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0. 제자도5 - 섬김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Luke 9:23-24

Jesus said to them all: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e will save it.

 

“I've just got to find myself.” Won't ever happen. We do not “find ourselves, our life” by pursuing it. We find it by losing it to something or someone greater than ourselves. We find our life be losing it to Jesus and the work of his Kingdom.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때에, 제자들은 여전히 서로 높아지고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진정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반대로 남을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제자도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세상에 태어나면 세포분열을 통해 성장을 합니다. 자란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신자도 자라야 합니다.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면 새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라납니다. 신자들이 자란다는 말은 육체의 성장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척도를,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 헌금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느냐로 가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호통 치는 교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범사에 그에게까지자라야 한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자의 머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인생관, 생각이 바뀌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이 내 삶이요 사고방식이었다면 신자의 가치관은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자동차가 소형이어서 기죽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못가서 창피하다면 그것은 삶의 철학도 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아직 자라나는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한 경우입니다.

 

머리가 변하십시오.

신자의 머리는 옛 사람의 머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자라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가끔 바울의 이름의 뜻이 작은 자라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일제시대 일본 성경학자의 잘못된 해석이 지금까지 전달), 이름이 작다라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바울 자신의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4세기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설교자요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4(133cm) 단구의 사람이지만 하늘에 닿은 듯이 큰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Ιωaννηs ο Χρυσwστομοs, 349~407)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세상의 원리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빼앗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이기려는 삶에서 속임, 거짓, 부패, 폭력이 나옵니다. 그러나 남에게 양보하고 주는 삶에서 평화, 용서, 기쁨, 행복이 나옵니다.

 

콰이(Kwai)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커다란 전축(요즘의 오디오)를 통해 그 주제곡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LP판이라고 요즘은 보기도 힘듭니다. 흑백영화에서 영국군들이 휘파람 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 영화는 원래 콰이(Kwai)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콰이(Kwai)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은 작가인 어네스트 골든이 자기가 겪은 일을 쓴 전기적 실화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얀마 국경 부근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포로로 잡혀온 영국군 대령 니콜슨(알렉 기네스)은 전형적인 군인 기질을 가진 완고한 장교이다. 일본군 포로수용소장 사이토 대좌(세슈 하야카와)는 엄격하지만 인간미를 갖추었다.

콰이강 계곡에 타이 방콕과 미얀마 양곤을 잇는 철도용 다리를 건설하라는 임무가 포로수용소에 주어지자 사이토 대좌는 니콜슨 대령과 마찰을 빚게 된다.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영국 장교까지 노동을 시키려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대항하는 니콜슨과 사이토의 알력 속에 미군 포로 시어즈(윌리엄 홀던)는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다. 니콜슨 대령은 사이토 대좌를 누르고 투철한 군인 정신과 지도력을 발휘해 독단으로 다리를 완공시킨다. 다리가 완공되는 날 시어즈는 영국군 유격대와 함께 나타나 다리에 폭파장치를 한다. 고관을 태운 첫 기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리를 건너다 니콜슨의 눈앞에서 다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다.

콰이강의 다리는 점령국 일본과 패전국 영국이 서로의 자존심을 대결하는 상징적 구축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파괴되고 만다. 다리가 파괴됨으로써 제국주의도 함께 붕괴되는 것을 영화 속에서 암시해준다. 다리와 기차가 함께 무너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윌리엄 홀던, 알렉 기네스, 잭 호킨스의 명연기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멋지게 울려퍼지는 주제가 콰이강의 행진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 그동안 멜러 작품을 만들어온 데이비드 린 감독은 웅장한 규모의 이 영화로 아카데미에서 첫 감독상을 받았다.

1958년 제3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어네스트 골든은 이차대전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콰이 계곡에서 일본군을 위해 태국 서부지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철교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포로수용소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굶주림, 가혹한 노동, 일본군의 학대, 이런 가운데서 수백 명의 포로가 죽어갑니다. 포로들은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사회가 되어 동물들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어네스트 골든은 포로가 될 때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상처에서 오는 고통은 날로 심해지고 굶주림도 견딜 수 없었고, 어느 날 어네스트 골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서 삶을 포기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같은 처지인 포로 한 사람이 자기를 정성껏 간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어네스트 골든을 간호해 준 포로는 이름 모르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크리스챤 동료 포로의 희생적인 봉사로 그는 용기를 얻었고 삶의 의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간호해 준 사람을 따라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힘을 합해 다른 포로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수용소를 관리하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본군에 대해서도 힘을 합해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일본군은 이 요구에 굴복하고 맙니다.

