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 요한의 침묵, 왕의 침묵

 

마가복음 6:14~29,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누가복음 23:6~12,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시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헤롯(헤롯 대왕), 그 뒤를 이어 어린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롯 아켈라로(유대지역의 분봉왕), 빌립(요단 동편의 북동부 지역 분봉왕), 헤롯 안디바(세례 요한 처형,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1(12, 야고보를 처형, 베드로 투옥, 신의 소리라는 칭송을 듣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여 충이 먹어 죽음), 아그립바 2(25, 로마로 가려는 바울을 신문) 모두 6명입니다.

 

그중 헤롯 안디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고 빌라도의 요청으로 예수님을 신문한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들(10명의 부인)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3명의 분봉왕 중 하나)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과 그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앞 길을 예비하기 위해 살던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죽인 사람은 헤롯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달게 들었다"는 표현은 그가 요한의 말을 긍정하고 거의 믿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권력자들의 죄에 대해 거침없이 외치고 회개를 선포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의 내용인데도 헤롯왕은 받아들였습니다.

 

헤롯의 그런 행동을 보면 아마 그는 이중적인 성품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과 자신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어 열등감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로마의 힘에 의지하여 부분적으로 나마 이스라엘의 왕노릇을 했지만 세상 권력을 비웃는 차가운 성격이었습니다. 종교성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세상의 정욕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략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복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으로 결혼했습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그와 헤로디아를 비난했습니다. 요한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일은 그가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가려져야 그리스도가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헤롯은 요한을 좋아했지만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헤로디아는 기회를 잡아 자신의 딸의 춤으로 왕의 환심을 사게하고 그 대가로 요한의 목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요한을 영원히 침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죽이기 전, 왕은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6:26,

왕이 심히 근심하나(perilufos)...

 

이 단어는 우연히도 헤롯이 훗날 죽게 한 또 다른 사람이 죽기 전날 밤에 한 근심과 같은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헤롯의 멸시와 무관심을 받고, 헤롯의 근심과 비교 안 되게 깊은 영혼의 고민을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perilufos)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헤롯의 근심은 한 가닥 남아있는 양심의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근심을 따라, 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의 체면과 권력을 위해 요한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날 밤 이미 죽음을 아시고 자신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근심하셨습니다.

 

헤롯은 왕으로서 왕실과 가까이 있는 사두개파의 영향(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을 많이 받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듣고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혹은 죽은 선지자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라도 자신들은 그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로 미신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도 하는 것이 믿음 없는 사람들의 진실입니다.

 

그는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양심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체면과 권력에 자신의 마지막 양심까지도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양심과 주관을 버리고 표를 얻기 위해, 권세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세를 따른다는 명목으로 부침하는 군중의 흐름만을 따라가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려 근심하나 양심을 무시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이적의 힘이나 행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삶과 가진 것들이 더 아깝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 헤롯이 대표합니다.

 

그는 요한의 목을 베어 버려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마지막 남아있던 종교심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요한이 생전에 늘 말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알기를 원했던 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흥밋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변했습니다.

 

1:24에서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존경과 믿음의 사이는 우주의 간격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문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의 유일한 흥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적 행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침묵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침묵하셨습니다(23:9, 참고 막 15:5).

 

누가복음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마가복음 15: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계속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언젠가는 올무에 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처럼, 가족 때문에, 정욕 때문에, 명예나 경력 때문에 진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그분의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지키려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생명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들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양심으로 근심하여 믿음에 이르십시오.

 

고린도후서 7:10~11,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여러분의 양심에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 그 때가 우리가 그 말씀과 복음의 가치를 무시할 수 있는, 마치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들을 수 있는 카세트나 라디오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이면 그것으로 여러분의 양심에서는 더 이상 복음이 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가려져 마음을 닫으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기회는 헤로디아의 기회처럼 악한 의도입니다.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는 언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뭔가 변할 기회가 있을 것을 바라지만 기회의 때(kairos)는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와 있습니다.

 

헤롯처럼 자기의 육신의 소욕의 기회, 기회(eukairos) 좋은 날을 찾으시겠습니까?

