등이 구원을 가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도리어 무가치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이 탄식하셨습니다.

 

사랑의 탄식입니다. 안타까움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가장 안타까운 고통의 탄식을 내어비치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고통의 탄식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로마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군병의 창이 그의 가슴을 찢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은 단지 이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에게만 향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에서 고통 받고 구원받아야 할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하신,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고통스러운 비명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이 그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명 같은 탄식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의 십자가의 비명의 탄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하사 고통당하신 주님. 저를 구원해 저세요.”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 고개 위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탄식 소리를 들었습니까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탄식이라는 같은 단어가 이렇게도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에 겨운 신음입니다.

 

주님의 종이라면 우리도 그런 탄식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을 위해 그렇게 탄식하여야 합니다.

 

갈라디아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4. 예수님이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아람어)라는 말의 뜻은 열려라혹은 풀려라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말씀으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을 구원하는 능력이요 진리입니다.

 

로마서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구원하시는 능력은 그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구별하심을 체험하고, 그의 시선과 함께하고, 그의 탄식을 들었을지라도, 그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10:17)고 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것으로 깨달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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