 

한 기독교인 포로의 봉사를 통해 육신의 생명을 되찾고 신앙을 갖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된 어네스트 골든은 훗날 자신의 이 체험을 소설로 쓰면서 그 소설에 이런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봉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인생의 본분을 게을리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어네스트 골든은 콰이 계곡을 통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뿌리와 전통도 또한 본래 남을 섬기는 제자도였습니다. 초기의 서양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골육이 이 땅의 거름이 되기까지 이 나라와 교회를 섬기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라는 묘비를 남기기까지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에 천국에서 큰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크게 성장한 원인 중의 하나가 외국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흔적을 마포 양화진의 선교사들의 묘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포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공원묘지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국을 위해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입니다. 그 무덤 앞에 서 있는 묘비의 묘비명들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헐버트 선교사)는 묘비명도 있고,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고 새겨진 묘비명도 있습니다.

 

헐버트 선교사(Hormer B. Hulbert)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고종황제는 열강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모두 다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7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오게 되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온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겪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다.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백악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있었다. 그 밀약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도록 되어있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한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왔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19498월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08년 떠나서, 40년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참으로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기간에 그를 부르셨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의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또한 그곳에는 다른 120명의 선교사들의 묘지와 같이 한국에 온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과 그 가족들이 거기 묻혀 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서 침몰할 때 순직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일단 육지까지 헤엄쳐 나왔는데 한국어 통역이 아직 나오지 못한 것을 구하러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1902.6.11).

 

그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주로 이화학당을 위해 많은 일(이화학당 제 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을 하다가 순직해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이 아펜젤러 선교사의 가족 묘지가 있는데 그 앞의 묘비명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양화진 제1묘역(-6)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을 섬기는 자들은 그 상급이 천국에서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제자도는 가장 행복한 자의 모습이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가복음 49. 선한 이는 없다

 

마가복은 10:17~31,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어느 날 예수님께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마가는 마태(19:20)와 같이 그를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누가(18:18)는 그를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는 젊고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꺼릴 것 없는 사람이 바리새인들이 거부하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를 예수님이 귀하게 생각하신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21,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그가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이런 태도로 가르침을 청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의 자식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아니고 영적인 일에 대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제자들조차 이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매우 기이한 사건입니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예수님이 선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생에 대한 열심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어떤 사람이, “...에 대하여 광신개독들은 설명을 하라고 하는 게시판글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 몇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기독교인들의 글은 없고 기독교를 비아냥거리는 짧은 글들만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도 선하지 않다고 했는데 무슨 별 볼일 있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제외하고 일반 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수준 같습니다.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으면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보고 다만 사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다 죄인이어서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24,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던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이 영적인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나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이런 사망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12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죄로 오염되고,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이미 원죄로 죽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할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주여, 주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깨끗한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태어난 지 반 날 밖에 안 되는 갓난아이도 주님 앞에서는 깨끗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했습니다.

 

사람은 선하다는 생각은 구원 받는데 가장 큰 첫 번째 걸림돌이 됩니다.

 

전도로 유명한 미국의 H.A. Ironside(1876~1951)목사님이 캘리포니아의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백 개의 종교가 있습니다. 각 종교의 신자들은 오로지 자기들만이 올바르고 참된 진리의 종교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진리인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이언사이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수백 개의 종교라고요? 거참 이상하군요. 나는 이 세상에 종교라고는 단지 2개 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요.”

 

거짓말 마십시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만 해도 벌써 3개나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 외에 모든 종교들은 동일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종교의 형태는 2개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무엇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종교이며, 다른 하나 즉 기독교는 무엇인가 행하여진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즉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행하여진 대속을 구원의 근거로 믿으며, 결코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행하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선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한테 일어나라고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결코 아무 힘도 없고, 문자 그대로 완전히 부패하고 썩어 버려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셔야만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구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 지키는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은 그 청년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율법에 대한 원칙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혹은 양심의 법, 혹은 사람의 기본 양심에 새겨진 선한 마음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 본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율법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양심으로 부딪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게 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0계명의 제 2부인 여섯 가지 중 다섯 가지를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인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가 이미 그 계명을 지키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0계명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0,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지니라 [14] 간음하지 말지니라 [15] 도적질하지말지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마가복음 10:19,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Thou knowest the commandments, Do not commit adultery, Do not kill, Do not steal, Do not bear false witness, Defraud not, Honour thy father and mother. (KJV, 10:19)

 

마태복음 19:18,19에서는 속여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생략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이기 때문에 사람에 관한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의 내용을 다시 정리한 내용이 마지막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누가복음 18:20에서는 약간의 순서만 다를 뿐 마태복음과 거의 비슷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10번째 계명인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속여 취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살짝 내용을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그가 비록 거짓 증거를 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어떤 모종의 일에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했던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21절에서 그 계명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말씀에 청년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는 슬퍼하며 돌아갔습니다.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청년이 그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었다는 말은 낙심하고 절망한 얼굴의 표정입니다. 여기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상황묘사입니다.

