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6. 배에 계신 그대로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마가복음의 네 가지 비유이후 네 가지 이적이 연이어 나타납니다.

 

1. 바다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4:35~41

자연을 다스리심을 보여 주십니다. 어떤 어부, 선원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거라사의 무덤에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5:1~20

귀신의 세력을 굴복케 하십니다. 어떤 정치인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3.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십니다. 5:26~34

인간의 불치병을 고치십니다. 어떤 의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5:35~43

죽음도 이기십니다. 어떤 부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인간들의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의 네 가지 비유를 전하신 후 제자들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그 배를 그대로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바다란 짠 물이어야 하나 당시의 갈릴리는 짠맛이 약하거나 거의 민물에 가까운 물이지만 바다라 불렸습니다. 갈릴리바다는 해수면이 낮으면서 주변의 산이 높은 특이한 지형을 갖고 있는 바다입니다. 그래서 종종 이상기후로 거센 바람이 불기도 하는 곳입니다.

 

갑작스럽게 바람이 잘 변하는 바다이지만, 어부로서 경험 많은 제자들이 보기에는 그때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넙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몇 명이 다른 배를 타고 같이 바다를 건넜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하루 종일 있었던 육체의 피로로 인해 배 안에서 잠드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달라지고 파도가 일었습니다. 경험 많은 노련한 뱃사람들인 제자들도 배 안에 물이 들어오고 뒤집혀질 것 같아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고 소리 질렀습니다. 다음 상황은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고 예수님은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이 배는 제자들에게 단지 들려지는 비유가 아니라 체험하는 다섯 번째 비유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험한 파도의 비유를 체험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오늘도 이런 파도를 경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마가복음의 최초 독자들은 로마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이 장면을 읽었을 때 아마 자신들의 입장을 비교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믿음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네로황제의 핍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고, 화형에도 처해졌습니다. 마치 자신들을 구할 분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그들이 모든 자연과 귀신과 질병과 죽음도 이기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는 다섯 번째 비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이 어떠하셨습니까?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가 마치 잠자는 것 같습니다. 아니 진짜 잠자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구약에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31: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장밋빛 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를 정말 돌보고 있습니까?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배 안의 제자들은 믿음의 학교를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하교를 다닙니다. 세상의 학교에도 시험이 있듯이 믿음의 학교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종이로 보는 시험이 아니라 삶으로 보는 시험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갈릴리바다라는 시험장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잠잠하다라는 뜻의 두 단어:

1. 침묵하다 siope - 스스로 조용하게 됨

2. 재갈을 먹이다 phimo - 강제적으로 조용하게 됨

 

마가복음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φιμώθητι)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마가복음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ἐσιπων)

 

마가복음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πεφίμωσο)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가복음 9:34,

저희가 잠잠하니(ἐσιπων)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마가복음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σιωπήῃ)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마가복음 14:61,

잠잠하고(ἑσιπα)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러므로 4:39의 바다를 잠잠케하신 단어는 재갈을 먹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 있습니다.

 

89:9,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

 

예수님은 이 일로 제자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저가 뉘기에?”

 

예수님의 목표는 이 파도 속에서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알게 되는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나는 어떤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때로는 그 파도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죽을 뻔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7:18~25,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제자들은 아마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지켜드려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을지라도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님을 위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과 같은 배에 올라타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인생의 배에 주님이 있음을 알고 있나요? 여러분은 처음 구원받은 그대로 주님과 함께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마가복음 25.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30~34,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성경에서 겨자씨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겨자씨는 먼저 천국’(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기 위해 사용되어졌고, 두 번째로 믿음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어졌습니다.

 

1. 겨자씨는 천국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누가복음 13:18~19,

[19]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 겨자씨는 믿음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겨자씨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겨자씨는 작습니다. 복음은 이 세상이 보기에 너무 작아 경멸하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2) 겨자나무가 되면 새들이 깃들 정도가 됩니다. 복음의 결국은 영화롭고 위대합니다. 그 반대로 이 세상은 교만하게 시작하나 나중은 멸망입니다.

