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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 중풍병자와 마비된 한국 교회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문까지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였습니다. 그 집안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2: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어떤 사람들은 신기한 이벤트를 원하고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길 원하고 병 고침을 받기를 원했겠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진실한 고통과 문제는 돈이 아니고 가족, 직장이나 사업이 아닙니다. 생명이요, 그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까?
제가 오늘의 본문에 대한 설교를 과거에 들었던 기억에 의하면,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협력해서 도왔으니 ‘전도하자’로 결론을 맺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핵심은 빠뜨리고 단지 ‘전도’라는 주제를 위해 본문의 상황만을 이용한 해석입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까지 데리고 온 사람들은 환자의 침상을 들고 온 네 사람을 포함해서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목을 끈 사람들은 네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그 중풍병자가 스스로는 올 수 없는 완전한 무능력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 병자에게, 그리고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 와야 한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그들의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선언을 통해 인간의 질병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죄의 문제와 구원을 연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병자를 죄 사함이라는 선언으로 구원하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여전히 몰라보는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영적인 병자들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내용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의 만남을 통해 죄의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절망적일만큼 아느냐?그리고 그 구원자는 자신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죄인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근원적인 치유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던 서기관들은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참람되다 즉 불경스럽다’고 서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까지 보시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9~11,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9절에서 “더 쉽다”는 헬라어 단어(ευκοπωτερον)에는 “더 좋다”(better)는 뜻이 또 있습니다. 즉 9절 말씀은 “말로 하기에 어떤 표현이 더 편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절망적인 사람에게 어떤 말로 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더 좋겠느냐”는 뜻입니다.
사람의 병이 죄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믿는 유대인들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절망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죄를 늘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의 근원은 물질이나 질병이 아니고 죄에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쳐 주시려고 죄 사하는 선언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제대로 알고 듣는 자는 모든 인생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고통들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 시민이 되는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 후에도 죽습니다. 요한복음의 나사로는 예수님의 이적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언젠가 다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후의 결과에 대해, 어떤 사람의 구원에 대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단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았다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비가 된 자들은 그 환자가 아니라 그 집 안에 앉아있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앉아 있었고 예수님이 어떤 잘못을 하지 않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관심도 없고 단지 적대적인 의심과 불신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몇 가지 질병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문둥병(한센병, 나병)은 사람의 신체 전체에 한센균이 감염되어 모든 지체가 하나씩 죽어가는 병입니다. 신경조직, 뼈,눈까지 감염합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감각기관들이 기능을 상실합니다. 이런 원인과 증상 때문에 성경에서는 문둥병을 죄로 인한 일반적인 인간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중풍은 신체에 감염된 세균이 원인이 아니고 뇌의 문제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경색) 터져서(출혈) 뇌신경이 죽으면 죽은 뇌신경에 연결된 신체부위들이 아무리 건강했어도 당연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머리가 죽으면 지체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중풍을 종교 지도자들의 죄와 타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가버나움 마을의 한 중풍병자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을 대표한 경우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그 지역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와 있었거나 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대한 감시를 목적으로 파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과거 80년대 후반까지 후진을 모르는 전진 성장만 해 왔습니다. ‘교회 성장’이 실제 목표인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교회 성장 이론을 꺼내오기는 하지만 정말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장한 교회의 결과를 보면 압니다. 결국 목사든 신자들이든 인간의 영광이 목표입니다.
한국 교회의 머리들이, 지도자들의 영적인 혈관이 욕심과 세상 정욕에 막혀서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 정신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몸이, 교회가 마비되어갑니다.
더 크고 성공한 목사가 되기 위해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조건, 학력, 시스템, 건물(건축) 등으로 교회를 채워 넣고 있습니다. 설교가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아니라 교양미를 내세우고 위로의 내용만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영적 마비 현상을 개탄하는 제 은사(합신)이신 어느 목사님의 글을 잠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마비되어 가고 있다”
- 김명혁 (강변교회 원로목사)
첫째, 한국 교회는 지금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에 마비되어 있다. 한국 교회의 예배는 어느덧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음악 및 율동적인 소양을 지닌 젊은이들이다. 저들은 음악 및 율동을 하면서 감동적인 언어와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감동적인 음악과 율동 또는 통성 기도가 반복되다가 예배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음악과 율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중세교회는 물론 일부 개혁교회들은 감정을 흥분시키는 음악과 악기를 자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다.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유명한 목회자의 유명 카리스마에 마비되어 있다. 목회자의 진실한 삶보다는 목회자가 각종 두드러진 유명 카리스마를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게 되었다. 그것이 설교의 카리스마이든지 방언의 카리스마이든지 치유의 카리스마이든지 뒤집어짐의 카리스마이든지 코미디의 카리스마이든지 정치력의 카리스마이든지 경제력의 카리스마이든지 반공의 카리스마이든지 상관이 없다. 수천수만 명의 청중들을 사로잡기만 하면 된다. 카리스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모여든다.