 

이 청년은 10계명의 둘째 서판 즉, 사람을 상대로 지켜야 하는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탐심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비록 사람들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지는 않았을지라도(19), 물질에 대한 탐심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약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기까지 하며 배움의 열정을 가졌던 청년은 자신이 얻어 갖는문제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진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그에게 부족한 점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을 따르기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이나 십계명의 조항에서 부족한 점을 생각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탐심과 같은 세상에서의 소유와 승리에 집착해 있다면 그 청년과 똑같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땅의 것 즉, 세상의 것을 향한 마음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 노릇을 하는 우상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신자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구원과 관계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전에는 신앙을 반대하고 오히려 적대적이었다가 죽기 직전에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 얻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 큰 구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 자들이 얻는 하늘의 상급입니다.

 

예수님께 달려온 청년에게 탐심의 문제가 있어서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하듯,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죄인 됨을 알고 자신을 향한 애착을 버리고 십자가를 향해 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만이 가는 길, 제자도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소유를 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처분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본들에는 그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이 앞에 붙어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그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마가복음 48. 제자도4 - 행진 (고난주간중)

 

마가복음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이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십니다. 예전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단순한 방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가복음은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만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33,34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매를 맞고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앞일을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인줄 모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미래에 대한 도움을 구하고자 점집이나 타로카드집을 찾습니다.

 

만약 자신이 몇 년 안에 암으로 죽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모든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어떤 불행을 당하기는 하지만 눈앞의 위험과 고난을 스스로 알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2절에 보면 오히려 제자들 앞서서 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각오가 어떠했는지 주변에 함께했던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추호도 머뭇거림이나 뒤로 물러섬이 없이, 단호하고 꿋꿋하게 당신이 가야할 그 길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구원의 목적과 준비된 그 십자가 길을 향하여 주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고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여러 번역본들과 다른 공관복음서의 병행구절을 통해 그 자세한 분위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라고 우리말 성경과 NIV 영역본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과 다른 무리가 같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가복음 10:32,

They were on their way up to Jerusalem, with Jesus leading the way, and the disciples were astonished, while those who followed were afraid. Again he took the Twelve aside and told them what was going to happen to him.

 

하지만 여러 사본에 의한 구체적인 해석은, 명사 좇는 자들은 제자들 외의 다른 추종자들이 아니고, ‘좇아가면서라는 진행형 분사형태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 대한 여러 개의 헬라어 사본이 있습니다. 당시 여러 교회와 신자들이 돌려보기 위해 글을 베끼다보니 손으로 베낀 사본들마다 약간의 오차가 발생하게 되고, 고고학자와 성경학자들의 손에 들어온 그 헬라어 사본들이 오늘날까지 여러 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각각의 사본에서 발견되는 차이점들을 성경(헬라어 성경)의 각주로 집어넣어 그 차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성경 전체의 본래의 뜻과 많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마가복음 1032절을 권위 있는 사본 각주를 통해 정확히 그 뜻을 살펴보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제자들이 좇아가는 중에 놀라기도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영어성경도 어느 헬라어 사본의 전통을 따르느냐에 의해 번역이 달라집니다. NIV 성경은 70년대에 완성된 그래도 최근 번역본에 속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영역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다고 일컬어지는 KJV 영역본을 보면 제가 소개한 해석과 일치합니다.

 

마가복음 10:32,

And they were in the way going up to Jerusalem; and Jesus went before them: and they were amazed; and as they followed, they were afraid. And he took again the twelve, and began to tell them what things should happen unto him,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헬라어 성경에는 본문에 두 개의 미완료시제 동사(εθαμβουντο, εφοβουντο)가 나옵니다. 우리말로 놀라고두려워하더라로 번역되었습니다. 미완료시제란 어떤 동작이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 동작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영어의 “~하고 있었다는 과거진행형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이 본문을 설명하자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그 걸음걸이가 마치 행진하듯이 걸음을 빨리해서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는데,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워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이런 특징이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마가는 이 사건을 눈으로 본 듯 조목조목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사건 속에 직접 참여한 동행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마가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하는데 도움을 준 베드로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 장면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가복음의 내용 하나 하나를 고난과 십자가라는 관점으로 구술해 준 사도 베드로가 누구보다도 그 사건을 심도 있게 기억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기록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마가는 이런 방식으로 이 장면을 기록했습니까? 그 당시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던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과거의 부족함과 믿음 없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즉, 우리로 하여금 이 한 구절에서 예수님의 단호한 십자가 행진과 제자들의 어정쩡하고 용기 없는 걸음을 비교하라는 뜻입니다.

 

이 장면을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9:51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누가복음의 기록은 마가복음보다는 직설적이지만, 오히려 그 생동감이 줄어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즉 마가복음은 이 장면을 우리에게 훨씬 생생한 표현으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구약의 시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9:133,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런 행적을 분명히 기억했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납니다(21). 그 때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주님께 달려간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요한복음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후회와 심적인 고통 가운데 밤새 헛된 그물질을 하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늘 예수님을 그리다가 부활하신 후 자신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자신들을 부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배가 육지에 닫기도 전에 급한 마음으로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 후 그의 달리기는 훗날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목표도 없고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다른 쪽 귀로 새어 나갑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야를 바라고,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인으로 대접받을 높은 자리만을 꿈꾸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들릴 리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내 신앙의 주체요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신앙을 위한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내 신앙이 이 정도 수준이다는 자기표현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가 기복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복신앙에 더해서 또 다른 문제점이 나타났는데 신자들의 만족신앙입니다. 만족신앙은 제가 이름붙인 것입니다.

