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6. 한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사람이 제일 견디기 힘든 일은 돈이나 사랑의 배신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 인격체로, 사람으로 대접을 못 받을 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가장 견디지 못합니다.

 

한국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제일 높은 나라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스웨덴, 노르웨이가 그랬다고 공부한 기억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재산이 있거나 인기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그렇게 자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해서 입니다.

 

저는 대형 마트 같은 곳에 갈 때 기분이 나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옷을 파는 가게 옆을 지나면 판매원들이 제 옷을 쳐다보고, 구두 가게 옆을 지나면 신발을 바라보고... 자신들이 팔고자 하는 물건과 제가 갖고 있는 같은 종류의 물건을 비교할 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느낌 받으신 적 있죠? 이상하게 종업원들이 한결 같이 손님의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짓지 않고, 아이 컨택,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카트 컨택, 쇼핑 카트 안의 물건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손님이 인격으로 대접받아야 기분이 좋은데 상품의 소유자로만 취급당합니다. “뭘 샀나?” 비교 당하는 것 같아 기분 안 좋습니다. 아마 종업원들이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없거나, 아니면 판매 의욕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직업병 같은 현상 같습니다. 종업원들이 창고에서 나오면서 왜 허공에 대고 인사합니까? 손님의 눈을 바라보고 손님을 향해야지요. 대형 마트 경영진은 본인이 직접 쇼핑을 해보지 않아서 이 중요한 문제점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어떤 물건을 파는 사람이라면, 저는 손님의 물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눈을 보겠습니다. 그것이 그 손님을 대접하는 제일 좋은 태도일 것입니다.

 

최고의 장사꾼들은 자신이 팔고자 하는 물건의 가치와 고객의 가치를 비교평가(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고객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이나 자신보다 더 고귀한 존재로 대접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얻고 물건을 파는 방법입니다. 교회에서 전도할 때에도 그런 방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예수님의 태도를 한 번 보십시오.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이런 전도의 관점에서 완전 빵점입니다. 마트 종업원이 손님에게 무례한 수준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게서는 예수님을 찾아 온 한 여인에게 최소한의 배려나 자존심을 챙겨주는 행동이 전혀 없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랍비로 인정받았고, 그 여인은 이방인이요, 또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7:24에 의하면, 예수님과 일행이 두로 지경을 가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15:21)에는 두로와 시돈 지방이라고 하는데 두 지방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찾아 온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인혹은 가나안여인이라 합니다. 수로보니게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곳입니다. 수로보니게의 뜻은 수리아(시리아)에 속하는 베니게(페니키아)라는 말입니다. 그곳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북쪽에는 시리아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이곳의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밀려서 쫓겨 갔던 가나안 족속의 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지방을 지나면서 한 집에 들어가시는데 그 목적이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려주지 않기 위해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한 여인, 그것도 이방 여인에 의해서입니다. 이 여인은 제대로 예수 컨택을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름 없이 그저 한 여인으로 지칭이 됩니다. 전설이나 어떤 기록에는 이 여인과 여인의 딸의 이름까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름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 내용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에 이 여인의 간절함과 예수님의 예상외의 쌀쌀한 태도가 더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같이 보십시다. 마태복음 15:21 이하에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 즉 이방인에게는 구원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시고, 유대인에게 돌아갈 구원()을 개 같은 이방인에게 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즉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생각을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틀린 말했어?”라며 듣는 사람이나 대화의 대상을 자존심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용이 옳아도 방법이나 목적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진실만큼 마음에 거슬리는 말은 없다라는 프랑스 속담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존심 상하면 스스로 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지경을 넘어섰습니다. 자신의 생명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중에 멍들고 피 흘리는 사람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기만 해도 급히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어디에 숨거나 가리면서 부딪치고 다쳐서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율법을 엄격히 지킨다는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 여자를 보는 것으로도 죄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멀리했습니다. 심지어 율법선생이라는 랍비들에게는 더한 율법적 요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랍비로 불렸습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여자가 직접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규정상 랍비들에게는 매우 거북한 입장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도 만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은 사람처럼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방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제자들은, 스스로 예수님의 마음을 눈치 챘다고 생각하고 귀찮은 여자이니 돌려보내라고 응원까지 합니다.

