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5. 제자도- 이혼에 대한 교회의 태도

 

마가복음 10:1~52

(마가복음 10장의 구조와 내용을 정리하면서 같이 성경을 읽기 바랍니다.)

 

 

1. 이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2.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3. 재물 많은 자가 돌아감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4.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자이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5. 십자가에 대한 예언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6. 제자의 받을 상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7. 섬김에 대한 가르침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8. 소경을 고치심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마가복음 10장에서는, - 물론 성경의 장절 구분이 성경이 처음에 기록될 때부터 같이 붙어 나온 것도 아니고, 그 순서도 사복음서가 다 같지는 않습니다만 - 몇 가지 일련의 사건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앞의 8장과 9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십자가와 고난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0장에서도 역시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10장의 전체 내용이 8장부터 계속 이어지는 십자가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란, 예수님에게는 당신이 곧 당하실 십자가형이지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제자들이 복음을 위해 살면서 겪을 고난을 말합니다.

 

먼저 1~12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해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이 이혼이라는 대화 주제를 먼저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먼저 다가온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신봉하지만, 대부분 그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악함을 전제로 한 모세의 이혼 허락에 대한 가르침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결혼의 대한 관점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혼은 사람들이 만나 이루어가는 모든 인간 사회제도의 가장 기본 제도인 가정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과 죄악에 의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이미 50%라고 합니다.

 

현대사회의 이혼문제는 교회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혼은 교회 안에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의 표준인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먼저, 성경의 이혼 혹은 결혼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경의 이혼(결혼)에 대한 구절들: (마가복음 외)

 

신명기 24:1~4,

[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마태복음 5:27~32,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태복음 19:3~9,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고린도전서 7,

[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허락)요 명령은 아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 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모세의 이혼에 관한 율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왜 이혼 문제로 시험을 한 것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할 줄을 정말 몰라서가 아니고 예수님을 말 그대로 시험한 것입니다. 당시 이혼에 대한 대표적인 율법해석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둘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대답을 하면 반대 학파의 의견으로 반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우리나라 국회의원들과 똑같습니다.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299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절반입니다. 성경을 보고 바리새인에게 한 수 배우는 모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논쟁으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24: 1~4에 대한 유대의 두 학파간의 논쟁은 매우 유명합니다. BC 1세기의 대표적 학파인 샴마이파와 힐렐파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샴마이파는 이혼에 대해 보수적이었는데, 이혼의 근거로 수치 되는 일을 강조하여 간음이나 성적 범죄에 대해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힐렐파는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아주 사소한 이유라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힐렐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가 길에서 자신의 친오빠를 만나 장시간 이야기하는 것도 이혼 사유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는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처럼 이혼에 대한 모든 학설이나 변명을 정리하셨습니다. 모세의 이혼 허락도 본래의 의도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답변의 의도는 이혼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취지와 아울러 결혼의 올바른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판단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 음행하였다고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 용서와 화해를 하는 것이 성경적인 답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신랑인 하나님의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신을 따름으로 행음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혼증서까지 써주고 내어 쫓기까지 했으나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1~25,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유다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 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에게 절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완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19]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우리 열조의 산업인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열조가 어렸을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무엇보다도 호세아서 전체가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신부 이스라엘을 대하신 것처럼 사람 부부 사이에도 같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당사자가 철저히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기독교인은 그것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영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상황을 처음부터 선택한 신자에게 있습니다. 만일 신자가 고린도전서 7: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을 근거로 별거에 응한다 하더라도 결혼 관계 자체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별거한 신자는 재혼할 수 없습니다. 재혼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은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죽었을 때뿐입니다.

 

고린도전서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21세기의 세상의 현실에서 이혼을 생각하게 하는 원인으로 가족 간의 학대, 시부모 학대, 며느리 학대 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드라마가 아니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 배우자가 불치병 환자인 경우, 혹은 정신병자의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하고 나중에야 알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도박중독도 정신병입니다.

 

성경에서는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이혼이나 재혼은 금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매우 심각한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교회들은 이혼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이혼에 대한 태도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혼은 절대금지라고 합니다. 청교도적인 보수적인 교회가 이런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방임합니다. 현실적으로 신자 중에 이혼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강단에서 이혼에 대해 금하는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대개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법적인 태도입니다. 카톨릭은 결혼도 7성례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그들 법으로는 파문입니다.

 

넷째로 이혼을 현실적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신자에게 이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 사이에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도 이혼율이 증가합니다.