 

마가복음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마태복음 26: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eukairos)를 찾더라(14:11)

 

누가복음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로마서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지금이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입니다. 그 복음을 침묵시키면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음성도 침묵하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천국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

마가복음 30.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4장의 4가지 비유에 이어, 5장에서는 4가지 이적이 나오면서 점점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의 주제는 무기력한 인간 존재의 모습에서 또 죽음에서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배척을 보여주어 앞으로의 제자들의 사역과 교회의 모습이 세상에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암시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안다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여 스스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을 사용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우리는 혹여 우리의 편견과 익숙함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인간적인 자랑과 영광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는 겉돌게 하며 살지는 않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주께서 이런 우리를 오히려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돌아보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마가복음 5장에 언급된 이적 기사들은 거라사 지방의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예수께 나아온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거라사 광인, 혈류증 여인, 회당장 야이로)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엄청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무서워 떨고 있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렸던 자는 비록 처음에는 자기의 의지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지만 고침을 받고 고향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실낱같은 병 고침의 희망과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이나마 잡아보겠다고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부족한 믿음이지만 예수님만이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이에 비해 지금 우리가 다룰 막 6장의 장면(6:1~6)은 이러한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권능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은 불신앙 때문으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을 통해 독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반응을 보게 되는데 이들 두 반응은 다음 장면 가운데 묘사된 제자들의 전도(선교) 사역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합니다(6:11~13).

 

결론적으로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정반대의 구도로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제자들(교회)의 전도(선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이 어떠할 것인지를 성공과 실패, 수용과 반대, 이해와 오해의 대조적인 두 반응으로 잘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이 언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어 규례에 따라 회당에 들어가셨고 거기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회당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되었으나 예수님의 신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의 출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를 배척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 중에 안식일을 맞아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다고 합니까? 2절에 놀라”, 놀랐습니다.

 

마가복음 6장과 유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좀 더 자세히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6~30,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2)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2절에서는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즉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같은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다른 두 사건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결론을 쉽게 옮기자면, “어리벙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에 대한 소문을 또 전해 듣고 2절 이하에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라 하면, 지역공동체에서 종교의식과 종교교육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정식으로 랍비가 되는 훈련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향 사람들이 다 아는 목수였습니다. 당시 목수라는 말은 나무만 만지는 일뿐 아니라 다른 다방면의 기술자’(craftsman)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흔한 노동자였지 학자나 선생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최소 10년 이상을 목수로 일했을 것이고, 예수님이 만든 가구나 혹은 고친 물건들이 한 두 개 정도 있는 집들도 꽤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를 선생이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호칭은 당시 좋은 호칭이 아니라 합니다.

 

그들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즉 특별하게 보이는, 남들과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종교나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해 그런 비슷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좋다” “유명하고 학위가 있는 목사가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교회가 이사할 자리를 찾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다니다 보니, 문을 닫는 작은 교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너무 교회가 많고 경쟁적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부터 번듯하게 지어놓고 시작하는 교회들이 그래도 성장하는 것을 보면, 작은 교회를 기피하는 것도 최근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 땅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선입견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셨다고 합니까?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오히려 더 낮추어진 모양으로,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 씩 짝을 지어 전도로 제자들을 내어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사도라 불렸고 초대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전도를 할 때, 제사장들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러할 때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들어 논리적으로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4:13~14,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범인(凡人)이란 말은 평범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호칭했던 이 사람입니다. 교육받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한 어부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특별히 정식으로 교육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들은 하나같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을 통해 시작한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학벌도 지식도 가문도 좋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 교회 건물을 찾고, 교육 많이 받은 목사를 찾지만, 하나님은 다른 교회, 다른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깊이를 재시지, 숫자를 세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 사람들의 방법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32천명의 군사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지만, 하나님은 300명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깊이를 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25평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을 얻어 놓고, 또 이것저것 부족한 것을 보고 한숨을 쉬겠지만, 하나님은 그 25평의 건물을 복사하듯이 옆으로, 옆으로 계속 연결시켜 주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원본의 깊이가 어떠하냐에 달려있겠지요.

 

그러면, 그 깊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준비입니까? 우리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제자들이, 사도들이 자기들을 잡아 가두려는 유대인들의 협박에도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심을 증거하고 오히려 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열심히 성경과외공부를 해서도 아니고, 미리 문장을 외워서 말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로역정이라는 신앙소설을 남긴 분입니다. 당시 영국왕 찰스 2세는 자기는 천주교인인데(모친이 프랑스 출신) 그것을 숨기고 천주교를 영국에 심기위해 신교를 핍박했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전하는 존 번연의 신교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존 번연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루는 감옥에 갇힌 존 번연에게 어린 딸이 면회를 왔습니다. 딸은 너무 어려서 아빠가 왜 감옥에 있어야 하고 자기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죠. 어린 딸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Daddy, Daddy, come home." 존 번연은 나중에 그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그 말을 듣는 것이 자기로서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감옥에 몇 번 갇히는 중에 한 번은 풀려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tinker 였습니다. 우리말로 땜장이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직업이 냄비 고치는 땜장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당시에 얼마나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겠습니까.