 

이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이 전하신 때는 복음전파의 방법이 달라진 후입니다. 회당에서 바닷가로 장소를 이동했습니다. 회당을 지배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반기지 않았지만 듣는 백성들은 숫자가 많아져서 더 이상 좁은 건물 안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천국의 일곱 가지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먼저 나온 두 가지 비유(네 가지 밭, 등경)는 모두 천국복음이 유대인들에 의해 거절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의 두 비유에서도 같은 맥락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주님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은 당연히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많은 숫자의 무리 속에 숨어있는 적은 수의 무리들,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사기 7장에 기드온의 군사들이 수십만 미디안 대군과 싸우기 위해 어떻게 모였습니까? 처음에 32천 명이 모였으나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아가게 하니 1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것도 많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에 물가에서 물을 핥아먹는 자들을 추리게 하여 그 숫자인 3백 명으로 싸우게 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지혜롭거나 조심성이 많은 정예부대가 아닙니다. 단지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적은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적은 수로 일을 하십니다.

 

현대 교회는 숫자가 커야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카타콤 지하교회에서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숫자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큰 교회가 다 악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형교회 나름대로 쓰임 받는 일이 있잖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탄도 쓰임 받습니다. 용도가 있다고 옳고 그른 것을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작은 교회가 선은 아닙니다. 낮거나 약한 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숫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대군을 주지 말라. 나에게 죄를 두려워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백 명을 주어라. 그러면 나는 지옥문을 흔들 것이다

 

Vance Havner(1901~1986) 가 말했습니다.

교회가 전진했을 때는 상처를 입었을 때였다. 교회가 쇠약해졌을 때는 메달을 걸었을 때이다. 경기장 관람석 티켓을 샀을 때보다 기독교인들이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으로 던져졌을 때 기독교는 위대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귀천과 높고 낮음으로 사람을 보고 교회를 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기뻐하는 눈입니다.

 

고난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이 마가복음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들은 겨자씨처럼 적으나 마가복음을 보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교회가 성장하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의 삶을 살 것을 바라고 소망합니다.

 

 

참고.

겨자: 헬라어 '시나피스'(sinapis). 구약성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 겨자는 오직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발견되는데, 천국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는 비유 (13:31~32, 4:30~32, 13:8~19)와 그리고 믿음에 대한 비유 (17:20, 17:6)에서 이다.

이 시나피스(sinapis)라는 겨자에서 열리는 겨자씨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씨"지만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고 하는 하늘나라의 비유에 대한 매개체로 이용되었다. 이스라엘에는 여러 종류의 겨자가 있는데 그중에도 야생겨자(sinapis arvensis)와 백겨자(sinapis alba) 그리고 흑겨자(brassica nigra /사진)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겨자과(crusiferae)에 속하는 것으로서 노란 꽃을 피우며, 네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고, 위에서 바라보면 그 꽃의 모양이 십자형을 띠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백겨자(white mustard / sinapis alba)와 흑겨자(black mustard / brassics nigra)는 지중해 지역과 중동지역에서 기원하였으며, 2000년 이상 경작 되어져 왔다. 또한 이 겨자들은 고대로 부터 기름을 채취하거나 식용, 약용으로 이용 되어져 왔다. 신약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겨자씨는 이렇게 많은 겨자들 가운데 아마도 흑겨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이 흑겨자는 다른 종류의 겨자들과 비교해 볼 때 경우에 따라 2m 이상 자라는 키가 가장 크고, 갈릴리 지역에서 많이 자라며, 뿐만 아니라 그 씨앗의 크기가 비유의 내용과 비슷하게 직경 1mm 정도로 아주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겨자를 나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새가 깃들만큼 튼튼한 것으로 적고 있어서, 겨자를 나무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분명히 겨자는 12년생 초본이다. 그렇지만 중동지역에서는 35m씩 자라서 사람이나 말의 키보다도 큰 것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또 원줄기가 사람의 팔뚝만큼 굵은 것이 있고, 12년생 식물이지만 줄기가 목질화(木質化)하여 나무처럼 된다. 새들이 씨를 따먹으러 와서는 집을 틀어도 그 무게를 넉넉히 감당할 수 있어서, 예수님께서 나무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해야 옳다.

 

Mustard seeds are the proverbially small seeds of the various mustard plants. The seeds are about 1 mm in diameter, and may be colored from yellowish white to black. They are important spices in many regional cuisines. The seeds can come from three different plants: black mustard (B. nigra), brown Indian mustard (B. juncea), and white or yellow mustard (B. hirta/Sinapis alba). It is often whimsically referred to as "eye of newt."