“지금 일부 한국 교회는 바른 삶보다는 흥분과 기현상을 나타내 보이고 그것들을 추구하게 만들므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진실한 삶보다는 약간 무당적이고 약간 귀신적이고 약간 이단적인 요소들을 나타내 보여야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문선명 집단이나 김기동 집단에만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아니다. 유명 카리스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약간 무당적이고 약간 귀신적이고 약간 이단적일수록 사람들은 몰려온다. 지금 한국 교회는 유명한 목회자의 유명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있다. 최근에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설교 세미나와 능력전도 세미나에 몰려드는 것은 유명한 목회자, 성공한 목회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목회자가 되려는 야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셋째, 한국 교회는 지금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마비되어 있다. 목회자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죄와 허물을 지적하는 책망보다는 모든 것을 눈감아주는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이미 오래 전에 로버트 슐러가 했다. 로버트 슐러는 죄를 지적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결국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 조언에 따라 죄에 대한 설교는 가능하면 하지 않게 되었다. 위로와 축복만 강조하게 되었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는 이런 말까지 했다. “교회의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중진들이 주일을 범하고 주일에 다른 곳에 가서 딴 짓을 해도 모른 척하여야 합니다.”
결국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회개와 헌신의 기본 신앙을 지니지 못해도 출석만 잘하고 헌금만 잘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치켜 세워주게 되었다. 결국 목회자는 속이고 신자는 스스로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운’ 목회라고 피차 착각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마비되면 전신이 마비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참된 영성을 회복해야 마비된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납니다.
종교 제도와 조직과 건물과 부흥과 승진과 개인의 성공지향의 인생관이 우리의 영적 혈관을 막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치유자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을 먼저 깨닫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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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0~45,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찬송가 509장(21세기 456장)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특히 사람들과 접촉하시는 장면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입니다.
마가복음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2. 문둥병자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3.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댔습니다.
마가복음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4. 야이로의 딸
마가복음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5. 병인들
마가복음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마가복음 6: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6. 귀먹고 어눌한 자
마가복음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7. 소경
마가복음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7. 귀신들린 아이
마가복음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8.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시고 설교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9. 어린 아이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른 아침 일찍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고 낮부터 늦게까지 병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만지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고치고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직접 만지시지 않고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병을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접촉하셨다는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에는 전혀 우연한 사건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이 나옵니다. 신약시대에는 문둥병보다 더 끔찍한 질병이 없었습니다. 요즘의 에이즈와 같은 천형으로 여겨지던 병입니다.
나병(문둥병)에 대한 사전적 정의:
나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 한센병(Hansen’s disease)이라고도 한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A.G.H.한센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결핵균 비슷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74년 Bacillus leprae 라 명명함으로써 유래하였다. 말초신경과 피부에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의 조직에 침범하기도 한다. 일찍이 한의학에서는 가라(痂癩)·풍병(風病)·대풍라(大風癩)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 하였다. 현대의 학술적 분야에서는 나병으로 하되 사회적 분야에서는 한센병이라고 통칭한다.
나병은 피부과 영역의 질병이면서도 특별하게 취급하는 이유가 다음과 같다. ① 나균은 만성적으로 세대증식을 하며, 수년의 잠복기와 장기간의 경과를 가진다. ② 시험관 내 인공배양이 어려워 나병 퇴치의 의학적 발전이 저조하다. ③ 나균은 신경을 특이하게 침범함으로써 신경손상에 따른 불구를 유발한다. ④ 사람에게 특이하게 감염되는 질환으로서,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 옮기며, 이론적으로 다양한 매체에 의하여 균을 옮길 수 있다. ⑤ 전염경로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여 역학적 관리로서 임상적인 환자 추적에만 국한된다. ⑥병의 경과나 증세, 치료 등은 인간의 면역과 나균의 상관관계에 따라 좌우되는데, 자연치유되는 경우에서부터 몸의 일부에 국한되는 경우, 전신에 퍼지는 경우 등 다양하다. ⑦ 나병은 질병 자체 외에 사회학적·정신과적 질환으로서 사회공동생활의 융화문제를 안고 있다.
