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마가복음 1:29~35,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오늘의 본문은 1장 21절부터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첫날이며 안식일이었던 갈릴리 가버나움 사역의 계속입니다예수님은 회당에서의 축귀(逐鬼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쳤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첫날의 사역은 공생애 마지막 날의 일정과 대조가 됩니다마지막 날의 기록인 14장에는,

 

마가복음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첫날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리스도로서의 권세를 나타내신 일이 있었습니다그런데 마지막 날에는 제자들의 배신과 체포당한 일조롱과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이런 극명한 대조의 처음과 마지막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는 섬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예수님은 첫날의 사역에서 회당에서의 놀라운 가르침과 이적을 통해 자신의 권세를 보여주셨지만그 일로 인하여 스스로 높아지는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회당을 나가신 후 예수님이 하신 것은 가난한 어부의 집을 방문하신 일입니다그리고 그곳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회당에서처럼 대중 앞에서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자신이 드러나건 가리건 그것은 주님께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1. 즉 예수님의 사역은 섬김을 위한 것입니다.

 

가르침축귀병 고침 등의 일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사역과 섬김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자칫 명예와 인기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교회나 기독교 단체마다 섬긴다는 말을 너무 남용하고 오용합니다이제 섬김이 캐치프레이즈가 되고 하나의 평범한 용어가 되었습니다희생과 봉사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진정 교회와 타인을 섬기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결국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 같아 보입니다.

 

사역자들의 가장 중요한 기본은 처음부터 끝까지드러내지 않고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렇게 자신의 사역을 알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2. 제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그래서 자신들의 문제를 주님께 갖고 왔고 주님께서 처리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옵니까아플 때 의사에게 가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질병과 문제를 해결할 분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고 질문 드리는 것입니다.

 

아사왕의 예를 보십시오.

 

역대하 16:12,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그러나 간교하다는 야곱은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창세기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산헤립의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왕도 위기의 순간에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열왕기하 19:1,14~16,

[1]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15]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의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나사로의 여동생들도 주님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 11:1~3,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과연 주님은 여러분의 친구입니까?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님은 당신의 가장 큰 사역인 십자가의 때까지 공생애 동안의 모든 사역을 섬기는 사역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신자들의 섬기는 사역도 이와 동일합니다신자의 사역의 목표는 그 일 자체가 아닙니다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십자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봉사정신을 위해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남을 돕는다는 기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신자의 일생과 사역의 초점은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주권을 내려놓고 모든 일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께 내 모든 일을 아뢰고 내어놓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 아닙니다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그 살을 우리의 음식으로 나누어주셔야만 했던 주님 때문입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1. 종의 만지심  (0) 2012.01.29
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0) 2012.01.27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0) 2012.01.20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마가복음 1:21~28,

개정,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개역,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오늘의 본문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권세)입니다. 한글개역판 성경에는 권세로 번역하고 있는데 개정판 번역대로 권위가 더 올바른 번역입니다.

 

권세란 권력과 세력이라고 합니다.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즉 다른 이의 복종을 끌어내는 힘이 권위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세속적 권세나 권위가 아니고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구분이 정말 가능할까요? 저는 정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외모나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를 보거나 진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많이 배워서, 인격이 훌륭해서, 경험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만나 거꾸러진 제자만이 갖게 됩니다.

 

한국에는 나이가 계급장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때로 연장자가 하는 말이 무조건 먹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연세가 지긋하고 품격이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분이 젊잖게 말하는 것과 시골뜨기에 배운 것 없고 노동자 출신인 젊은이가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권위 있어 보이겠습니까?