 

교회는 이혼 문제를 현실로 알아야 합니다. 이혼한 신자들을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치료하고 상담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태도일까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0.29. ~ 1920. 11.8.)라는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개혁파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는 그가 네덜란드의 수상(1901~5)이었을 때 공창(公娼)지역을 만들었습니다. 네덜란드가 워낙 성적으로 문란하니 법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면 오히려 음지에서 활동하니까 법적 대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요즘에야 어쩌다 가끔 그렇게 하자는 말이 나옵니다. 아직은 보수적 유교 사고 때문에 시도하지는 못합니다만, 실제로 성적으로 문란한 것을 따지자면 한국은 더 하면 더할 겁니다. 대도시 주변의 국도를 따라 운전해 보면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다 그런 영업장소들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어떤 교회는 담배를 못 끊은 신자들을 위해 흡연실을 아예 만들었다고 합니다. 좀 심하지 않느냐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좋은 방법입니다. 그곳에서 흡연하는 사람들은 때로 금연교육도 받으면서 아마 하다못해 생각만으로도 금연을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의 이혼에 대한 태도

 

교회에서는 이혼을 권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엎질러진 일은 어찌합니까? 그들을 우리의 연약한 그릇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은 이상, 배우자의 간음이나 폭력을 용서하는 성인 같은 신자가 될 수 없고, 그 피해자가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라면 성경에서 배운 것과는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혼한 사람들, 별거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어디에서 그들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겉으로 이혼을 안 해서 의인이 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못됩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 없이 간음한 죄인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이 주님의 십자가와 관계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0장의 후반부에 섬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0장은 제자들의 십자가로서 섬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듯, 우리 주변의 불행을 당한 많은 영혼들을 받아들이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현대와 같은 세상에서 세상과 신자들을 섬기는 제자로서의 모습을 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불행한 처지의 이들을 섬기는 일들이 제자와 교회의 십자가입니다.

 

이런 일은 저보다 우리 담임목사님이 매우 잘하시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보수적으로 비성경적인 일에 대해 완강히 금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어려운 처지의 신자들을 잘 도와주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제자된 신자들이 감당하여야 할 사명입니다

마가복음 44. 소자의 실족

 

마가복음 9:41~50,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섬김의 삶에 많은 할애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십자가의 도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을 로마의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알려 그들이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로마 박해로 말미암는 고난이지만 한편으로는 승리의 희망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또 자신의 신앙의 푯대로 삼기까지 순간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된 것 같아도 언제든 십자가를 등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과 이적으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쳐 주셨지만 열두 제자들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가르쳐 주시는 데도 거의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누가 크냐에 대하여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논현동 주공아파트 2단지에 가보니 어떤 감리교회 건물이 건축 중이었습니다. 아파트 10층 높이이고 부속시설들이 어마어마합니다.

 

대형 교회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인이 많아서? 그렇다면 잘못입니다. 다른 지역에 교인들을 파송하거나 그 지역들에 작은 교회들을 몇 개 더 세우면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대부분 대형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들 하지요. “대형 교회가 더 힘이 있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요. 아닙니다. 그 생각은 교회의 힘과 사역의 목표를 세속적 기준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제 금액으로, 파송 선교사 숫자로 자신을 과시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건물을 짓는 이유가 혼자 다 가지려하고 누리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총회장 되고 싶고, 교단의 어른 대접 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시대에 현재의 우리나라 대형 교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대형 교회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들이 대부분 현재의 사용 목적이 관광지로 쓰입니다. 텅 비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 건물들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자신들의 세력을 자랑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것들이 천국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땅의 문화유적지가 하나님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울이나 베드로 등 초대교회 교회 개척자들은 교회 건물을 지으려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시작한 곳은 가정집, 다락방, 심지어 지하무덤이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높으냐, 누구 교회가 더 크냐로 경쟁하는 것이 한국 교회 모습입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테리어 장식일 뿐 그 길을 가야한다는 관심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스러운 자리만 동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정 누가 큰 자인지 누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인지 옆의 어린 아이”, 아람어로 과 같은 단어인 소자를 안고 제자들이 소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38절에서 40절까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는다는 요한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답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았으면 어쨌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41절로 넘어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요한의 말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제자들의 문제에 접근하여 해결하십니다.

 

요한은 우리 편이 아니니 그를 금해 주세요라는 요청이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알고 너희에게 누군가 물 한 그릇을 주었다면 그는 상을 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소자를 가치 없다고 취급하고 죄짓게 하면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 이상의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소자를 대접하는 작은 일이 큰 상을 얻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을 무시한 사람은 대가는 너무나 크다고 합니다.

 

41절과 42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그에 대하는 행위에 따른 상벌이 서로 대칭이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41절에서는 너희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나오고, 42절은 소자라고 표현이 됩니다.

 

41절에서는 그들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했을 때의 받는 상을 말하고, 42절은 그들을 실족케 한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린다고 합니다.

 

즉 물 한 그릇 만큼의 작은 친절과 소자는 둘 다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의 상과 연자 맷돌은 매우 큽니다.