한번은 존 번연 때문에 골치 아픈 찰스 2세가 당시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였던 존 오웬이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존 오웬은 벌서부터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에도 참여한 사람이고 뛰어난 청교도 신학자로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가 쓴 23권짜리 전집은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은 안되었지만 그 전집에는 당시 청교도로서는 드물게 성령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학식으로 당시 비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학문이라고는 전혀 없는 땜장이 존 번연의 설교를 들었다는 소문은 청교도가 미운 왕에게는 통쾌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왕에게 어느 날 존 오웬이 편지를 썼습니다. “전하, 만약 제가 그 땜장이의 설교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저의 모든 학식을 버리겠나이다.” 물론 존 오웬도 역사에 남는 훌륭한 신학자요 설교가로 분류되는 분입니다만 그는 존 번연을 자기보다 더 높이 세웠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즉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고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상식으로 마리아가 사생아를 낳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하! 그래, 우리는 이 자가 누군지 잘 알아!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잘 알지. 그런데 그가 뭐가 어떻다는 거야? 어디서 사기꾼 기술을 좀 배우고와서 이제 고향에서 위신을 세워보겠다는 말이로군.

 

우리말로 배척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의 스캔들로도 말이 전하여진 σκανδαλίξοντο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감정이 상하다, 불쾌하게 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그 헬라어의 뜻은, “걸려 넘어지는 돌에서 유래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의 선입견과 상식으로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이나 가시떨기의 모습과 같은 사람들처럼 지혜와 권능에 대해 잠시 놀라지만 신앙(의 뿌리)이 없기 때문에 세상견해에 의해 곧 넘어지는”(σκανδαλιζονται) 자들(4:17)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잘 안다고, 오래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잘못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쌓아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또는 당연시할 때가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증상입니다.

 

더운 여름날 어느 농부가 호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농부는 하나님도 무심하시다. 어찌하여 튼튼한 나무에는 쥐방울만한 호두를 열리게 하시고, 저 연약한 덩굴에는 커다란 호박이 열리게 하셨을까. 참으로 불공평하시구나.’ 생각하며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불이 번쩍하여 눈을 떴습니다. 호두가 머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잠에서 깬 농부는 옆에 있는 호박을 쳐다보며 만약 저 호박이 이 튼튼한 나무에 달렸다가 머리에 떨어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하나님께 감사했답니다.

 

때때로 우리는 눈앞의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이런 것을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고향 동네 사람들도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예수님을 무시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기록과 같이 고향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사렛에서는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소수의 병자만 고침을 받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가게 됩니다. 이적에 대한 놀람만 남아있지 참된 신앙이 없는 그곳은 기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예수가 떠나 버린 곳”(cf. 6:11)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에 반응하십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에 예수님이 오히려 놀라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의 믿음에 어떻게 반응하고 계실까요?

나의 신앙이 하나님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과거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고, 지금도 그 성장의 관성이 조금 남아서 계속 성장하는 약간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성장의 배경에는 우리가 믿을 수 없게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분의 존재와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과 기복 추구의 어두운 그림자가 상당 부분 성장의 동력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새로 이사 갈 교회 처소에 전기시설이 아직 안되어서 골치입니다. 벽에 콘센트는 버젓이 있는데 전기가 안 통합니다. 즉 그 건물이 준공검사를 받으려고 모양만 전기시설을 했지 벽의 콘센트가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기는 전선이 연결된 곳으로만 흐르지, 전선이 연결되지 않은 곳으로는 도저히 흐를 수 없습니다. 전기가 통하려면 침 바르면 되나요?

 

전선이 연결 안 된 곳으로는 전기가 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못 흐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믿음을 고백함이 없는 곳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를 수 없습니다.

 

민수기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인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이미 얻은 복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뜨겁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특히 부모님 때부터 예수님을 믿거나,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서 복음과 주님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사람이 주님을 배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마가복음 29. 구원 얻는 믿음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 다시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예수님께 찾아온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만남이 극적으로 교차한 중에 나타난 두 사람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같은 12년을 전혀 다르게 살아 온 두 사람의 운명과 우리의 모습을 대조해 보았을 때, 같은 동시대에 이 교회에 모인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 이 시간에 모여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나의 부족한 어떤 점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힘들고 지친 세상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면 그러한 정신적 위안을 받는 일도 많습니다만, 그런 일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과녁을 잘못 조준한 양궁선수나 사격선수처럼 엉뚱하게 다른 선수의 과녁에 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은 야이로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는 도중에 중간에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만남이 일어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자신이 유대교의 회당장인데 다른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체면이나 입장이나 명예보다 자기 딸이 더 소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의 입장에서 구약의 한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바로 나아만입니다.