 

, 그 젊은이는 예수님을 말할 수 있겠구나. 그러면 당연히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이 말이 권위가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야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러시다면 다음 질문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양심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멀리 이사했습니다. 지금까지 다니던 교회를 계속 못 다닐 정도로 멉니다. 그래서 주변의 다른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대개 전에 다니던 교회와 같은 교단의 교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도 없다면? 지역적으로 아예 장로교가 없는 지역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큰 교회를 선택하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의 크기에 교회 목회자의 능력이나 성도들이 받는 은혜가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으면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익명성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갖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사실 핑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한 교회의 가치만큼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유명한 외국 대학출신의 박사님이라서, 서울 강남에서 이름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라서,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매스컴도 타고 좋은 일을 했다는 교회라서... 그렇게 여러분의 선택대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자신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비유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일 년 수입이 수억 원이고 사회적 지위가 꽤 있다면, 여러분은 옷 한 벌 사기위해 동네 옷가게나 마트에 가겠습니까 아니면 유명 백화점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백화점에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걸맞게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곳을 가야 그런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자신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저희 가족이 한때 부모님이 사시던18평 시영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한 동안 살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아파트 주차장에는 당시 우리나라 고급 승용차들이 꽤 많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집은 작아도 차는 번듯하면 어디 나가서 기죽지 않는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열등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외형과 소유로 자신의 가치를 포장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형 교회를 자신의 교회로 선택했다면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명품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와 같습니다. 그 브랜드의 권위만큼 자신도 괜찮은 신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 여러분은 외모와 나이와 재산과 학력을 떠나서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까?

 

교회의 가치를 영적 감동과 생명력의 활동 그리고 대사회적인 건전한 세계관과 그 관계에서 구하지 않고 건물의 크기, 담임목사의 학력, 교인들의 경제적, 학력 수준에 둔다면 세상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 그 두 가지 권위를 여전히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을 권세로 복종케 했습니다. 그들의 권세의 근원은 백성들의 신앙이고 자신들이 일반인보다 더욱 열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인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잘 지키느냐로 종교적 열심을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일반과 구별된 특수계층이 되면서 스스로 사회적으로 계급화 되고, 종교적으로 권력화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명예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욕망의 실현과 그것을 영구히 지속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그렇게 자신들의 목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도, 심지어 메시아라도 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율법주의자를 바리새인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기보다 신앙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종교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기독교가, 교회가 권력화 되어 결국 타락하는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대개 단 하나의 종교만 허용하는 사회에서는 종교계급은 어쩔 수 없이 정치권력과 밀착하거나 아예 종교인들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세력을 두려워하기에 복종할 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권세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고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순전한 영적 권위를 가진 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22절에는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권위가 두 번 언급이 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의 권위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이나 학자들은 자신들의 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른 권위 있는 지명도 높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때 유명한 가말리엘과 힐렐 학파 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유명한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 외에 어느 누구의 이름을 인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끌어와서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마음대로 못하고 악한 귀신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이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은 당연히 귀신보다 더 큰 권위와 능력을 가진 자만이 가능합니다.

 

마침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아니고 귀신의 의지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나사렛이란 호칭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 자리의 어떤 누구보다도 그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고 또한 아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가복음의 다른 장면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가복음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가복음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귀신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느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정확하게 그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의 지식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귀신들은 두려워서 떱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8:16~17,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세례 받은 것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봉사를 하는 것이 약간의 외적 증거로서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러분 안의 성령께서 증거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가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 같은, 어떤 은사가 나타나고 병이 고쳐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은사들은 사라지고, 나았던 병이 다시 들기도 하고 다른 병으로, 혹은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증거가 교회 다니니까 복 받고, 돈 잘 벌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증거는 이단과 마귀가 더 잘 나타냅니다.

 

성령이 증거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말씀의 권위에 거꾸러진 경험이 있으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셨으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아무에게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만난 제자만이 그 내적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남편이 회사에서 갑자기 퇴직하라는 압력을 받고, 집 나간 자식이 애 하나 안고 덜컥 들어올 때 어찌하시렵니까?

 

그 일 속에서 어떤 일에도 실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사랑을 발견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꿇어 엎드리고, 자신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눈물로 아뢰어 보십시오. 그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심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의 고난이 있어야 영혼의 눈이 뜨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권위 앞에 복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고난과 함께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0. 종의 기도  (0) 2012.01.27
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0) 2012.01.25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5. 광야에서  (0) 2012.01.15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마가복음
 
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나를 새생명 얻게 하셨다고 생각하시면 구원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 뿐 아니라 또 다른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여러분을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로서 부르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주님의 생애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자란 종의 다른 이름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는 면을 강조한다면, 제자는 배우며 따라간다는 면을 강조한 이름입니다. 종이 구약적인 색채가 있다면 제자는 신약적인 느낌의 단어입니다.

