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0. 제자도5 - 섬김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Luke 9:23-24
Jesus said to them all: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e will save it.
“I've just got to find myself.” Won't ever happen. We do not “find ourselves, our life” by pursuing it. We find it by losing it to something or someone greater than ourselves. We find our life be losing it to Jesus and the work of his Kingdom.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때에, 제자들은 여전히 서로 높아지고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진정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반대로 남을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제자도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세상에 태어나면 세포분열을 통해 성장을 합니다. 자란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신자도 자라야 합니다.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면 새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라납니다. 신자들이 자란다는 말은 육체의 성장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척도를,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 헌금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느냐로 가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호통 치는 교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과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자의 머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인생관, 생각이 바뀌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이 내 삶이요 사고방식이었다면 신자의 가치관은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자동차가 소형이어서 기죽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못가서 창피하다면 그것은 삶의 철학도 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아직 자라나는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한 경우입니다.
머리가 변하십시오.
신자의 머리는 옛 사람의 머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자라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가끔 바울의 이름의 뜻이 ‘작은 자’라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일제시대 일본 성경학자의 잘못된 해석이 지금까지 전달), 이름이 ‘작다’라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바울 자신의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4세기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설교자요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4척(133cm) 단구의 사람이지만 하늘에 닿은 듯이 큰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Ιωaννηs ο Χρυσwστομοs, 349경~407)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세상의 원리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빼앗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이기려는 삶에서 속임, 거짓, 부패, 폭력이 나옵니다. 그러나 남에게 양보하고 주는 삶에서 평화, 용서, 기쁨, 행복이 나옵니다.
‘콰이(Kwai)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커다란 전축(요즘의 오디오)를 통해 그 주제곡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LP판이라고 요즘은 보기도 힘듭니다. 흑백영화에서 영국군들이 휘파람 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 영화는 원래 ‘콰이(Kwai)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콰이(Kwai)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은 작가인 어네스트 골든이 자기가 겪은 일을 쓴 전기적 실화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얀마 국경 부근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포로로 잡혀온 영국군 대령 니콜슨(알렉 기네스)은 전형적인 군인 기질을 가진 완고한 장교이다. 일본군 포로수용소장 사이토 대좌(세슈 하야카와)는 엄격하지만 인간미를 갖추었다.
콰이강 계곡에 타이 방콕과 미얀마 양곤을 잇는 철도용 다리를 건설하라는 임무가 포로수용소에 주어지자 사이토 대좌는 니콜슨 대령과 마찰을 빚게 된다.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영국 장교까지 노동을 시키려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대항하는 니콜슨과 사이토의 알력 속에 미군 포로 시어즈(윌리엄 홀던)는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다. 니콜슨 대령은 사이토 대좌를 누르고 투철한 군인 정신과 지도력을 발휘해 독단으로 다리를 완공시킨다. 다리가 완공되는 날 시어즈는 영국군 유격대와 함께 나타나 다리에 폭파장치를 한다. 고관을 태운 첫 기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리를 건너다 니콜슨의 눈앞에서 다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다.
콰이강의 다리는 점령국 일본과 패전국 영국이 서로의 자존심을 대결하는 상징적 구축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파괴되고 만다. 다리가 파괴됨으로써 제국주의도 함께 붕괴되는 것을 영화 속에서 암시해준다. 다리와 기차가 함께 무너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윌리엄 홀던, 알렉 기네스, 잭 호킨스의 명연기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멋지게 울려퍼지는 주제가 《콰이강의 행진》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 그동안 멜러 작품을 만들어온 데이비드 린 감독은 웅장한 규모의 이 영화로 아카데미에서 첫 감독상을 받았다.
1958년 제3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어네스트 골든은 이차대전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콰이 계곡에서 일본군을 위해 태국 서부지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철교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포로수용소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굶주림, 가혹한 노동, 일본군의 학대, 이런 가운데서 수백 명의 포로가 죽어갑니다. 포로들은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사회가 되어 동물들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어네스트 골든은 포로가 될 때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상처에서 오는 고통은 날로 심해지고 굶주림도 견딜 수 없었고, 어느 날 어네스트 골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서 삶을 포기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같은 처지인 포로 한 사람이 자기를 정성껏 간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어네스트 골든을 간호해 준 포로는 이름 모르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크리스챤 동료 포로의 희생적인 봉사로 그는 용기를 얻었고 삶의 의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간호해 준 사람을 따라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힘을 합해 다른 포로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수용소를 관리하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본군에 대해서도 힘을 합해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일본군은 이 요구에 굴복하고 맙니다.
한 기독교인 포로의 봉사를 통해 육신의 생명을 되찾고 신앙을 갖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된 어네스트 골든은 훗날 자신의 이 체험을 소설로 쓰면서 그 소설에 이런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봉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인생의 본분을 게을리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어네스트 골든은 ‘콰이 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뿌리와 전통도 또한 본래 남을 섬기는 제자도였습니다. 초기의 서양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골육이 이 땅의 거름이 되기까지 이 나라와 교회를 섬기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라는 묘비를 남기기까지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에 천국에서 큰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크게 성장한 원인 중의 하나가 외국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흔적을 마포 양화진의 선교사들의 묘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포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공원묘지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국을 위해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입니다. 그 무덤 앞에 서 있는 묘비의 묘비명들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헐버트 선교사)는 묘비명도 있고,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고 새겨진 묘비명도 있습니다.
헐버트 선교사(Hormer B. Hulbert)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고종황제는 열강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모두 다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오게 되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온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겪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다.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백악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있었다. 그 밀약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도록 되어있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한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왔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1949년 8월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08년 떠나서, 40년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참으로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기간에 그를 부르셨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의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또한 그곳에는 다른 120명의 선교사들의 묘지와 같이 한국에 온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과 그 가족들이 거기 묻혀 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서 침몰할 때 순직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일단 육지까지 헤엄쳐 나왔는데 한국어 통역이 아직 나오지 못한 것을 구하러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1902.6.11).
그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주로 이화학당을 위해 많은 일(이화학당 제 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을 하다가 순직해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이 아펜젤러 선교사의 가족 묘지가 있는데 그 앞의 묘비명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양화진 제1묘역(바-6)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을 섬기는 자들은 그 상급이 천국에서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제자도는 가장 행복한 자의 모습이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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