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4. 두 렙돈
마가복음 12:35~44,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질문 내용 | 성경 구절 | 질문자 |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과 비유로 대답하심 | 11:27~12:12 |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
세금에 대한 질문 | 12:13~17 | 바리새인, 헤롯당 |
부활에 대한 질문 | 12:18~27 | 사두개인 |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 12:28~34 | 서기관 |
마가복음은 십자가로 향하신 주님과 그 십자가를 따라야 할 제자들의 앞길을 위한 제자도를 가르치신 주님의 행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장까지는 대중들에게 이적 행하심과 가르치심으로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중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즉 말씀의 주제가 많이 좁혀졌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당신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아셨고,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자연적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집중적인 질문과 관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동과 가르치심의 주제가 그들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기시고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과의 논쟁을 통해 바로 그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진실입니다. 진실됨이란 양심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입니다.
신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인 것은 신앙으로 알겠는데 삶과 행위에 있어서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신감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타인과 세상에 불의하지도 불법도 아니라면 사람은 양심의 자유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세상에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세상에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처럼 권세를 잃었을 때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12장의 논쟁들은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의 전쟁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었고(11:27~28), 예수님도 맞받아치시는데 이승엽이 홈런 치듯 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바리새인들의 따귀가 돌아갈 지경입니다.
그리고 12:1~11의 반역하는 농부들의 비유 이야기는 아주 노골적이었습니다. 이에 발끈한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12절).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그렇다고 그들이 케이오 패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다고 합니다.
“책잡다”라는 뜻이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뜻이지만 예수님에게 객관적인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기분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시험한 것입니다.
사자와 호랑이를 같이 키우는 사파리에서는 사자와 호랑이는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습성도 모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같이 힘을 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동물이 나타날 때입니다.
라이거라고 사자와 호랑이의 잡종이 있습니다. 라이거는 보통의 사자나 호랑이보다 체격이 더 크고 힘이 셉니다. 그래서 라이거가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 나타나면 이들은 라이거에게 같이 덤벼든다고 합니다.
13절에서는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라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거의 상종하지 않는 파입니다. 헤롯당은 헤롯왕가를 지지하는 친로마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바리새인과도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 대망사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대교적이고 민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헤롯당과도 연합했고,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이 반대하던 로마법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연합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악한 감정을 품었는지 이 사실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로마에 세금 바치는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 대부분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금에 대해서 그랬습니다. 심지어 주후 6년에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다라는 민족 운동가가 일어나 로마에 세금 바치는 문제로 반대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금문제는 로마에 반대가 되고 반역이 되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유다가 로마의 속국이니 로마에게 강제적으로 세금을 바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납세가 옳다하면 유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에 반역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매우 현명한 답변으로 그들의 공세를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17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질문을 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본래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처음부터 잘못 본 것입니다. 천국 시민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육적으로는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더라도 신앙의 자유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세상 권력의 속박이나 의무사항이 있더라도 그 권세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 만큼 신자들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중요한 내용은 15절에,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예수님이 그들의 외식함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반대하면서도 헤롯당과 손을 잡았고, 헤롯당도 마찬가지로 만나지도 않는 그들과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세금문제를 단지 자신을 사로잡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이란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추악한 이익을 가리기 위해 거짓된 언행을 하는 일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양심을 속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2:18~27까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이란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새파에 비해 소수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명기 25:5의 말씀의 내용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나의 예로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은 후에 천국에 갔을 때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과 결혼한 한 여자와의 부부관계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신명기 25:5,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즉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도 믿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영국의 목회자의 75%가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는 오히려 덜 비양심적입니다. 물론 성경을 믿지도 않으면서 목회를 한다는 자체가 양심적이지도 않은 외식자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질문과 답변의 결과는 그들의 참패였습니다. 