 

마가복음 24. 씨앗의 비유

마가복음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4장의 네 가지 비유는 마가복음에서 유일한 비유 이야기들입니다. 비유에는 가장 중요한 진리 하나가 숨어있습니다. 앞의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통해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참고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모든 비유나 이야기에서 씨앗이 말씀을 뜻한다라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 신약성경에 나오는 씨앗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약속의 자손을 말하는 좋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를 해석할 때 무엇은 반드시 무엇이다라고 단순화시키는 방법은 위험하다고 몇 주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씨앗이 어떠한지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씨앗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성경의 헬라어 원문에는 어떻게 된 것이 먼저 나와 강조되고 있습니다. 앞에 있다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ς ούκ οδεν (how knows not he)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싹을 틔우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은 씨앗 안에 있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자라고 열매 맺는 현상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씨앗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위대한 자연물입니다.

과학자들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씨앗에 있는 세포의 핵에는 모든 유전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분열은 언제 시작할 것인지, 어떤 식으로 얼마나 분열할 것인지, 세포의 성질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핵 안의 염색체에 저장되어 있지요. 씨앗의 생김새가 비슷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들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식물이 되지요.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1) 충분한 산소가 있어야 합니다.

씨는 광합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흡으로 싹을 틔웁니다.

씨앗이 발아하려면 충분한 산소의 공급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보리와 밀을 물속에서 발아 시키면 전혀 발아하지 못합니다. 벼는 물속에서도 발아를 합니다.

2) 적당한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이 많으면 씨앗이 썩을 수도 있고, 적으면 자라지 않습니다. 발아 과정에서 수분은 종피를 연화시켜 배가 쉽게 씨앗 껍질을 빠져 나오도록 해주며 껍질의 가스투과성을 증가시켜 산소공급과 탄산가스 배출을 쉽게 해줍니다. 또한 흡수된 수분은 저장물질의 분해와 전류를 가능케 하여 발아에 필요한 물질대사를 원활하게 해줍니다.

3) 적당한 온도입니다.

씨는 생물체이기 때문에 적정온도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약 30~36도 수준. 그러나 씨의 종류마다 다릅니다. 어느 정도 깊이의 땅 속까지는 지표면에 가까울수록 햇볕을 받는 양 때문에 땅 속의 온도가 내려갈수록 낮아집니다. 물로 아주 깊으면 지열 때문에 높아집니다.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는 온도가 점점 낮아집니다. 그래서 땅이 깊을수록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적정 온도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쥐들은 밤을 땅 속에 저장하는데 30cm 이상 깊이 저장합니다.

그러면 흙은? 밭에 씨앗을 뿌린다고 했는데 밭은 아무 일을 하지 않나요? 씨는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릴 때까지 자랄 양분이 이미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고 광합성을 하는 때부터 거름이 풍부한 토양이 필요하죠.

자연의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의 비유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베드로전서 1:23~25,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 55:10~11,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여러분이 받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2. 씨앗은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스스로”(ατομτή) 자동적으로와 같습니다. ‘오토입니다. 영어의 오토매틱(automatic)이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장면의 같은 단어 사용 예: 사도행전 12:10 - ‘자동으로감옥 문이 열림.

사도행전 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씨앗의 비밀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이것은 천국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그 자라는 일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요한복음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전도서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씨를 뿌린 농부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시대의 씨를 뿌리는 농부는 우리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직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농부입니다.

고린도후서 5:18~20,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전서 3:6~7,9,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후서 3:1~5,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2.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4:27~28,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전도서 3:1~2,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인데, 인내, 인내, 인내.”

씨앗에도 수면기가 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기에는 조건이 맞지 않아서 잠을 자는 것은 말합니다. 보통 10~20년입니다. 조건이 맞추어 질 때까지 가만히 있습니다. 씨앗이 휴면에 들어간 경우에는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후에도 조건만 맞는다면 발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적으로 얼마 전에 TV에서 삼국시대의 창포인지 목련 씨앗인지 발아했다고 했습니다. 해외에서는 선사시대의 양치식물 종자가 발아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전도서 11: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3.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실하게 하십니다.