 

열왕기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아람(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개인적으로 인생의 최고점에 이른 사람이고, 국가적으로 왕 빼놓고 전 국가에서 일인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다른 나라의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자기의 소중한 딸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삶의 극한 상황까지 몰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마귀에게서 찾아오십니다.

 

, 이제 야이로는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 듯 야이로를 앞세우고 따라 가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 주위로 구경하기 위해 몰려듭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혹은 지금이 어려운 때라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거나 기억해보십시오. 그런 때를 대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이 왔는데 서리가 껴서 더 추운 겁니다. 서리가 언 것은 추운 바람이 분 것입니다. 눈만 와도 영하의 날씨인데 바람까지 붑니다.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하지요.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야이로가 그랬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이 갑자기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자기 옷을 누가 만졌다고 합니다. ‘내 딸이 지금 막 죽어 가는데 이 많은 사람 중에 옷 좀 만진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야이로의 속이 거의 뒤집어 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중요했습니다.

 

마가복음 5:25~30,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아마 이 혈루병을 고침 받은 여인도 왜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가시는지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면 자기 병도 고침 받을 것까지는 기대했을지라도 예수님이 자기를 직접 찾으실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옷을 누가 손댔다고 마치 짜증내는 것 같은 내용의 말에 제자들이나 야이로는 좀 당황하기도 하고, 답답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마가복음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제자들은 당연한 상식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부딪치며 가는데 다들 손이나 팔이 닿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여러분이 야이로라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몰려가던 수 백 명도 갑자기 행진을 멈추느라 좀 더 혼란스럽다가 곧 잠잠해졌을 겁니다. 사람들이 좀 웅성웅성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밀었대?” “누가 저 사람에게 손댔대!” “? 소매치기야?” “아니, 옷을 만졌대.”

 

겨우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문제의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내렸습니다. “아니, 저 여자는 옆 마을 혈루병자 아냐?” “저런, 저런, , 비켜. 혈루병자다!” “, , , 저 여자가 저 선생을 만졌나봐.” “신통두 허이, 그러게 이적을 행하지.” “아하, 그러니까 저 부정한 혈루병 여자가 부정하게스리 자기를 만졌으니 화가 난 게야.”

 

마가복음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때, 여러분이 야이로라면 계속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예수님, 제가 좀 급하거든요?” “그 여자 나중에 좀 보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잡아 놓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속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그 시간이 모두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야이로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자초지종을 고백합니다. “이러이러해서 고생하다가 예수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나설 형편도 못돼서 옷깃이라도 만졌습니다.” 아마 2,3분이 더 걸렸을까요?

 

그런 사정을 예수님이 몰랐을까요? 아셨죠.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를 건너시기 전에 바다 건너 동편에 거라사 지방 출신의 귀신들린 자가 마귀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딱 그 한 사람만 고치시고 곧바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하루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야이로를 만날 것을 아셨고, 그 와중에 이 여인을 만날 것을 아셨습니다. 물론 또한 그 여인의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물어 보십니다. 왜요?

 

마가복음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진행할 때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체크해 나갑니다. 여러분이 야이로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의 행동이 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좀 급하거든요. 이렇게 일이 꼬이게 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지 않습니까?

 

잠깐 혈루병 치료를 받은 여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신유(병 고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유의 능력을 행할 때, 자신에게서 기운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은사는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낫게 하시지만 즉시 낫는 경우 은사를 행하는 사람도 그 변화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능력이 나간 것이 바로 혈루병 걸린 여인의 믿음의 행위가 원인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허용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찔러서 절 받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이 상황을 무시했다면 그 여인은 혼자 감사는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겠지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건드린다면, 여러분에게서 어떤 것이 나오겠습니까? 길 가다가 사람들이 툭툭 건드리면 짜증이 나옵니까? 운전하다가 자동차를 꽝 건드리면 욕이 나옵니까? 누군가 여러분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건드렸을 바로 그 때, 순간적으로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생명입니까? 아니면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나만 주장하는 의지입니까?