 

만족신앙이란 신자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이 심리적 자기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교회도 그렇고, 절도 그렇고 종교단체에 찾아 온 신자들이 최대한의 만족감을 갖고 돌아갈 수 있도록 종교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신자들은 그것에 만족하면 그만큼의 지갑을 엽니다.

 

절에 가면 곳곳을 관광하면서 무슨 부처니, 무슨 기도니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심지어 지붕 기와 올리는데도 그 앞에 불전함이 신자들의 정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제대로 돌면 10만원은 기본이죠? 정성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자발적인 정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에 따라 사찰의 재정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는 무슨 헌금, 무슨 집회가 차고 넘칩니다. 비신앙인의 눈으로 이런 현실을 보면 절이나 교회나 비슷하겠지요.

 

경영방법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단체들은 신자들이 자발적인 헌금을 하도록 즉 그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종교적인 서비스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놀이공원의 경영방법을 생각하면 거의 일치합니다. 종교단체에서는 노는 것이 아니고 메마른 현대인의 기호에 맞게 마음의 평화니, 영혼의 쉼이니 이런 개념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꼈으면 합니다.

 

주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그들에게 멸시를 받고 능욕을 받고 매 맞음과 십자가의 고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범죄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대신해서 죗값을 대신 치러야 하는 사명 때문에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데 제자들은 서로 좋은 자리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습니다.

 

똑같은 길을 가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은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기에 주님은 원망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 길을 올라 가셨습니다. 신앙의 길은 외롭습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은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가야할 사람은 가야 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은 외롭지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사는 길이고 영생 얻는 길이기에 가야 합니다. 외롭고 힘이 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루살렘 길을 올라가신 것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외로운 예루살렘 행진은 결국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체험을 합니다. 제자들이 그 후 완전히 변했습니다. 단지 성령 체험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양심의 가책, 그리고 부끄러움과 죄책감 속에서 지내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들은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생의 모든 소망과 가치가 끝나는 줄 알았던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알았습니다. 다락방의 성령 체험은 그 확신을 확실하게 인증한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한 후,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제자였습니까? 예수님이 마가복음 10장에서 예루살렘으로 행진하실 때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고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요한은 마가복음 10장에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달라고 간청을 했던 바로 그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대표자 격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두 사람입니다.

 

이들이 성전 문 앞에 있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앉은뱅이 거지의 영혼 속에서 얼마 전의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거지는 하루하루 남의 도움으로 살면서 그것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예배와 구원의 장소인 성전을 구걸의 장소로 이용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앉은 장소는 아마 예루살렘에서 가장 목이 좋은 구걸 장소였고 그 앉은뱅이의 하루 수입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걸인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에게는 장애를 고치고 정상인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명예를 누리고 권세를 누리고 사는 것보다 영혼이 구원 받는 일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정말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가난한 어떤 사람들은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눈을 소경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소경으로 구걸해서 사는 것이 맨 눈으로 배고픈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과거 세상 중심으로 십자가를 모르고 살 때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 두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면서 구걸을 하던 사람을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적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담대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3:1~8,

[1]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베드로는 또한 훗날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갈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심정으로 자신의 베드로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마가복음 47. 제자도3 - 호산나찬송 (종려주일)

 

마가복음 11:1~1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듣기: 베토벤(1770.12.17.~1827.3.26)9번 교향곡 합창

 

이 곡은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의 가사로 합창을 붙인 교향곡입니다. ‘환희의 송가는 독일 18세기의 괴테와 함께 고전주의를 대표한 시인인 프리드리히 쉴러가 1785년 청년 시절에 발표한 시로서 당시 독일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작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빌헤름 텔을 쓴 사람입니다.

 

베토벤이 쉴러 환희의 송가에 감동을 받고 20년 넘게 그가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구상해 오던 이 9번 교향곡 합창은 그의 음악적 위기가 한창 고조될 때 완성되었습니다. 중이염을 앓아오던 베토벤은 30세 무렵에 난청의 징조를 보였고, 40대 후반에 완전히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 후 5년 후 1824년에 이 곡을 완성했습니다.

 

그가 모든 악기와 사람의 목소리까지 동원하여 만들어 낸 이 환상의 하모니는 교향곡 중 단연 최고하는 찬사를 받습니다. 당시로서는 기악과 성악을 같은 비중으로 다룬 최초의 획기적인 곡이었습니다. 악보로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최고의 음악 중 하나입니다.