 

여인은 이 모든 불가능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왜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야말로 평범하고 모든 이의 관심 밖에 있던 한 여인, 예수님을 만나서 응답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분이 이 우주에 오직 한 분만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 어떠한 가치평가보다도 그분이 주실 은혜가 더 크고 가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그런 믿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때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의 시련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함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15:22)이심을 믿고 그분께 나와 엎드린다면, 때로 자신을 숨기시고(24) 침묵하시는(15:23) 그분의 응답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극동방송, 기독교 유선TV, 인터넷 기독교 방송 등 유명 교회, 유명 목사의 예배 중계와 설교가 넘치는 요즘 세상입니다. 은혜 받으려면 그런 방송매체로 예배드리고 설교 들으면 됩니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딪치는 게 자존심 상해서 축도 끝나자마자 재빨리 달아나면 여러분의 영적 고통이 해결이 됩니까?

 

물론 교회에서는 예배와 설교로 받은 은혜가 바탕이 되지만 더욱 큰 은혜는 교회 생활 속에서 겪는 실전에서 생깁니다. 상처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신앙의 싸움에서 체험과 자람이 있습니다. 유아독존, 고상한 일인 신앙은 자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체험은 한 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의 아라비아 사막의 경험과, 평생의 온갖 고난, 교회의 오해, 죽음의 위협 같은 실전에서 그가 더 자랐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교회로 부름 받았고, 이겨내어야 할 사명이 있는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 혼자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영광을 향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조그맣고 일시적인 체면과 자존심을 얻는데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로부터 얻을, 크고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얻으시겠습니까?

 

로마서의 문제는 단지 '초대교회 때의 구약율법과 에수님을 믿고 변화한 새로운 사람으로의 변화'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대를 넘어서 '인간 속의 죄악의 본성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구원'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씀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특히 한국의 교회 강단에서는 여전히 율법적이고 '목사를 위한' 말씀이 판을 칩니다. 안식일이 무슨 요일이냐, 주일은 어떻게 지키냐가 여전히 우선적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들입니다.

 

 

 

마가복음 35. 사람의 계명, 하나님의 계명

 

 

마가복음 7:1~2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비난합니다. 그들의 비난의 이유는 장로들의 유전’(3)때문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란 바리새인 중에 학식 있고 경건한 사람들이(힐렐 혹은 샴마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르면서 만들어낸 성경 외의 율법조항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구전법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된 구전법은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대한 법입니다. 물론 이 정결의식의 조항들도 원래는 구약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이 구절은 본래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던 율법조항들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일반적인 유대인들에게도 요구되었습니다. 대개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팔꿈치까지(=‘부지런히’) 씻고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같은 구약의 말씀으로 대응하십니다.

 

마가복음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사야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수님이 사용하신 외식(外飾)’(hypocrisy, hypo=under, 가면 아래’)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연극배우가 연기를 할 때 가면을 쓰고 하는 모습과 관계가 있는 단어입니다. 아무리 연기를 실감나게 해도 연기는 흉내일 뿐 실제가 아닙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 인간의 윤리 제도는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는 시도입니다. 그 시도가 동기가 선할지라도 그것을 시도하려할 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이렇게 하니 이 일을 하지 않는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비교입니다. 바로 이런 결과가 반드시 나타나고 그 결과 때문에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진 인간의 제도와 종교조차 아니 기독교 안의 모든 외적인 율법조차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율법조항들을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안식일에는 거울을 못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거울을 보다가 흰머리를 보고 그것을 뽑을까봐 보지 못하게 합니다. 머리카락을 뽑는 것을 노동이라고 해석한 겁니다. 또 안식일에는 땅에 침도 못 뱉습니다. 땅에 침을 뱉으면 땅에 물을 준 것이 되어 노동을 한 것이므로 침도 뱉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랍비였던 엘리아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전법(전승)에 위반이 되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내세에 가질 것이 없다.”