 

내세의 크고 영원한 것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의 아주 작은 것이라는 내용이 바로 두 절의 말씀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실족케 한다범죄케 한다라는 단어입니다. 원어에서는 같은 한 단어입니다.

 

실족케 하면이라는 뜻의 동사는 스칸달리세(σκανδαλιση), 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 길에 덫을 놓다, 걸려서 넘어지게 하다)가 원형입니다.

 

이 단어는 이미 6:3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6: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서 우리말로 배척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의 스캔들로도 말이 전하여 졌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감정이 상하다, 불쾌하게 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그 헬라어의 뜻은, “걸려 넘어지는 돌에서 유래합니다. (6:1~6설교, 2008.8.24)

 

본문에서, 이 실족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형제들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지 말라 입니다.

3. 세상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

 

이 내용은 4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이 부분은 앞에서부터 계속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연자 맷돌입니다. 연자 맷돌은 형제를 실족케 했을 때 받는 형벌이 작은 것에 대조가 되어 상대적으로 큰 물체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조선시대 육시, 능지처참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범죄자의 목에 연자 맷돌을 걸고 바다나 강에 던집니다. 이 방법은 당시 로마가 쓰던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장면입니다. 대부분 어부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았거나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일설에는 사도행전 5:37에 가말리엘의 연설 중에 예로 등장하는 폭도 갈릴리 유다가 이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연자 맷돌 처형 장면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사형수의 시체가 물속에서 조류에 떠밀려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진저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자들끼리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범죄하게 할 수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일이 본문에서도 예로 나타나는 분파주의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영적 교만과 시기에서 나옵니다. 적극적으로는 모함과 언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표적인 분파주의로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구원과 관계없는 경건에 관한 문제로 믿음의 형제들을 자신과 비교하는 일은 자신이 결국 신앙적으로 덜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를 들면 음식 문제로 누군가 오해할만한 일이 있으면 본래 먹어도 되지만, 믿음이 약한 그 형제를 위해 아예 먹지를 않겠다고 합니다.

 

로마서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린도전서 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그러므로 신자의 생활은 자신을 기준 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기준하기도 해야 합니다.

 

2. 자신을 실족케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43절에서 48절까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에는 손, , 눈이 등장합니다. 만일 이것들이 범죄하면 이것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이것들 가지고 지옥 형벌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이 말하는 신체 절단은 문자 그대로 신체 절단이 아닙니다. 성경이 손, , 눈을 잘라내라는 말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근원은 죄를 지은 손과 발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20~23,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가 죄를 대할 때에 마치 신체를 잘라내듯 죄와 떨어지라는 말씀입니다.

 

3. 세상이 실족케 하지 말라.

 

49, 50절 말씀입니다.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과 불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나타나는 요소들입니다. 소금은 제사의 필수요소입니다.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즉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희생 제사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제사, 영적 제사를 말합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가지를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둘 다 불에 태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불형벌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완벽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제사였습니다.

 

우리 안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소금이 음식을 짜게 해서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게 하고 맛을 내는 것처럼, 희생과 십자가의 삶을 우리가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의 삶의 모습은 이렇다는 것을 골로새서에서 소금과 신자의 언행을 두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을 뿌리듯 하다는 것은, 은혜 가운데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자기 부정과 헌신, 희생이 은혜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듯이, 신자의 삶에서 십자가가 없으면 역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가 전도가 어려워지고, 오히려 신자 수가 감소되었습니다. 2006년 통계로는 한국의 기독교인의 숫자가 861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숫자가 과거 10년 전보다 약 14 만 명이 줄어든 숫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종교들, 불교나 천주교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기독교만 유일하게 줄어든 종교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는 원인이, 교회가 부족해서 아닙니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도 아닙니다. 여러 설문 조사에 의하면,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도 많은 이슈가 되어 온, 목회자들의 윤리문제가 가장 큽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보고, 기독교를 욕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난 기독교인들에게는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다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방식이 싫었다. 왜 기독교를 믿지 않느냐고 물으면 간디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다.”

 

간디의 이 말은 이렇게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그러하듯 힌두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존경했습니다. 심지어 산상수훈의 구절들을 종종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E. 스탠리 존스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간디를 만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탠리 존스의 묵상집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침마다 읽는다고 합니다. “간디씨, 그리스도의 말씀을 종종 인용하시면서, 왜 그분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거부하십니까?”

 

간디가 대답하기를, “저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단지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당신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젊었을 때 영국에서 유학해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 후 고국인 인도에 돌아왔다가 몇 년 후 남아프리카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아프리카도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는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인으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비인격적이고 치욕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느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물론 교회는 서양인들의 교회였습니다. 그가 교회로 들어가려 할 때, 입구에서 한 사람이 길을 막고 기분 나쁜 말투로 말했습니다. “넌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검둥아.” “저는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려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간디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검둥이를 위한 자리는 없다. 꺼져! 사람들을 시켜서 너를 쫓아내겠다.” 그 후에 간디가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겠습니까?