 

베토벤이 1824년 이 곡의 지휘를 맡아 초연할 당시 귀가 완전히 멀었기 때문에 등 뒤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이끌어주어 뒤를 돌아섰을 때에야 그 엄청난 갈채와 환호를 보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전곡의 중심사상은 이 환희의 송가에 집중되어 있고 1,2,3악장과 4악장의 전반부는 궁극적인 환희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악장은 강렬한 의지와 분투를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궁극적인 환희에 도달하려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2악장은 경쾌한 형식으로 혼란스러운 열광적인 난무를 그렸습니다. 이 악장은 인간이 쾌락을 추구함으로서 환희를 얻으려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3악장은 아름다운 사랑의 황홀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타인 또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통해 환희를 추구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따라서 1,2악장에 비해 숭고한 느낌을 가집니다.

 

마지막 4악장은 환희의 송가입니다. 관악기와 팀파니가 격렬한 리듬으로 환희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4악장은 시작됩니다. 이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연주를 통해 그러한 격렬함은 환희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됩니다. 이어서 1악장의 테마 강렬한 의지와 분투가 다시 짧게 소개되고 그 역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부정됩니다.

 

계속해서 2악장의 테마 열광적인 난무3악장의 테마 아름다운 사랑의 황홀경이 각각 연주되고 그들도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 후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이중주로 연주하며 조심스럽게 환희의 정의를 제시하고 타악기들이 가세하며 환희를 표현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바리톤 솔로가 등장합니다. 이 솔로 부분은 4악장 전반부에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여러 형식과 테마로 제시된 환희의 모습을 부정할 때와 같은 선율이며 우리가 원하는 환희의 소리는 이런 것이 아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음악의 흐름이 동시대를 살았던 헤겔(1770~1831)의 변증법 이론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4중창과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합주를 통해 궁극적인 환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결론지으며 4악장의 막을 내립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악기들만으로 환희의 선율이 연주되었을 때 바리톤 솔로에 의해 부정된 점입니다. 아마도 악기들은 인간을 제외한 우주만물을 의미하는 것 같고 4중창과 합창은 인간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목소리와 자연 또는 우주를 대변하는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며 주의 성호를 찬양할 때 진정한 기쁨, 환희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Ode

Friedrich von Schiller

(1~3줄은 베토벤이 씀)

O Freude, nicht diese Tone!

Sondern laß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Freude, schoner Go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uder.

Wo dein sanfter Flugel weilt.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u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osen

Folgen ihrer Rosenspur.

Ku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u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be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acsht' gen Plan,

Laufet, Bruder, euer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uder! uber'm Sternenzelt

mußein lieber Vater wohnen.

Ihr stu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opfer, Welt?

Such'ihn uber'm Sternenzelt!

Uber Sternen muß er wohnen.

 

환희에 부쳐

프리드리히 폰 쉴러

 

오 친구들이여, 이러한 소리가 아니라!

우리들은 좀 더 기쁜 노래를 부르자

좀 더 환희에 넘치는 노래를!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과 같은 빛남,

낙원의 딸이여,

우리는 광휘에 취해서

천사의 당신 성역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당신의 조화를 다시 결속시켜 놓으리라

이 세상의 풍습이 엄하게 갈라놓았던 것들을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어라,

당신의 온유한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하나 친구가 된다는,

커다란 포부를 실현한 사람,

정숙한 아내를 맞이한 사람,

그들은 환호를 울려라!

그렇다. 지구 위에서 오로지 하나의 영혼만이라도

그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함께!

하지만 이런 것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눈물 흘리며 이 단합에서 물러가야 하리.

모든 존재가 환희를 마시는

자연의 가슴에서

모든 선량한 사람, 모든 악인들까지도

그들의 장미꽃 길을 걸으리라.

자연은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송이를 주며,

죽음의 시련 겪는 친구들에게도,

한낱 벌레에게 마저 만족이 주어져

그리하여 창조주 앞에는 천사가 서리라!

 

기꺼이, 천상의 거대한 운행을 따라

태양들이 움직이듯

달려가라, 형제여, 그대의 길을,

기뻐하라, 승리를 향해 영웅 나가듯,

 

백만의 사람들이여, 너희 껴안으리!

온 세상에 보내는 입맞춤 받으라!

형제여! 별 반짝이는 저 높은 곳에

사랑스런 아버지 꼭 살아계시니

백만의 사람들아, 너희 무릎 꿇었는가?

세상이여, 너 창조주 계심을 깨달았는가?

별 반짝이는 저 높은 곳의 그를 알라!

저 높은 창조주 계시리니

 

웹사이트 참조:

http://home.nownuri.net/~gjsoft/music/beeth9.html

http://www.lifewater.co.kr/poempic/gpoet/schiller/schiller.html

 

마지막 코러스 합창 부분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Joy, beautiful divine spark, etc.

Let me embrace you, O millions!

This kiss is for the whole world!

Brothers, above the starry firmament

A loving Father must surely dwell.

Do you fall down, O millions?