 

탈무드의 전승집인 미슈나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을 위반하는 것보다 랍비들의 구전을 위반하는 가르침이 더 큰 위반이다.”

 

랍비들의 전승은 유대교 것이니까 랍비들의 전승까지 가지 말고, 우리가 믿는 성경인 구약성경을 봅시다. 돼지고기 먹어보셨죠? 토끼탕 먹어보셨죠? 새우튀김 먹어보셨죠? 오징어 먹어보셨죠? 그런데 이런 음식들은 성경에서 먹지 말라는 음식입니다. 먹었으면 우리는 성경을 지키지 못하는 겁니다. 큰일입니다. 우리는 천국 못 갈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단인 안식교는 레위기 11장에 부정하고 가증하다고 언급된 식물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안식교인들은 분문에 명한대로 짐승 중에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소, , 염소 등의 짐승 외에 돼지, 토끼 같은 짐승들은 부정한 것이라 하여 금하고, 물고기 중에도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붕어, 조기 등의 물고기 외에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오징어, 조개류, 장어 등의 물고기는 금하고 있습니다. , 구약 시대처럼 부정(不淨)하고 정()한 것을 구별하는 정결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을 율법주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구전을 가장 크게 제도화시킨 유대교 외에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들과 변형시킨 것들을 신앙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문제가 없을까요?

 

예를 든다면 이런 겁니다. 만약 내가 십일조를 해서, 주일을 잘 지켜서, 그 행위가 남을 정죄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오해 없이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도 사람이 보기에는 감사와 사랑으로 계명 지킨 일과 구별이 안 되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구별하시고 그런 것들은 아무 쓸데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왜 나오셨습니까? 목사님 눈치 때문에요? 부모님들이 나가라고 하니까요? 글쎄요, 억지로라도 나오다 보면, 어찌어찌해서 믿음도 생기고 은혜도 받는 일도 생길 수는 있겠지요.

 

오늘도 교회에 못 나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온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별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칫 보수적이라는 기독교인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세계와 한국에 자유주의자 혹은 무교회주의자들이 나타난 원인이 되었고, 최근에는 무관심교인들, 혹은 낙심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종종 보수적인 분들이 인용하는 구절이 이것입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고, 해석을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18~20,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말을 따라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 지키려면 적어도 바리새인들이 지켰던 이런 것들도 다 지켜야하는데 정말 이런 것들도 행해야 합니까? 정말 그런 식이라면 난감하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는 조항 준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바리새인이나 율법주의자들이 하는 외형적인 준수보다 훨씬 더 뜨겁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경건의 내적 아름다움은 없고 외형적인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율법조항들을 다 지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유독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뭔지는 잘 아시지요?

 

작은 것 하나도 못 지키면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에서 지키라는 것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하며, 그 다음에 성경을 인용하며 뭐해라, 뭐 해라를 당연하게 말합니다.

 

물론 자신들도 잘 지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를 누립니다. 명예를 얻습니다. 자신은 성경말씀대로 사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자타의 인정을 받습니다. 또 권세를 얻습니다. 그렇게 성경말씀으로 포장된 자신들의 요구를 따르도록 하고, 그렇게 따르는 세력들을 자신의 권력화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질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정확히 구별한다는 것은 때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 부적절하게 적용하면 사람들을 정죄하는 잘못도 생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 한 가지를 잘 보시면 분명합니다. 대개 율법주의자들은 작은 것에 치밀합니다. 그러나 정말 큰 것,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진리, 거룩과 같은 커다란 것에는 장님입니다. 남을 세우거나 섬기거나 높이는데 어둡고 자신이 대접받는 일과 명예에 밝은 사람은 율법주의자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성경을 빌미로 이것저것 하라고 요구하면서, 결국 그 결과는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이단입니다. 이단의 목적은 하나같습니다. 그 꼭대기에 있는 교주나 최고 고위층만 잘 사는 겁니다. 북한 집권자들이 딱 그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훈계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예로 듭니다. 그것은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대로 부모를 섬겨야 하는데, 부모의 물질적인 필요를 자녀가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녀가 이것은 성전에 바칠 겁니다.” 고르반입니다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에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 바치라고 명시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바쳐도 됩니다. 그래서 그 재물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르반 이야기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모든 정결 규례가 폐지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나중에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넬료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10:1~23,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면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이 구원 못 받을 부정한 민족으로만 생각되어진 구약식 고정관념을 바꾸어 주십니다.