 

말하자면, 간디가 만났던 그 사람이 간디를 실족하게 했습니다. 지금 간디는 위대한 인물이고 당연히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으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인도는 물론 세계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봅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뒤통수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보고 복음의 결과를 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치와 진실을 규정하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믿는 형제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그들이 나로 이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는 숨어있는 헌신으로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43. 제자도, 종과 어린 아이

 

마가복음 9:33~40,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병행 본문: 18:1~5, 9:46~48, 9:49~50

 

누가복음 9:49~50,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우리너희의 차이)

 

 

마가복음 8장에 접어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그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제자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9장의 갈멜산상에서의 변화 사건도 이러한 십자가의 원리를 가르치는 한 재료였습니다. 즉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결국 얻게 될 것이지만, 그 제자들은 반드시 주님의 고난도 같이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8장부터 10장까지 연속적으로 말씀되어집니다.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마가복음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말씀을 하신지 얼마 안지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적과 권능을 행하실 때는 누구나 대단한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로마를 때려 부수고 부활한 다윗왕권의 권세의 한 자락씩을 잡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사장들과 자기 백성들, 그리고 제자 중 한 명에게 배신을 당하고 로마병사에 의해 십자가에 형벌을 받게 되자 모두들 겁에 질리고 실망하여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행동과 믿음 없음이 오늘날의 우리와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이적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관심을 갖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원하신 것은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향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 앞에서 모두 다 도망갑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다를까요?

 

제자가 되시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리되기 위해 오늘의 성경말씀을 듣고, 왜 예수님이 제자도와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종과 어린 아이로 그 말씀의 재료로 다시 삼으시는지 생각하십시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누가 큰 자인지 길을 가면서 계속 논쟁하던 제자들에게 무엇이 큰 자인지,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제자인지, 즉 십자가를 가르치기 위해 두 가지 사건 재료 혹은 예화를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과 어린 아이입니다.

 

35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뭇 사람)섬기는 자가 되어라 하시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섬기는 자”(servant, diakonos) 혹은 하인을 말합니다. 바로 이 헬라어 단어에서 집사”(deacon)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마침 옆에 있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나다. 나에게 하듯 이 아이에게 대하라는 실물교육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강해 중에 제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듯이, 이 마가복음은 당시 로마황제의 핍박아래 있던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한 복음서가 마가복음입니다.

 

신약성경은 거의 대부분이 당시 국제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영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제자들이 실제 사용한 언어는 헬라어가 아닌 당시 이스라엘의 지역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원래의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언어입니다. 옛적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사용한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부터 나온 언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멸망한 북이스라엘 지역에 내려와 살게 되고, 남유다 마저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사왕국에서 포로생활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본래 히브리어와 비슷한 아람어를 유다민족의 공용어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과도기 시대의 기록인 다니엘서의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백성들의 일상 언어로는 아람어를 사용했지만, 때로 국제 공용어린 헬라어나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도 필요에 따라 자주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라틴어나 헬라어는 웬만큼 배운 사람들이나 국제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언어적 특징은, 4복음서 중에서 아람어 단어와 라틴어 단어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헬라어 발음으로 음역해서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아람어 단어들이 달리다 굼(5:41), 에바다(7:34), 아바(14:36) 등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의 뜻을 기억하십니까?

 

Aramaic phrases in Mark

 

Talitha qoum (Ταλιθα κουμ)

Mark 5:41, And taking the hand of the child, he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is translated, "Little girl, I say to you, get up".

The Aramaic is ţlīthā qūm. The word ţlīthā is the feminine form of the word ţlē, meaning "young". Qūm is the Aramaic verb 'to rise, stand, get up'.

In Aramaic, it could be ימוק אתילט or ימוק אתלט 

(* 히브리어 철자가 원래는 반대 순서인데 여기에서는 순서가 변경이 안됩니다)

 

Ephphatha (Εφφαθα)

Mark 7:34,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ighed and said to him, "Ephphatha", which is 'be opened'.

In Aramaic, it could be חתפתא or חתפא. In Hebrew חתפה

 

Abba (Αββα)

Mark 14:36, Abba, Father," he said,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Abba, an Aramaic Hebrew word (written Αββα in Greek, and 'abbā in Aramaic). Romans 8:15 and Galatians 4:6.