 

왜 여인이 앞으로 나오게 만드셨을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 다른 신자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구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죽기 직전 회개하고 예수님 믿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극악한 범죄자가 사형선고 받고 감옥에서 회개하고 신앙을 갖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죠. 그렇게도 구원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은 가져도 교회 다니는 것을 불편해 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싫어하기도 합니다. “목사들은 위선자들이다. 성경은 믿겠지만 교회는 못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이 지금 내 옷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라고 한 마디만 하셔도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이 누군지 다 압니다. “, 혈루병 여자!”

 

그 여인이 앞으로 일부러 나오지 않게 하고 그렇게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왜 군중들 앞으로 나오게 하셨어요? 바로 신앙은 가져도, 성경은 믿어도 교회 나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대개 그런 분들은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상처를 받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닫습니다. 그런 분들은 영적으로 혈루병에 걸린 것처럼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마음의 피를 흘렸습니다. 착합니다. 남을 욕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웁니다. 피를 흘립니다. 이런 병은 참 낫기가 힘듭니다.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해결이 안 됩니다. 자기는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참 기쁨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부족해서 그래.” 즉 자기는 부족하지 않다. 내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 사람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정말 희한한 일들도 많고, 말도 많고, 오히려 안 나갔을 때보다 더 피곤한 일, 괴로운 일을 겪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그냥 극장에 가듯 맘 편하게만 가려고 합니다. 헌금도 극장표 사듯, “예배 쇼 잘 봤으니 인사는 해야지?”

 

하나님이 왜 그곳에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내 교만과 자존심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교회인데 우리는 탕자처럼, 호세아의 부인처럼 다른 곳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보다 못한 수준의 설교를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아멘 할 수 있으면 그 때가 진정으로 병 고침을 받는 순간입니다. (이때는 아멘하면 안되는데...)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의 장미희 같은 집사,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려는데 자꾸 딴죽 거는 장로의 까탈스러움을 허허, 아멘하며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때 병 고침을 내가 받은 겁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교회 안 나가면 압록강 바로 앞에 놔두고 일사 후퇴한 겁니다. 아직까지 38선이죠.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고 무너졌을 때, 주님은 나를 모든 우주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혈루병 고침 받은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부르셨습니까? “딸아.”

 

예수님은 이 여인을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천국을 상속받은 당신의 백성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공적으로 이 여인이 고침 받았음과 이제는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됨을 증거 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 여인을 앞에 나오게 하셨고, 자신의 입으로 믿음을 증명하게 하고, 이제 예수님이 그 여인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그 여인이 군중들 앞으로, 자신 앞으로 나서게 부르십니다. 누가 자신의 옷을 만졌는지도 다 알면서 누가... 대었느냐라고 물으시며 그 여인이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다시 야이로에게 돌아옵시다. 야이로에게는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도중입니다. 진짜 설상가상입니다.

 

마가복음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제 끝났습니다. 야이로의 무릎의 힘이 쭉 빠졌겠지요. 기가 막혔겠지요. 아마 길에서 5분 정도 더 지체하지 않았다고 딸이 죽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보장은 못하겠지만, 왜 일이 이렇게 절묘합니까?

 

이 여자가 하필 이 시간에 나타나가지고... 왜 이 선생은 일부러 쓸데없이 시간을 보낸거야?” 야이로는 딸의 죽음의 소식에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생각은 못했을지라도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소식을 전한 사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선생을 더 오시게 하지 않아도 돼. 귀찮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상식입니다.

 

우리도 또한 야이로 같이 얼마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까?

 

몇 년 전 영국의 아이리스 지오프리라는 중년여인이 로터리에 당첨되었습니다. 영국의 로또(로터리)는 당첨금이 어마어마합니다. 자그마치 2천만 파운드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20,000,000 X 2,000 = 40,000,000,000 . 010개 붙으면 얼마입니까? 400억 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마 전 식도암으로 판정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돈으로도 자기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남을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냥 주어버렸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이 영국 여인에게 삶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신앙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없어지는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무덤에 돈을 갖고 가서 무슨 소용입니까?

 

어제 저녁 스폰지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몇 십억의 로또 1등 당첨금을 타고도 도벽에 중독이 되어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수중에 수십억 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둑질을 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한국인 도둑은 그 인생의 의미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죠. 그것이 없으면 로또 1등 당첨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야이로에게 인생의 가장 큰 의미는 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최우선 순위를 자꾸 걸어 넘어뜨립니다. 급한 야이로를 놔두고 12년을 앓고 있는 여인,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고 난 후에 만나도 될 일을, 그 여자는 왜 하필 지금 나타나가지고, 아니 이따가 몇 시간 후에, 내 딸 좀 살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지. 왜 이 시간에 교묘히 나타나서!