 

골로새서 2:14~19,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식물(食物)에 관한 문제도 함께 폐지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하기를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14:20)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14)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를 드셨는데 우리는 왜 못 먹게 합니까? 성경에는 담배피지 말라는 말이 없는데 담배를 왜 피우지 못하게 합니까? 예수님 시대 때에는 포도주가 술과 음료수로서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담배는 당연히 그 시대에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는 맥주를 술로 인정하는 나라가 있는 반면에 어떤 나라는 맥주를 음료수처럼 생각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맥주가 주류(酒類)로 법제화되어 있으니 당연히 술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술 담배 문제는 비록 성경에 없지만 신앙이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공통되는 기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만 믿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술 담배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전으로 드려 그렇게 살고자 할 때에 술 담배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셔야 합니다. 자연히 그런 것들과 관계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술 담배도 전혀 안하는데 저 교인은, 저 집사는 왜 저래.” 그러면 그것은 그의 경건의 모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술 담배를 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그 제도와 평생을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추기경들보다 더 내 속을 더 두려워한다.”

 

유명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선하다는 사람의 속에도 하나님이 그 불을 꺼지게 하시지 않으면 지옥의 밑바닥까지도 불태워버릴 화약더미가 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의 속일지라도 만약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가 막아주지 않으면 그의 연혼을 영원까지 멸망시킬 수 있는 부패와 사악함이 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우리의 내적인 동기, 숨어있는 속에서부터의 변화를 말씀합니다. “무엇을 해라가 아닙니다.

 

율법이나 의에 대한 성경의 모든 지적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선언입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부패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로마서 3:10~18,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은 이런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십니까? 우리는 완전히 흑암에 있고, 혼돈한 가운데서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고백합니까?

 

로마서 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우리 속의 것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세상의 어느 만물보다, 누구보다 더 악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면 모든 문제가 남들에게, 세상에 있고, 그것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내가 누구인지, 어떤 죄인인지 알면 오히려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New Heart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거듭났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도 성령의 은혜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본 환상(10)을 통해 깨닫게 된 진리를 우리도 성경을 통해 볼(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거듭나, 은혜를 따라 살며, 커다란 신앙성숙을 향해 자라야 합니다.

 

 

참고.

구약의 정()한 음식과 부정(不淨)한 음식의 규례

종류

정한 동물

부정한 동물

관련 구절

포유류

굽이 갈라진 것

새김질 하는 것

정한 동물 조건에 하나의 결격사유라도 있는 것

11:3~7

14:6~8

조류

부정한 것 이외의 것

썩은 고기 취식

맹금류

더러운 주거지

11:13~29

14:11~20

파충류 및

기는 것

전무(全無)

전무

11:29~30

어류

지느러미 있는 것

비늘 있는 것

정결한 것에 하나의 결격 사유라도 있는 것

11:9~12

14:9~10

곤충류

날개가 있는 것

네 발로 기어 다닐지라도 뛰는 다리가 있는 것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닐지라도 뛰는 다리가 없는 것

11:20~23

 

Hacker, get out!

 

마가복음 34.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


마가복음 6:45~56,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두 번째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 경험은, 첫 번째와 다른 상황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네 가지 비유(네 가지 밭의 비유, 등불 비유,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를 가르치신 후,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시기 위해 바다를 건너실 때입니다.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이때는 예수께서 배 안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나, 6장의 비슷한 사건인 갈릴리 바다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떨어져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 비슷한 내용의 경험을 두 번 인도하셨습니다.