In Aramaic, it would be בא

 

마가복음에서 특히 많은 아람어 단어들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이 책이 비 아람어 독자들을 대상으로 즉 로마교회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두 단어를 봅시다. 그것은 어린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아람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아람어로 talyâ입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하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문둥병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의 하녀가 어린 소녀(왕하 5:1~3)였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도 똑같이 어린 아이라는 단어가 하인이나 노예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하시고, 바로 어린 아이 하나를 안아주시면서 어린 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섬기는 자, 즉 종과 어린 아이는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어린 양이라는 단어도 같은 아람어 탈랴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아이와 종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If John made his proclamation in Aramaic, he said, "talya de laha" (ref: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page 62). The phrase is ambiguous because it can mean Lamb or Servant of God. The Aramaic word talya does not mean lamb; it means child or servant (the Aramaic word for lamb is immer). However, talya took on a double-meaning when the Targums used the word idiomatically (in Pseudo-Jonathan Targum Gen 30:40) capitalizing on its similarity to the Hebrew word taleh (lamb). Although John's proclamation had a double entendre, it was the Servant that Israel was anticipating (Isa 42:1-4; 49:5-6; 52:13; 53:7; Mat 12:18-21; Mat 20:28). 인용: http://glad-u-see.com/sin_world.html

 

아마 제자들은 이 경험을 하면서 그 단어들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 재료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요한의 불평입니다.

 

예수님이 종과 어린 아이에 대한 말씀이 끝나자마자,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최소한 예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의 두 가지 예화를 다시 정리하자면, ‘어린 아이를 예수님으로 영접하는 것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인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와 같이 어린 아이가 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자의 위치가 되고, 남들을 섬기는 자, 종이 되어라,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든지 우리에게 반대를 하지만 않으면 서로 같은 위치에서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하고 힘없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두렵고 힘드니까 다 도망갑니다. 그래도 자신들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거짓 예수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몇 년 전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한다는 책이 나왔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 자신은 물론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했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공부를 잘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로 그 책을 이해한다면 공부 못하는 보통 이하의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대학입학을 앞 둔 자녀들에게, “서울대냐 지방대냐?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겠느냐?”로 공부 좀 잘 하라고 설득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설득이 아니고 협박이지요. ‘서울대 가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논리는 제자도가 아닙니다.

 

제가 제일 거북스러운 교회 직분 중에 권사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집사에서 권사 되면 거의 인품이 달라졌습니다. 권사직에 귀신이 붙는 겁니까? 권사님들이 다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분들도 있다고 듣긴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고질병의 하나가 자리싸움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에서 올라갈수록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감리교에는 감독회장이 하나여야 합니다. 그런데 작년(2008)에 두 명이 선출이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고 감독회장의 직인까지 몰래 훔쳐가면서 잘 싸웠다는데 현재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 제자의 모습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습이 어제 오늘이 아니고, 장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은 겉에 나타나는 세력과 힘과 높아짐을 추켜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결과를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하는가 그 모습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내게 지금 허락된 것,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최근에 제가 보는 책이 본회퍼의 최후라는 책입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의 히틀러 지배 당시의 목사님입니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메시야로 생각하는 나치즘이 판을 치고 히틀러를 반대하는 사상들은 모두 적으로 돌려 깡그리 몰살시키던 시대에,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목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히틀러는 20세기 문명의 탈을 쓴 악마였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몇몇 군인들과 주요 인사가 가담한 암살 계획에 동조하여 모종의 연락책을 담당했는데 그만 발각이 되어 모든 가담자들과 함께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심문과 투옥생활 끝에 그만 독일이 항복하기 한 달 전에 교수형을 당합니다.

 

그가 독일군 나치 장교로부터 심문을 당하면서 (일제시대 독립군 심문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고 간 대화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낭독 내용 생략)

 

나치들이 보기에는 본회퍼는 목적을 이루진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제자로서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통해 영광된 이름을 얻었습니다.

 

당시 독일교회는 지금도 서구 교회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소속이 된 공무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특정한 종교 제도권이라는 고급 계급사회에 소속이 되어 그 관리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은 무미하고 건조하고 자유주의신학에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각성하면서, ‘고백교회라는 국가제도에서 보호받는 교회가 아닌 독립적인 교회들이 나타났고, 본회퍼는 그 교단의 목사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로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로 학생들에게 영성훈련을 시킵니다. 그렇게 나온 지은 책 중에 제자의 대가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싸구려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제자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고 한 참이 지나면 번영과 고난의 시간들이 반복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한국은 부침하는 역사와 함께 또 빠른 경제성장 속도와 같이 교회들의 변화도 매우 심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쇠퇴기입니다. 아니면 또 다른 고난의 시기, 사회적으로 돌 맞는 고난의 시기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는 이상한 환상과 착각이 지배적입니다. 아시다시피 7,80년대까지 교회를 부흥하게 했던 주요 흐름은 신유은사, 방언, 이적 등등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유행하던 말을 사용하면, “능력전도즉 능력을 나타내면 전도가 된다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허울 좋은 전도와 심령부흥집회 시절을 지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던 목사들과 교회들, 그리고 그 속에 같이 묻어 간 기독교인들의 숨어있는 욕망의 정체가 들어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부흥의 깊숙한 동력원은 인간의 허영, 권세, 영광을 바라는 욕망이었습니다. 큰 것이 복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에 따른 수적 성장에 의해 물질적 성장, 교회의 대형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약 20여 년 동안 성경공부, 제자훈련, 영성훈련 등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 내면을 잘 살펴보면 과거의 은사위주, 기복주의가 더 이상 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고 있는, 그릇된 교회성장에 대한 개혁적 움직이라기보다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들입니다. 목적은 같고 방법만 달라진 것입니다.