 

처음 네 명의 제자들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주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마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약간 다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안드레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로서 지내다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두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자기 형제인 시몬 베드로를 전도하여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으로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를 부르시기 몇 달 전에 이미 서로 만났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연유로 잠시 헤어졌다가 그들은 고향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다시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면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왜 그 과정을 생략했습니까?

 

마가복음의 처음 독자였던 로마교회의 고난 받는 성도들은 심각한 신앙의 위기와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당했고, 박해가 잠시 뜸한 틈에서도 제대로 생업을 이어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극심한 왕따를 당했습니다. 요즘말로 괴담 같은 거짓 소문들이 퍼져나가 아주 이상하고 위험한 부류로 낙인찍혔습니다. 우리나라의 광우병 사태를 보면 거짓 소문의 효과가 어떠한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면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때에 마가는 베드로의 도움으로 기록한 예수님의 생애가 담긴 책을 기록하여 그들을 주님의 종이요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의지였습니다.

 

실제로는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지만 그렇게 그가 한 행동도 하나님이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마음에 좀 평안을 얻어야지라고 색각하고 처음 이 교회에 발걸음을 시작했을 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권적으로 내가 구원받도록 부르셨습니다.

 

, 예수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1.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바다는 디베랴 혹은 게네사렛호수라고도 불렸습니다. 호수가 워낙 넓어서 짠물이 아닌데도 바다로 인정이 될 정도입니다. 물이 짠지 민물인지는 나중에 직접 가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아마 애매모호한 수질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2천 년 전이니 지금과 수질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는 사해는 엄연히 짠물이니까 세계에서 제일 작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오대호나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갈릴리나 사해보다도 훨씬 크지만 민물이라 호수로 불립니다.

 

갈릴리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수면이 낮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예수님 당시의 사회와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바다에 15개의 항구가 있었고 330척의 배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는 이스라엘 전역에 판매가 되고 소금으로 절여서 외국에까지 판매가 될 정도로 어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예수님이 최초의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은 제자들의 생업의 현장이었습니다. 즉 늘 하던 평상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이적이나 증거를 원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오라고 부르실 때 그것이 기적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사형수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감옥에서 나와라, 자유다, 생명을 얻었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사형수에게 더 큰 기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들은 언제 구원받은 것일까요? 굳이 그들의 구원과 제자로 부르심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제자로 불릴 때 동시에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것은 알겠는데 아직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야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이미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시에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얻는 것으로,천국 가는 티켓을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제자로 불림 받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그것은 과거의 순간이 아니고 계속 진행형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645)라는 독일의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정권에 반대하여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2차 대전이 끝나기 한 달 전에 감옥에서 처형당했습니다(1945.4.9). 그가 제자도(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1937). 원제목의 뜻은 제자가 되는 비용 혹은 대가라는 뜻입니다.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구원받았음을 즐기는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 거룩한 희생이 따른다는 내용입니다. 싸구려 은혜란 희생도 훈련도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값싼 은혜에만 만족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제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12명 중 처음 네 명의 제자들을 어떠한 기준으로 부르셨나요? 이들은 모두 어부들이었습니다. 어부란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부러움을 살 만한 직업은 결코 아닙니다.

 

요즘 교회를 개척하면 목사들은 어떤 사람들이 교회로 오기를 바랍니까?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가 있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안 그럴까요? 그렇다면 신도시 값나가는 아파트 지역에 왜 교회가 너도나도 먼저 들어갑니까?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의 일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1 19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과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리란 로마 식민지이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면서 때로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던,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7 6절을 보면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택정하여 준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주님은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택정하고 부른다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골라내어 부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 중에서 택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택정함을 받은 사람은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택정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선생을 따라야 합니다. 선생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2.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유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제자로 훈련시키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우리를 훈련시키는 분은 주님이지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을 사용하신다가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당신의 도구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부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원양어선이 그물을 바다에 던지면 족족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있는 몇 달 동안 단지 몇 차례의 기회 밖에 없습니다. 낚시할 때 낚시꾼이 낚시를 드리우고 물만 바라보고 몇 시간을 기다립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매일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는 실패 후에 풍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일곱 명이 어부입니다. 당시의 많은 직업 중에 가장 인내가 필요한 것은 아마 어부일 것입니다. 그런 인내에 익숙한 어부들을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 낚는 어부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일이 얼마나 큰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은 영광된 일입니다.