 

이 두 번째 풍랑에서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동행하지 않으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했을 때의 상황을 미리 보여주시는 하나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45,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백성들의 예수님에 대한 과도한 반응과 승리감에 들뜬 제자들 사이의 분위기에서 교만과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지 않도록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재촉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사도행전 3,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그들의 복음전도로 오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을 때 관원들과 제사장들에 의해 오히려 옥에 갇히고 핍박받은 사건과 연결 지어 생각했습니다. 과거 오천 명을 오병이어로 먹인 후 풍랑을 만났을 때 자신들이 믿음의 싸움에서 실패한 경험을 기억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옥에서도 담대하게 예수가 주이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러므로 오병이어나 풍랑의 경험들은 훗날의 제자들을 위한 훈련이요 믿음의 학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 때에 가끔 이상한 경험들을 하는데, 그것은 어떤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고 급격히 진행되는 일 들입니다. 때로 그 일들이 미리 예상할 수도, 혹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진행 속도는 다른 평범한 일들보다 급박한 경우가 있습니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이유가 사람의 인위적인 개입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사용하십니다.

 

그때,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때가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의 안주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지금의 어떤 일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진행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맡기십시오.

 

하지만 그 다음의 진행과정이 우리 기준이나 소원에 맞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풍이 아니고 풍랑이기 때문입니다. 부흥할 때 반드시 시험이 있고, 환경이 변할 때 언제나 시험의 요소가 암초처럼 숨어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나 환경을 만날 때 우리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더 큰 믿음으로만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어서 가라고 재촉하십니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산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져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46,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산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라고 합니다.

 

산 위에 올라가면 우리는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다보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의 정상에 섰을 때 승리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가장 꼭대기에서부터는 내려오는 순간이고 잘못 내려오면 파멸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정상에 올랐을 때, 무언가 일을 성취하고 어떤 과정을 이루었을 때 여러분의 이름을 새긴 깃발을 휘두르지 말고 엎드리십시오. 주님께 엎드리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주님은 산 위에서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바다에서 곧 풍랑을 만나 고통을 겪을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몇 년 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 그들만 남아 복음을 전할 때를 위하여 그들이 시험이 들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 12제자를 세우기 위해 그 전날 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12~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 주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거듭나 믿음을 갖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3. 예수께서 제자들의 형편을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바다 위에서 고난을 겪는 제자들을 보셨듯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물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헉헉거리며 괴로워하는 우리를 보시고 그 고통을 당장 없애버리면 우리는 지금은 좋겠으나 결국은 우리에게도 좋지 않을 것을 아시기에 안타까워하시면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관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고통을 이기도록 하늘 위에서 간구하십니다.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또한 성령도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4. 예수께서 제자들을 돕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마가복음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요한복음 14:18~20,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함께하시겠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 혹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히 믿을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성령의 전(殿)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함께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다 혹은 약하다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하나님 보좌 옆에 계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바람에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어떻게 오셨는지 살펴봅시다.

 

1) 밤 사경 즈음이라 했습니다.

 

4경은 지금의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저녁에 배를 타고 출발해서 거의 6,7시간을 바다에서 고생했습니다. 완전히 탈진했을 시간입니다. 보통 유월절은 보름달이 뜨는 때이지만, 지금은 풍랑으로 하늘이 어둡고, 새벽이 가까워 오히려 흑암이 가장 짙은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완악할 때, 믿음이 없을 때 흔히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힘을 다 쓰고 완전히 탈진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19~20,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십여 리는 4~5km입니다. 풍랑 때문에 저녁부터 6~7시간을 노를 저어 간 거리가 10리를 겨우 넘었습니다. 제자들이 완전 탈진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돕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점입니다.

 

2)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상하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기록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유명한 일화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부침하는 사람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에 집중한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49절을 보면,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인데 그밖에 쓸데없는 소망을 헛된 망상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에게 웬 로또입니까?