Are you aware of your Creator, world?

Seek Him above the starry firmament!

For above the stars He must dwell.

 

하늘의 궁창 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 확실하도다.

그대들 모두 꿇어 엎드리는가 온 세상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창조주를 알고 있는가?

하늘의 궁창 위에 그 분을 찾으라

별 들 위에 그 분이 계시도다.

 

 

 

베토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신앙으로 이겨냅니다. 그 대표적 작품이 세계의 명곡인 9번 교향곡 합창입니다.

 

우리는 이 곡을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의도적으로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그 곡의 테마가 바로 그 드라마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어려운 환경과 역경을 음악에 대한 신념과 열정으로 이겨낸다는 메시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왔던 강마에의 유명한 대사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청력을 점점 잃어가는 여자 주인공 두루미에게 독설로 말합니다.

 

뛰어들어. 호수 보이지? 시퍼렇지? 아주 깊어. 게다가 먹통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죽고 싶을 거야. 아니 죽을지도 모르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을 수밖에 없는 거. 그게 바로 절망이고, 시련이고, 실감이야! 그걸 거쳐야만 네가 병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거고.”

 

그리고 악단이 해체되는 위기에 처한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신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자에게만 시련을 줍니다. 고로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물론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매개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비이성적인 현대세계에서 그나마 인생의 진실과 소중한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9번 교향곡 합창을 작곡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이나 그 곡에 영감을 불러 준 천재 시인 쉴러나 그들이 진정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으로 그 음악과 시를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들이 적어도 하나님께서 그 음악을 만드시도록 허락하신 자연계시를 받은 사람들이란 것은 틀림없습니다.

 

Copying Beethoven(2007)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인 9번 교향곡의 탄생 비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서 자신의 음악을 들을 수조차 없을 때입니다. 베토벤의 악보를 대신 받아 적게 되는 여자 주인공 안나 홀츠에게 베토벤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기의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게 이야기를 하는 하나님의 숨결이야. 음악은 하나님의 언어야. 우리 음악가는 인간들 중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 우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

http://usoc.snu.ac.kr/music-site/beethoven/sym-all/sym-dresden/5-04.mp3

 

그런데 베토벤의 같은 교향곡을 그대로 신앙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Henry van Dyke(1852~1933) 라는 사람으로 20세기 초의 미국의 목사이며 문학교수, 시인으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이 목사님이 1908년 윌리엄즈 대학의 신앙집회에 설교자로 초청되어 갔다가 그곳의 산천을 통해 영감을 받아 시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학 학장에게 그 시의 원고를 주면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맞춰 이 노래를 불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찬송가 13장입니다.

 

Copying Beethoven 지휘 장면:

http://blog.naver.com/happymil07?Redirect=Log&logNo=130043568304

http://video.naver.com/2008102822150798147

 

신앙을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무게와 고통에 당당하게 서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베토벤 바이러스카핑 베토벤이라면, 헨리 반 다이크는 그 감동과 의지를 찬송가로 표현했습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구름 걷히니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못알고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의 생각도 그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뻐하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의 환영을 당연한 것으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이시기에 자격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쉴러든지 베토벤이든지 TV 드라마든지 영화든지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런 작품들을 듣고 볼 때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것들이 예수님을 찬송하는 호산나 찬송으로 들리십니까?

 

세상과 자연에서, 산천초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예술가만 전율을 느끼지 않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아는 여러분들은 이 부활절을 기다리는 봄바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이 되는 누가복음 19장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찬양을 들으시는 장면에서 특이한 이야기가 더 첨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누가복음 19: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러자,

 

누가복음 19:39~40,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노래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돈이 있어야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평안은 건강해야, 잘 생겨야, 결혼을 잘해야, 직장이 든든해야 평화롭게 산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핵무기가 있어야, 미사일이 있어야 나라가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그런 것 하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평화를 전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전해 받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런 것들이 없어도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나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찬양하실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죽은 베토벤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야 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면 길바닥의 돌들도 소리 질러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상에서 어떤 상황과 위기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돌보다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마가복음 46. 제자도

 

마가복음 10:1~16,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며칠 전 제 친구 목사가 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제게 자신이 기도 중에 체험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예배가 끝났는데도 교회 일로 너무 마음이 답답해서 교인들을 모두 보내고 강대상에서 혼자 기도하는데 누군가 옆에 서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었답니다. 환상이죠.

 

그리고 자신에게 예수님이 종말의 주님을 전하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면서 현대의 종말의식이 사라지고 현실과 물질에 안주한 교회들을 한탄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말씀을 전해야 겠다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나 위대한 부흥을 일으킨 신앙의 선각자들은 종말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진정한 제자로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종말을 인식하고 행동한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순절기간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보아 온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일부러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곧 그 길을 갈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제자들도 훗날 그 길을 기쁘게 갑니다. 이것이 종말의식입니다.