 

진정한 말씀과 제자도에 의한 회개와 개혁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교회성장의 시도들이 거의 대부분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성장에 보탬이 되기 위한 여러 방법론과 변형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작금의 현상을 꿰뚫어 보십시오. 지금은 한국 교회의 공백 기간입니다. 텅 빈, 마치 태풍의 눈의 시점과 같습니다. 다음 단계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긍정적으로만은, 지금까지 기대했던 외적 교회성장면으로는 예측되지 않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목사들의 윤리문제, 세습화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방송을 타고 대두되면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추락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과거의 성장 관성이 남아 있어서 과거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한국 교회 상황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양적으로, 물질적으로 성장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진정한 제자들과 알곡을 고르기 위해 잠시의 양적인, 물질적인 성장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지금까지 능력과 힘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교회의 전체로 이해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의 영광과 병고치고 귀신 쫓는 능력 행하심에 한껏 기대를 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르치시는 진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보이는 것, 능력, 누가 더 높아지느냐에 자리다툼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교회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가 버린 제자들처럼, 앞으로 한국교회에 고난이 닥칠 때에 대다수의 교인들이, 교회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때에도 진정한 제자를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참고.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독일의 이름 있는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목회자 집안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유산을 물려받은 가정이었지만, 교회생활에 적극적이거나 충실히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정신의 맥이 숨어 있었던 탓일까. 본회퍼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3년 열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튜빙겐대학에 진학한 본회퍼는 그 곳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후 베를린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가 신학을 하던 1920년대는 자유주의 신학이 몰락하고 변증법적 신학이 독일의 대학가를 휩쓸 때였다. 그러나 베를린대학만큼은 자유주의 신학 전통의 마지막 보루였고 그런 대학의 분위기에서 본회퍼는 하르낙과 칼홀, 제베르히, 칼 바르트 등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의 신학 세계를 키워나갔다. 그는 겨우 23세에 신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강의를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논문은 당시 신학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교수들이 본회퍼를 천재적 신학도라고 입을 모을 만큼 그의 신학적 학문의 깊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재적 신학자로서 빛을 발하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교수 취임 후 2년 반 동안 베를린대학의 교수로서 생활하던 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2년 간 목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다시 독일로 돌아왔을 때는 이전의 천재적 신학자, 교수로서의 본회퍼가 아니었다. 그는 고백교회 운동가 본회퍼, 실천적 신앙인 본회퍼였다.

1930년대 독일에서는 이미 혁명의 힘이 잉태되어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국가 전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 있었던 선거 뒤 제국의회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리는 12석에서 107석으로 늘어났고, 1932년 선거에서는 나치당이 의회에서 271석을 차지해 압도적 지배당이 되었다. 1933130일에는 드디어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3공화국,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됨으로 20세기의 신화가 남기고 간 인류의 죄악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회퍼가 교수를 그만두고 실천적 신앙인으로 활동하던 때는 바로 그 시기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고 세계 제패의 야욕을 안고 있던 때. 그 때 본회퍼가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것은 바로 독일적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를 단지 정치적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메시아로, 그리고 나치즘을 행동하는 적극적 기독교로 받아들여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나 한국의 유영모, 중국의 본색교회 운동가들의 민족적 기독교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나치즘은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만을 배타적으로 존중하고 유대민족과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핍박과 학대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했던 바가 결코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히틀러의 교묘한 술책에 의해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에 절대적 충성을 맹세했다.

고백교회 운동은 이런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독일 복음주의교회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교회를 나치의 선전도구화하려는 히틀러 정권에 저항한 신앙부흥운동이며 반나치 단체였던 것이다.