 

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마가복음 6:50~52,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랐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당연한 권세와 능력을 믿지 못했기에 놀란 것입니다. 52절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권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놀란 제자들에게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내용이 비슷한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워낙 많지만 그중 한 가지만 같이 보겠습니다.

 

이사야 43:1~12,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수님이 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I am”과 같습니다. 즉 나는 나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4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자신을 믿는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이사야 43장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파도와 바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실패하고 믿음의 연약함을 주님께 보여드렸지만, 그 경험이 훗날 그들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는 디딤돌 같은 경험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세파, 세상의 파도와 바람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그것들을 모두 유익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세기의 야곱이 오랜 세월을 외삼촌 라반의 밑에 살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천사의 군대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하나임이란 두 개의 군대 진영을 뜻합니다. 즉 야곱의 한 무리와 천사의 한 무리가 평행하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보는 영적 경험을 합니다.

 

하늘 군대와 이 땅의 일들을 함께 본다는 것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심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의 일들에 너무나 집착되어 있고 또한 우리의 관심이 너무 쓸데없는 것들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우리가 신분이 상승하고 남들에게 다른 사람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세상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조차 인격적인 무시를 받아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껴도 하나님께 변함없이 여전히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경제에 미쳐있습니다. 석유 값 폭등에 이어,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불황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얼어붙었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만나는 현실이고 풍랑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의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연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들과 꽃들! 아무도 관심 없는 태양의 해돋이와 일몰의 장관들!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차고 넘쳐 보이는데 사람보기에 이 얼마나 낭비가 심해 보입니까? 사람들이 전세계의 재물과 과학지식을 사용해서 그 자연의 한 자락이나 흉내 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는 방식은 인간의 경제지식과 관념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풍랑이 거세질 때 우리는 마태복음의 하물며를 기억합시다.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가복음 33.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

 

 


마가복음 6:45~56,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같은 오병이어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백성들의 열광적인 메시아니즘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메시아니즘은 아마 심각한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했다면 헤롯왕과 로마총독을 몰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왕위를 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 제자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영적인 일을 분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실 나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정치적, 군사적인 제도를 생각했습니다.

 

요즘(200812) 포퓰리즘(populism)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최근 이문열씨의 발언에서도 나타납니다. 포퓰리즘이란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치가가 실현해줌으로써 인기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 국가의 장래와는 상관없이 다수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분석이 배제되고 국가 장래를 위한 전략도 없고, 원칙도 없는 반논리적, 반시장적인 정치행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될 자격과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엄청난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고달플 때보다 더 쉽게 만족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시험에 듭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따르면 그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2. 그리스도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마가복음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으로 세상에 증거 되어야 했습니다. 권력의 힘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방법에는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이 있고, 왕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냈습니다. 제자들이 백성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유는 요한복음에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하나의 이유를 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직후에 폭풍우가 있을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 받는 종으로서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체험학습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훈련은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이미 4장에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경험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의 폭풍과 지금의 폭풍은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가, 아닌가 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될 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때에는 제자들이 자신의 인격과 의지로 예수님이 아닌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나라를 전하는 사역을 할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그들을 바다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유혹에 빠졌을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영적 체험의 뒤에는 매우 위험한 장소가 있습니다. 산을 내려 올 때는 늘 계곡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시(豫示)와 같은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과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체험한 후, 훗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사도행전 4장에서 몇 명을 전도했습니까? 오천 명입니다.