 

잠언 11:30,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다니엘서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17절의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고 바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훈련과 연단 과정을 거쳐서 숙성하고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루어지지만 제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거듭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할 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했을 때, 이미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라 살며 그분의 제자로 되어가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19] 조금 더 가시다가(a little further)

 

두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셨습니다. 여러분도 구원의 입구에서 조금 더 가보십시오. 제자 되는 영광된 시작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돈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기를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낚기 위해 어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려고, 그런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려고 생각하셨다면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사는 것입니다.

 

3. “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주님이 제자를 부르시자 네 명의 제자들은 곧 따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전에 전혀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그 중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몇 달 전에 예수님을 따랐던 적이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들입니다.

 

마태복음 27: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한복음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러나 자신의 생업과 가족들을 놔두고 즉시 따라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 혹은 가족들을 전도하기 더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마태복음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요한복음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우리의 순종은 즉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그들은 그물을, 같이 일하던 자들을 놔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우리를 붙잡는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앞서게 해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8절에 나오는 '좇으니라'는 말과 20절에 나오는 '따라가니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주님을 닮아 가는 것과 주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는 받고, 주님의 축복은 받고, 주님의 구원을 받으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주님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라고 구원하신 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되어야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신적인 삶, 이타적인 삶, 사람 낚는 어부의 삶으로 부르신 우리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이 너무 중요해서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 거룩한 제자의 삶을 사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나야 했으며, 배와 그물도 버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혈육과 삶을 버린다는 것은 오늘 날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 당시로써는 더욱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저마다 다르기에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업을 유지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실제 모든 것을 끊는 것을 뜻하지 않고 나의 세상적인 욕심과 삶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삶의 목적이 돈을 벌고, 명예와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소명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부인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이 정하고, 얽어 맨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부인한 사람은 이제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이 목적과 소망을 갖고 주님을 쫓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이신 것을 그 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리지 못하여서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의 배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것 같고, 세상의 문화와 조직을 벗어나면 도태되고, 외면당할 것 같아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변화된 열둘의 제자로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주님은 변화된 우리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후에 열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사도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메섹도상에서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네로황제의 박해 때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박힐 수 있는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7,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린도후서 4: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주이신 것과 우리 자신이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인 것을 전파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연약하고 찌꺼기 같은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9~13,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시도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중요한 직분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모습과 능력으로 그 직분을 수행케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상식입니다.

 

새예루살렘성에는 성의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19~20,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러나 보십시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렇게 사도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네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네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겠느냐”(고후 10:10) 거기에 대해 바울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었고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셨다”(고전 4:13)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된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주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를 성공시켜 달라고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면 무슨 망신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향한 자존심과 욕망의 문제이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섭섭해 하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일하게 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그 예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을 정복해야지 왜 십자가에서 죽느냐?”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고 못났다고 하나님께서 쓰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니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약함이 우리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야 할 신자들도 자신의 자존심과 자아 때문에 내가 얼마나 능력 있고 쓸 만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는 형통하고 승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한 제자들의 승리는 자신을 나타내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는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주 앞에 무릎 꿇은 자에게 문제의 해결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의 존재가 높아지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소원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께 소유 당했느냐 입니다.돈이나 건강, 명예, 가정의 평화가 아닙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을까를 구해 본적이 있습니까?

 

모든 영적 싸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만이 그 힘을 발휘합니다.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09. 종의 사역  (0) 2012.01.25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0) 2012.01.20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5. 광야에서  (0) 2012.01.15
마가복음 04. 종의 시험  (0) 2012.01.14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마가복음 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NIV

[14]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15]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KJV

[14] Now after that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came into Galilee,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15]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ye, and believe the gospel."