본회퍼는 바로 이 고백교회 운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신앙적 실천을 시작했다. 이전의 학자로서, 목회자로서 만의 삶이 아닌 자신 앞에 놓인 국가적 위기 앞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직접적 저항운동이었던 것이다. “고백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것은 나를 구원으로부터 멀리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할 정도로 고백교회에 대한 사명이 대단했던 본회퍼는 교회가 영원한 진리나 원칙들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한 형태로서의 고백교회는 본회퍼의 신앙과 신학적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의 실천적 신앙은 고백교회 운동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 고백교회 운동의 정신이 흐려지면서 운동성이 약해지자 본회퍼는 나치즘에 대항하는 지하 운동세력에 적극 가담하여 반나치 운동에 직접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 본회퍼의 교수직은 박탈됐고 그가 가르치던 핑켈발데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독일 안에서 그가 책을 출판하는 것도 금지됐고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감시를 받아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본회퍼는 더욱 적극적으로 반히틀러 세력에 가담하여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본회퍼는 본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위탁된 목회자의 과제를 넘어서 왜 정치적 항거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자로서 히틀러에 반대하고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복음의 실천이요, 선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미친 사람이 베를린의 번화한 거리에서 인도 위로 차를 몰고 달린다고 하면, 나는 목사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가정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내가 만일 이 장소에 있다면 나는 뛰어 덤벼들어서 그 미친 운전사가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당시 나치즘 하에서의 상황과 그의 마음가짐을 잘 드러낸다.

본회퍼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얼마 후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 1944720일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지하활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수용되었다. 본회퍼는 그가 37세되던 1943년 그의 자택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다. 테겔 형무소에 18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그가 가담했던 히틀러 암살 음모의 내막이 드러나면서 게슈타포 감옥으로, 다시 북켄발트 수용소, 플로센뷰룩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549.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형무소의 의사는 본회퍼의 최후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아마도 5~6시였던 것 같다. 죄수들을 감방에서 불러내다가 선고문을 읽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본회퍼 목사를 봤다. 죄수옷을 입은 채 꿇어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의 열심과 확신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의 소원은 순교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이미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여서 믿음을 위한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와 순교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 있는 사람이 남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고 떠드는 허황된 말. 나는 두 번째의 경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다.

아이큐도 없고 상식도 없고 믿음도 없는 두 번째의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가복음 42. 큰 자들과 소자 하나

 

마가복음 9:33~50,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이 기록된 당시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에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 마가복음의 목적입니다. 그 제자도의 핵심이 바로 마가복음 9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도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는 과정, 헌신의 길입니다. 이 제자도는 과거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현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나 나쁜 행위들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자기 부인(否認)이라고 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제자가 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인격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가 되심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기독교에 기대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신자라면, ‘지옥으로부터 구원죄 사함에 대하여 듣기를 좋아합니다.

 

때로 어떤 이들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싸워서, 목사님이 바람이 나서, 목사와 장로가 싸움질을 해서 그 꼴 보니 싫어서 교회 안 다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비극입니다. 그런 교회들도 문제지만, 신앙의 조건을 그런데서 찾는 당사자 자신도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는 비극만 가득한 드라마입니다.

 

교회에 실망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착각했든지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도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요한복음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제자도에는 올인해서 운이 좋다면 곱빼기로 이문을 남긴다는 약속이 전혀 없습니다. 올인은 기본인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보상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자가 되려고 하면 지금까지의 경력과 명예를 다 잃어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그러한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된다고 믿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아무든지는 가정(假定) 상황이 전제된 말입니다. “만일 ~하려 하면입니다. 그 의미는 반대로 네가 원치 않는다면 제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제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구원은 받겠으나, 그 사람의 이 세상의 삶은 우리 주님께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돌덩이와 보석의 차이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새예루살렘이 정금이니, 보석이니, 진주 등등의 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 보물들이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한 보물이 아닙니다. 바로 새예루살렘, 즉 그리스도의 신부된 신자의 영광된 모습을 보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8~22,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계속 이 한 가지 문제로 신자의 자아와 다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권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이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도하기 전에는 나는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관계를 주님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신앙생활에는 대가(cost)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도의 조건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인 열띤 논쟁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열띤 논쟁은 바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곧 로마를 정복하고 왕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큰 자가 누구냐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짜 누가 천국에서 큰 자고 첫째가 되는 자인지 가까이에 있던 어떤 어린아이를 데리고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작은 자, 즉 소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참된 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남보다 높아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남보다 낮추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탄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렇게 큰 자와 소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던 중에, 제자인 요한이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고자질을 합니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과 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화 산 아래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기에 어떤 어린아이를 말 못하고 귀먹게 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그 사람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질투, 시기심이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속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들을 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작은 사람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매우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단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주님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으로 일하는 형제들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9장 후반에 나타난 제자들의 첫 번째 문제는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남보다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은 제자 사회라는 울타리를 두르고 남들보다 자신들이 더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선권을 주장하며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는 말씀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9:35)는 말씀처럼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게 되는 희한한 법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권세 있고 돈 있는 큰 자들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즉 가진 자가 높은 자요, 먼저 된 자가 먼저 누리는 곳이 세상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고대 세계에서 한편으로는 문명이 발달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 가장 야만적인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즉 권세 계급이며 지배계층인 로마의 귀족들과 왕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향락과 권세를 위해 갖은 추악한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세계에서는 모든 제국의 백성들은 로마 황제만을 주()라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황제가 신처럼 숭배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마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가 그들을 그대로 둘리가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을 굶주린 야수들의 발톱으로 찢었으며 그들의 눈을 뽑았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당시의 성도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남을 정죄하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수족을 베는 듯한 과감한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또한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 치듯하다는 말은 죄인이 지옥에서 불로 형벌을 받을 때 마치 소금으로 맛을 내게 하듯 불이 죄인에게 뿌려진다는 뜻입니다(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NIV).

