יְקַלְלֵ֖ם בְּשֵׁ֣ם יְהוָ֑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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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Gospel Church is a religeous sect seeking prosperous faith which is constructed on Christian faith. Its root is based on the lust of human. It seeks success, prosper, wealthy and healty life disguised not to be seen inferior by social tradition, philosophy, and benefaction.
Job's three friends are a kind of that. They don't understand Job's troubles and "the end of the Lord"(James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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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aching with the same passage and story may cannot produce the same result. There are some preachers leading his audience, whereas aren't others. It is a matter of feeling which should be experienced on the pulpit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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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내입니다.

 

너무 힘들 때

내가 그래도 견디어내는 것이

이 자리로 인도하신 분을 믿는 행동입니다.

 

나의 자녀들이 살아있다는 것으로도 나의 유일한 자랑이 되듯

하나님은 내가 살아있어 견디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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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십일조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먼저 한국 교회 교인들의 근본적인 신앙 태도가 어떠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보통의 한국의 교인들은 보수적이고 온순한 신앙의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일반적으로는 좋은 신앙의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상대성을 갖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교인들은 좋은 신앙의 밑거름을 갖고 있기도 하면서 종교권력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악용할 수 있는, 한 마디로 ‘쉬운’ 대상입니다.


가장 밑바닥에 깔린 문제점은 ‘목사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는 신이며 왕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을 믿기보다 담임목사를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사를 비판하면 심판받을 것 같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것 같습니다. 외국의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목사에게 존경을 표현하지만 친구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는 교회에서도 권위주의가 있습니다. 목사를 그냥 목사라고 부르면 잘못된 것 같고 ‘주의 종’이나 ‘당회장’이라 해야 제대로 대우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교회들은 목사들의 개인 왕국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잘못된 인식을 갖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것이 보수적이고 성경적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고 성경적인 가르침과 헌신으로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과 신자들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들은 너무 적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들이 결코 헌신적이지 않거나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열심히 하고 있다는 문제를 말합니다. 이런 모습은 보수적이라는 교회에서 더 심합니다.


요즘도 어떤 부흥회에서 담임목사의 승용차를 고급차 혹은 외제차로 바꿔달라는 강사들의 주문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 부흥강사들은 담임목사 본인이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대신해서 교인들에게 전합니다. 그것이 교회 건축 아니면 목사용 승용차입니다. 소형차나 승합차 타고 노회나 목사들의 모임에 나가면 창피합니다. 아이들의 학교 학부모 모임 때 누가 그 모임의 대표가 됩니까? 큰 차 타고 잘 입고 오는 사람입니다. 목사들의 모임도 마찬가지 입니다. 큰 교회 목사가 목사들 모임의 대표가 됩니다. 큰 교회가 큰 일을 잘 하지 않느냐는 사고방식은 이제 그만 두십시다. 교회는 일하기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전도, 선교, 부흥이 진정 교회가 최고로 목표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교회 권력자들에게 세뇌되어 있습니다. 유치하기 그지 없는 교회건물 경쟁과 목사들끼리의 경쟁에 여러분이 “아멘, 아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잘못된 점을 이미 알고 있고 고민하면서도 왜 목사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고 잘못을 지적하지 못합니까? 목사에 대해 잘못 말하면 죄짓는 것 같은 인식을 갖게끔 교육받았습니다. 목사를 신의 대리자로 알고 있습니다.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들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목사들이 설교에서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말은 간혹 하기는 하지만 실제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교회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왜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시대를 한국 교회만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신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목사를 그렇게 만든 것은 신자들입니다. 목사가 전횡을 하고 제 멋대로 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그 교회 신자들입니다. 신자들의 ‘자존심’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를 선택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합니까? 설교를 들어본다? 분위기를 본다?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실제로는 자기 수준에 맞는 교회를 찾으려 합니다.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좋은 직장 다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교회를 선택할 때 자기 수준에 맞는 교회를 선택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를 고급승용차에 못 태운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는 장로, 권사와 ‘힘 있는’ 신자들이 문제입니다. 왜? 자신은 고급승용차 타는데 자신의 담임목사가 싸구려 고물차를 타면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과 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형 교회에 소속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평범한 여러분들이 문제입니다. 담임목사와 교회의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은 그 교회에 소속된 것이 좋아서,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과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유혹 때문에, 잘못을 눈감아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종’을 섬기는 태도라고 착각하는 보수적인 신자들이 문제입니다.


십일조는 한국 교회를 외형적으로 성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입니다. 그 재물로 많은 좋은 일들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나의 제도로 율법처럼 만든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도화시킨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십일조를 통해 신자 개인의 신앙이 성장하는 좋은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십일조 때문에 신앙의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자들은 현대의 바리새인들입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단 한 푼의 헌금이라도 돈 때문에 한 사람이 교회에 나가기를 부끄럽게 만드는 교회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죄인 한 영혼이 교회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지 교회의 재산을 늘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한국 교회의 실제는 십의 2~3조는 해야 직분 가진 신자가 자신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대부분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개인사업체의 직원들에게 박하게 봉급을 주는 신자라면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마 23:23).


신약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신자들이 십일조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친 사건’과 말라기 3장의 ‘온전한 십일조’ 그리고 히브리서 7장의 ‘아브라함과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대표성’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허리에 하나님의 백성을 갖고 있어서 그 한 사람이 드린 십분의 일의 재물은 온전히 아브라함 자신을 포함해서 그 안에 포함된 모든 믿는 자들을 단 한 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골자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만 보는 영적 소경들은 물질의 욕심으로 십일조를 성경구절로 법제화시키고 교회의 재물을 늘리는 도구로 성경을 쓸 뿐입니다.