마가복음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땀을 반드시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잠언 11:8,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전도서 11: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최후의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야고보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또 맡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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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3. 등불의 비유

마가복음 4:21~25,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지난 시간에는 두 번에 걸쳐 비유의 비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알기위해 다른 것과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쉽게 설명하는 비유가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두 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비유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영적인 일에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진리를 더 잘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일에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는 성경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49절과 23절에,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온다고 합니다만, 헬라어 원문 성경(혹은 KJV)에는 등불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등불이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마가복음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And he said unto them, Is a candle brought to be put under a bushel,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set on a candlestick? (KJV)

He said to them, "Do you bring in a lamp to put it under a bowl or a bed? Instead, don't you put it on its stand? (NIV. 일반인 지칭명사 너희를 사용합니다)

, 등불이 하나의 인격처럼, 사람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그 등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이와 같이 빛을 예수님으로 은유해서 사용하는 부분이 특히 많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한복음 8:21,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이 빛이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빛이 세상에 왔으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5,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구약에서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을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1~4,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비유의 목적 중 하나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 자체가 하나의 비유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비유입니다. 성육신 자체가 신비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에는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았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를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요즘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지식의 힘이 바로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이고 매우 감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예수라는 사람을 왜곡시키고 덧붙여서 편집된 사람들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좋게 봐주어도 단지 명상과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데 좋은 마음 닦기 수단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것은 옛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최근 SBS방송에서 방영한 신의 길, 사람의 길이라는 특집프로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나 몇 년 전 나온 다빈치코드 같은 영화들이 요즘 대표적인 영적 장님들에 해당합니다. 그런 시도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 대해 반대를 하는 뭔가 새로운 접근이 있어야 인기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때문입니다.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2절의 말씀은 언뜻 보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한 병렬형식입니다. 빛이 집 안에 비췰 때 억지로 빛으로부터 숨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빛이 모든 것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비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숨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우리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믿는다고 하면 저절로 모든 말씀이 이해되나요? 이해된 것이 그 말씀대로 살아지나요?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24절과 25절의 말씀으로 이 등불의 비유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즈음에 달란트비유(마태복음 25)를 마음속에 떠올린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비유의 비밀을 찾으신 겁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찾아봅시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히브리서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마가복음 4장의 등불의 비유에서는 등불이 놓이는 세 가지의 장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디죠? 말 아래, 평상 아래, 등경 위입니다. 말 이란, 곡식의 분량을 한 말, 두 말 재는 말통(20L)입니다. 평상이란 침대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매트리스가 달린 침대가 아니라 그냥 나무로 만들어진 침상입니다. 등경이란 촛불이나 호롱불을 놓는 곳인데 주로 집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높은 곳입니다. 주로 벽이나 가운데 기둥에 설치합니다.

만약 등불을 말 아래 둔다면 어떤 상황입니까? 더 이상 불이 필요 없어서 불을 끌 때입니다. 좁은 공간 안에 갇힌 등불은 산소가 없어서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등불이 평상 아래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잘못하면 화재가 날겁니다. 하나는 불이 없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이 너무 많이 생겨 등불이 아니라 재앙이 됩니다. 등경 위에 놓이는 것이 등불의 제 위치입니다.

24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 신자들도 그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기 어려움을 설명합니다. 지난 시간의 네 가지 밭 혹은 네 가지 땅의 비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너무 굳어있으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혹은 깊이가 너무 얕아서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혹은 다른 염려와 유혹에 가려져 싹트던 곡식이 자랄 수 없습니다. 적당한 밭에 뿌려진 씨앗이 제대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등불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 등불이신 예수님이 몇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유를 비롯한 깊은 말씀을 그들에게만 설명해 주셨습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여기에서 혼자 계실 때란, 단지 예수님 혼자가 아니라 많은 무리들과 떨어져서 오직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34절의 혼자 계실 때개인적으로 혹은 비밀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 된 자신의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나누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빌립보서 2:15~16,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1:1~3,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이제 여러분이 등불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작은 등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들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정작 깨닫게 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동일한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위해서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비추이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기름이 되고 심지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5:18).