 

이 모든 사건을 움직인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모든 우주를 움직이십니다. ... 때로는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일이 틀어지게 하실지 모릅니다. ... 때로는, 우리의 죽음까지도 허용하십니다.

 

그러한 야이로의 마음 상태까지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36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마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충격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야이로는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이미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의 기준은 자기 딸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의 근거가 되는 자기 딸의 생명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끝났습니다. 그만 돌아가세요.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마가복음 5장이 이렇게 끝났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단지 병 고침을 소원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까지도 이기시는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상식도 없는 막 되먹은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것을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상식은 믿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사람의 상식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미 끝났어, 더 이상 소용없어!”라고 우리의 상식은 말하지만, 하나님은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그때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박국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마가복음 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손이 오늘 절망 가운데 처한 우리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 손은 십자가에 박히셨던 손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 손에 못이 박혔나요?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손 안에 있는 신자들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29,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리고 달리다 굼하시며 소녀를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일으키셨습니다.

 

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옷을 믿음의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여자 아이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야이로는 설마하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릴까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의 유무를 떠나 당신의 구원 의지를 보여주시려고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믿음이 소녀를 살린 조건이 아니고 믿는 자의 복을 보여주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가 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군중 가운데서 비비적거리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사정이나 시간을 비껴 주님은 주님의 독특한 방식대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설혹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 소망이나 바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일처럼 보여도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진정 복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마가복음 28. 구원 얻는 믿음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35부터 5장 마지막 절까지 마가는 주님의 능력에 대해, 메시야의 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31~41에서는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자연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5:1~20에서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건에서 우리는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우리도 또한 사랑받을 수 없는 세상의 자식들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5:21~43에서는, 질병을 고치시고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의 병자가 같이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위해 등장하고 예수님을 모시어 가는 중에 길에서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자가 나타나 믿음으로 치료를 받고, 그 와중에 자기 딸이 죽고, 그리고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네 가지 사건과 이적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모두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사람의 상황이 극한적으로 몰려있을 때에야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음과 같은 간절한 문제와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연의 위험, 마귀의 지배, 질병과 사망의 고통 속에 처하여 있는 몇 가지 상황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상황입니다.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 주님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을 알고계시고 그 상황 속에 계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우리가 만나는 일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 그 지역 사람들의 배척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5: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들은 자신들에게 진정 중요하고 생명이신 당사자를 피하고 싶어 하고 당장의 이익과 피해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건너 오셨을 때 가버나움의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5: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한 사람이 예수님께 뛰어와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이며 장로인 야이로라 했습니다. 그 지역 유지입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임을 얻은 사람이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정적으로도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 온 종교적 명성, 사회적 명망을 다 버리고 한 젊은이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문제는 12살 난 딸이 병으로 고생하다가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재산으로도 그의 인맥으로도 그는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12살의 딸자식이라면, 그야말로 자식 키우는 때 중에 가장 기쁘고 사랑스러울 때입니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딸의 재롱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행복이 확 사라지고 이제 가장 고통스러운 자식의 죽음을 앞에 놔두고 있는 부모의 심정은 찢어질 듯합니다. 아마 대신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것이 모든 정상적인 부모의 마음일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아무 희망이 없을 때에 야이로는 자신의 회당에서 얼마 전 큰 사건을 일으켰던 한 청년이 다시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도 했고, 손 마른 자를 치료하기도 했고, 근처 마을에서 어느 여인(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많은 병 고치는 이적을 행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부터 들었고 보기도 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회당장이라는 직분 때문에 아니면 율법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면 그때는 딸의 병이 없어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배반자라고 비난할지라도, 회당장의 직분에서 물러나게 될지라도, 야이로는 자기가 지금까지 본 대로 이 예수라는 청년을 찾아가서 간절히 구하면, 그가 자기의 가장 큰 문제를, 딸을 고쳐줄 것으로 가대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자가 등장합니다. 요즘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혈루병이란 X염색체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원래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걸릴 수 없는 병입니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혈루병()은 상처에서 피가 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혈루병은 그런 혈루병이 아니고 요즘 말하는 여자의 자궁출혈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든 남자든 출혈이 발생하면 레위기 15장에서는 그 사람이 부정하다하고 7일간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데 이 여자는 12년을 계속적인 출혈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인 접촉이 종교적으로 금지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만지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같이 불결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여자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재산을 허비하고 오히려 병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5:25~26,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래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공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무리 속에 숨어 있다가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계획을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5:27~28,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12년을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여기 두 가지의 12년이 있습니다. 하나는 야이로가 경험한 12살 난 딸의 행복한 12년입니다. 그러나 그 12년도 이제 질병과 죽음으로 끝을 맞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혈루병 걸린 여자가 경험한 12년의 고통의 세월입니다. 물론 더 오래 그 병을 짊어지고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괴로움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내온 시간입니다.