 

사도행전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마가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의 기적이자 비유입니다. 제자들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체험하고 오병이어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신으로 함께 하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바로 이 믿음을 갖도록 주님은 산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물 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물가에 내놓은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지 하고 능력을 보이려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이야기는 마태복음 14:28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가의 스승이며 마가복음의 출처인 베드로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베드로의 겸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의 스승이 베드로입니다. 그가 바다를 걸은 경험은 어찌 보면 예수님 외에 누구도 해보지 못한 특이한 이적입니다. 훗날 마태 복음서에는 기록이 되지만 베드로는 기억은 하면서도 그 기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달리 보는 것을 염려했을지 모릅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 경험의 주제가 자신의 이적 경험이나 믿음의 부족함이라는 데에 빠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이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그래서 이 마가복음을 읽어야 하는 로마의 고난 받는 성도들이 폭풍 같은 로마 황제의 박해 속에서도 주님이 보시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유혹과 고난에 쉽게 넘어지기 쉬운 우리들의 처지와 당시 폭풍 속의 제자들의 처지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래서 사도행전의 오천 명을 전도한 제자들의 영적인 승리에서도 그들은 오병이어를 기억하고 교만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조그만 영적인 성공에서도 교만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말씀은 당신이 풍요롭게 사는 능력과 재주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풍요한 중에 - 당시 감옥 안에서 얼마나 풍요했겠습니까. 정신적인 기쁨이거나 아주 적은 물질적 도움일 수도 있습니다. - 그가 깨달은 비결은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삶의 한 비밀입니다.

 

빌립보서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배고픈 중에도 배부름에 처하는 법을 아는 것은 거룩한 교훈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배부른 적이 있었지만 고기가 아직 그들 입에 있을 때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11:33).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혈기를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혼의 방탕을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들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 부요함에 대해서조차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배가 불러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만족한 우리는 천국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배고픔에 처할 줄 아는 것보다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길 바랍니다. 배부르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기도드릴 때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우리가 만족스러울 때나 폭풍 같은 시련의 때에도 동일하게 주께서 그 모든 일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힘주시옵소서.

 

 

마가복음 32. 오천 명을 먹이신 종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 씩 혹 오십 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이 5천명을 오병이어로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의 3년 반 공생애 가운데 3년째 되는 초기에 일어났습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와 능력 행함으로 짧은 여행을 하고 돌아 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보고를 한 직후의 일(30)입니다.

 

39절의 푸른 잔디라는 말을 보아 봄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잔디가 푸른색을 띄는 계절이 봄이라고 합니다. 시간은 저녁이 다 되어가는 늦은 오후입니다. 장소는 갈릴리호수 주변의 어느 한적한 지역입니다.

 

여러분은 오병이어가 진실로 믿어집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 -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심지어 예수님 자신조차 - 도 어떤 사람들은 쇼크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흔히 들을 수 있는 병원괴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눈에 보이는 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음식물과 관계된 이야기라 현대인들은 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물론 요한복음 2장의 물로 포도주로 만든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냐고 합니다.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설명은 5천명의 사람들이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는 이론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목사와 신부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야외 부흥집회나 무슨 컨벤션(Convention)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시락 비법도 아니고 수십 명을 수천 명으로 부풀린 과장도 아니고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명을 먹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록을 그대로 믿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이 사건이 사실임을 말하기 위해 구체적인 설명까지 붙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필요한 음식을 살 돈이 200 데나리온이라든가 소년이 가지고 온 음식물의 구체적인 숫자, 남은 음식물의 구체적 분량, 그리고 사람들을 떼로 앉혀서 그 숫자를 파악할 정도였다는 사실입니다. 40절의 ”(πρασιαὶ)라는 단어는 원래 밭이나 화단에 열()을 지어(in ranks) 식물이 배치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질서 있게 앉았다면 숫자를 세기도 좋고 음식을 공평하게 나눠주기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이 사건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일일이 반박할 자료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사건의 정황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묘사는 37절과 38절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마가복음 6:37~38,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마련할 돈도 재료도 없는 것을 아시면서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련한 최대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자신들의 입으로 최종 결론이 내놓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다녀온 그날 하루 종일 먹을 시간도 낼 수가 없어서 배고프고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하고 배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호수 주변의 어떤 곳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일행이 가는 장소를 알고 호수를 빙 돌아 걸어서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소문은 더욱 퍼지고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영혼의 쉼이 없는 백성들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었고 해는 지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남자들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저녁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마을로 사람들을 보내자고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사건에서 가르치고 싶어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사람들의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필요를 책임진 상태에서 그 필요한 것을 다른 어떤 수단이 아닌, 바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1. 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떠나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한 번 생각해 보거라. 너희들은 200 데나리온을 계산해 내는구나. 그러지 말고 너희가 주어보아라. 너희들이 할 수 있겠느냐? 못 한다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너희 앞에 누가 있느냐?’는 뜻입니다.