 

특히 마지막 절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9:50,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가운데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금 그 소금 맛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금은 소금 맛이 필요할 때 소금을 필요로 하는 곳에 던져져야 할 터인데 우리는 던져져서 그래서 녹아 없어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이미 전혀 엉뚱한 일로 소금 맛을 다 잃어버려서 던져져 봐야 아무 쓸모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요?

 

더럽고 부패하기 쉬운 것일수록 소금을 필요로 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짠 맛을 지녀도 싫다고 배척하려 하지만 우리가 짠 맛을 잃으면 더 더욱 우리를 무시할 것이며 그 때에는 우리를 이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이라고 더 맹렬히 핍박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세상과 짝하여 적당히 지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더 우리 본연의 짠 맛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의 제자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제자들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을 되찾아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요즘 제직훈련 중에 제직으로서, 성도로서 교회 생활하는 모습에 그 역할에 대해 집사님들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남을 돌보고 섬기는 거룩한 부담감으로서의 직분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성도님 가운데는 이런 분들이 안 계시지만, 어떤 교회들 가운데는 직분을 명예처럼 여기고, 서로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훨씬 낫다는 우월감이 있다면 영적인 교만이 됩니다. 남과 나를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되지 않았다는 비교입니다.

 

또 사람을 누구 편이냐?’로 가릅니다. 교회는 우월의식이 아닙니다. 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인간의 가장 본성적인 싸움은 권력 싸움입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이면 권력 싸움을 합니다. 누가 더 우선권이 있느냐?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작은 공동체 안에도 권력 다툼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에서는 더욱 심합니다.

 

TV 드라마 중에 요즘(20091)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랍니다. 그 내용의 핵심이 어떤 부잣집에 시집간 평범한 집 출신의 며느리가 마음이 너무 착해서, 남과 경쟁하지 못해서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무시 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마음을 바꾸고 요녀로 변신한다는 줄거리라고 합니다. 현대 세상에서는 친구에게 남편을 뺏길 정도로 순진하기만 하고 남을 의심할 줄 모르면 가진 자들과 더 똑똑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간에, 장로와 장로 간에, 집사와 집사 간에, 교회 안에서조차 계급화, 권력화 되어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 직분을 출세로, 감투로, 벼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의 제일 좋은 칭호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당회장이라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예전에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 소도시 던펌린에 현대전자가 반도체 공장을 세웠는데 그 직원 중에 몇 명이 제가 공동 목회하던 에딘버러 한인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인교회 청년회를 제가 맡았는데 청년회장이 한 번은 청년들이 부탁한 일을 하러 그 공장에 갔습니다. 직원인 청년회원들이 회장님이다라는 말을 하니까 갑자기 전체 공장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회장님 오셨다!” 현대그룹 왕회장님’(당시 생존)이 기습 방문을 한줄 알고 말입니다. 호칭이 문제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은 늦게 예수를 믿고 훗날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분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삼일운동 준비를 할 때는 장로였습니다.

 

삼일운동 직전, 독립선언서에 쓰일 민족대표들의 이름을 쓰려고 할 때 사람들 간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냐 기독교의 대표인 이승훈이냐 누구의 이름을 먼저 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잠시 바깥에 나가있던 이승훈선생이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義菴,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

 

교회 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먼저 죽는 순서입니다. 남보다 내려가는 순서입니다. 누구 뒤에 썼다고 누구 다음에 내 순서라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에는 상식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을 위해 순교까지 하는 기독교인데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로 살 때 가족들이 불화하고 분쟁하는 일도 있다고도 했습니다(10:35, 12:53).

 

하지만 우리의 제자의 삶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나 우월의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헌신, 자기 부인, 사랑이라는 신앙의 행위 속에서 조차 내가 남들에게 우월하게 보이려는 마음이 없는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 능력, 남을 돕는 구제 그 모든 행위들이 내가 남보다 더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는 동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큰 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여전히 살아있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일은 어린 아이, 소자와 같은 영혼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제자들은 자기를 낮추고 자기가 죽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제자로 부름 받은 분들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