 

한 사람의 어린 소녀는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12년의 행복을 보냈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죽음 같은 12년의 오랜 세월을 억지로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12년을 너무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이 한 순간의 장면에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의 너무 다른 인생이 절망이라는 끝에서 한 사람 예수 앞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각자 다른 시간들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동시대를 만났고, 비록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를 지라도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서로 만났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분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얽혀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문제를 주님께 드리는 믿음으로 지금 나와 있다면, 바로 이 자리가, 바로 이 교회가, 주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셨다는 믿는, 승리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상식적으로 정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내가 엎드러짐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어떤 조건이 있어야 교회에 나가겠다, 무엇이 없어서 못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이런 삶과 신앙의 한계를 넘어보지 못한 수준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투정만 하여야겠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몇 달 전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2시간 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한양공대 대학원까지 다닌 분이고 강사까지 하셨고 미국에서 몇 년 생활까지 하신 70이 가까우신 분입니다. 컴퓨터와 전자보안관리 시스템까지 경험과 지식이 꽤 있는 분이 지금은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어느 교회에서 관리집사직을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 관리직이라는 것이 큰 교회에서는 자기 맡은 전문만 담당하면 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중소규모 교회들에서는 크고 작은 궂은일을 다해야 하고 일 잘하면 아무 말 없고 실수하면 말 많은 직업이 관리직입니다. 그렇다고 노동에 비해 보수가 대체로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이 처음에는 순수하게 일을 시작했다가 여러 자존심 상하는 일들을 당했습니다. 다른 집사님들로부터, 교회 교역자들 심지어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통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답니다. 가끔 저하고 마음을 터놓는 이야기를 해서인지 제가 그 교회를 떠나고도 전화가 왔습니다. 말하자면 제게 화풀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그냥 듣기도 하고 그렇게 2시간을 통화하다가 마지막에 제가 한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면서 화가 납니다. 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에서는 더욱 조심해야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눈에 뜨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나를 그 교회로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런 믿음의 성장의 상황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잘나서 그 문제의 해결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이 내가 망치와 모루에 두들겨 맞고 뜨거운 불맛, 차가운 물맛 보면서 연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곳 외에는 나 같은 인간이 단련 받아 성장할만한 곳이 더 이상 없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교회가 그 연단의 장소입니다. 교회가 좋은 면만 내놓고 멋있게 찬양하고 멋있게 설교 듣고 앉아 있다가 헤어지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이 더 잘 해냅니다.

 

대형교회들이 전도 안 해도 사람이 몰리고, 인기 있는 이유가 그 이유입니다. 부담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헌금, 봉사, 준만큼 교양 있게 대접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신약서신들의 교회 어디에도 그런 교회가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문제 많은 인간들이, 때로 서로 말 많고, 상처를 주고, 지지고 복닥거려도 그래도 주님만은 붙들겠다는 곳이 교회입니다.

마가복음 27.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거라사가다라

 

마태복음 8:28~34가다라지방의 귀신들린 자와 마가복음 5:1~20, 누가복음 8:26~39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사건을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마태의 기록대로 가다라인지 마가나 누가의 말처럼 거라사인지가 문제입니다.

 

사실 거라사는 갈릴리 동편에 위치한 지방으로 갈릴리로부터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요단계곡 동쪽으로 2마일 이상 떨어져 있으므로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이라고 한 누가의 기록과는 일치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두 지방은 다같이 갈릴리 동남 편에 있어 헬라도시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경에 속하므로 거라사(데가볼리의 하나인)가다라 구역 안에 있는 도시로 보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복음서 기록자들이 각기 지명을 달리 표현한 것이므로 공관복음서간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가다라’(8:28 이하)와 마가복음, 누가복음(8:26 이하)거라사는 지리상 구분하면 다른 지역이지만 거라사는 가다라 안에있고 가다라와 거라사 둘 다 데가볼리에 들어가므로 복음서의 오류가 아닌 같은 지역을 이르는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데가볼리는 본래 유대의 한 지방이었는데 알렉산더 대왕 이후 열 개의 헬라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군 제 14군단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사문화와 상업주의 문화, 그리고 물질주의 문화가 결합되어 음란하고 죄악된 거라사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지형적으로도 갈릴리 해변에는 해수와 바람에 의해 괴상한 모양을 한 바위와 천연동굴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이런 천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해서 귀신이 들려서 무덤 사이에 거주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던 한 사람을 회복시키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세 가지 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사탄의 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그 지방 사람들이 아니라 귀신들리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입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뜻대로 살면서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를 지배하던 악한 영은 누가 자기에게 찾아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예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에게 그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물으신 이유는,