하지만 십일조가 굳이 폐지될 필요도 없습니다. 넉넉하고 능력이 있으면 자신의 믿음과 교회의 재정을 위해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아니 그 이상도 할 수 있습니다. 권사 직분, 서리집사 직분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데 교회 실정상 할 수 없이 채용하는 제도들도 있듯이 교회의 어느 정도의 이익과 신자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십일조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것을 절대 제도화시키거나 한 사람이라도 시험에 들게하지 않도록 충분한 교육과 관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래의 두 인용문들은 십일조에 대한 글입니다. 참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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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가지 십일조

"첫째 십일조"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십일조로 "레위인과 제사장과 나눠먹는 십일조(레 27:30-33, 민 18:21-32)"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십일조는 레위기 27:30-33에서 언급된 후 민수기 18:21-32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그 모든 소산들은 여호와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을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십일조입니다. 또한 이것은 구별되어 성전을 섬길 직분을 맡음으로 땅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인들을 위한 생계의 대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제사장들에게 주어야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고 또 교회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십일조의 용도입니다.


"둘째 십일조"는 "축제에서 가족과 함께 나눠먹는 십일조(신 12:5-19, 14:22-27)"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 11, 14:23)'으로 가지고 나와 '온 가족(12:7, 12, 14:26)'이 함께 먹고 즐기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제사의 큰 주제인 '여호와 앞에서의 음식 나눔'에 내포되어 있는 '거룩한 식사와 축제'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함께 축제하며 또 함께 나눠 먹는 정신은 신약의 애찬(love-feasts)과 성찬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서 언약 공동체 내에서 영속적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유월절 등 절기 축제에 참여하는 경비와 또 함께 음식 나눔을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나누어 먹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십일조"로는 "이웃과 나눠 먹는 십일조(신 14:28-29, 26:12-15)"가 또한 명령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매 3년마다 한번씩 행하는 철저하게 나눔에 목적이 있는 십일조였는데, 수혜 대상은 레위인들과 객(이방인,개종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은 알다시피 구약에서 늘 언급되는 나눔과 구제의 대상이었기에 이 십일조는 특별히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용도로 실시되었던 십일조였으며, 또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복에 대한 선포는 오직 이 십일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선포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 하면 워낙 '복'을 밝히는 백성인지라 좀 강조하여 밝혀야겠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당연한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이기에 오히려 안 지키면 저주만이 선포되고 있지만,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는, 물론 이 십일조도 명령이지만, 이 십일조는 잘 지킬 때에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는 축복의 약속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받기 위해 십일조 하시는 분은 전략적으로라도 반드시 구제의 십일조를 하셔야 그토록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복 받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라면 이웃과 나눠 먹는 구제의 십일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의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 율법으로 언급된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에 대하여는 지금 처음 들으시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우리는 여지껏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잘 알고 있었는데 정작 십일조를 온 가족이 함께 나눠먹었다 라든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삼 년에 한번씩 따로 다시 십일조를 했고 특히 그 십일조에만 사실은 축복이 선포되고 있음을 왜 우리는 여지껏 제대로 몰랐을까요? 서두에서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라고 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일조는 정작 십일조의 일부분뿐이었고 또 레위인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가 강조되어 십일조를 했어야 하는게 논리적으로 맞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관련되어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는데, 십일조는 처음부터 성전 유지를 위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3kJWC 에서 일부 인용.



[2]


혹시, 성경 전체에 "십일조" 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와 있는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모두 25번이 나옵니다. 구약에 22번, 신약에 3번이 나옵니다. 책 별로 나누어 보면, 민수기에 4번, 신명기에 6번, 사무엘상에 1번, 역대하에 3번, 느헤미야에 5번, 아모스에 1번, 말라기에 2번, 마태복음에 1번, 누가복음에 2번 나옵니다. 아래에 "십일조" 가 들어 있는 성경 구절들을 추출해 놓았습니다.


1. [민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 [민 18: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3. [민 18:26]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민 18:28]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5. [신 12: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6. [신 12: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찌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7. [신 12:17]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너의 각 성에서 먹지 말고

8. [신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것이며

9. [신 14: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10. [신 26:12]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11. [삼상 8: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2. [대하 31:5]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13. [대하 31:6]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14. [대하 31:12]

성심으로 그 예물과 십일조와 구별한 물건을 갖다두고 레위 사람 고나냐는 그 일을 주관하고 그 아우 시므이는 버금이 되며

15. [느 10:37]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16. [느 10:38]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17. [느 12: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18. [느 13: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19. [느 13: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20. [암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21.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22.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23.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눅 11: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25.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얼마 전이었습니다. 우연히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몰아 세우고 있었습니다. "시간의 1/10, 마음의 1/10, 물질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도적질을 하는 것" 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도 났습니다. 십일조가 그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것처럼 '필수적'인 것이라면, 구약에 22번 등장하는 '십일조' 라는 단어가 왜 신약에는 3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신약에 등장하는 3번의 '십일조' 라는 단어도, 동일 사안에 관한 것이기에 결국 신약에는 '십일조' 라는 단어가 딱 1번 나오는 셈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3차례의 '십일조'에 관한 성경 구절은 모두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헌금 자세를 꼬집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것처럼, 십일조가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셨을 때에 반드시 언급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하라는 말씀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대 교회들에게 많은 편지들을 써서 교훈하고 책망했던 바울 사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도도 십일조에 관하여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목사님들께서는 왜 그리 십일조에 목을 매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연보" 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13번이 나옵니다. 구약에 2번, 신약에 11번 등장합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11번의 연보에 관한 구절 중 넷은, 예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에 관하여 언급하신 것이고, 나머지 일곱 번은 서신서에 등장합니다. 연보에 관한 기사 중, 어느 곳에도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1&command=body&no=364 ‘아멘넷뉴스 김동욱칼럼’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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