 

 

예수님이 광야 시험 후, 세례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듣고 곧 바로 갈릴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 거의 일 년 가까이 유대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1~3)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수개월간의 유대 지방의 사역을 생략하고 곧바로 갈릴리 지방에서의 사역을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 요한의 체포 사건과 곧바로 연결시키기 위해 유대 지방의 사역은 생략하고 갈릴리 지방의 사역으로 직진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나라는 셋으로 분할되었고 세 명의 총독이 다스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의 유대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가 다스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며,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군대를 모으고, 로마제국을 쳐부수며, 모든 나라를 그 발아래 굴복시킬 것이라고 구약을 해석했고 그렇게 믿으면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로마제국 같이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폭동을 유발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스는 유대인에게 메시야 비전을 심어주는 세례 요한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두려워 요한을 옥에 가두고 있다가, 자기와 결혼한 헤로디아의 딸(살로메, 헤롯 빌립과 헤로디아의 딸, 헤롯 빌립은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와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는 죽은 동생 빌립의 아내와 결혼함,  6:17~18)이 춤을 춘 일에 대한 상으로 할 수 없이 요한을 죽이게 됩니다. 이 일이 마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의 전기를 쓰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이 무슨 이유로 어디에서 어떻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의 순교에 관해서 마가는 6(14~29, 요한의 죽음에 대한 과거사 기록)에 이르러 비로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제 요한의 시대가 지나가고, 예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붙잡힌 시기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것도 요한이 체포된 갈릴리 지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시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역사의 뒤로 사라져 가고, 광야에서 돌아온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시는 이 역사적 교차점에는 한 가지 공통된 단어가 운명처럼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paradidomi”입니다. 마가는 요한이 잡혔다(arrested)고 묘사할 때 헬라어 동사 파라디도미(paradidomi)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으로 유대인의 관원들에게 넘겨졌다(handed over)고 할 때도( 9:31; 10:33; 14:21,41) 똑같은 헬라어 동사 파라디도미(paradidomi)를 사용합니다. , 이 헬라어 동사는 요한이 붙잡혀 처형당했듯이 예수님도 결국 붙잡혀 처형당할 운명임을 암시해 줍니다.

 

파라디도미(paradidomi, 넘겨주다)는 본래 헬레니즘 세계에서 범죄자들에게 사용되는 법률용어인데,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의 기록들은 이 어휘를 주로 예수의 고난과 재판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paradidomi는 또한 우리 말 넘기운다는 단어로 예수님이 잡혀 죽게 되는 장면에도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마가복음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또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다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자러라

 

바울의 편지들에서도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버리다라는 뜻으로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에베소서 5:2,25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내어주다라는 뜻으로도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므로 마가는 세례 요한의 체포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예수님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의 관점은 요한의 체포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최종 목표인 십자가에 일치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증언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 아셨습니다. 요한처럼 붙잡혀 처형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붙잡혀 처형을 눈앞에 둔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첫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시작부터 죽음을 예약해 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길은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십자가입니까? 그것으로 제자냐 아니냐가 구분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첫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전하신 복음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있었을까요?

 

1. 복음적입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고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목사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는 모든 믿는 자들의 사명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도들도 자신들의 신앙의 이유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복음전파는 성도들 모두의 몫입니다.

 

사도행전 11:19~20,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복음이란 사람을 위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 중심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목적을 두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 중심주의(神本主義)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입니다.

 

3.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말씀입니다. 구약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예언했고 그것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그러므로 성경적입니다. 거꾸로 성경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4. “때가 찼고

 

구약에 예언된 구원의 때를 시작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여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권세가 적용되고 말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이 지상에서 보이는 세상 권세가 아닌 영적인 삶입니다.