 

악한 영의 세력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그 형상의 본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그 형상을 회복하여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내면이 밝아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을 때 미움과 증오심이 생기고, 자학과 심한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악한 영은 죄와 어두운 생각을 심고, 참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배후세력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 한 편에서는 악령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당하거나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은 둘 다 사탄이 기뻐하는 현상입니다. C.S. 루이스는 사탄은 물질주의자들과 주술주의자들을 둘 다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참 자아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을 나타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입니다. 악한 영은 거라사인의 참 자아와 이름을 상실케 했습니다. '나는 버림받은 자이다', '쓸모없는 존재다', '죽어 마땅한 자다'라는 거짓 자아를 심어서 비참한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죄의 포로 된 삶을 살게 했습니다.

 

악령의 이름은 군대라고 했습니다. 빛이 비추이는 곳에 어둠이 물러가듯 영적 권세자 예수님의 음성 앞에 악한 영의 실체가 들어났습니다.

 

군대는 헬라어로 레기온으로 로마군인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입니다. 거라사인에게 엄청난 떼의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습니다. 정욕, 교만, 시기심, 자의식, 절망, 이기심, 안일, 물질, 반발심, 열등감 귀신 등, 갖가지 귀신이 그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는 더러운 군대귀신에 지펴 세상과 고립되어 무덤주위에서 살았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에 묶이기도 했으나 아무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가정과 자신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사탄과 마귀의 힘은 존재하며 여전히 하나님과 대적하고 믿는 자들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10:10).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사회의 힘

 

인간의 세상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어지럽히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못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따로 격리시킵니다.

 

그래서 교도소가 있고 정신병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원인인 죄인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또 다른 결과로부터 안전히 지켜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자들이나 다루기 힘든 자들은 쫓아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를 멀리 격리시켰고 쇠사슬로 묶기까지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무슨 간구를 했습니까? (10)

 

[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정체가 들어난 악한 영들은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지방은 자신들이 터 잡고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악한 영이 거하기 좋은 환경이란 어떤 사회이겠습니까?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시되는 사회입니다. 물질이, 인간의 욕망들이 고상한 가치로 바뀌어, 혹은 쾌락이라는 허울로 바뀌어 인간의 생명과 고귀함보다 다른 것들이 우선시 되는 사회(17)입니다.

 

그런데 데가볼리 지역의 거라사(가다라) 사람들은 그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예수님께 간구(기도)했습니다. 뭐라고요?

 

[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돼지 2천 마리는 약 3억 원(돼지 1마리 고기 약 80kg, 현 국내산지 가격이 1kg에 약 2,000, 2천 마리 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한 영혼이 돼지 2천 마리나 몇 억 원보다 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골칫거리를 해결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두렵고 손해만 끼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돼지라는 동물을 미워하신 것도, 돼지 주인을 미워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을 바로 보기보다 자기에게 유익되고 편안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회의 원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고 그에 따르게 될 희생과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가 있어도 자신들의 이익에 해를 끼칠 것 같으면 진리를 외면합니다. 일본의 정권이나 극우파들은 독도가 자신들의 단합에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진실을 알면서도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있었을 때 아데미(아르테미스)우상제조를 업으로 하던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의 모함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19:23~29,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 주의 힘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악한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폭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가신 이유는 이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악한 영의 위협과 세상의 위험과 어려움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주님의 권능으로 구하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악령이 떠난 후 귀신 들렸었던 자는 예수님께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18).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19~20).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이 온전케 된 거라사인을 데가볼리 지역으로 파송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향해 가도록 하십니다.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귀신들린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아닐지라도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일 수도 있고, 내적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있고, 죽지도 못하고 무덤 사이에서 밤낮 울부짖는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 여러분 자신을 내어 드리십시오. 여러분을 묶고 있던 문제들과 고통을 돼지에게 옮겨 가라고 하십시오. 그 돼지가 여러분의 재산이든 어떤 귀한 것이든, 여러분의 영원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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