 

제가 주보에 쓸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찾다가 아주 재미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외국에서 오래 전에 어느 전신주에 붙은 전도지를 찍은 사진입니다. 그 밑에 달린 댓글이 더 재미있습니다. “Damn, I missed it.” 번역하면, “젠장, 놓쳤잖아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독교의 영향을 받은 거의 모든 외국에서도 그랬습니다. 결국 당시의 과격한 종말론도 자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입품이었던 겁니다.

 

1992년 그때 얼마나 떠들었습니까? 거짓 종말론 신봉자들이 그날 밤 휴거한다고 모여서 기도하는 장면을 자정까지 TV로 찍고 생방송을 했는데 결국 생 쇼가 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죠.

 

그래서 진정한 종말론이 무색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교회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면 이단시되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시각을 웃기는 말로 치부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것도 매우 위험합니다만, 종말론에 대한 바른 신학과 신앙이 우선해야 합니다.

 

진정한 종말신앙은 매일의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의 십자가 제자로서 잊지 않는 것이 진정한 종말의식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0장에서는 이혼 혹은 결혼에 대한 말씀과 어린아이와 천국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지난 마가복음 강해 시간에는 특히 이혼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대해 같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혼문제와 어린아이의 문제를 같이 묶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한 내용은 신명기 241~2절에 기록되어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신명기 24:1~2,

[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리고 당시 기원전 100여 년 전부터, 힐렐학파와 샴마이학파라는 두 개의 유대교 학파들이 이혼의 문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정리를 하자면, 샴마이파는 이혼에 대해 보수적이었는데, 이혼의 근거로 수치 되는 일을 강조하여 간음이나 성적 범죄에 대해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힐렐파는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아주 사소한 이유라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힐렐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가 길에서 자신의 친오빠를 만나 장시간 이야기하는 것도 이혼 사유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어떤 학파인지는 모릅니다만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혼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면 예수님이 둘 중 한 학파의 견해를 지지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반대 학파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니고 거꾸로, ‘적의 친구는 적이다라는 사고지요.

 

그들은 예수님과 근본적으로 사고방식의 구조부터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 때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어 보내도록 명한 것은 이혼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피해를 고려하여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즉 어떤 여성이 남편에게 학대 받고 이혼 당했을 때 공식적인 이혼증서를 받게 하여 나중에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법은 남자들에 의해 무절제하게 행하여지던 이혼을 억제시키기 위한 것이며 당시 사회적 약자들인 여자들이 남자들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내가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 증서만 써주고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다는 그들의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5절 이하에 있습니다.

 

[5] ...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과 결혼에 대한 진리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완악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둔감하고 사랑이 결핍된 마음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로서 남자들이 함부로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자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혼을 최소한으로 억제시키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혼 증서가 없으면 이혼 후에도 여성은 한 남편의 아내로 계속 남아있게 되고, 다시 결혼하면 사람들로부터 창녀 취급당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여성이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신명기 24장 전체를 잘 읽어보면, 구약 율법의 취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24장에서는 처음에는 이혼의 문제, 다음은 결혼한 지 일 년 동안은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는 내용,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생활필수품으로 돈을 꾸게 하지 못하게 하는 등, 특히 당시의 가장 힘없는 약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고아와 과부를 위한 규정으로 24장을 마치고 있습니다.

 

즉 신명기 24장을 비롯한 구약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세히 규정한 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세상의 법제도의 관점에서 보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려하니까 바리새인들 같은 오류가 나오게 됩니다.

 

결혼에 있어서 처음부터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결혼하면 그 결혼의 결과로 당연히 이혼할 확률이 많아집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전 세계 3위인 50%로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혼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가정 내의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 폭력, 도박을 포함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도 사람들이 살다보면 진짜 어처구니없고 어쩔 수 없는 이혼의 사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런 사회현상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저는 용서와 화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깨어진 가정일지라도 다시 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들도 이제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가정 상담과 신앙훈련에 준비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한다면, 교회는 이 세상의 머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머리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모두 교회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세상에서 이혼과 가정의 파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그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제대로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사탄이 기뻐하는 일들이 당연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한 달도 안 되서 이혼한 부부도 보았습니다. 그런 이혼을 청년이혼이라고 한답니다. 요즘에는 대입이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 가는데 지장이 갈까봐 꾹 참았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맘 놓고 이혼하는 겁니다. ‘황혼이혼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오래 전에 재혼한 90대 할아버지와 80대 할머니가 재산문제로 이혼한다고 합니다.