 

궁극적으로 종말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이루어 질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온전한 그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중간 단계의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 전파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는 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으라. 그리고 죄에서 돌이켜라. 너희를 구원하는 복된 소식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죄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께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교회에 나오고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만약 다른 목적이 있어서 교회에 온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진리는 아주 심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기 있는 설교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그리스도인 자신이나 그 자녀의 출세와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좀 더 세련된 설교가들은 기독교 신앙이 생존의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게 해 줄 것으로 설교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적극적인 혹은 긍정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으로 규정하고, 기독교 신앙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업 정신을 낳게 한다고 설교합니다. 이 모든 설교들은 듣는 이들이 화려한 삶을 예약해 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영국에서 ‘Gospel Illusion, 혹은 Magic’이라는 마술쇼로 설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인터넷(유투브) 검색하면 동영상도 나옵니다. 주일 강단에서 마술을 하며 사람들의 집중과 흥미를 끌어당깁니다. 그런 이벤트를 하는 설교자들은 교인들이 졸면서 예배드리는 일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용이어야 합니다. 그런 이벤트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좋은 방법은 될 수 있지만 이미 믿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교회 안에서 쇼를 하듯 하는 것은 설교가 제 자리를 잃어버린 모양을 보여줍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에서 크게 벗어난 설교들입니다. 복음에 입각한 설교는 화려한 삶을 예약하는 설교가 아니라 죽음을 예약하는 설교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이 역사해야지 왜 이벤트와 재미가 역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고난의 길을 가셨고, 그 사역을 고난을 암시하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과 우리가 믿는 복음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내용도 아니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도 아닙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우리는 또한 그 복음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당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행적을 들려주면서 그들의 현실과 복음의 삶을 연결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가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다면 고난을 당신의 목표로 시작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그 길을 걸어간 것처럼 고난을 능히 받되 또한 이겨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2: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08. 종의 권위  (0) 2012.01.20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5. 광야에서  (0) 2012.01.15
마가복음 04. 종의 시험  (0) 2012.01.14
마가복음 03. 종의 세례  (0) 2012.01.13

마가복음 05. 광야에서

 


마가복음
 
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광야시험의 특징:

 

40일의 시험이었으나 그 후로도 계속된(imperfect) 시험입니다. 40일은 실제 역사이며 또한 성도와 교회에 대한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마가는 시험에서의 승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상 죄를 지신 고난 받으시는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는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가셨다는 것과,  그 모든 일을 성령께서 몰아내시는 방법으로 보내어졌고,  받을 필요가 없는 시험을 받으셨어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오늘은 특히 13절 부분에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는 부분을 통해 마가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 주고자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마태, 누가)에 비해 간략하게 2개의 절로 기록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직후 그분의 가실 곳을 번쩍이는 예루살렘성이 아니고 거친 들판,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는 광야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기록함으로써 마가의 복음서를 읽었던 당시 고난 받던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특히 예수님을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유혹과 시험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합니다.

 

전에는 죄로 인해 죄로 여기지도 못했던 것들을 이제 죄와 유혹의 것으로 알게 됩니다. 전에는 세상의 도덕적 기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았지만, 이제 너는 내 아들이라, 내 자녀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과 자신들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것들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성경이 죄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려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리고 있을 때에(벧전 5:8)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이미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겨 나갑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유혹을 이겨내기 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은 더 심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영광스러운 산꼭대기 보다 산 아래 계곡에서 믿음을 더 잘 배웁니다. 누구나 있고 싶고 일하고 싶은 예루살렘 왕궁 안에서 보다 광야에서 주님의 제자가 탄생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 받으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시험 받는 문제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1:13~15,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수님은 삼위일체로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맞지가 않는 건가요? 우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시험받는 것은 현실이잖습니까?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두 가지 인격(흔히 생각하는 도덕성이 아니라 자아 개체입니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시험 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가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여 구원하는 방법 외에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또한 두 번째 의문인, ‘우리가 시험 받는다는 문제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야고보서의 1 13절의 시험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직접적으로 주는 시험입니다. 그것이 처음에 고난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무릎 꿇고 신앙을 저버릴 정도에서 갈등을 하면 그것은 시험 즉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소명을 저버리게 할 정도의 시험이라면 마귀가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험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유익과 내세에의 소망을 더 든든히 갖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마귀가 주는 시험마저도 그 주권 아래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욥의 고난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마가복음 1 1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장소가 광야라고 했습니다. 들짐승과 함께 40일을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광야가 생물이 살기에 거친 장소이기는 해도 자연적으로 그런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식물, 곤충들과 그밖에 야생짐승들이 광야에 꽤 있었습니다. 위험한 대형 포식동물인 자칼, 하이에나, 심지어 사자도 있었습니다. 요즘 중동지방에는 사자가 멸종되었지만 구약 성경책의 약 3분의 2에 사자가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흔한 짐승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단지 굶어서 배고픈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험한 야생동물들의 위험도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시험을 받는다는 단어를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처럼 시험을 받았다가 아니라, “시험을 받는 중이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3,