 

같은 오병이어 이적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에서는, 안드레가 자신의 도시락을 가지고 온 한 소년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소년이 다섯 덩이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필요한 음식의 값어치는 어림잡아도 200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한 사람의 하루 노동품삯입니다. 200 데나리온을 생각하는 제자들은 약간의 떡과 물고기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인다니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한 가르치심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이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불가능해 보이는 인생의 일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한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바닷가에 섰을 때,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들은 뒤에 쫓아오는 애굽 군대와 눈앞의 바다, 그리고 좌로도 우로도 도망갈 수 없는 자신들의 상황을 보고 절망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즐겨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도무지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 자신들이 충분히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기회들이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는 때입니다.

 

2. 38,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예수님께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갖고 나오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최소한도의 투자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더 확실히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리석어 보이는 계산법이 인간들의 어떤 능력과 계산보다 더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의 백성들이 약할 때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려 주께서 일하시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빈 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3. 39, “제자들을 명하사...”

 

예수님은 제자들이예수님 자신의 방식대로 뜻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 명하시는 대로 했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4. 41, “예수께서...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사람들을 위한 간구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필요의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전달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병이어 이적 직전의 예수님의 기도 장면은 십자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의 몸이 사람들을 위해 찢어지고 나누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단번이나 그 영향은 영원입니다.

 

5. 41,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부름 받은 사실에 확신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사역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6. 42~44, “다 배불리 먹고...”

 

차고 넘치도록 하시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남자들만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 넘게 음식이 남았습니다. 12란 수는 이스라엘 지파 수, 사도들의 수입니다. 그들의 모든 것을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나 기드온의 300 용사 이야기를 종종 이렇게 오해합니다.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소년을 칭찬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온 안드레를 위대한 전도인으로 칭찬합니다. 그리고 300명의 군사들을 용기 있는 군사로 치켜세웁니다. 매사에 주의력을 가져야 한다는 둥. 그래서 결론은 사람들이 가진 작은 것이나마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을 크게 쓰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도나 헌금을 위한 부흥회에서는 좋은 설교 아이템입니다. 그런 설교에 사람들은 힘을 얻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반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하고 헌금해도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해 의도하신 본문의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답을 듣기를 원했던 것은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것이 겨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즉 아주 적은 것을 바치겠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불가능한 문제라는 데에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기를 바꾸어서 음식으로도 만들 수도 있고, 아니 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제자들이 최선을 내어놓게 한 후, 도저히 불가능한 문제라는 결론에서 예수라는 해결책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적을 행하시면서 그 이적이 제자들을 통해 확대해 나가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암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할 일의 예시가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나 간섭이 전혀 필요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이 행하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버이날에 색종이로 직접 만든 카네이션에 가슴 뭉클해본 경험이 있으시죠? 그 카네이션이 세상의 가격 기준으로 보면 별로 가치가 없지만 부모에게는 어떤 선물보다도 좋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능력과 소유가, 헌금이, 노력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버이를 향한 아이의 마음 같은 여러분의 진심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고 또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당시 장애인으로 취급된 왼손잡이 에훗은 에글론왕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기드온은 무기도 없는 자원봉사단 수준의 300명으로 승리했고, 소년 다윗은 거인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갖고 있느냐 물으시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아벨,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그에게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야,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이 여인에게는 전 재산일 수 있는 향유 한 병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여, 무엇이 있느냐?”

두 렙돈 이었습니다.

 

도르가여, 무엇이 있느냐?”

바늘과 실입니다.

 

소년아, 무엇이 있느냐?”

자기 먹을 도시락 오병이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했습니다. 동일하게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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