현대의학에서도 나병은 인간 사회를 파괴하는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문둥병을 특별히 취급했습니다. 레위기 13,14장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레위기 13:44~49,
[44] 이는 문둥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확실히 진단할 것은 그 환처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45]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47] 만일 의복에 문둥병 색점이 발하여 털옷에나 베옷에나 [48] 베나 털의 날에나 씨에나 혹 가죽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있되 [49] 그 의복에나 가죽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병색이 푸르거나 붉으면 이는 문둥병의 색점이라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문둥병자가 접촉한 집은 불결한 것으로 선언되었고 문둥병자는 사람들과 접촉도 할 수 없고 사림들과 수 백여 미터를 떨어져 다녀야 했습니다.
문둥병이 구약에서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신체적 질병이지만 신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영적인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타난 문둥병자는 이런 의미에서 죄에 빠진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는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알았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는 처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알고 그분께 간구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 문둥병자보다도 더 끔찍한 상태에 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도움을 구하는 자만이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민망(憫惘)히 여기셨다”(41절)는 말은 그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를 향하여 손길을 펴셨습니다. 주님의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리고 능력의 손길이 그에게 접촉되었을 때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치료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의 손길로 치료받고 구원받은 문둥병자 같은 죄인들입니다. 내일 수능시험 본다는 학생이 밤새도록 게임하고 놀러 다니면 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시험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벤틀리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고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에 살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은혜로 구원받은 죄악 덩어리라는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문둥병자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문둥병자는 자신의 구원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파탄된 인생과 몸을 구원할 분을 제대로 찾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친 세상에서 실패했을 때, 인생의 낭떠러지 계곡 깊은 곳에서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일들이 우리를 내리누를 때마다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신 주님의 손길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가장 낮추어진 자들이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분명히 들으시고 일으키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과 삶을 은혜롭고 능력 있는 손으로 만져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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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마가복음 1:35~39,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자의 의지(意志)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행하셨기에 그런 당신의 놀라운 사역을 기도 없이는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요 5:19).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든 신자의 삶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역과 섬김의 행동의 최우선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는 모든 신자의 최우선입니다.
*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장면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 기도의 시간: 은밀한 시간에.
이사야 50:4,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2. 기도의 장소: 은밀한 장소에서.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통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하면, 그 설교의 결론은 ‘새벽기도 잘 나오라’는 다그침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새벽, 철야를 하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지 실제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고는 성경에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장면들을 오늘날의 한국 교회 기도집회의 근거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예수님이 늘 하신 것이 아닙니다. 철야 혹은 심야기도도 늘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많이 혹은 여러 번 하셨습니다.
새벽기도가 옳지 않다거나 하지 말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의 하나의 좋은 전통입니다. 기도를 해야 하지만, 그 근거가 정확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언제, 어디에서 해야 하고 등이 정해져야 안심이 되는 분들은 스스로 혼자 찾아서는 못합니다.
기도는 제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다그쳐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계급장이 아닙니다. 누가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하면 무슨 영적 권세가 붙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새벽기도 안하는 사람들을 좀 잘못된 것으로 본다면 새벽기도 하여 좀 더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자신만의 영적 비밀을 구하지 않고 껍데기에서 신앙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열심 있는 기도 행위를 무슨 자랑처럼 남들에게 말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무저갱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남 보이려는 기도를 안 하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솔직히 목사들이 설교 중에 대부분 기도를 다그치는 이유는 ‘집회’가 목적이고 ‘출석’이 목적이지 성도들의 내밀한 영적 성장이 일차 목적은 아닙니다. 물론 말은 그리 하지요.