주님은 홀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홀로 고독을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죽을 때 우리의 등불이 탑니다. 그리고 빛을 발합니다. 세상을 밝히고 또 다른 제자들에게 그 빛이 비추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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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2. 비유의 비밀

 

마가복음 4:1~20,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같은 내용인 누가복음을 병행 본문으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5~15,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네 가지 밭의 비유는 먼저, 말씀이 결실을 맺는 비율(예수 믿어 구원 받는 수)이 극히 적지만 큰 결실이 있기 때문에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네 가지 밭의 비유, 마지막 좋은 밭을 제외하고는 세 가지 밭들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비유할 수 있기도 하지만, 이 모든 밭이 넷으로 나누어진 다른 상황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가 구원 받은 사람의 이야기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냐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 있는 이야기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 말씀 앞에 나와 있는 우리를 향한 비유입니다. 즉 말씀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의해 우리는 네 가지 밭을 수시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812~13절의 말씀 중 믿는다는 단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밭의 비유에서 똑같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가 이 세상 신, 곧 마귀가 그 마음 문을 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지만, 한편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누가복음 18: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음으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체험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구원 받는 문제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가지 밭 혹은 땅의 비유의 말씀으로 우리가 늘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길가(단단한 흙)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가의 흙이 단단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발로 밟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 문을 닫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에 너무 많이 내어주어 우리의 영혼이 너무 많이 세상에 밟혀지게만들어 버린 경우에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 많이 세상에 내어주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2. 돌밭(흙이 얇은 밭)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외적인 문제(환난, 핍박)에 부딪쳐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환난은 우리의 얄팍함을 나타내어 줍니다. 환난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척도입니다.

 

이들은 때로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간입니다. 환난, 핍박이 올 때 믿음을 버립니다. 뿌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8:13에는 잠시 믿는다고 했습니다. 원하기는 늘 충만하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의지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이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교회를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믿음을 따라 살기를 원할 때, 환난이나 어려움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하나님을 향한 의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3. 가시떨기(가리워진 흙)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이 경우는 내적인 문제(염려, 유혹, 욕심)에 어두워져 결실을 못하는 경우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가시떨기에 뿌리어진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환난은 사탄의 두 번째 강한 무기이다. 첫 번째로 강한 사탄의 무기는 물질이다.”

 

4. 좋은 땅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밭은 앞의 세 가지를 다 이겨내는 밭입니다. 저절로 좋은 밭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의 최고라는 생각과 의지가 있는 사람은 길가와 같은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사람이 돌짝밭도 이겨냅니다. 세상의 유혹과 물질의 유혹도 이겨내야 가시떨기 같은 상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거름이 되고 두엄이 되어 좋은 밭으로 만들어 갑니다.

 

예화: 공산 베트남 소속 민병대원 바이의 이야기

베트남 전쟁 당시 바이라는 청년은 어렸을 때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불행한 경험 속에서 정부군과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습니다. 어느 날 베트남 정부군 소속 병사를 사로잡아 그를 처형하기 직전 마지막 소원을 들을 때였습니다, 그 병사가 자기 윗주머니의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들어 주게 됩니다.

바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그때 미군의 헬리콥터가 사격을 시작하여 처형 직전의 병사는 도망가고 게릴라들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바이는 동료들과 도망가는 도중 게릴라 지도자에게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라고 질문하여 오히려 반동이라는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그렇게 같이 도망가는 중 그는 설사병에 걸려 뒤처지고 혼자 남아있게 될 때 갑자기 앞에서 폭음이 들렸습니다. 먼저 가던 동료들은 몰살당하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바이는 4년 동안 계속 그 다음 예수가 무엇이라고 말했을까?”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기 직전 가장 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내용이 그 사람의 생명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후 전쟁이 끝난 후 바이는 우연히 성경책을 얻게 되어 읽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도 어느 날 심기어진 작은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자신만의 간증과 신앙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남기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자라고 열매 맺기를 위해 기도하시고 신앙을 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겨우 두 배의 결과가 나와도 대박이라고 하면서 그 결과를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결실은 100배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어 놓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믿음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자존심, 욕심, 자만 같은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좋은 땅이란 사람 사는 환경이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반대로 복음이 자라기 좋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이 자라는 땅은 고난의 땅이요 피 흘리는 땅입니다. 신앙을 위한 고민과 자신과의 싸움의 땅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눈물로 자라고 수고함으로 자랍니다. 그러나 열매가 거두어질 때에는 커다란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100배의 결실이고 이 천국의 기쁨에 주님은 여러분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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