그들의 모략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질문과 답변을 듣고 있던 한 서기관이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12:28~34)라는 질문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성경에 남기신 율법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정한 ‘장로들의 유전’ 같은 전통적인 율법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때로는 그 계명들이 실생활에 서로 상충되는 상황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하는 서기관도 결국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답변에 ‘옳소이다’라고 하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첫 번째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 두 번째 세금에 대한 질문, 세 번째 부활에 대한 질문, 그리고 네 번째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2:41~46)과 누가복음(20:41~44)에서는 예수님이 서기관들에게 질문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질문하는 반문식 질문을 하신 것(12:35)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위기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거꾸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5절,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즉 이 말씀은 메시야가 진정으로 다윗의 자손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것으로서 그들이 기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로마의 압제에서 다윗왕의 왕권을 회복하는 다윗의 후손인 구세주입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못하는 서기관들을 대신해 시편 110:1을 근거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님과 메시야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도덕적, 영적인 이해 부족을 폭로하셨고 예수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의 위선과 외식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시며 신앙의 순수와 진실함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 38절 이하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마침 성전 앞에 있는 연보궤에 어느 여인이 연보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여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의 전부를 연보하였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심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 여인의 행위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불의와 거짓은 감추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질문을 한 종교 지도자들과 완전히 대조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여인을 하나의 가르침의 본으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기도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의 가진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연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렙돈을 연보한 그 여인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과부란 당시 사회에서 약자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권세도 없고, 지식도 없고, 재산도 없지만 대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진실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위치는 가장 낮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진실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제자의 삶은 무엇인가요?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욕망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헌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과부는 그렇게 연보를 하고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으니 곧 복을 받고 가난한 형편을 면하게 되었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고, 혹은 어떤 병 고침이나 역사를 바라고 헌금을 하면 대가를 바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은 그냥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가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에 헌금을 하면 목사가 받아서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를 극렬히 반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목사가 다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단이나 그 비슷한 종교단체들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일반 교회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아까워하고 비록 할지라도 체면유지나 미안한 마음에서 부조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종종 헌금봉투에 기도 제목을 적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옳은지는 아직 저도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기도의 조건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기도와 헌금은 별개로 생각하세요.
여러분, 헌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과부를 칭찬한 것이 그의 중심을 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이 마케팅 가치가 높은 것, 즉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는 일들이 평범한 것 보다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연쇄 살인범 강호순이 옥중에서 회개하여 예수 믿는 것과 평범한 사람이 예수 믿는 것 중에 어는 것이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될까요? 똑같습니다. 다 같은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깡패가 회개해서 예수 믿고 몇 년 후에 목사가 되어 짠 나타나서 간증집회 다니면 더 은혜가 되고 뭔가 있을 줄 착각합니다. 절대 아닙니다.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전 개인적으로 연예인 출신이나 범죄자 출신 목회자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달란트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굳이 목사가 되어야 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자신의 인생이 종교적인 변화를 겪을 때 그 변화의 정점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인물로 종교지도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기존의 목사들도 특히 부흥사들이 자신의 세력과 추종자들을 구축하기 위해 좀 특이한 회심자들은 ‘주의 종이 되시오’라는 주문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전 두드러기가 나요.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직후 많은 간증 들어보셨죠. 우리나라의 가장 호화로운 백화점이었습니다. 5층 건물이 부실시공과 건물주의 욕심으로 500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기 직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서 건물 밖으로 나갔더니 곧 바로 건물이 무너졌더라. 그래서 예수 믿게 되거나 아니면 그전까지 신앙이 약했다가 그 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줄 알고 신앙적인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비슷한 간증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부러우셨습니까? ‘야, 나도 저런 비슷한 체험을 했으면 더 잘 믿을 텐데...’
강호순이 예수 믿는 것과 보통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다르지 않듯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병고침 받고 다시 살거나 기적적으로 어떤 체험을 해서 예수 믿는 것과 그냥 여러분 발로 평범한 가운데 또박또박 걸어서 교회 나오신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적인 인생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분들은 구원 받을 길이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하나님께 죄짓고 살았기 때문에 범죄자 출신 목사들은 인격적인 문제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병에서 고침 받는 것도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은혜죠. 진정으로 그런 체험을 하신 분들은 제 말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안되시면 한 번 더!
그러나 평범하게 예수 믿고 있는 여러분이 만약 특별한 체험이 더 멋있고 더 화끈하고 더 신앙이 있는 역사로 착각하시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세상적인 가치 있는 것을, 마케팅 가치가 높은 것을 바라고 산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눈여겨보신 가치 있는 과부의 연보는 남들 눈에 뜨이는 많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효험이 있어 보이는 어떤 체험이나 극적 변화가 아닙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그냥 평범한 동전 두 개 일뿐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이 상태에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목숨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가장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여러분 자신을 진심을 담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두 렙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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