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 요한의 침묵, 왕의 침묵
마가복음 6:14~29,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누가복음 23:6~12,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시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헤롯(헤롯 대왕), 그 뒤를 이어 어린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롯 아켈라로(유대지역의 분봉왕), 빌립(요단 동편의 북동부 지역 분봉왕), 헤롯 안디바(세례 요한 처형,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1세(행 12장, 야고보를 처형, 베드로 투옥, 신의 소리라는 칭송을 듣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여 충이 먹어 죽음), 아그립바 2세(행 25장, 로마로 가려는 바울을 신문) 모두 6명입니다.
그중 헤롯 안디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고 빌라도의 요청으로 예수님을 신문한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들(10명의 부인)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3명의 분봉왕 중 하나)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과 그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앞 길을 예비하기 위해 살던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죽인 사람은 헤롯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달게 들었다"는 표현은 그가 요한의 말을 긍정하고 거의 믿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권력자들의 죄에 대해 거침없이 외치고 회개를 선포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의 내용인데도 헤롯왕은 받아들였습니다.
헤롯의 그런 행동을 보면 아마 그는 이중적인 성품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과 자신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어 열등감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로마의 힘에 의지하여 부분적으로 나마 이스라엘의 왕노릇을 했지만 세상 권력을 비웃는 차가운 성격이었습니다. 종교성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세상의 정욕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략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복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으로 결혼했습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그와 헤로디아를 비난했습니다. 요한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일은 그가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가려져야 그리스도가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헤롯은 요한을 좋아했지만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헤로디아는 기회를 잡아 자신의 딸의 춤으로 왕의 환심을 사게하고 그 대가로 요한의 목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요한을 영원히 침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죽이기 전, 왕은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6:26,
왕이 심히 근심하나(perilufos)...
이 단어는 우연히도 헤롯이 훗날 죽게 한 ‘또 다른 사람’이 죽기 전날 밤에 한 ‘근심’과 같은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헤롯의 멸시와 무관심을 받고, 헤롯의 근심과 비교 안 되게 깊은 영혼의 고민을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perilufos)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헤롯의 근심은 한 가닥 남아있는 양심의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근심을 따라, 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의 체면과 권력을 위해 요한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날 밤 이미 죽음을 아시고 자신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근심하셨습니다.
헤롯은 왕으로서 왕실과 가까이 있는 사두개파의 영향(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을 많이 받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듣고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혹은 죽은 선지자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라도 자신들은 그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로 미신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도 하는 것이 믿음 없는 사람들의 진실입니다.
그는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양심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체면과 권력에 자신의 마지막 양심까지도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양심과 주관을 버리고 표를 얻기 위해, 권세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세를 따른다는 명목으로 부침하는 군중의 흐름만을 따라가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려 근심하나 양심을 무시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이적의 힘이나 행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삶과 가진 것들이 더 아깝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 헤롯이 대표합니다.
그는 요한의 목을 베어 버려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마지막 남아있던 종교심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요한이 생전에 늘 말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알기를 원했던 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흥밋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변했습니다.
1:24에서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존경과 믿음의 사이는 우주의 간격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문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의 유일한 흥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적 행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침묵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침묵하셨습니다(눅 23:9, 참고 막 15:5).
누가복음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마가복음 15: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계속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언젠가는 올무에 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처럼, 가족 때문에, 정욕 때문에, 명예나 경력 때문에 진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그분의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지키려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생명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들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양심으로 근심하여 믿음에 이르십시오.
고린도후서 7:10~11,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여러분의 양심에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 그 때가 우리가 그 말씀과 복음의 가치를 무시할 수 있는, 마치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들을 수 있는 카세트나 라디오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이면 그것으로 여러분의 양심에서는 더 이상 복음이 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가려져 마음을 닫으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기회는 헤로디아의 기회처럼 악한 의도입니다.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는 언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뭔가 변할 기회가 있을 것을 바라지만 기회의 때(kairos)는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와 있습니다.
헤롯처럼 자기의 육신의 소욕의 기회, ‘기회(eukairos) 좋은 날’을 찾으시겠습니까?
마가복음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마태복음 26: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eukairos)를 찾더라(막 14:11)
누가복음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로마서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지금이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입니다. 그 복음을 침묵시키면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음성도 침묵하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천국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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