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1. 능력있는 믿음
마가복음 9:9~32.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30]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지난 (2009년) 1월 1일 어느 일간지에 우리나라의 두 사람의 천주교 추기경 중 한 사람인 정진석씨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5천명의 사람들이 각자 준비했던 도시락을 꺼내 먹은 것이다.” 저는 그 기사를 보고 한국의 천주교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적을 믿어야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상식과 가치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임을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참고.
중앙일보 1월 1일자 42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명동성당 옆 집무실에서 정진석(78·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을 만났다. 경기 한파의 찬바람이 몰아치는 신년 벽두를 향해 정 추기경은 ‘고통’과 ‘참다운 행복’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를 돌아보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일화’와 ‘다윈 200주년, 진화론 150주년’에 대해 깊고도 파격적인 답을 던졌다.
-일주일 전 성탄 메시지에서 ‘경제만 좋아지면 우리의 모든 삶이 다 해결될 것이란 헛된 기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헛된 기대’입니까.
“사람은 물질만 가지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부탄이나 방글라데시 국민을 보세요. 그들의 행복지수는 문명국보다 더 높아요. 행복의 요건은 물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거죠. 마음 여하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질, 그 자체가 행복을 좌우하진 않아요. 행복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겁니다. 물질을 가져도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을 가졌으면서도 그걸 초월하죠. 그런 사람들은 덕(德)이 있는 이들이죠.”
◆‘오병이어’ 일화는 기적 아닌 사랑
그 말끝에 정 추기경은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 일화를 꺼냈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여자와 아이들은 제외한 수치)의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적(異蹟) 일화다. 정 추기경은 그 사건을 ‘기적’으로 풀지 않았다. 대신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사랑’으로 풀었다.
“성경을 보세요. 어린이와 여자를 빼고도 5000명이 모였죠. 그럼 적어도 7000∼8000명은 됐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50명씩, 혹은 100명씩 무리 지어 앉게 하셨어요. 서로 낯선 이들이었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죠. 물론 그중 일부는 같은 마을 사람도 있었겠죠.”
당시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모인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성경에는 기록돼 있다.
정 추기경은 사람들 사이에는 ‘친밀도’가 있다고 했다. “가장 친밀한 이들이 가족이죠. 그 다음에 학벌로 뭉친 이들, 이권을 위해 모인 사람들 등이죠. 그럼 가장 친밀도가 낮은 이들은 누굴까요. 시장 바닥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음을 안 여는 사이죠.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모인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죠.”
정 추기경은 예수가 올린 ‘감사의 기도’에 주목했다. “그게 어떤 기도였을까요. 그건 ‘마음을 열어라.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저마다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도시락을 꺼냈던 거죠.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이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죠. 그렇게 나누고 남은 게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는 겁니다. 거기에 ‘오병이어’ 일화의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그건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사람들 마음 여는 기적 필요한 때
-그럼 ‘오병이어’ 일화에서 예수가 보인 기적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도 없어요.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진정한 기적은 뭘까요. 다름 아닌 꼭꼭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여신 거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도시락을 나누게 하신 거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죠.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10년 전 외환위기 때를 보세요.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죠. 그런 공동체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한마음이 돼야 합니다. 한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요.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고가 아닙니다.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 중략
◆‘진화론’은 신의 섭리 알아가는 과정
2009년은 ‘진화론의 해’다.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의 고전인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다. 한때 발명가의 꿈을 꿨던 공학도(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답게 정 추기경은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은 우주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은 결국 신의 섭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며 ‘진화론’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답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시간’을 전제로 한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등생물이 나왔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럼 ‘시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를 알아야죠. 시간은 빅뱅 때 생겼습니다. 빅뱅으로 인해 이 우주가 생겼고, 그로 인해 시간과 공간도 생긴 거죠. 그래서 매 순간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하느님도 시간의 영향을 받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계신 분이죠. 그러니 시작이 없고, 변화가 없고, 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장14절,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모세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라고 기록돼 있는 겁니다. 그게 영원한 법이죠.”