 

이혼을 하면 당사자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오랜 시간을 고통을 받습니다만 가장 큰 피해자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요즘에는 워낙 이혼하는 가정들이 많아서 이제는 그런 아이들도 상처를 덜 받을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한 번 받은 상처가 평생을 지배하고 모든 사회생활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장난감, 컴퓨터, 게임기, 휴대폰, 연예인 되기 등이겠지만, 아마 조금 있으면 부모가 이혼하지 않는 것혹은 이혼한 부모가 다시 합하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엄마만 뿔나지 않습니다. 부모의 이혼에서 가장 뿔나는 사람은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이혼문제에 대해 학파차원의 심각한 논쟁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그 당시에도 이혼문제가 사회적으로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당시의 이혼은 오늘날의 이혼과 다릅니다. 당시 이혼이란 다분히 남자 위주의 결정이었고, 그 원인도 인간의 완악함, 용서 없는 마음, 그리고 욕망이었습니다. 당시는 성인 남성위주의 사회구조였기 때문에 여자들이나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초기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율법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기득권자들은 당시 성경인 구약 율법을 하나님의 순전한 영감으로 해석하기보다 사회 주도층인 성인남자들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학파들의 논쟁이 오히려 이런 잘못된 관행을 용납하는 배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악함과 욕심이 율법의 해석이라는 방법으로 선한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 목적은 약자를 지켜주기 싫다는 겁니다. 이런 일에 바리새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화석화된머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듯,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악함은 그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전 사회적이고 어떤 역사에도 없었던 특이한 가정 파괴 현상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교회 안의 이혼 가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혼한 사람들, 이혼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혼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장자연 리스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일면입니다. 그 리스트에 들어간 사람들은 실제로 그 일에 관계가 없더라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식입니다.

 

나는 이혼 안 했으니 거룩한 가정이라고요? 천만의 말씀, 다 마음으로는 벌써 백 번 이혼했고, 다 파괴범이고, 다 음행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리스트에서 주님의 보혈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단지 이혼과 가정의 분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죄와 고통이 현실화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안했으니 문제없다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독사의 자식들 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독사의 자식들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다는 교회들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혼문제로 시험하려 했고, 바리새인들보다는 낫겠지만 제자들까지도 어린아이를 예수님이 가까이하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고 아이들을 가까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분해하셨습니다. 즉 속이 상했다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는 말은 섬긴다는 뜻이 아니고 받아들인다(receive)’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단지 나이만 어린 어린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 어린아이와 같이입니다. 즉 어른이라도, 노인이라도, 부자라도, 어린 아이와 같이 주님을 믿는다면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어린이처럼 됩니까? 어린이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어린이도 사람인 이상 죄가 있습니다. 이기적일 때가 있고 그릇된 고집이 있습니다. 말썽도 피우고 분별력이 없는 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어린 아이의 수준은 부모를 따라 주님의 축복하심을 바라고 나온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 부모가 건강하고 행복한 부모인지 아니면 이혼 직전의 불행한 부모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한 삶은 자신들의 자녀에게는 반복되지 않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주님께 찾았고, 앞으로의 자녀들의 행복이 바로 주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가 자녀들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기꺼이 순종하고 얌전하게 주님을 바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도 가정도 없습니다. 자녀들도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 뿐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 완벽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깨진 마음이고 상한 마음입니다.

 

이 시간에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것이 진리인줄로 아는 모든 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설교를 무조건 믿으면 영적으로 무지한 겁니다. 잘 분별하십시오. 말세가 가까울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때로 설교를 죽 쑬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설교자가 다 설교를 능숙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한 가지 공통된 하나가 있는데, ‘그 말씀을 위해 죽기로 각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삯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점을 느끼시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비록 재주는 부족하여도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주님의 기뻐하시는 제자로 살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온갖 풍상이 있습니다. 가정의 위험으로 사탄은 우리를 시험합니다. 비록 한 때의 고통으로 가정의 분열을 겪은 분들은 그 상태 그대로 주님께 나아오시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나만 잘되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도움을 구하지 마시고,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간구를 하십시오. 비록 용서 못할 배우자였더라도, 못난 자식들이었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진짜 죄인인 내가 은혜로 용서받은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사랑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십자가일지 누가 압니까?

 

마가복음 10장에는 이렇게 결혼의 신성함과 어린아이에 대한 말씀이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그러한 기록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주님의 제자인 교회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심정으로 가정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약한 자들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어제 신문(2009.3.21, 중앙일보)에 시골(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 배제비골)의 어느 가난한 목사님 가정(윤익상 48, 이명자 49)이 자신들도 외동딸자식이 있는데도 10년 동안 일곱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대신 키워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혼하거나 버림받은 아이들, 신체적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경계하고 마음을 열지 않다가 결국 헌신적인 그 부부의 사랑에 부모의 사랑을 느꼈다고 합니다.

 

천국 제일 좋은 곳은 아마 순교자들 다음으로 이 부부가 갈 것 같습니다. 이 분들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분들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당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정말 중요한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사는 일입니다.

 

내 고집과 내 주장과 내 자존심마저도 주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소서.

 

그것을 경험하는 일들이 무슨 영화처럼 멋진 배경음악이 나오는 순간이 아닙니다. 모욕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철저히 깨지는 때입니다. 죽음처럼 정말 견디기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먼저 십자가를 살면서 체험한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4:11,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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