부흥하면, 교인만 많으면, 힘이 세면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치부하는 오늘날의 성장제일 위주의 잘못된 가치관이 참된 영성의 본질을 흐려 놓았습니다. 목사 혼자라도 새벽기도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참된 기쁨을 발견하고 있다면 남들에게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성은 자신에게서 넘쳐서 남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호소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샘이 깊은 물은 그 물이 저절로 큰 강에까지 이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왜 예수님이 기도하셨느냐, 무엇 때문에 기도해야 했느냐를 놓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일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쉬운 것, 그 모든 일들보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 그것을 잡으려는 예수님의 노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개인적으로도 이런 요구는 치열했고, 그렇게 실제 기도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신 후, 그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거나 구경을 하기 위해 시몬 베드로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귀신들린 자, 각색 병이 들린 자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바쁜 하루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일정을 거의 쉬는 시간도 없이 지내셨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을 모두 다 이 세상을 위해 헌신하신 것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바쁜 시간 중에서도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듯이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베드로의 기억과 신앙을 이어받아 예수님의 생애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의 기억에 잊지 못할 어떤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마을을 돌아다녔다는 기억입니다. 물론 별 중요한 사건도 없었고 큰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인상 중 하나가 예수님이 종종 혼자 있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베드로에게는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아다녀야하는 귀찮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이 되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고 네 명의 제자들은 재촉하는 사람들의 성화에 갑자기 사라진 예수님을 찾아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베드로에게는 잠시 성가신 일이었지만 나중에 몇 년이 지나 예수님을 회고하면서 그 귀중한 그 경험이 자신의 사역과 신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바쁘고 많은 일과 속에서도 그런 일들의 근원은 그 모든 문젯거리들을 가져 온 사람들이나 이 세상도 아니고,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인 예수님 자신도 아니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모든 사역을 준비할 때에 기도로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도는 단지 좁은 의미로서 기도 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리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기도는 수시로 나타나는 우리의 교만과 게으름을 물리치고 깨어있기를 위해 힘쓰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마가의 스승인 베드로도 자신의 서신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지의 표현으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삼위일체이시기에 하나님이시면서 아들이신 예수님은 기도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다른 외부의 능력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혼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시면서도 아들로서 그리고 종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순종이란 뜻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뜻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외에서도 중대한 일을 앞에 두시고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12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12~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변화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께서 5천명을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시고, 제자들을 앞서서 바다로 보내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22~23, (막 6:46)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의 본으로서도 우리에게 기도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님은 혼자 무리와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기도는 다음 사역의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세 번 예수님이 기도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론 일생 세 번만 기도했다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발견한 장면 중에 특히 남기고 싶은 기도 장면이 세 번 마가복음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마가에게 전하여 준 베드로의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면은, 예수님의 일생에서도 중요시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1.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첫 번째 사역을 하신 ‘안식일 다음날’ 새벽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 다음 날’은 예수님께 어떤 날입니까?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2.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무리를 떠나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는 사건 바로 다음에 이어집니다. 세례 요한의 때가 사라지고 예수님의 때가 되어 엄청난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와 놀람과 인기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역과 기도에만 집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3.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렇게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일생 사역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와 기도로 계속 이어나가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기도는 가장 중요한 최우선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세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시간’입니다.
기도는 제자도의 중요한 한 가지 입니다. 그래서 희생이 따릅니다. 기도는 기도할 시간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그 시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주었고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별도의 시간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4복음서의 기록을 보았듯이 예수님은 남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 혹은 기회를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아침의 기도는 이미 구약에서도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고난의 종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이사야서 50장은,
이사야 50:4~5,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예수님은 아침마다 혹은 자주 하나님과의 조용한 교제와 기도를 통해 지혜를 얻으셨고 순종의 삶을 행하셨습니다.
2. 두 번째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마가복음 1:35의 ‘한적한 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인적이나 소음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 누가 기도처를 제공하거나 헌물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 장소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신 곳들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은밀한 곳입니다.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산 위에서, 그리고 동산에서 자신만의 골방을 만드셨습니다. 그곳은 또한 ‘우리의 골방’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힘써 만들어야 합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고 그 아이를 고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귀신들렸을 때 즉시 기도하면 낫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병 고치는 놀라운 이적의 힘이 ‘하나님께서 치료하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이고 그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유’는 ‘이런 종류’입니다. 어떤 종류의 문제가 있습니까? 마귀의 문제입니까? 질병의 문제입니까? 가정의 부부문제입니까? 자녀의 문제입니까? ‘이런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주님께 맡겨드리십시오.
기도는 말로만 “믿습니다”는 마술사의 주문 같은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설혹 우리의 소원을 따라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더라도 순종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먼저 앞에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소원이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뜻이 나의 기도가 되어 주옵소서”라는 고백을 드려보십시오.
37절에서 39절까지 보시면,
마가복음 1:36~39,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찾았다’는 표현은 ‘수색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가가 막 치솟는데 이때 팔아야지요. 여기 혼자 앉아서 뭐하십니까? 빨리 나가셔서 사람들을 좀 더 치료해 주시고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의지(意志)입니다.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 같아도 실제 우리 삶 속에서 훈련이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시끄럽게 따라오는 무리를 떼어 두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시어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행동하며 살겠다는 신앙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여러분 속의 모든 욕망과 방법을 버리고 예수만 의지하겠다고 홀로 설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시끄러운 상황과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들 보다 더 중요하고, 아니 그 모든 문제들의 근원인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거룩한 뜻을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만물의 마지막 때와 같은 이 세상을 살겠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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