이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단지 사랑이시니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그들의 요지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셨거나 사흘 만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에 집착하지 말고 사랑의 정신만을 붙들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런 신학과 사상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그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은 허무맹랑한 종교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세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의 한 흐름입니다. 특히 정진석씨는 한 가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고 여러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을 인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가 합해진 잡종입니다. 그 이론들은 벌써 오래된 이론이고 이 인간중심적인 논리들 속에서도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의 진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목사나 신부가 “성경은 가짜다”라고 해야 박수 쳐주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이런데서 이상한 정신도착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천주교나 기독교나 성경 진리를 위해 순교까지 했는데 요즘은 그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성경과 그 진리를 부인해야 인기를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뿐 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도 복음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신앙을 가장한 이상한 이론들과 궤변들이 마치 진리인양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그들에게 “물러가라 사탄아”라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리와 믿음이 혼탁한 때에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인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되 그야말로 겨우 믿어주는 바닥을 기는 믿음입니다. 즉 능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변화산의 영광에서 내려 온 제자들은 세상의 현실과 고난에 직면해서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신앙의 문제는 신자가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고 사람을 높이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윤리적 기준을 주님보다 더 내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8:27~33에 있었던 사건과 내용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27~33,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을 구체적으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고난의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채근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을 해보신적 없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 성령 충만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다 되는데 왜 그렇게 답답한 상태에서 굳이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셨을까요? 나중에 성령 받으면 다 알 텐데.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미리 가르치셨을까요?
이것이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입니다.
마가복음 8:34~3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가 요구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제자가 마땅히 가야할 길, 제자도 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몇 주 전에 그 십자가는 상황에 따라 겪는 고난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길 뇌두고 어려운 길 가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이루어가는 제자는 자기의 의(義)가 부수어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것을 온 인격에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성령 체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성령 체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 체험의 감동과 경험이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갖가지 상황과 사건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하는 지혜까지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제자들이 복음의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억했던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체험도 살아있는 말씀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성령 충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단 한 번의 그냥 은혜로운 사건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우리도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그 주님의 열심과 의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도를 가르치는 상황이 변화산 사건(9:1~8)을 통해 다른 국면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변화산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거의 얼이 빠졌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고난을 예언하셨습니다. 즉 변화산의 영광은 앞으로의 영광이며 고난이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의 40일 광야에서 시험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이미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서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영광이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이 있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에는 16세기의 유명한 화가인 라파엘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변화”입니다. 맨 위에는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된 모습이 있고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맨 아래 부분에는 귀신들린 아이와 그 부모, 그리고 다른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라파엘은 이 그림을 통해 극적인 두 가지 장면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산 아래 세상의 밑바닥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의 입장으로 상상해 보시면서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황홀하면 걷기는 걷되 구름을 걷듯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산을 내려올 때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장소에서 점차 땅으로 내려올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한 소년과 그 가족들의 절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한 고백이 이 사건과 비교하여 하나의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8~9,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 영광스러운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살 때에는 어떠하다고요? 모든 세상의 구경거리처럼 세상의 대접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산을 내려오니 소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예수님이 묻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즉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마가복음 9:17~18,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간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가복음 9: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상태를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살 수도 없고 귀신의 의지대로 쓰러지고 불과 물에 자기 몸을 던집니다. 그런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의 심정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의 현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그 현장으로 가야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주께서 택한 자들을 그런 상황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직장만 잘 다니면 그럭저럭 편히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이 세상의 고통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착각과 오해를 깨뜨리고 살도록 때로는 극한적인 상황으로도 밀어 넣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세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돈? 교육?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마가복음 9:18,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믿음이 없는 세대”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먼저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는 병 고치는 능력을 받고 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선생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OO교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보고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기 시작합니까?
마가복음 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할 수 있거든.” 죽은 자도 살리신 분에게 ‘할 수 있거든 해 주시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 원인은 제자들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고 그런 무능한 모습은 그들이 따르고 있는 선생님 즉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제자를 보고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무능은 바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믿음입니다.
28, 29절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9:28~29,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이다”입니다. 제자들은 과거의 자신들의 경험과 능력을 믿고 기적을 행하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영적인 삶의 진정한 시험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기도까지 하고...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주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자세와 심정으로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하고 금식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에게 십자가는 필수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일부러 내 것으로 만드십시오. 쉼 없이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분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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