peirazomenos (pres.[현재형] pass. part. peirazo, to tempt)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And he was there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tempted of Satan; and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ministered unto him. (KJV)

 

마태복음 4:1,

peirasthenai (aor.[부정시제] inf. pass.)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Then was Jesus led up of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of the devil. (KJV)

* aorist(부정시제)란 부정(不定) 시제에, 즉 어떤 시점에 (1)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나, (2) 이미 끝난 일이나, (3)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일을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4:2,

peirazomenos (마가와 같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Being forty days tempted of the devil. And in those days he did eat nothing: and when they were ended, he afterward hungered. (KJV)

 

* 요한복음에는 광야시험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의 현재형 동사 표현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험은, 고난은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그래서 3가지 시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만 말하면 광야의 40일이 3가지 시험과 배고픈 일 외에는 큰 문제가 없는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험이 3가지 이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귀의 시험은 종류가 세 가지였지만 그것이 단숨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거의 40일간 계속된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마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은 그 40일간의 3가지 시험의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은 광야40 이후에도 예수님의 남은 3년 반의 기간 동안 계속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40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0은 특히 광야와 관련하여 특별합니다. 모세의 광야 40,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방랑.......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이 그 40년으로 끝났던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고난도 단순히 광야 40일로 끝나지 않았다고 마가는 우리에게 두 절의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0은 이와 같이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특별한 숫자입니다. 모든 주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인생을 광야 40년의 세월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광야입니다.

 

마가는 특이하게도 마태복음과 다르게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결과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천사들이 수종든 것”( 4:11,  1:13)으로 보아 예수님이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겨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처럼,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라는 유명한 말씀도 없습니다. 11절에 마귀가 물러갔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은 그런 이야기도 없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는 기록을 굳이 나타내지 않음으로 마가복음을 읽는 성도들이 고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언제 어디에서 끝납니까?

골고다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최후의 고난이면서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의 광야는 어떻습니까?

 

이제 왜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고난 받으셔야 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라고 하면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그 모든 양떼 대신 당신 혼자 죗값을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이사야 53:6,11,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선한 목자로 비유되시어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0:11,14~15,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불순종으로 범죄하여 죄를 세상에 들여놓았으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기에 고난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으나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 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의 어떠한 환난이나 고난에도 우리가 망하지 않도록 지키시고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받으셨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선언하신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H.C. Trumbull, 1830~1903)이 교도소의 죄수들을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감자들을 찾아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른 점은 단지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어떤 수감자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에게 하신 말씀 중에 당신의 인생을 다르게 만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때문이라는 겁니까? 정말 그것이 당신을 우리 같은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 유일한 것인가요?” 그 죄수는 목사님으로부터 더 자세히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종신형으로 있습니다. 이제는 이곳에서 만족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죄수가 되어 나의 형제가 되어주신 분이 이곳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광야에서 수많은 고난과 시험을 받습니다. 이 세상이 감옥입니다. 모든 사람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이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의 사망 권세까지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나의 형제가 되어서 나의 모든 고난과 죄짐을 지신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주님이 이 광야에 계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 광야를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고난의 광야를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Heav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07. 종의 제자를 부르심  (0) 2012.01.19
마가복음 06. 사역의 시작  (0) 2012.01.17
마가복음 04. 종의 시험  (0) 2012.01.14
마가복음 03. 종의 세례  (0) 2012.01.13
마가복음강해 입문: 왜냐하면  (0) 2012.01.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